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生活)의 예지(睿智)
증조할아버지의 밥상은 정결(淨潔)하고 단출했다. 뚜껑이 덮인 밥그릇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그릇은 유기(鍮器) 그릇이었다. 그리고 생선 한 토막과 산나물이 작은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머니가 상(床)을 들고 사랑채로 향하면 할아버지가 술주전자를 들고 따르셨다. 증조할아버지가 식사하시기 전에 반주잔을 채워주셨고 증조할아버지가 수저를 드시면 돌아오셨다. 증조할아버지는 아침저녁 꼭 막걸리 한 잔을 반주로 드셨다. 백세(百歲)를 넘기시고도 정정(亭亭)하신 비결이라고 하셨다.
본채 안방에는 그제야 밥상에 둘러앉았다. 할아버지의 독상(獨床)은 사랑채를 향한 문 앞에 자리하였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통하는 문 옆에 앉았다. 둥근 교자상(交子床)은 항상 비좁았다. 밥상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했고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하루 한 끼의 식사는 의식(儀式)이었다. 고요하면서 엄격했다. 손주들이 밥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시는 할아버지의 눈길은 다사로웠다. 손주들과의 눈길은 길게 주셨고 말씀을 짧았다. 밥을 흘리면 할아버지의 목조리는 낮았고 단단했다.
"밥은 흘리지 말고 먹어라."
"한 톨의 쌀이 한 섬이 되느니라."
그 말씀이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한 톨 한 톨이 모여 한 섬이 된다는 뜻은 나중에야 알았다.
산촌(山村)이 그랬다. 산이 높아 어둠도 빨리 찾아오고, 그래서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서 아침의 시작도 빨랐다. 조식(早食)이 끝나면 앞산에 해가 솟아올랐다. 논밭으로, 학교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루의 시작은 같아도 저녁은 달랐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녁상을 여러 번 차렸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때 밥상에는 놋그릇들이 많았다. 그 많던 유기(鍮器) 그릇들은 어디로 갔는지 분명치 않다. 묵직했던 밥그릇과 국그릇들이 상위에 가득했다. 식사를 하다가 조금 소란한 낌새가 보이면 할아버지는 국그릇을 숟가락으로 땅땅 치셨다.
명절(名節)이나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는 어른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유기(鍮器) 그릇과 제기(祭器)들을 닦았다. 지난 시간을 보내고 새로운 순환(循還)을 맞이하는 의식(儀式)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가끔 그 멍석 위에 어머니의 한숨과 침묵 (沈默)이 흐르기도 했지만 그 이유는 몰랐다. 아마도 지난봄 시집간 큰누님과 서울로 유학 간 형 생각이 깊었는지도..
삼촌은 옛 기왓장을 잘게 부수어서 절구에 넣고 빻았다. 체에 걸러진 고운 기왓가루를 지푸라기 수세미에 묻혀 놋그릇을 문질러 닦았다. 수세미가 시커멓게 될 때까지 닦았다. 물로 씻은 후 무명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면 놋그릇들은 정말 반들거렸다.
어머니와 숙모는 치맛자락에 손을 닦고 유기(鍮器) 그릇들을 삼베 보자기 위에 조용히 올려놓고 묶었다. 어머니의 손길은 고요하고 조심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사대(四代)가 함께 사는 밥상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참 고생을 많이 하셨으리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냉장고나 전기밥솥은 없었다. 음식 보관이 되지 않으니 끼니때마다 음식을 만들어야 했겠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다.
김치항아리는 땅에 묻었고 나물이나 야채는 염장(鹽藏)이 많았다. 소금에 절인 갈치와 전갱이 그리고 a돔배기가 할아버지 상위에 올랐다. 증조할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생선을 조금만 드시고 상을 물리셨다. 똘망똘망한 손주들의 눈망울이 어른거려 고기반찬을 물리셨으리라.
그때의 삶의 모습은 그랬다. 요란하지 않았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삶을 둘러싼 환경에 휘둘리지 않았다. 윗분들의 잔잔함 속에 흐르는 내리사랑은 부족함을 채웠다. 아버지의 퇴근길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린 고등어 한 b손은 부모님을 향한 효심 (孝心)이었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孝而親不待
나무는 흔들리지 않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를 하려 해도 부모가 기다려 주시지 않네.
註
a돔베기 상어의 살코기
b손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