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감자꽃 모정(慕情)

세월(歲月)의 그림자

byMorpheus


겨우내 얼었던 채전밭이 이른 봄기운에도 촉촉이 녹아내린다. 봄비라도 간간이 내린 후에는 쟁기질이 한결 부드럽다.

옆집 영감님이 싸리나무 울타리 사이에 난 좁은 길 옆의 채전밭을 아침 일찍 갈아엎고 있다. 새끼 밴 암소가 힘겹게 쟁기를 끌고, 막내아들이 코뚜레줄을 잡고 쟁기 길을 앞선다. 영감님이

"이랴 쯧쯧 ~"

하는 소리가 골목길 담을 넘는다.

쉰여 평 남짓한 옆집 채전밭은 아침밥 먹기 전에 쟁기질이 끝난다. 관우가 살갑게 다가가서 힘겹게 아침 쟁기질을 마친 암소에게 콩깍지와 등겨를 삶은 여물을 한 바케스 담아 와 물과 함께 내놓는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암소는 침을 길게 흘리며 여물을 맛있게 먹는다. 암소의 뿌연 입김이 먼저 여물통을 채운다.

관우의 쟁기질은 동네에서도 알아준다. 워낙 팔힘이 좋아 쟁기를 끄는 소를 힘들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갈아놓은 밭고랑이 기막히게 가지런하다.

어머니는 소와 쟁기를 빌려준 영감님께 갓 걸러낸 막걸리와 섞박지 김치를 담은 소반을 채전밭 끝자락에 있는 감나무 그늘 아래 내놓는다.

동네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감나무에는 감꽃망울이 조롱조롱 달렸다.

"올해는 감 풍년이 오려나?"

어머니 얼굴이 모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그때 시골사람들은 봄이 오면 참 바지런히 움직였다. 감자알같이 주렁주렁 딸린 아이들 얼굴이 누렇게 푸석푸석해지고, 보리추수 때까지 뭐라도 먹여야 했다. 감자라도 빨리 심어 보릿고개 춘궁기(春窮期)를 넘어야 했다. 일 년 중 제일 힘든 시기가 춘삼월이다.

쟁기질을 마친 채전밭에 새로 싸리나무 울타리가 쳐지고 골을 따라 어머니는 봄감자를 심으셨다. 옆집 채전밭 보다
두어 배가 넓은 밭에 허리 한번 펴지 않고 감자를 심었다.

담 밑에는 동그랗게 거름을 묻은 자리에 호박씨를 심었고, 싸리나무 울타리를 따라 완두콩을 쪼르르 심으셨다. 채전밭 입구에는 오이와 가지씨를 심었고, 흙을 돋운 고랑에는 고추모종을 내었다. 양지바른 땅에는 봄상추 씨앗을 뿌렸다. 그 봄날 채전밭에 어머니는 자식 같은 온갖 씨앗들을 심으셨다.

어머니는 자그마한 체구에 참 조용하고 정(情)이 많으셨다. 동네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머니를 좋아하셨다.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좋은 혼처 다 마다하고 가난뱅이 선생님 만나 결혼하여 비록 빠듯하게 살고 있지만 마음은 늘 넉넉하셨다.

글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이 외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어달라고 야단들이었고, 어머니는 밤늦게 답장까지 대필(代筆) 해 주셨다. 일제 때 소학교를 다녔다고 하셨다.

유월의 끝무렵은 이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어 채전밭은 푸르고 싱싱했다. 무성하게 자란 감자이파리 위로 자주색 감자꽃이 여기저기 피어오른다. 감자알이 굵어지고 있단다. 때 묻은 흰 무명수건을 머리에 쓰고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고 김매기에 하루해가 짧았다.

남쪽지방은 장마가 일찍 찾아온다. 동네 사람들은 장마가 오기 전에 감자를 캔다. 감자 줄기에는 어른 주먹만 한 자주감자가 주렁주렁 딸려 나온다. 감자를 심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확을 하다니 신기하다. 채전밭에는 오이와 보라색 가지가 주렁주렁 달렸고, 담장 위에는 굵은 호박이 편안히 자리를 잡고 있다.

장마가 지나간 시골에는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마당에는 널찍한 멍석이 깔리고, 지붕 위로 모깃불 연기가 피어오를 때 어머니는 박바가지에 찐 감자를 가득 담아내놓으신다. 아릿한 자주색 감자에 어머니의 모정(母情)이 배어있다. 오뉴월 더위에 흘린 땀냄새도 함께 스며있다.

감자줄기에 달린 감자알 보다 많던 자식들 다 키워 내보내고, 채전밭 울타리에 매달린 완두콩 마른 줄기처럼 모진 삶 다 살고 떠나가신 어머니의 자주색 감자꽃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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