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다

해체(解體)의 철학

by자크슈타인


"모든 삶이란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일련의 과정일 테지만, 그중에서도 중대한 타격은 그 파괴력을 단숨에 발휘하지 않는다. 외부의 타격엔 내부의 또 다른 타격이 뒤따르게 되는데, 이를 자각했을 때엔 이미 늦어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무너져 내리다 (The Crack-up)」 (『재즈 시대의 메아리』 수록)


삶의 비가역성을 보여주는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에세이에 있는 문장이다. 서른아홉의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붕괴를 기록한 글. 영미권에서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이자 재즈 시대의 총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는 단편소설 《The Cut-Glass Bowl》에서 인생을 ‘금 간 접시’에 비유했다. 겉보기엔 멀쩡하다. 손님상에는 못 올려도 밤참 비스킷쯤은 담을 수 있다. 다만 두 번 다시 이전의 접시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가 말한 타격에는 두 개의 레이어가 있다. 밖에서 오는 타격은 요란하다. 그 순간에는 무척 아프지만 그래서 오히려 견딜 만하다. 무서운 것은 그다음으로 외부의 타격에 뒤따르는 내부의 타격은 소리 없이 진행되다가, 자각했을 때엔 이미 늦어서 다시는 회복하기 어려워진다.


시차를 두고 따로이 찾아오는 밖과 안에서의 타격.


몇 해 전,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대기업과의 갈등으로 회사가 휘청였을 때 그것은 외부의 타격이었다. 밤을 새워 대응했고, 버텼고, 다행히 극복해 냈다. 문제는 그 뒤에 찾아왔다. 어느 날부터 일에 대한 회의가, 이십 년 넘게 단단하다고 믿었던 내 안의 어딘가에서 가는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던 일은 그대로인데 그 일을 하는 이유가 흐려지는 것. 그것이 바로 내부의 타격이었던 것 같다. 피츠제럴드의 말대로, 내가 그것을 느꼈을 때엔 이미 꽤나 진행된 뒤였다.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내부의 타격에 대한 자각. 무언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 균열이 삶의 중심을 관통한 뒤였다.


젊은 날의 우리는 삶을 ‘쌓아 올리는 구축의 과정’이라 믿는다. 관계를 맺고, 자리를 잡고, 내 이름 석 자로 단단한 명망을 세우는 것만이 최선의 모습이라 여긴다. 그러나 생의 반환점을 훌쩍 돌아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불편한 진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삶이란 실은,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일련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지금, 그래서 묻게 된다. 나의 해체는 어디쯤 왔느냐고.

그런데 '해체'라는 단어를 얘기하니 다른 한 사람이 떠오른다.


-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


질 들뢰즈, 미셸 푸코와 함께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이자, 전통 서구 철학의 근간을 뒤흔든 '해체주의(Deconstruction)'의 창시자로 탈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장으로 불리는 사람.


공교롭게도 피츠제럴드의 ‘breaking down’ 이나, 데리다의 ‘déconstruction’ 이나, 우리말로는 똑같이 '해체'라 할 수 있지만, 두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피츠제럴드의 ‘해체’가 붕괴되어 무너져 내림이라면, 자크 데리다는 평생 자신의 ‘해체’는 결코 파멸이나 파괴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에게 해체란 하나의 절대적인 중심,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견고한 질서의 허구성을 밝혀내는 일이다. 중심이 무너질 때 비로소 주변부에 밀려나 있던 작은 목소리와 숨겨진 의미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서구 사상을 흔든 유명한 통찰 하나는, 서구 지성사가 붙들어 온 '절대적 진리', '순수함' 등 구조의 중심이라 믿어온 것들의 허상과 모순을 폭로하는 방식이었다. 그것들이 실은 중심이 아니었거니와 중심은 구조를 지탱하는 부동의 축이 아니라, 우리가 불안을 견디려고 세워둔 가정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심이라 생각했던 것이 그동안 무엇을 밀어내고 무엇을 감춘 채 서 있었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기존 체계를 무조건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것, 즉 건물을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를 다시 제대로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중년의 날들이 문득 헛헛해지는 이유를, 그의 해체주의로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젊은 날의 나는 내 삶의 중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회사, 실적, 매출, 성공.. 이런 것들이 내 삶의 축이었다. 그런데 외부의 타격이 오고 내부의 타격이 뒤따르면서 드러난 것은, 그 축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이 중심축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심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중심이라 믿었던 자리가 실은 중심이 아니었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한 해방감도 느껴진다. 끝없는 시지프스의 굴레에서 일단은 벗어난 느낌이랄까. 중심을 잡는 축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원래 중심이 아니었던 거라면, 난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잘못 해독한 설계도를 이제야 제대로 읽게 된 것뿐일 테니 말이다.


“흔적(trace)” - 데리다의 철학에서 이는 서구 형이상학의 '순수하고 완전한 실재(본질)'라는 개념을 해체하기 위한 핵심 개념으로 원래의 존재나 순수한 의미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차이와 지연(차연, Différance) 속에서 남겨진 자국을 의미한다.

