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이력서 뒤에 숨겨진 진짜 내 이름
어느 늦은 저녁,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한 수강생분이 유독 지쳐 보이는 얼굴로 맨 앞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셨죠.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내시더니, 이내 한숨을 깊게 쉬며 화면을 제 쪽으로 돌려 보여주셨습니다. 화면에는 한글 문서가 켜져 있었고, 그 안에는 대학 전공부터 시작해 전 온라인 게임 이름, 취득한 자격증, 다녀온 해외 어학연수 지역까지 빼곡하게 정리된 이력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작가님, 제 이력을 쭉 정리해 봤는데요. 아무리 읽어봐도 제 삶은 너무 평범하고 기계적이에요. 이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바카라이 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혹시 자격증이나 이력을 더 쌓아야만 바카라을 쓸 수 있는 걸까요?"
저는 그분의 이력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화면을 마우스로 조용히 내린 뒤 여쭤보았습니다.
"이 자격증을 따던 날 밤에,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해주셨나요? 그리고 전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고 나오던 날 아침, 회사 문을 열고 나서며 처음 느꼈던 공기는 어떤 냄새였나요?"
그분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멍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자격증 이름 뒤에 숨겨져 있던 지독한 불안감, 퇴사하던 날 느꼈던 해방감과 두려움의 교차 같은 진짜 삶의 냄새들이 그제야 테이블 위로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바카라을 쓰려고 마음먹는 순간, 세상이 만들어 놓은 평가 기준을 먼저 꺼내 듭니다. 내가 슬롯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지,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거창한 타이틀을 가졌는지 검토하며 지레 겁을 먹죠.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출판사의 편집자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이력서에 적힌 화려한 스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메마른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뜨거운 감정과 깊은 생각들, 즉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진짜 알맹이들입니다.
그 알맹이를 일컬어 저는 '정체성 키워드'라고 부릅니다.
삶이라는 거대한 광산에서 흙먼지를 털어내고 찾아낸 빛나는 원석 세 가지.
오늘은 나라는 사람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진짜 정체성 키워드를 발견하고 정돈하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왜 하필 '세 가지'여야만 할까요?
종종 예비 작가님들과 개인 면담을 나누다 보면,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저는 진짜 평범하게 온라인 게임만 다녀서 쓸 키워드가 단 하나도 없어요"라며 빈 종이를 만지작거리시고, 또 어떤 분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육아, 이직, 요리, 여행, 마음 챙김, 재테크까지 수십 가지 단어를 칠판 가득 적어두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많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너무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제 오랜 경험상 나라는 입체적인 인간을 가장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세상에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숫자는 바로 '셋(3)'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 타던 세발자전거를 떠올려 볼까요? 바퀴가 하나뿐인 외발자전거는 끊임없이 중심을 잡으려 애써야 하고 금방 쓰러집니다. 두 바퀴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갈 때는 안정적이지만, 멈춰 서는 순간 옆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하지만 세 바퀴는 다릅니다. 가만히 멈춰 서 있어도, 울퉁불퉁한 흙길을 걸어갈 때도 흔들림 없이 가장 단단하게 중심을 유지합니다.
글쓰기도 이와 똑같습니다. 단 하나의 키워드로만 글을 쓰다 보면 이야기가 지루하리만큼 납작해집니다. 예컨대 '10년 차 대기업 온라인 게임인'이라는 키워드 하나로만 글을 쓰면, 시장에 널려 있는 수많은 온라인 게임인 에세이 중 하나가 되어 금세 잊히고 맙니다.
하지만 여기에 '매주 일요일 밤마다 구운 구움과자'라는 관심사 키워드와, '타인의 고민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다정함'이라는 강점 키워드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10년 차 대기업 온라인 게임인] 이 [일요일 밤의 베이킹] 을 통해 월요병을 극복하고,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동료들의 서랍 위에 작은 마들렌과 함께 [다정한 위로] 를 건네는 독보적인 서사가 탄생합니다. 단어 하나씩만 떼어 놓고 보면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지만, 이 세 가지가 한 사람의 우주 안에서 긴밀하게 얽히고설키는 순간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독창적인 콘셉트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복잡한 삶 속에서 굳이 세 가지의 정체성 키워드를 추려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내 삶의 세 가지 서랍을 열어젖히는 시간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키워드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내야 할까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발한 단어를 발명해 내려 애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미 당신의 발자국이 닿았던 길, 당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 밤마다 일기장에 끄적이던 문장들 속에 고스란히 묻어 있으니까요. 저는 이것을 세 가지의 서랍으로 분류하여 들여다보길 권합니다.
잠시 일상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따뜻한 차 한 잔을 곁에 둔 채 제 질문을 따라 마음속 서랍들을 하나씩 천천히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서랍 : 내가 지나온 소중한 시간들,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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