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메모리 공급국에서 피지컬 AI 실험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 6월 5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다시 한국에 왔다. 지난해 10월 ‘깐부치킨 회동’ 이후 약 7개월 만의 재방한이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의전 방문이 아니었다. 6월 5일 입국해 9일 출국한 닷새 일정 동안 SK, 삼성, 현대차, LG, 네이버, 두산, 정부, 대학, 스타트업, 게임업계까지 두루 만났다. 현재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5조 달러를 넘어서며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앞선 세계 최상위 기업이다. 그런 기업의 CEO가 1년도 안 돼 같은 나라를 두 번 찾았다는 것은 한국의 전략적 위치가 달라졌다는 신호다.
지난해 방문이 APEC과 재계 이벤트에 얹힌 상징적 행보였다면 이번 방문은 한국을 겨냥한 사업 출장에 가까웠다. 로이터는 젠슨 황의 두 번째 방한이 한국의 AI 산업 내 위상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특히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AI 칩에 필요한 메모리의 약 70%를 공급하고, 제조·로봇·자동차·게임·플랫폼 산업을 함께 갖춘 나라로 평가됐다. 이제 한국은 엔비디아 입장에서 단순한 부품 공급처가 아니라 AI를 현실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실험장이자 AI 생태계 확산을 위한 파트너로 격상된 것이다.
젠슨 황의 동선을 보면 엔비디아의 전략 지도가 보인다. 그는 한국에 HBM을 사러 왔다. SK하이닉스와는 다년간 기술 협력을 맺고 차세대 AI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개발을 확대하기로 했다. 그는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가장 큰 메모리 파트너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말했고 현재의 생산능력 확대만으로도 AI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삼성전자와도 HBM4E, HBM5, 차세대 파운드리, 자율주행 칩 협력을 논의했다. 즉 한국 반도체는 더 이상 범용 메모리 공급자가 아니라 엔비디아 로드맵에 맞춰 설계되는 맞춤형 AI 부품 공급망으로 들어가고 있고 차세대 반도체를 함께 설계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동시에 그는 팔러 왔다. 방한 중 공개된 ‘네 가지 선물’은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 서버용 CPU 베라, AI PC용 RTX 스파크, 휴머노이드 로봇용 엣지 컴퓨터 젯슨 토르였다. 이 네 제품은 모두 한국 기업과 연결된다. 베라 루빈은 AI Factory라는 새로운 사업 수요를 키우고, 베라는 서버 CPU 시장에 대한 도전이며, RTX 스파크는 업무용 AI 전용 PC와 게임 시장을 겨냥하고, 젯슨 토르는 로봇과 제조 현장의 피지컬 AI를 향한다. 한국은 이 제품들의 부품 공급자이자 초기 고객이면서 동시에 함께 시장을 키우는 협력사가 된다. 즉, 함께 새로운 AI 시장을 키우러 왔다는 점이다. 엔비디아는 한국에 AI 기술센터를 세우고 AI 연구자와 로봇 공학자를 채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와의 면담에서는 베라 루빈 최우선 공급, GPU 26만 장의 차질 없는 공급, GTC 코리아 개최, 엔비디아 AI 테크센터 설립 등이 논의됐다. 과기부 장관은 한국이 LLM에서는 뒤처졌을지 몰라도 피지컬 AI에서는 세계를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엔비디아가 이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기업별 그림도 선명하다. SK는 HBM 공급자이면서 SK텔레콤을 통해 기가와트급 AI 인프라 사업자로 변신하고 있다. 네이버는 각 세종 데이터센터를 AI 팩토리로 확장하고 이를 글로벌 사업화하려 한다. LG는 로봇, 자율주행, 데이터센터 냉각·전력 설계에서 엔비디아와 접점을 넓혔다. 현대차는 자율주행, 로봇, AI 제조를 묶어 새만금 AI 밸리 구상을 내세웠다. 두산은 로봇, 전력, 첨단 소재를 통해 피지컬 AI와 AI 팩토리 인프라에 연결된다. 각 기업들의 이같은 AI 사업 전략에 엔비디아가 힘을 보태고 있다.
