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길쌈 이야기

생활(生活)의 예지(睿智)

byMorpheus


너무 어렸던가? 삼밭에 대한 기억은 마치 뿌연 안개가 덮인 먼산처럼 가물가물하다.

추수가 끝난 뒤, 논둑에 자란 마른 잡초를 태우는 쌉싸한 느낌의 삼밭 냄새는 무거웠다. 빽빽하게 들어선 삼 줄기와 까슬한 삼잎들은 마치 작은 밀림( 密林) 같았다.

늦봄부터 여름 한 철 내내 삼촌댁 앞밭은 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채전밭과는 달리 삼밭에는 삼만 자랐다. 할아버지는 삼밭 출입을 엄하게 금지하셨다. 특히 송아지가 삼밭에 들어가면 기겁을 하셨다.


그리고 삼은 a지기(地氣)를 심하게 빨아가기 때문에 b연작(連作)을 못하게 하셨다.

삼들은 그렇게 여름철 더위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계절이 끝날 무렵에 베어져 앞마당에 몸을 눕혔다. 삼촌은 대나무로 만든 칼로 삼잎을 쳐내고 삼나무 줄기만 가지런히 모아서 묶었다. 생각해 보니 삼촌이 닥나무 잎을 쳐내던 기억과 닮았다.

c삼굿을 거친 삼껍질은 쉽게 벗겨졌다. 벗긴 삼껍질의 외피를 치대어 씻어내고 하얗게 만들어 볕에 말린다. 그리고는 한 올 한 올 가늘게 찢어 삼을 d 삼는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무릎 위 허벅지에 삼을 비벼 삼올을 이었다. 어머니의 뽀얗든 무릎 위 허벅지가 피멍이 들듯이 빨개졌다.

길쌈은 한꺼번에 하는 일이 아니라고 어른 들은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짬이 나면 삼타래를 갖고 나와 삼을 삼았다. 다 삼은 삼실은 둥근 채에 담겨 물레 잣기로 넘어갔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는 가을밤이면 어머니는 호롱불 아래서 물레를 돌렸다. 둥근 채에 담긴 원실이 어머니의 왼손을 타고 물레의 둥근 바퀴에 탄탄하게 감겼다. 끼륵끼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물레 옆에 엎드려 우리는 바카라을 읽었다.

물레 잣기가 끝나면 어머니는 이제 길쌈은 반(半)을 지났다고 하셨다. 물레에 감긴 삼실을 볕이 좋은 날을 잡아 짤 삼베의 길이와 폭으로 펼치는 베날기와 풀을 먹이는 베매기를 한다. 베날기가 참 어렵다고 하셨다.

어느 날, 안방 옆에 딸린 공부방 한편에 베틀이 자리를 잡았다. 누구네 베틀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쇠붙이 하나 들어가지 않은 목재 방직기(紡織機)였다.

베틀 앞쪽에 날실이 길게 펼쳐있고 어머니가 발을 뒤로 빼면 날실이 열렸다. 그 사이로 럭비공 모양의 날렵한 북 속에 감겨있는 씨실이 지나가고 어머니는 바디를 탁탁 쳤다.

"덜크덩 쉬익 탁탁.. "

베틀소리가 담을 넘었다. 요란해도 정겨운 장단 같았다.

"e청새 옥새가 날아든다 옥황상제가 바둑 두고.."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베틀가(歌)를 따라 베는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종일 짜도 팔길이를 넘지 못했다. 어머니는 언제 베 짜는 일을 배웠는지 몰랐다. 가끔 큰누님을 곁에 앉혀놓고 베 짜는 일을 가르쳤다.



1970년대 초, DMZ 부근의 미군부대 막사에 미군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병사들의 관물함과 케비넷을 샅샅이 뒤졌다. 마리화나를 단속한다고 했다. Merle Haggard의 Country Music "Okie from Muskogee"가 미군 막사에까지 흘러들어 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We don't smoke marijana in Muskogee"

어릴 적 삼촌이 삼잎을 태울 때 매캐하던 그 연기가 마리화나와 관련이 있는 대마초 (大麻草)였음을 군에 가서야 알았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송아지까지 삼밭 출입을 염려 하셨던 그 이유도 그때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註)
a지기(地氣) 농작물을 키워내는 땅의 기운
b연작(連作) 매년 같은 작물을 재배하는 일
c삼굿 삼을 땅에 묻어 증기로 찌는 일
d삼다 삼 가닥을 비비어 꼬아 잇는 일
e베를 짜며 부르던 향토 "베틀가"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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