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치산치수(治山治水)

생활(生活)의 예지(睿智)

byMorpheus


어렸던 시절, 장마철의 시골은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하늘에 비구름이 산비탈을 따라 한 번 내려오면 물러갈 줄 몰랐다. 개울가에는 개구리들이 밤새 개골거리며 울었고, 며칠 간씩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방둑을 따라 심어놓은 뽕나무와 자작나무 이파리에 내리는 빗소리는 멀리 잔잔하게 들려왔으나 담장을 타고 오른 널따란 호박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종일 따닥거렸다. 가끔씩 먼 산자락 검은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면 "우장창"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마을 어귀의 개울은 황톳물이 콸콸거리며 넘쳐흘렀고, 마을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근심 어린 눈으로 방둑으로 모여든다. 어른 들은 "큰 물 졌다"라고 했다.

녹화사업(綠化事業)이 이루어지기 전인 1950 ~ 60년대에는 장마철 홍수(洪水)는 연례행사와도 같았다. 해마다 논밭이 잠기고 방둑이 무너져도 어쩔 방도가 없었다. 야산은 민둥산이었고, 비가 내리면 빗물은 그냥 개울로 흘러내렸다.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아이들은 산(山)을 푸른색으로 칠하지 않았다.

1959년도 사라호태풍의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읍내(邑內)를 연결하는 다리가 무너지고 강을 건너는 철교(鐵橋) 위를 강물이 출렁거렸다. 홍수에 집들이 둥둥 떠가고 소와 돼지들이 떠내려가도 어른들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면 도시인(都市人)들은 바캉스 다 해수욕(海水浴)이다 하며 바다로 떠났 지만 시골은 농사일로 바쁘게 돌아갔다. 농부들은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고 논도랑을 고쳤다. 황톳물에 잠겨 쓰러진 벼 포기들을 한 잎 한 잎 씻어내면 벼들은 다시 숨을 고르고 하늘을 향해 햇볕을 받아들였다. 여름날 긴긴 해가 짧았다.

시골의 농부들은 알고 있었다. 장마의 피해가 자연의 재해가 아님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해마다 비는 내렸고 장마가 오기 전에는 가뭄이 길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연에 순응(順應)한다는 것이 피해를 보고도 손을
놓고 있어라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속수무바카라(束手無策)으로 피해를 당했던 1960년대는 잔인했다. 몸부림쳐도 농촌은 해마다 같은 피해에 시달렸다.

그리고 1970년을 맞이했다. 그해 봄에 "새마을 운동" 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정부가 주도(主導) 했지만 누구도 개조 (改造)나 개혁(改革)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변화를 향한 조용한 몸부림이었고 잘 살아보자는 의지(意志)였다.

난생처음 불도저(Bulldozer)를 보았다. 황톳물이 범람하던 개울바닥을 불도저가 파냈다. 방둑을 만들고 굵은 돌로 제방벽 (堤防壁)을 쌓았다. 계곡(溪谷)을 막아 저수지(貯水池)를 만들어 a천수답 (天水畓)을 없앴다.

농촌사람들은 손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짬만 나면 b리기다 묘목(苗木)을 지게에 지고 민둥산에 올랐다. 반공일 오후에 국민학교 학생들도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갓 심은 묘목에 물을 주었다. 산마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말라죽은 묘목은 다시 심고 또 심었다. 억새풀을 심고 잔디 씨앗을 뿌려 흘러내리는 빗물을 잡았다.



입산금지(入山禁止)는 법(法)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땔나무가 사라진 아궁이에는 연탄불이 밥솥을 받쳤다. 야산(野山)에도 푸르름이 더해지고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할 즈음에는 장마가 져도 농부들은 밤잠을 설치지 않았다.

전화(戰火)로 폐허가 된 그 땅에 울창한 푸른 숲과 맑은 물이 가득히 흐르는 산하(山河)를 보며 세상은 기적이라 부른다. 민둥산에 어린 리기다 묘목을 심던 세대(歲代)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까?



山河如今皆成翠
治山治水是睿心

산과 물이 모두 푸르게 되었으니
치산치수의 예지가 아니겠는가?

치산치수(治山治水), 한 세대가 이루어 낸 그 기적(奇跡) 깊숙한 곳에 "삶의 예지(睿智)"가 숨어있다.

註

a천수답(天水畓) 빗물에 의존한 논

b리기다(Rigida) 소나무 품종. 잎이 세

가닥이며 거친 땅에도 잘 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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