이번 방한의 핵심 키워드는 피지컬 AI임과 동시에 소버린 AI다. 피지컬 AI는 AI가 문서와 화면을 넘어 공장, 자동차, 로봇, 물류, 의료 현장에서 실제 세계를 인식하고 움직이는 기술로 엔비디아의 차세대 먹거리이다. 소버린 AI는 자국의 인프라, 데이터, 인재로 AI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으로 한국 정부가 강조하는 국가 정바카라이다. 한국은 초거대 언어모델 경쟁에서는 미국 빅테크보다 늦었지만 제조 현장과 산업 데이터에서는 강점이 있다. 반도체 공장, 자동차 공장, 조선소, 물류센터, 병원, 게임·콘텐츠 산업은 모두 AI가 현실 세계를 배우는 훈련장이 될 수 있다. 또한, 한국식 소버린 AI를 전세계에 공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래서 젠슨 황의 치킨, 삼겹살, PC방, 야구장, 예능 출연은 단순한 팬서비스가 아니다. 엔비디아는 한국의 경영진만 설득한 것이 아니라 개발자, 게이머, 스타트업, 대학 연구자, 대중을 함께 설득하려 했다. AI 인프라는 정부 예산과 기업 투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를 실제로 쓰고, 개발하고, 실험하고, 문화로 받아들이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젠슨 황은 한국 대중에게 엔비디아를 ‘칩 회사’가 아니라 한국의 AI 미래를 함께 만드는 동맹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단, 이같은 선물 보따리에는 청구서가 항상 따라온다. 그런만큼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있다.
첫째, 인프라다. GPU 26만 장을 들여오고, 베라 루빈 기반 AI 팩토리를 구축하려면 전력, 냉각, 부지, 송전망, 자본이 필요하다. 정부는 2026년 GPU 확보 사업에서 네이버클라우드, 삼성SDS, 엘리스그룹을 선정하고 베라 루빈 2,016장, B300 7,688장 등 총 9,704장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숫자는 커보이지만 이를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여러 극복할 과제가 있다. 즉, AI 팩토리는 서버만 사면 끝나는 사업이 아니라 부동산, 전력, 냉각, 네트워크, 보안, 운영 소프트웨어가 모두 맞물리는 산업이다.
둘째, 종속 관리다. 엔비디아의 GPU와 플랫폼 안에 갇혀버리면 종속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GPU를 몇 장 확보했는가”가 아니라 “그 GPU로 무엇을 학습시키고, 어떤 추론 서비스를 만들며, 어떤 산업용 AI 제품을 수출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메모리를 팔고 GPU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AI 시대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 이런 인프라를 이용해 AI를 구동하는 최소 단위인 토큰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셋째, 사람이다. 엔비디아 AI 테크센터는 기회이지만 동시에 인재 쟁탈전의 시작이다. 업스테이지, 트웰브랩스, 루닛, 프렌들리AI, 노타AI, 래블업, 마키나락스 같은 스타트업들이 엔비디아 생태계와 연결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좋은 인재가 모두 글로벌 빅테크의 하청형 파트너로 흡수되면 국내 독자 생태계는 약해진다. GPU 도입 속도만큼 연구자, 엔지니어, 로봇 개발자, AI 제품기획자, 데이터 엔지니어를 키우는 속도도 따라가야 한다.
이번 방문은 한국의 위상이 올라갔음을 보여준 반길만한 소식이다. 과거 한국은 엔비디아에 메모리를 공급하는 나라였다. 이제는 메모리, AI 클라우드, 로봇, 자동차, 제조 데이터, 콘텐츠, 의료 AI를 함께 제공할 수 있는 나라로 도약한 것이다. 젠슨 황이 “한국에 큰 기회가 오고 매우 바빠질 것”, "AI 산업 내 한국이 세계 1위 기여 국가이고 미중에 이어 AI 분야 세계 3위 국가라고 생각한다."라고 한 말은 덕담이 아니라 한국의 현주소를 말한 것이다. 엔비디아는 한국을 필요로 하고, 한국도 엔비디아를 필요로 한다.
이제 앞으로의 숙제는 이 협력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다. 엔비디아는 팔 것과 살 것을 명확히 들고 왔다. 한국은 이제 무엇을 함께 키워서 세계에 팔 것인지 답해야 한다. HBM을 더 많이 파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형 AI 팩토리, 제조용 파운데이션 모델, 로봇 운영체계, 산업용 데이터 플랫폼, 소버린 AI 클라우드를 만들어 세계로 수출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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