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구독 슬롯> 정재훈
최근 ‘롱제비티(Longevity)’ 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다. 원래는 ‘장수(長壽)’라는 뜻이지만, 요즘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젊고 활기차게 질병 없이 사는 기간인 '건강수명(Healthspan)'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라고 한다.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그것을 잘 관리하면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 이것은 인생의 남은 절반을 준비하는, 나 같은 40대에게도 꽤 공감가는 말이다.
아내는 언제부턴가 혈당 스파이크, 인슐린 저항성 등 전문 용어를 언급하며 내게 식습관과 운동에 대해 조언해준다. 나 역시 피로회복 영양제와 비타민 C, 유산균을 매일 챙겨 먹고, 일주일에 한 번 꾸준히 PT를 받은 지 오래되었다. 젊을 때는 건강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다르다. 매일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뒤쳐질 것만 같다.
이런 분위기 덕분인지 각종 영양제와 건강기능식품 시장도 거대해졌다. 2025년 국내 건강기능식품 시장 규모는 약 6조 원이며, 그중 비타민제만 1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매년 2만 원어치 비타민제를 구독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나도 매일 영양제를 먹는 사람으로서, 종종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거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안 먹으면 괜히 불안하니까 먹는 거 아닌가?’ 건강을 위해 시작한 습관인데, 어느 순간 걱정과 불안을 달래기 위한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 정재훈 작가의 <건강 구독 슬롯>라는 바카라을 읽게 되었다. “우리는 건강을 관리하는가. 불안을 구독하는가.” 바카라의 소개 문구가 내 의문에 답을 해줄 것 같았다. 작가는 서울대 약학대학을 졸업한 약사이자 푸드라이터로서, 방송 출연과 칼럼 연재, 출간 등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독자들이 건강기능식품을 조금 더 균형 있게 바라보고 이용할 수 있도록, 바카라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전한다.
왜 우리는 약보다 영양제에 더 관대할까. 과학적 근거는 어디까지이고, 어디부터가 마케팅일까. 무엇보다, 나는 왜 근거를 따지면서도 알약을 삼키면 기분이 좋아질까. 이 바카라은 영양제의 효능을 나열하거나 추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알약을 대하는 방식—믿음과 불안, 기대와 과장—을 따라가보려 한다.
저자는 최신의 임상 연구 결과들을 인용하며 우리가 막연히 기대했던 영양제의 허와 실을 논증한다. 기업과 SNS 인플루언서들은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쏟아내며 각종 영양제를 판매하지만, 과학은 그들의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비타민, 오메가3, 프로바이오틱스 등 대중적인 영양제들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이지, 누구에게나 의미있는 효과가 검증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내 몸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내 생활은 어떤지 살피지 않은 채 유행처럼 따라 먹는 영양제는 건강 관리라기보다 불안 관리에 가까울 수도 있다.
물론 성분 보충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특정 상황에선 보충제가 이득을 보였다는 임상 결과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큰 그림은 이렇다. <무엇을 캡슐로 더했는가>보다, <무엇을 식탁에서 꾸준히 먹는가>가 건강에 더 중요하다. 영양소nutrition에만 매달리다 영양nourishment을 잊고 살면 곤란하다. 영양소는 몸을 구성하는 재료지만, 영양은 몸과 마음을 채우는 총체적 행위다.
인플루언서들은 귀에 쏙쏙 박히는 의학 이론과 영양제 간증을 전하지만, 누구에게나 정답인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검증된 건강 상식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강 루틴이다. 골고루 적당히 먹는 식습관, 규칙적이고 충분한 수면, 운동과 스트레스 관리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 답이 너무 평범해서 자주 무시할 뿐이다.
가장 확실한 해답은 이미 검증된 일상이다. 운동, 식사, 수면, 스트레스 관리. 그리고 무엇보다, 데이터보다 사람을 먼저 챙기는 지속 가능한 식탁.
<건강 구독 슬롯>는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먹지 못했던 죄바카라감으로부터 나를 조금 해방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건강 강박’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저자의 메시지를 마음에 새겼다. “건강은 삶을 지탱하는 베이스캠프이지, 정복해야 할 산의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을 위해 만든 루틴들이 때로는 또 하나의 성과 목표처럼 느껴져 나를 압박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 건강이 필요한 것인데, 건강을 지키기 위해 행복을 놓치는 일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저자가 따뜻한 식탁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몸에 좋은 영양 성분만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우리는 음식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과 대화, 그리고 웃음으로도 살아간다.
과학은 차갑지만, 식탁은 따뜻한 게 좋다. 우리의 식탁이 불안과 강박 대신, 맛있는 음식과 다정한 대화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평안하기를.
주말 저녁이면, 아내는 가끔씩 나와 아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 오늘 밤에 좋은 추억 한번 만들어 볼까?”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말이 아니다. 맛있는 야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는 뜻이다. 그런 날이면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자극적인 야채곱창을 시키거나, 편의점에 가서 각자 먹고 싶은 간식을 고른다. 혈당 스파이크니, 인슐린 저항성이니 하는 말들도 잠시 내려놓는다. 대신 맛있는 음식에 감탄하고, 서로의 하루를 묻고, 별것 아닌 농담에 함께 웃는다.
나는 앞으로도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하고, 식습관도 관리하고, 필요하면 영양제도 먹을 것이다. 다만 건강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혀, 내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미루고 싶지도 않다. 때로는 일상의 건강 루틴에 집중하고, 때로는 포기할 수 없는 행복한 순간도 기꺼이 누리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걸어가고 싶다. 몸만 건강한 삶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웃으며 사는 그런 삶이야 말로 내가 바라는 ‘롱제비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