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무싸'를 보면 볼수록, 이 작품은 '자기혐오'와 '자기애'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제목 또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데, 이는 자신의 가치없음 때문에 자기를 혐오하거나 자기에게 애착을 가지는 상황을 나타낸다. 특히, 작중인물들은 자기혐오와 자기애가 사실상 다른 게 아니라, 한 몸이라는 걸 보여준다. 자기혐오를 하는 사람이 자기애를 갖고 있다.
가령, 박경세 감독은 자기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안에는 '감독'이라는 이상이 있는데, 그 이상에 스스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목받았던 첫 작품도 사실은 자기의 온전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라, 친구의 아이디어를 훔친 거였다. 그는 '감독'이라는 자기 이상에 기대어 자기가 그와 같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다.
그래서 자기가 아이디어를 훔친 그 대상인 친구를 미워한다. 그런데 그 미움의 본질은 자기혐오다. 감독은 되었지만, 그 감독은 자기가 진짜 바라던 '그 감독'은 아니다. 감독이라는 이름만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작가'를 붙여서 '도와주겠다'는 말에 과민반응하며 날뛴다. 자기가 가까스로 믿고 있던 '자기 이상'이 침범당하는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자기애는 곧 자기혐오처럼 느껴진다.
유명한 배우인 오정희 역시 비슷한 상황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과거를 혐오하기에 자기 과거를 감추며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것은 자기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과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 자기혐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녀는 과거의 가족을 버렸다고 믿지만, 사실은 혐오스러운 자기 자신을 버리고자 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 자기혐오에 기반한 자기애는 그녀를 더 나르시시스트로 만든다. 모든 게 연기고 거짓말이다. 대중을 경멸하고, 가면을 쓴 채 나타나며, 자기 자신에게 진실할 수 없다. 자신의 진실을 등진 채 삶을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의 제목에서 모두가 싸우고 있다는 그 '무가치함'이란, 자기 내면의 투쟁에 가깝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자기를 경멸하는 자기 이상과의 싸움이다. 황동만이 "내 인생이 왜 니 맘에 들어야 하는데요?"라고 따져 물을 때, 그는 사실 자기 안의 '이상'을 겨냥하고 있다. 왜 내가 내 안의 이상인, 내가 이상적인 삶을 요구하는, 이상이라는 니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라고 자문하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조금씩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자기혐오와 자기애가 뒤범벅인 저 영화계, 문화예술계의 이야기가 그렇게 펼쳐진다. 그들은 모두 대단하고 싶고, 자기 안의 이상에게 인정받고 싶다. 자기가 꿈꾸었던 바로 그런 존재이고 싶고, 그렇게 줄곧 빛나고 싶다. 마치,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듯,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그 어머니에게 사랑받기 보다는, 그 어머니라는 이상과 싸우고 싶다. 자기 안의 이상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다. 그 자기 자신은 남들에게 어떻게든 인정받으려 애쓰려 발버둥치기 보다는, '자기 안'에서 끌어나오는 무언가로부터 시작되었으면 한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보고 싶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작중인물 뿐만 아니라 아마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고, 자기의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미워 죽을 것 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투쟁의 끝에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마땅히 어디로 이르러야 할까? 아마 자기혐오를 직시하고, 다시 자기만의 가치를 찾는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로부터, 내가 살아있는,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부터.
* 사진 - JTBC 드라마 모자무싸 캡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