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生活)의 예지(睿智)
할아버지의 꼿꼿이 세우신 붓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지(韓紙) 위에는 세월이 쌓인 묵직한 벼루와 먹이 놓여있고 정성껏 갈아 놓은 먹물은 검게 반짝였다. 상(床) 위쪽 에는 연적(硯滴)이 놓여있었다. 할아버지는 왼손으로 오른팔 도포자락을 잡고 한 자 한 자를 고요히 써내려 가셨다.
"顯考學生府君神位"
할아버지의 지방문(地榜文)은 가지런하고 먹물은 번지지 않았다. 옆에서 삼촌과 문중 어른들이 숨을 죽이고 할아버지의 글씨를 잠잠히 지켜보셨다.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동네 초입(初入) 에는 길을 따라 실개천이 흐르고 개천 언덕 에는 뽕나무와 닥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뽕나무 잎은 밝았고 닥나무 줄기는 어두운 갈색이었다. 가끔씩 a무자치가 인적에 놀라 닥나무 속으로 꼬리를 감췄다.
늦가을에 삼촌이 닥나무 한 짐을 지게에 지고 와서 마당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끝가지와 잎을 쳐내고 외양간 구유에다 차곡차곡 넣고는 가마솥에 펄펄 끓는 물을 닥나무에 부었다.
닥나무 껍질을 벗기기 쉽다고 했다. 할아버지도 나오셔서 닥나무 껍질을 벗겼다. 우리도 일손을 도왔다. 닥나무 껍질을 벗은 나무줄기는 하옜다. 할아버지는 하얀 줄기는 회초리로 "안성맞춤"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눈빛은 따사로웠다.
삼촌은 닥나무 껍질을 가지런히 묶어 개울물 속에 담가 넣고 큰 돌로 눌러놓았다. 닥나무 껍질은 겨울철 꽁꽁 언 실개천 차가운 물속에서 한 철을 보내고 이른 봄 따사로운 마당 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둘러앉아 닥나무 껍질의 외피를 벗겼다. 흑갈색을 벗기면 내피(內皮)는 온전히 뽀옜다.
동네에는 한지(韓紙)를 뜨는 공방(工房)이 있었다. 외피를 벗긴 닥나무 껍질은 몇 번 이고 삶고 떡을 치듯 두드리는 b고해 (叩解)를 거친다. c닥풀을 넣고 하얀 묽은 죽이 되도록 풀어주면 힘든 일은 끝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 촘촘한 발로 종이 뜨는 작업이 시작된다. 한지(韓紙) 뜨는 작업은 할아버지 가 하셨다. 숨을 고르시고 양손으로 발을 잡으신 할아버지는 신중하셨다. 손이 흔들 리면 한지(韓紙)의 두께가 고르지 않다고 하셨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아야 한다고 했다.
실개천 언덕 푸른 하늘 아래서 자란 닥나무의 숨결이 차가운 얼음 속에서 인동(忍冬)하고 화사한 봄날에 하얀 종이로 다시 태어났다.
한지(韓紙)는 어디서나 숨을 쉰다. 이 편과 저 편을 나누고 안과 밖을 가르지만 숨으로 연결한다. 한지(韓紙)는 천 년의 세월을 무덤 속에서 그 질긴 생명력을 지켜냈다.
밝음을 통과시키고 계절의 온도를 전한다. 닥나무의 뽀얀 속살로 빚은 한지(韓紙)는 단아(端雅)하다.
아침은 한지(韓紙)의 동창(東窓)을 통해 어둠을 밝히고 햇볕의 따스함을 안방으로 스며들게 한다. 한겨울 문풍지(門風紙)가 되어 찬바람에 울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한지(韓紙)는 산촌(山村)의 삶을 참 많이 닮았다.
傳明傳溫藏睿智
千年忍苦抱山魂
밝음과 온정을 전하는 지혜가 숨어있고,
오랜 고통을 참는 산촌의 혼을 품고 있네.
註
a무자치 물가 습지에 사는 토종 뱀
b고해(叩解) 닥나무 껍질을 쳐서 풀어줌
c닥풀 섬유를 풀어 엉기게 하는 점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