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담과 벽(壁) 사이

생활(生活)의 예지(睿智)

byMorpheus


역설적으로 담이 있기에 이웃이 있었다.

담은 거리(距離)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서로를 보호하고 이웃 간의 예(禮)를 존중 하는 장치였다. 까치발을 하면 담 너머 대청마루가 보이고 안마당에 모이를 쪼는 닭들과 디딤방앗간도 보였다.

떡을 담은 소반과 제철 과일이 담을 넘어 이웃 간의 정(情)을 건넸고 서로가 갖추지 못한 연장들이 담을 넘어 편리(便利)함이 건네졌다. 담은 경계가 아니라 통로였다.

담이 없는 이웃집은 대나무나 소나무가지 들을 엮은 울타리가 담을 대신했다.

울타리는 담보다 더 자유로웠다. 울타리 사이에는 바람의 길이 있었고 강아지나 고양이들도 오갔다. 아낙네들은 울타리 사이로 어른거리는 얼굴을 마주하며 동네 소식들을 조용히 전했다.

이웃 간에는 절대 담을 넘지 않았다. 월(越)담하는 것은 이웃 간의 예(禮)를 무너뜨리고 신뢰(信賴)를 허무는 행위였다. 담은 믿음의 경계(境界)였고 신뢰가 의지 (依支)하는 표징(表徵)이 되었다.

담에는 따뜻한 배려(配慮)가 스며있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에 양지바른 담벼락은 온기(溫氣)를 품고 있었다. 허술한 입성의 아이들은 언 손을 녹였다.


어머니는 채전밭 담벼락 밑에 호박씨를 묻었다. 호박씨는 새싹을 틔웠고 넝쿨은 담벼락을 의지하여 담장 위를 타고 올랐다. 가을이면 늙은호박이 담장 위에 편안히 몸을 뉘었다.

담이 사라진 도시에는 담 대신 벽(壁)이 세워졌다. 벽(壁)은 이웃 간의 통로(通路)가 아니라 단절(斷切)과 불신(不信)의 상징 (像徵)되었다. 벽(壁)은 신뢰(信賴)가 아니라 막힘과 거부(拒否)의 언어(言語)가 되었다.

벽(壁)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긴다. 그러나 이 벽(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전(跳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벽(壁)은 도전하는 자에게만 넘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준다.

요즘 많이 사라졌지만, 삼다도(三多島) 제주에는 낮은 지붕과 얼기설기 쌓은 현무암(玄武岩) 돌담이 무너지지 않고 제주의 강풍을 맞서고 있다. 그 낮은 돌담 에는 바람을 이기려 하지 않고 바람에게 길을 터준 제주인들의 "생활(生活)의 예지(睿智)" 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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