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영 작가는 10년 전, 남편을 사고로 잃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삶을 작품과 분리해서 보는 걸 선호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작가의 삶과 이어 창작 과정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 이후,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 이르는 소위 박해영 '3부작'이라는 작품을 연이어 발표한다. 세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삶을 견디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세 작품에는 모두 삶을 처절하게 견디는 중년쯤 되는 남자와, 그 남자를 곁에서 바라보며, 역시 자신도 삶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어린 여자가 등장한다. 한 남자는 아내의 불륜을, 한 남자는 연인의 자살을, 한 남자는 20년 간의 불안과 패배를 견디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각각의 여자는 사채 빚과 무연고에, 주변부와 불안한 삶에, 어릴 적의 트라우마에 역시 고통받고 있다. 박해영 작가는 거의 구원 받을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이 인물들을 어떻게든 구해낸다.
작가의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 과정은 작가가 자기 자신을 구해내는 과정과도 관계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그렇게 자신을 구해내기 때문이다. 위로받고 싶은 인물을 창조하고, 위로하고 싶은 인물을 글 속에 세우면서 말이다. 때론 저 중년 아저씨가 내가 되기도 하고, 그 아저씨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가 내가 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그 처절한 역할의 오고감이 작가 자신을 구해내고, 동시에 독자를 위로한다.
박혜영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전에는 나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것이 글쓰기의 목적이었다면, 그게 지옥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목적으로 놓고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제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지는 않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을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 적어도 작품을 쓰는 동안 만큼은 인물들 하나하나를 사랑하고자 하기. 그 말에 공감이 갔다. 나 역시 인간을 내가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인류애를 대단하게 발휘하는 삶을 사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목적으로 글을 쓰면, 묘하게도 내 삶이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글을 따라, 삶도 조금씩 움직인다. 내가 글에 담은 인간에 대한 애정만큼, 조금은 좋은 인간이 되길 바라게 된다.
'무자무싸'를 보면서, 왜 황동만은 늙지 않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 사람은 40대 중년에도, 이미 얼굴과 몸은 나이 들어버렸지만, 소년같이 그대로 있을까. 그건 어쩌면 작가의 애도방식은 아닐까? 여전히 자신의 마음에는 그 나이대에 머무르고 있는, 오래 전 떠난 한 남자를 기억하는 방식은 아닐까. 우리 삶에서 이별로 사라진 사람들은, 영영 그 나이대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를 기억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부쩍 나이가 들지만, 그를 기억하는 그 방식이, 계속 우리 곁에 그를 살게 할지도 모른다.
'모자무싸'에는 자기 삶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자기 삶을 걸고, 삶을 갈아넣어,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마음 속 '천개의 문'이 열려 있을 정도로 자기 삶에 진실해야 한다. 황동만은 "글만 보면,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싹 다 스캔되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따라 이 작품을 보면, 작가가 창조한 이 인물들 하나하나가 작가의 '천개의 문들' 중 하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삶을 견뎌내는 방식이 있다. 저마다 구원에 이르는 방식이 있다. 그 구원이 흔한 드라마 공식처럼, 재벌집 아들을 만나거나 1000만 관객의 영화 감독이 되는 일만은 아니다. 각자의 구원의 방식은 매우 복잡미묘하다. 누군가는 길가에서 만난 유기견 한 마리 때문에 구원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어디서 공짜로 얻은 자동차에 구원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저 '함께 늙어 죽자'라고 말하는, 한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구원된다. 세상에는 각자만이 찾을 수 있는, 구원의 빛이 새어나오는 틈새들이 있다. 작가는 아마도 그 모든 가능성들을 찾고, 실험하고, 이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