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찌개를 맛있게 끓이게 되면 결혼을 하자 던 한 남자를 알고 있다. 이하 나는 그 남자를 A라 부르겠다. A와 연인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지만 사랑을 느낀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에게 사랑이란 이미 '너'를 통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A는 어떻게 해도 내 삶을 흔들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 터.
그렇게 사랑은 고사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A와 만난 건 될 대로 되라는 자학적인 내 성향과 이런 나를 말릴 수 없고 그저 쏟아지는 물살 같은 나에게 속절없이 휘말려 사는 데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말들을 함께 지껄이고 깔깔거리며 미친 짓을 함께 할 수 있는 어린 동생 같은 남자였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괴롭힐 합당한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뀔 수 없는 내 현실에서 임시방편으로 이렇게라도 도망쳐야 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절망사 '선배'는 나에게 안 되는 거였다. 착하기만 그 사람을 나 좋자고 계속해 망가지고 싶어 하는 내 삶에 휘말리게 할 수 없었다.
A와 함께 반쯤 미친 일탈과 반듯한 일상 그 위에서 아슬아슬히 줄타기를 계속했고, 그 시간을 함께하며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먼저 나가떨어져 버린 것은 A 쪽이었다. 어느 날 A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나는 모든 일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기에 A에게 연락을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묵묵부답으로 3일 뒤에서야 연락이 닿아 내 앞에 나타나한다는 말은 개소리였다.
"우리 사이가 너무 가까워져서 조금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는 '으흥' 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A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게 3일 잠수를 탄 이유가 다일까?"라는 질문을 했다. 늘 그렇듯 나는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고, A가 말하는 너무 가까워져서의 범위와 조금 멀어져야겠다는 거리감을 정확히 해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아야 그 선을 지켜줄 수 있고, 그건 나에게 너무 쉬운 일이 었다.
"전에 그 애 있잖아. 내 전 여친 .."
"그 애. 뭐?"
내 말에 머뭇거리던 A는 마치 어려운 비밀을 털어놓는 것 마냥 비장한 눈빛과 말투로 말했다. 전 여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거의 확신하듯 예감했었다.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겠구나.'하고 실은 3일 연락이 되지 않는 그 순간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바였을지도.
"걔랑 있었어."
"왜?"
"힘들다고 연락이 와서 같이 있었어. 너는 뭐든 혼자서 잘하고 걔는 아니니까."
나는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 A를 향해 피식하고 웃었다. 그런 나에게 A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 아무 일도 없었어. 너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아. 하지만 정말 곁에만 있어준거야."
필사적이란, 단어가 어울리겠다. 지레 겁을 먹은 듯 해명하는 A를 바라보며 나는 '아, 지겹다. 인간관계 지겨워.'라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그 때는 감정을 많이 소비하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내가 A를 용서하고 말 상황이나 되던가. 조용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 상황을 정리하자면, 지금 현재 여친인 나의 연락을 받지 아니하시고, 헤어진 전 여친이 힘들다고 연락이 와서 함께 3일을 있었다.라는 거네?"
"맞아. 그냥 내가 필요해 보여서 곁에 만 있었어.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사이가 너무 가까워진 것 같아서 조금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너와 나를 위해서였어."
'아.. 너와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말을 속으로 곱씹는 버릇이 있었다. 일어난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복기하는 것이었다. 유치하게 복수라던가 치졸하게 상대방을 욕을 하기 위함이 아닌 나를 지키는 용도로서만 사용하는 일종에 방어같은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좋은 일도 빠짐 없이 복기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베푼 은혜 역시 절대로 잊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 잠수를 탔다. 고마운 일이네, 아무 일 없었다는 거 믿어 줄게. 하지만 너랑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
"아니 진짜 별일 없었다니까. 이런 일로 헤어지자는 거야? 날 못 믿는 거야?"
"별 일이 있었던, 없었던 내가 알 바 아니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너에게 연락을 했고 그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선택이고 그런 너와 헤어지겠다고 지금 말하는 건 내 선택이고. 어때? 이해하기 쉽지?"
저 말을 끝으로 삐뚜름하게 웃었다. 웃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A와 다른 일로 다퉈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화내는 것 따위가 필요 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아니! 진짜 아무 일도 없었고, 친구가 힘들다고 하는데 같이 있어 줄 수 있잖아!"
A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언성을 높였고 나는 조용히 바라봤다. 주변 사람들이 나와 A를 힐끔거렸지만 A가 어떻게 생각하든 A와 불필요한 언쟁을 더 이상 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A에게 다시 한번 더 상황을 설명했다.
