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모험 & 오디세우스
추석 날(25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 오늘 일정을 보니 아무것도 없다. 이런 날 신난다. 몇 백일인지 몇 천일인지 모르는 내 여생 중의 하루이기에 이렇게 완벽한 자유가 주어진 것을 신께 감사한다. 추석 같은 명절에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지만, 딸네는 미국에 있고, 아들네는 서귀포 앞바다에서 연휴에 바다를 찾은 다이빙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내는 친정에 갔고, 난 혼자 영화 보러 왔다. 그제저녁처럼...
IMAX로 촬영했다는 오디세우스를 꼭 IMAX로 보겠다고 마음먹었었지만, 집에서 가까워 가끔 찾는 아리랑 씨네센터에서 아침 9:50에 영화가 시작한다. 그 시간까지 아침 의식(ritual)을 다 마치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이트에서 예매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언제부턴가 시간 맞춰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서둘러야 한다면 더욱더 하기 싫다. 비록 내가 좋아서 하는 것 일지라도...
완벽한 자유가 조금이라도 방해받는 것이 싫은가 보다.
3 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는 동안 화장실을 참을 수 있다는 것에 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 직전의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무섭다. 이젠 이런 스릴과 서스펜스가 싫다. 충분히(?) 나이 들어 그런가 보다. 영화에 몰입하지만 자주 눈을 감았다. 보고 있기 힘든 장면이 많다. 내 마음이 많이 착해졌나 보다. 아니 여려졌다고 봐야겠지. 나만 그런가? 그래서 IMAX로 영화를 다시 보겠다던 마음을 접었다. 이렇게 자주 눈 감고 봐야 할 바에야...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
신을 노하게 하면 벌을 받는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니 무조건 신께 엎드려 빌어라? 권선징악?
오디세우스란 이야기 자체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 갖은 고생을 하고, 모든 부하를 잃고 홀로 고향에 돌아와 배신자 무리배들을 물리치고,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사람들은 영웅에 환호한다. 영웅은 신이 만든다. 영웅 되기는 정말 어렵단 얘기다. 영웅이 되고 싶어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웅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가끔 죽고 나서 영웅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영웅이 되고 싶지는 않았겠지?
오디세우스와 가끔 얘기하고 있는 여인이 나온다. 혼혈인가? 백인은 분명 아닌데 야릇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피운다. 알고 보니 아테네 여신이다. 내가 읽어 알던 여신의 모습처럼 완벽하지 않다. 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나를 납치함으로 해서 일어났다고 읽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절세의 미녀라는 헬레나가 화면에 나온다. 그런데 헬레나의 피부가 검다 못해 숯덩이처럼 새카맣다. 그 옛날 그리스와 튀르키예 지역에 정통(?) 아프리카 흑인이 있었을까 궁금하네. 그 당시에도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노예가 있었을까?
추석 연휴 직전(23일)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검색했다. 내가 좋아하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오늘 개봉하는 영화들이 있다. '아무런 사랑'이란 제목이 낯익다. 외국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저녁 7시 이후라 시간도 적당한데 개봉날이라 그런지 이미 만석이다. 꼭 봐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실망할 것도 없다.
닭대신 꿩인가? 꿩대신 닭인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둘러보니 '꿈꾸던 모험'이란 영화가 비슷한 시간에 2관에서 상영한다. 꿈꾸던 모험(The Dreamed Adventure)이란 제목이 마음을 끈다. 꿈과 모험, 그리고 배경이 불가리아다. 불가리아에 대해 아는 것 거의 없지만, 튀르키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8년여 전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입국한 날, 쿠데타가 발생하여 외교부로부터 튀르키예를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란 문자메시지를 받았었다. 공항이 마비되었는데 걸어서라도 불가리아로 나가란 말인가 했었다.
제목과 불가리아가 배경이란 것에 끌려 오후 7:25 상영을 예매했다. 시간은 충분하다. 씨네큐브가 있는 빌딩에 음식점도 여럿 있다. 일찍 가서 저녁을 해결해야겠다. 무엇을 먹을까? 벌써 군침이 돈다. 이렇게 식욕이 당기는 것을 보니 아직 살고 싶은 날이 많다는 거다.
갑자기 화면이 까매지더니 극장 불이 켜졌다. 그리고 화면에 엔딩크레디트가 흐르기 시작한다. 멍하다. 뭔가 끝났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163분을 앉아 있었는데, 마지막 장면이 지나간 자리에 물음표만 남았다. 밀수도, 실종도, 범죄 조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영화가 그렇게 공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전부 허공에 걸린 채로 끝나버렸다. 마지막 장면은 남녀(사이드와 베스카)가 다시 만나 얘기하는 장면이었다. 여자가 지난 일을 설명하는데 남자가 답하는 말이 엉뚱하게도 "I miss you."
I miss you. 가 감독이 내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인가?
처음엔 순전히 불만스러웠다. 163분 동안 긴장을 계속 쌓아 올리다가, 그걸 터뜨려주지 않는 건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나는 분명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성이든, 자백이든, 눈물이든. 영화가 주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그 순간을 기다렸는데, 영화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갑자기 걸어 나가버렸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모든 관객이 다 나가고,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붐비지 않을 화장실로...
소변기 앞의 검은색 벽을 바라보며 허망함을 추슬렀다. 무엇인가 있을 거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지하주차장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기다린 그 클라이맥스라는 것 자체가, 삶에는 원래 잘 주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위기는 대체로 이렇게 지나간다. 뭔가 크게 터지지 않고, 그냥 다음 날이 오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베스카가 마주한 것도 사건의 전모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이었다면, 그 발견에는 원래 폭죽 같은 종결이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나는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 실망했는지조차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마지막 대사인 "I miss you." 만이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이 싱거운 결말이 남긴 유일하게 확실한 성취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이렇게 뜬금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I miss you!!!
Who ar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