IT 업계에서 트레이스(Trace)는 주로 복잡한 시스템의 실행 흐름을 추적하는 옵저버빌리티(관찰가능성)의 핵심 요소이다. 이에 따른 분산 추적(Distributed Tracing) 기능은 시스템에서 요청(Request)이 지나가는 경로와 처리 시간을 좇으며 보여주는데, 이는 시스템의 병목이 일어나는 지점이나 오류가 발생한 지점과 원인을 빠르게 찾아내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하지만 난 평생 일에서의 tracing 에만 신경 쓰느라 내 인생의 흔적을 추적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어떤 것도 순수하게 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재에는 지나간 것의 자국이, 모든 나에게는 내가 아닌 것들의 자국이 새겨져 있다.


살아온 인생을, 맺어왔던 관계를 돌이켜보니 이 말이 사무친다.



내 서랍에는 삼십 년 넘게 간직해 온 편지 묶음이 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년여간의 시간이 쌓인 소인. 그 파란 잉크 자국들. 디지털이 생경했던 아날로그 시대에 맞이한 20대 초입의 시절과 군복을 입고 있던 시기의 나에게 닿았던 글들이다. 얼마 전 그 편지들을 오랜만에 꺼내 읽으며 알게 되었다. 종이는 낡고 빛이 바래도 그 필체와 내용은 변함없이 그때의 그 순간 그대로라는 것. 그 후 삼십 년 간 보지 않았었지만 그 편지가 남긴 흔적들은 종이 위에 그대로만 있지는 않았었다는 것을 말이다.


젊은 날, 나는 세 번의 사랑을 했다.


제법 지독한 사랑이었고, 비슷한 시간대에 얽혀있던 세 사람은 내 안에 각기 다른 세 개의 흔적을 남겼다. 하나는 말투로 남았고, 다른 하나는 침묵하는 버릇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노래가 되었다. 어떤 흔적은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다시 도지고, 어떤 흔적은 어느 골목, 혹은 어느 냄새 앞에서 문득문득 다시 나타났다. 사랑이 끝나는 자리마다 외부의 타격이 있었고, 진짜 타격은 피츠제럴드의 말처럼 늘 나중에, 안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라는 인간은 그렇게 겹겹의 흔적들로 고쳐 쓰이고 덧쓰이며 지금의 버전이 된 것일 게다.


그리고 그 세 번의 흔적 가운데 하나의 주인은,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보니 부고를 들었던 날보다, 그 사람의 흔적이 내 안에서 여전히 마르지 않았었다는 걸 깨닫는 날이 더 아프다. 평생 이렇게 아플 줄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답장할 곳이 사라진 흔적을 안고 산다는 것, 그것이 내가 겪는 가장 조용한 내면으로부터의 타격이다. 외부의 타격과 내부의 타격이 합일하여 끝내 한 몸이 되어버린 걸까.


상실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안에 남긴 흔적을 이제 오롯이 나 혼자만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데리다는 말했다. 모든 관계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언젠가 둘 중 하나가 먼저 떠난다는 가능성 위에 세워진다고.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그를 안고 살아갈 몫을 미리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말이다.


순진하게 믿었었다기보다는, 그래도 영원한 사랑을 꿈꿨던 젊은 날에 이 말을 들었다면 나라면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별이 예정되어 있기에 지금의 인연이 값진 것이고, 언젠가 홀로 보게 될 흔적이기에 오늘 함께 만드는 흔적이 귀한 것임을. 이미 세상에 없는 그 사람도, 나를 통해 여전히 조금은 이 세상을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임을 말이다.


"나의 해체는 지금 어디쯤까지 진행된 것일까"


절반쯤 남았나, 이미 삼분의 이쯤 무너졌나.. 그러나 해체가 부수어지는 파괴가 아니라 진짜 중심을 제대로 찾기 위한 과정이라면, 인생의 어디쯤 왔느냐가 아니라 인생을 얼마나 깊이 보게 되었느냐로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금이 간 접시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금이 가고 나서야 접시는 비로소 제 단면을 제대로 보여준다. 어떤 흙으로 빚어졌는지, 어떤 세기의 불을 통과했는지, 어디가 조밀하고 어디가 헐거운지, 금이 가기 전에 온전할 때는 결코 볼 수 없던 것들이 서서히 보인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해체’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일도, 관계도 서서히 지금과는 다르게 변해갈 것이다. 내게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고, 어떤 것들은 피츠제럴드의 금이 간 접시처럼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과정을 무너져 내리는 붕괴의 과정이 아니라 다시 읽는 리셋의 과정으로 살아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삶의 절반을 지나며 겪는 해체는 실패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가두고 있던 완고한 성벽이 비로소 열리는 순간일지 모르기에.

‘해체’되어 무너지는 자로서가 아니라, ‘해체‘를 통해 진정한 나 자신과 내 삶을 다시 읽어내고 재구조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