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으로 끝맺는 기도

보궐진언의 철학

by자크슈타인


불교의 의식에는 공양을 올린 뒤 마무리로 외우는 네 개의 진언이 있다. 이른바 사대진언(四大眞言).


순서가 있다. 먼저 이 공양이 삼보와 온 중생에게 빠짐없이 닿기를 비는 보공양진언(普供養眞言). 다음은 그 공덕을 나 혼자 갖지 않고 법계의 모든 존재에게 두루 돌리는 보회향진언 (普回向眞言). 그다음은 세운 서원들이 헛되지 않고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비는 원성취진언(願成就眞言). 그리고 마지막의, 보궐진언(補闕眞言)이다.


“Om huru huru svā-mukhe svāhā”

("옴 호로호로 사야모케 사바하")


‘보궐’은 빠진 것(闕)을 채운다(補)는 뜻이다. 정성껏 의식을 올렸으나 혹시라도 절차가 빠졌거나, 마음이 흐트러졌거나, 나도 모르게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그 빈 데를 채워 주소서. 그렇게 비는 것으로 의식은 끝난다.


처음 이 순서를 보았을 때 조금 의아함이 들었다. ‘회향’이야말로 불교 수행의 대미가 아닌가. 내가 지은 공덕마저 남에게 돌려버리는, 그 아름다운 ‘내려놓음’으로 끝나야 완결성이 있을 것 같은데.. 왜 마지막 자리가 회향이 아니라, 이 소박하고 겸연쩍은 진언의 몫이 되었을까.


하지만 곱씹을수록 이 사대진언의 배치에 심오함을 느낀다. 완성의 선언이 아니라, 부족함의 고백으로 끝맺음을 한다는 것.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끝맺음은 완성의 선언이다. 프로젝트는 완료 보고로 끝나고, 공연은 커튼콜로 끝나고, 경기는 승리의 세리머니로 끝난다. 다 이루었다, 다 해냈다, 이상 없다. 끝이란 모름지기 그렇게 자신 있게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워 왔다. 흠결이 드러나는 순간 끝은 미뤄지고, 그래서 우리는 끝맺기 위해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어 수정하고, 해결할 방법이 없거나 시간이 부족하면 그 흠결을 깊이깊이 감춰둔다. 상대방이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혹시라도 발견한다면 뭐라고 둘러댈지 핑곗거리를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 오래된 의식은 정반대의 순서를 말한다.

다 이루었다는 완성과 성취의 주문이 아니라, 아마 무언가 빠뜨렸을 것이라는 겸허한 마음. 완벽했다가 아니라, 나의 정성에도 분명 모자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모자람을,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모자람까지, 부디 채워 주소서…


의식의 설계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무언가를 빠뜨리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아예 의식의 구조 안 맨 마지막 자리에, 실수를 위한 방 한 칸을 미리 지어 두었다. 완벽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끝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패배의 문장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자신감의 문장이 아닐까. 자신의 모자람을 미리 셈에 넣을 줄 아는 자만이, 두려움 없이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빈틈을 감추려고만 드는 세상에서 이 진언이 유독 사무치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확히 그와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력서에는 빛나는 성취만 적는다. 보고서에는 돋보이는 성과만 담는다. SNS에는 자랑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만 올린다.


지금 조부와 증조부까지, 4대에 걸친 가문의 내력을 자랑하다가 본인도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실이 드러나 호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 기록과 그 시절의 기사나 인터뷰, 심지어 풍문으로 떠돌던 고종 황제의 독살설까지 얘기하며 친일의 행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시대에 살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그럼 ‘난 조선 사람이오’ 하고 말할 수 있었겠냐면서 정확히 검증된 사실이 아닌데 후손인 그녀를 욕하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 한다. 또 다들 몰라서 그렇지 자신들도 증조 고조까지 올라가면 적당히 친일한 선조들이 많을 거라며 그녀를 두둔하고 자위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사태, 그녀를 비판하고 꾸짖는 마음들이 큰 이유의 본질은 그러한 시대를 살았던 조상이 그 정도 위치에 있었다면 일제와 어떤 관계에 있었을지 돌아보고 스스로 조심하는 겸허한 자세가 결여된 채로 그동안 살아왔을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조상으로 인해 누렸을 호사는 그대로 누리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겉으로 그리 드러낼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살아왔었기를 바라는 마음.


