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취미는 어렵다

워해머를 아십니까

by제이스의 시선


아들 육아로 유명한 분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아이가 게임을 좋아한다면 부모도 그 게임이 뭔지는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콘텐츠 수위를 판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게임의 특성을 알아야 아이와 대화도 되고 언제 그만하라고 할지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스를 깨야만 세이브가 되는 게임이라면, 그 구조를 감안해서 시간을 정해야 한다는 식이다.


PC방과 스타크래프트 세대인 나로서는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빠진 것은 훨씬 더 거대한 세계였다.


시드니에서 시작된 것

워해머 40K. 들어보셨는지.

대부분 모를 것이다. 나도 이제 겨우 알아가는 단계다. 시작은 2024년 초 시드니였다. 여행 마지막 날, 캐리어를 맡겨두고 시내를 걷다가 워해머 매장을 발견했다. 통유리 안으로 멋진 미니어처들이 보였다.

아들이 흥미로워해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비행기 시간 때문에 직원과 몇 마디 나누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싱가포르로 돌아와서도 아들은 계속 워해머 얘기를 했다.

다행히 싱가포르에는 취급 매장이 많았고, 그중 차이나타운의 해머하우스가 무료 체험도 가능하다고 해서 예약했다.

그 뒤로 차이나타운에 갈 일이 있으면 해머하우스는 무조건 들르는 코스가 됐다.


처음 방문했을 때 스탭분이 우리에게 미니어처를 하나씩 공짜로 주며 색칠해보라고 했다.

색칠을 마치니 다락방 같은 위층으로 안내했는데, 게임 테이블이 4~5개 있는 공간이 나왔다.

스페이스 마린과 티라니드 유닛으로 게임 플레이를 배웠다. 나도 재밌었다. 이런 보드게임은 처음이었다.

그날 작은 티라니드 세트를 하나 사왔고, 아들은 혼자 조립하고 색칠하며 레고와 함께 가지고 놀았다.


코덱스, 그리고 진짜 시작

알아보니 이 취미는 초등학생이 하기엔 어렵고 비싼 편이었다. 그래서 그냥 지켜만 봤다.

그러던 어느 날 워해머 바카라이 사고 싶다고했고, 해머하우스에 갔던 날 티라니드 코덱스를 하나 사줬다. 티라니드 세계관과 미니어처별 능력치, 게임 룰이 적힌 바카라이었다.

아들은 코덱스를 읽으며 세계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차드 서점에서 워해머 특집전을 만났다. 코덱스뿐 아니라 온갖 소설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렇게 방대한 세계관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직 아들이 읽기엔 어려운 바카라들도 있어 고르고 골라, 얼티밋 가이드 한 권을 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게 진짜 시작이었다.


미션을 걸고 스타터 세트를

얼티밋 가이드를 밤낮으로 읽던 아들은 실제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게임을 하려면 미니어처도, 코덱스도, 색칠할 물감과 붓도 있어야 했다. 알면 알수록 비싸고 복잡한 취미였다.


한국에는 워해머 매장이 적다는 걸 안 아들은 싱가포르를 떠나기 전 스타터 세트를 꼭 사야겠다고 했다.

그냥 사줄 수는 없어서 운동 관련 미션을 걸었다. 꽤 어려운 목표였다.

솔직히 실패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했다. 이 정도로 좋아하는 걸 안 사주고 한국 가는 건 우리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미션을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날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첫 게임, 그리고 첫 패배

스타터 세트는 싱가포르에서 조립하지 못했다. 이삿짐을 싸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 말 한국에 와서, 정리도 안 된 집에서 아들은 스타터 세트를 조립했고, 우리는 첫 워해머 40K 게임을 시작했다.


아들은 코덱스와 가이드를 거의 외울 정도로 봤기에 룰과 전략을 훤히 꿰고 있었다. 나는 첫 판에서 완패했다.

다음 판엔 AI의 도움을 받아 전략을 세우고 겨우 이겼다. 재밌었다.

왜 해외에 워해머 팬이 그렇게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아들과 대화하기 위해 나도 시간을 내서 공부한다.

나는 영어 원서를 한국어바카라처럼 술술 읽을 수는 없으니 아들의 워해머 바카라을 보면서 유튜브와 AI의 도움을 받는다.


바카라을 읽다가, 밥을 먹다가, 산바카라을 하다가 아들은 자주 워해머 얘기를 꺼내는데,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척을 하고 질문을 하면 무척 좋아한다.

"오, 공부했네?" 하면서.


아들이 쓴 소설

어느 날 아들이 워해머 세계관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다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읽어봤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이걸 좀 더 의미 있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찾아보다가, 공식 소설가 지원은 나이 제한이 있지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컨테스트 몇 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들에게 앞으로 워해머를 더 재밌게 즐길 방법을 프레젠테이션해줬다.

소설을 써서 컨테스트에 도전하는 것뿐 아니라, AI로 그 소설을 팟캐스트나 영상으로 만들면 더 재밌을 거라는 제안도 곁들였다.

지금 아들은 작은 컨테스트 하나에 도전하고 있다.


신논현의 운명 같은 뉴스

한국에 매장이 없다 보니 여행 갈 때마다 워해머 매장을 찾아다닌다.

지난 5월 이탈리아에서도 아들은 로마 매장을 찾아 꼭 가자고 했다. 9월 영국 여행에서는 워해머 본사가 있는 노팅엄에도 갈 예정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 운명 같은 뉴스를 만났다.

게임즈워크샵 코리아가 공식 진출하며 신논현역 앞에 한국 첫 매장을 낸다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영국 공식 사이트에서 비싼 달러로 결제하고 배송비까지 내며 바카라과 카지노 게임을 구하던 우리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오픈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사람이 별로 없겠거니 했는데, 예상과 달리 많았다.

오픈 첫날엔 대기 번호가 엄청 길었다고 한다. 매장 규모와 구성도 싱가포르나 로마 매장보다 컸다.

아들은 그 어떤 테마파크보다 설레하며 매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집에 가는 길에 "너 나중에 여기서 알바하면 되겠다" 했더니, 아들도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동의했다.

얼마 뒤 학교에서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활동이 있었는데, 아들은 영국 게임즈워크샵 본사에서 작가이자 캠페인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적었다.


부러운 몰입

아들의 워해머 사랑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카라도, 음악도 온통 워해머뿐인 아들과 가끔은 균형을 지키자며 실랑이도 한다.

비싼 미니어처를 함부로 다루는 것 아니냐며 다투기도 하고, 보드게임 전략을 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이렇게까지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돌아보면 나와 아내가 이 정도로 무언가에 빠져본 적이 있었나 싶어서 더 그렇다.


매장 스태프에게 들으니 워해머 팬들도 저마다 좋아하는 지점이 다르다고 한다. 조립과 색칠을 좋아하는 사람, 보드게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 세계관을 좋아하는 사람.

아들에게 물어보니 다 좋다고 한다.

조립하고 색칠할 때는 몰입하는 게 좋고, 게임할 때는 전략과 주사위 굴리는 재미가 있고, 세계관은 읽고 상상하는 게 재밌고, 그걸 글로 쓰는 것도 좋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할 말이 있을까. 아내와 나는 열심히 응원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잠깐씩 워해머 바카라을 읽는다. 아들이 가끔 숙제 검사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