2020년 a32 스토리 소바카라자 공모전 낙선작
「햇살이 화사하게 비치는 잿빛 어느 봄날이었다. 안개 짙은 푸른색 호숫가에 언제나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서 있는 소녀를 만나기 위해서다.
6살처럼 보이는, 앳된 모습의 소녀는 옷차림 또한 그러하였다. 하얀 원피스에 노란 밀짚모자, 머리색은 짙은 주황색, 초록색 구두를 신고 우두커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녀. 몇 번 말을 걸기위해 시도했으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같이 호수 맞은편의 산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가끔 고개를 힐끗 돌려 소녀를 쳐다볼 때면 소녀도 덩달아 나와 눈이 마주친다. 생긋 눈웃음 짓는 그녀. 절로 아빠미소가 지어질 때쯤 다시 고개를 홱 돌린다. 어느새 저 멀리 산새 무언가가 울 때 쯤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돌아온 길로 되돌아가는 소녀.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오늘은 말 좀 걸고 왔어?”
미영이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한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종석.
“아니, 그냥 가만히 있다가 먼저 가던데?”
“뭐야? 남자가 소심하게. 벌서 몇 번째야”
하얀색 머그잔에 커피를 따라주며 미영은 툴툴대며 말한다.
‘냄새가 진한걸 보니 그래, 블랙커피구나’
사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커피생각이 날 때가 있다. 비가 오거나 추운 겨울날, 아니면 밤새 작업하느라 한 숨도 못 잤을 때 등. 그리고 오늘 같이 구름이 잔뜩 낀, 안개가 자욱한 흐린 날씨면 더더욱.
“꼭 말을 걸어야해? 어차피 조금 있다 떠날 텐데”
“그래도 매일 같은 장소에 나타난다며. 혹시 귀신 아냐?”
미영은 토스트에 잼을 바르다 흠칫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쳐다보는 종석.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냐. 나 작업실에 가볼게”
미영에 볼에 가볍게 키스한 뒤 산장 뒤쪽에 마련된 작업실로 향하는 종석. 그런 그의 뒷모습을 미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만 본다.
-딸깍-하고 작업실 불을 켜는 종석. 그 곳에서는 어제 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몇 평 남짓한 공간에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는 도구들. 선반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조각상들이, 문을 기점으로 양 쪽에는 유화로 그린 풍경화들이 걸려있다.
종석은 예술가다. 지방의 저명한 화백으로 알려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신 또한 그 꿈을 쫒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갤러리까지 마련할 정도로 아버지의 명성과 재력을 종석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하나의 사건으로 종석의 꿈은 망가진다. 한 번도 자식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불륜, 모든 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달이 내비치는 호수가 그려진 유화를 바라보며 종석은 당시를 떠오른다. 스캔들로 견디다 못한 아버지의 자살과 알게 모르게 져왔던 빚들이 가족에게도 알려지면서 모진고생 다 한 어머니의 모습까지. 주변의 모욕과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종석은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종석은 조각과 유화분야에서 촉망받는 신인 예술가로 성장하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자리에 앉아 앞치마를 두르며 종석은 생각한다.
‘그래도 부족해. 여전히 무언가 손에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기분이야.’
그렇다. 이제 조금 이름을 알린 것 정도로는 과거 아버지의 명성과 재력을 갖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거기에 ‘성공을 통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포함되어 종석은 이름 모를 광기에 때때로 사로잡혀가던 중이었다.
붓을 들어 ‘웻 온 드라이(wet on dry)’로 작업을 시작하는 종석.
‘도대체 아버지가 사랑한 그 여자는 누구일까?’
항상 머릿속에 의문점이 든 하나의 질문,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늘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살하는 그 날까지 끝내 그 여자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비밀로 묻기 위해서였을까? 경찰에도 수사를 의뢰했지만 들려오는 답변은 ‘신원미상’, 찾을 수가 없다는 답변뿐.
얼마 전 아마존을 통하여 주문한 유화물감을 팔레트에 짜내며 종석은 다시금 떠올린다.
‘그래, 이 별장 근처라고 했어. 분명 근방을 다 뒤져봤는데도 그 여자 사는 집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해외라도 간 걸까? 아님 개명이나 성형수술? 참 나도 웃기는 군.’
별장이 위치한 이 곳은 아버지가 이름 모를 여자와 만나 사랑을 나눴던 곳, 그리고 별장은 아버지가 그녀와 자주 만나기 위해 큰 금액을 주고 구매했음을 임대업자로부터 들었다.
‘이런, 마스크를…’
유화물감 특유의 휘발성 기름 냄새가 금방 작업실에 스며든다. 종석은 작업을 멈추고 재빨리 창문을 연 뒤 잿빛 방독면 마스크를 쓴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냄새와 환기에 예민한 종석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쉰 다음 이번엔 ‘웻 온 웻(wet on wet)’기법으로 덧칠한다.
유언장에 따라 아버지의 별장은 내 소유가 되었다. 갤러리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별장만큼은 내게 꼭 물려주고 싶으셨을까. 무엇보다 빚을 갚고자 밤낮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내게 큰 슬픔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어머니까지 잃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미영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 소중한 존재였다. 도제형태로 들어간 한 작가의 개인 전시회에 내 유화가 운 좋게 전시될 기회를 얻었었다. 그때 내 작품을 보고 팬처럼 좋아하며 따라준 여대생이 바로 미영이었다. 스타일은 수수했지만 시원 털털한 성격과 보이시한 목소리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여자였다. 우리는 불같이 사랑에 빠졌고 현재 약혼까지 한 상태다.
같이 침대에 누워 나의 불우했던 과거사를 무덤덤하게 고백했을 때 이 여자의 표정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마치 자기 일처럼 펑펑 울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과 같았기에. 그리고 나와 함께 있을 때만은 눈물이 아닌, 미소 짓게 해주고 싶다고.
이내 종석은 고개를 살짝 흔든 뒤 늦은 밤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종속의 키보다 조금 작은 캔버스에 그려지는 그림은 긴 생머리를 한 얼굴 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