그저 4대째 의사 가문이었던 지체와 부를 모두 가진 격식 있는 양반 가문의 후손임이 자랑스럽기만 했을 철없는 자랑질이, 그래서 지금 맞고 있는 후폭풍이 안쓰럽기까지 한 이유이다. 그 부모와 또 그 부모의 부모가 집안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교육해 왔을지가 미루어 짐작되기 때문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


우리 슬롯에는 ‘자애‘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저 사례는 ‘자애‘만 하고, ’자중‘하지 못한 사람이 맞을 수 있는 역풍이자 리스크를 잘 보여준다.


부끄러운 과거, 흠결이나 부족함은 그 자체가 리스크로 인식되고, 모자람을 고백하는 일은 어리석음이 된 시대. 우리는 저마다 성공의 선언들을 전시하며 살지만, 정작 그 뒤에서는 내가 빠뜨린 구멍들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나도 모르게 지나쳐 버린 구멍들이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담고.


일을 하며 수없이 겪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검토하고 또 검토한 제안서에서도, 분명히 조견표를 작성하며 RFP와 비교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생각했지만, 제출하고 돌아서면 꼭 하나씩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오탈자 하나, 빠뜨린 항목 하나, 미처 헤아리지 못한 상대의 사정 하나.

완벽을 기한다는 것과 완벽하다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메울 수 없는 도도한 강이 흘렀다. 그 강 앞에서 자바카라으로 밤을 지새운 날들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보궐진언은 마치 그 강가에 선 사람에게 건네는 오래된 위로인 것만 같다. 너의 정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빠뜨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그러니 자바카라 대신, 그 빈 데를 채워 달라고 기원하는 겸손을 배우라고 말이다.


회향보다 나중에 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순서의 뜻이 다시 보인다.

베풀고(공양), 돌리고(회향), 이루어지기를 빌고(성취) - 여기까지는 바깥을 향한 마음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마음들을 다 낸 뒤에, 의식은 마지막으로 내 안을 돌아보게 한다. 그 베풂에조차, 그 돌림에조차, 완벽한 성취가 아니라 어딘가 빈 곳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장 큰 내려놓음인 회향보다도 나중에 오는 것이 제 허물의 인정이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순서가 품은 가장 깊은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다 주는 일보다 어려운 것이, 자신이 스스로 모자란 존재임을 시인하는 일이기에.


나이를 먹는다고 꼭 철이 드는 것은 아니더라는 걸 요즘 자주 실감한다. 아는 것이 늘수록 아는 척이 늘고, 경험이 쌓일수록 임기응변이 늘고 변명은 더욱 교묘해진다. 젊은 날에는 몰라서 빠뜨렸다면, 이제는 알면서도 그냥 지나친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에게 보궐의 기도가 더욱 절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고 지은 허물만이 아니라, 알고도 모른 척한 허물까지, 그 모든 빈 곳을 채워 주소서..


하루를 이 진언처럼 닫아 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오늘도 다 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해야 할 말을 삼켰고,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뱉었고, 살펴야 할 마음 하나를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아는 허물은 여기까지지만, 모르는 허물은 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 빈 데가 부디 채워지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잠드는 밤은, 완벽했다고 자만하며 감는 눈보다는 조금 더 편안하지 않을까.


이 글에도 어떤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미처 닿지 못한 생각, 잘못짚은 대목.. 예전 같으면 그런 것들이 두려워 발행 버튼 앞에서 지금 누를지 말지 망설였겠지만, 오늘은 저 오래된 진언을 빌려 이렇게 맺는다.


정성을 다했으나 그래도 있을 이 글의 부족함을, 기꺼이 읽어 주신 당신의 너그러움이 마저 채워 주시기를.


"옴 호로호로 사야모케 사바하"

(“Om huru huru svā-mukhe svāhā“)





- 옴 (Om): 우주의 신성한 소리이자 진언의 시작을 알리는 감탄사

- 사바하 (Svāhā): 소원이 원만하게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침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