"잘 들어. 그래 친구가 힘들면 같이 있어 줄 수 있지. 그게 남자든, 여자든, 전 여친이든. 상관없어. 하지만 내 연락은 받았어야 했어. 그리고 상황을 나에게 설명해야 했어.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그럼에도 내 연락을 멋대로 안 받은 것은 니 선택. 그런 너와 헤어지겠다고 하는 것은 내 선택. 말이 어려워? 그리고 나보다 그 애에게 네가 더 필요해 보이니 가라고. 자 봐. 내가 너의 사정을 이해 줬잖아. 맞지? 내가 널 욕을 했어. 때리기를 했어? 너와 헤어지고 싶어 하는 나를 너는 이해해야 해."
내 말에 입을 다물고 그저 억울하다는 듯 바라보는 A에게 잠시 침묵을 가지다 나는 "안녕. 잘 지내." 인사를 건네며 돌아섰고, 얼마 뒤 A의 친구들로부터 내가 들은 말은 내가 자신을 얼토당치도 않은 이유로 차버렸다고 말하고 다닌 다는 거였다. 전 여친과 3일 점수 이야기는 쏙 빼고.
그 소식에 나는 웃으며 "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더 이상 A의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그걸 내가 해명까지 할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그걸 믿던 말던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 그렇게 A와의 연애가 끝난 그 이후 누군가와 만나더라도 최소한의 지인만 알게 했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그와 만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나에게 연락이 왔다.
"야야! A 알지 A!"
"알지 모를 리가?"
"걔가 자기한테 아직도 네가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다닌데."
하. 하고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자. A의 존재를 알고 있던 그는 전 후 사정을 듣고 웃을 뿐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어떻게 된 일인지 추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그의 앞에 나를 싸가지가 없고 나쁜 아이라고 말해도 그는 나와 사소하게 다툴 때 나를 둘러싼 것들이 그에게 충분히 나에게 상처를 입힐 무기가 될 수 있었지만 "너희 어머니가 너한테 왜 그러는 지 알겠다."라는 따위의 말로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다.
나를 알고 지낸 시간 단 한번도.
물론, 그가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말로 나를 휘두르려 했다면 진작에 헤어졌을 것이었다. 그런 그가 출간 이후, 작가 소개에 하나가 빠졌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내가 앙칼진 목소리로 "뭐?"라고 하자, 그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귀엽습니다. 다음에 사납습니다.도 넣었어야지."라고... 그 순간 내 눈빛이 사납게 변해 아르르르하며 그의 팔뚝을 물어 뜯어버렸다.
"아야! 맞자나! 사나운거 맞자나! 다들 모르자나! 아프다고!!!"
그의 고통에 찬 비명에 나는 그렇게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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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감정 채널이 있어 한 번 고정되면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그것이 불편한 감정이든, 기쁜 감정이든 계속 그 감정을 느끼며 일종의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엄마 팔자를 딸이 닮는 다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이 버려진 것에 대한 슬픔이 있었고, 나는 그런 주 양육자 밑에서 나 역시 버려질 것 이라는 그 감정에 휩싸여 자랐다.
그 감정이 불안하면서도 늘 느끼던 감정이기에 어쩌면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 했던 것이었을지도. 그 감정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가 '너'를 만나며 이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에게서 버려질 것이라는 생각과 객관적으로 나를 돌이켜 보는 방법을 알게되는 경험을 동시에 겪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선배'에게선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내가 사람이라 칭할 사람이 없었다. 인두겁을 쓴 인간들이었을 뿐.(A외 썰을 풀자면 팝콘 한 통도 모자람.)
그런 내가 '그'를 만나며 굳이 서로가 버리고, 버림을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 한 번 쯤 붙들어 줄 수 있는 가끔 미친짓을 해도 충분히 이해 받을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다 들이밀어도 이해 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그런 사람을 만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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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생각한다.
'너'는 나와 함께 추락해 줄 수 있었을까.
'선배'는 나의 추락을 견딜 수 있었을까.
둘에겐 항상 의문을 가졌다. 그에 반해 '그'는 언젠가는 홀로 될 것을 두려워 해 여전히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하는 나를 붙들고 기꺼이 함께 추락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틀 전 쯤.
출근 길 그가 배롱나무에 꽃이 핀 것을 보고는 나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의 학교 앞 배롱 나무가 이쁘게 피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퇴근 길 그와 어둠 속에서 배롱나무 꽃을 구경했다. 슬쩍 잡은 그의 손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지금의 안온한 날들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그와 나 우리만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