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ent가 SaaS와 SI를 흔들다
2026년 2월 “SaaS + Apocalypse”를 합친 “SaaSpocalypse(사스포칼립스)”라는 표현이 미국 월가와 테크 미디어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1조 달러 이상 증발했다. OpenClaw나 Claude Cowork이 출시되면서 업무 협업툴과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사실 대표적인 SaaS 기업인 세일즈포스, 서비스나우와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기업인 어도비, 오라클 등의 매출은 되려 상승할 정도로 견조했다. 하지만, 직접 개인이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바이브코딩이나 PC에 설치하는 Agent가 대신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면서 구독자수 기반으로 하는 기존 SaaS나 소프트웨어의 비즈니스 모델에 위협이 될 거라는 위기의식이 주가를 끌어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 위협은 SI와 컨설팅 사업까지 번져가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기업의 디지털 혁신 프로젝트는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기업은 새로운 시스템 구축이나 업무 혁신이 필요할 때 대형 컨설팅사를 통해 전략을 수립하고, 이후 SI(System Integration) 기업이 수백 명의 인력을 투입해 수개월에 걸쳐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젝트 규모는 투입 인력 수와 기간에 비례해 커졌고 컨설팅과 SI 산업 역시 “인력 × 기간 × 단가”라는 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ERP 구축, CRM 도입, 데이터웨어하우스 구축, 클라우드 전환 프로젝트까지 대부분의 엔터프라이즈 IT 시장은 이 구조 위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생성형 AI와 Agent의 등장은 이 산업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들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2월 OpenAI는 매킨지, BCG, 액센추어, 캡제미니와 함께 ‘Frontier Alliance’를 발표했다. 단순 기술 협력 수준이 아니라 글로벌 컨설팅 기업과 파운데이션 모델 기업이 AX(AI Transformation) 시장을 공동 공략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이어 5월에는 Anthropic이 블랙스톤, 골드만삭스, GE 등과 함께 약 15억 달러 규모의 기업용 AI 합작 사업에 참여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시기 OpenAI와 Google은 내부적으로 Palantir의 FDE(Forward Deployed Engineer)와 유사한 조직을 구축해 기업 고객 현장에 AI 엔지니어와 문제 해결 조직을 직접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OpenAI는 이를 위해 영국 AI 컨설팅 기업 Tomoro를 인수하며 수백 명 규모의 FDE 조직 확대에 나섰고 Google 역시 유사한 방향의 전문 인력 채용 계획을 발표했다.
이 움직임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AI 기업이 컨설팅 사업에 진출했다는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Enterprise AX의 가치사슬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기업 프로젝트는 “컨설턴트가 전략을 만들고 SI 기업이 시스템을 구축하고, 고객사가 운영한다”는 구조였다. 하지만 Agent 시대에는 전략, 실행, 운영, 자동화가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실시간으로 연결된다. 이제 AI 모델 기업들은 단순 API 공급자가 아니라 고객의 업무 프로세스를 직접 분석하고 Agent를 설계하며 업무 자동화와 운영 체계까지 통합적으로 제공하려 하고 있다. 즉, AI 모델 기업들이 과거 Accenture와 IBM Global Services, SAP가 담당하던 Enterprise Transformation 시장을 직접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Palantir의 FDE 모델은 이러한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Palantir는 단순히 플랫폼을 판매하지 않는다. 고객 현장에 소수 정예 엔지니어를 직접 투입해 기업의 실제 업무 문제를 분석하고 이를 데이터·AI·운영 시스템과 연결해 해결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대규모 개발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수백 명이 필요했던 프로젝트를 이제는 소수의 FDE와 AI Agent 그리고 플랫폼 기반 운영 체계만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AI는 단순히 소프트웨어를 자동 생성하는 수준을 넘어 컨설팅과 SI 산업이 필요로 하던 대규모 인력 구조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실제 기업 현장에서도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과거에는 ERP나 CRM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수개월 동안 요구사항 정의와 인터뷰, 프로세스 설계, 화면 개발, 테스트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AI Agent가 기업의 문서와 업무 흐름을 읽고 시스템 구조를 분석하며, 프로토타입과 운영 코드를 빠르게 생성한다. 컨설턴트가 며칠 동안 정리하던 보고서를 AI가 몇 분 만에 초안화하고 개발자가 반복적으로 수행하던 인터페이스 연동 작업도 자동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컨설팅과 SI 산업의 핵심 가치였던 “사람을 많이 투입해 복잡성을 해결하는 구조”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컨설팅과 SI 산업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할은 더 고도화될 가능성이 높다. 단순 개발과 구축 인력의 수요는 줄어들겠지만 기업의 비즈니스 문제를 정의하고 AI Agent의 역할과 업무 범위를 설계하는 고급 인력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 즉, “코드를 만드는 사람”보다 “AI와 함께 업무 구조를 재설계하는 사람”이 더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산업이 이동하는 것이다. 앞으로 기업 고객들은 단순 SI 구축사가 아니라 “우리 회사의 AI 운영 구조와 생산성을 함께 설계해줄 수 있는 파트너”를 찾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기존 SI 기업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AI가 소프트웨어 개발 자체보다 프로젝트 운영 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SI 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개발자와 프로젝트 관리 조직을 확보하고 있느냐였다. 하지만 Agent 시대에는 AI 플랫폼과 Agent 운영 체계, 데이터 연결 구조, 거버넌스와 보안 운영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 앞으로 기업 고객은 “몇 명을 투입할 수 있는가”보다 “얼마나 빠르게 업무를 자동화하고 운영 최적화를 해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파트너를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전통적인 인력 기반 SI 비즈니스 모델이 점차 플랫폼·운영·Agent 중심 구조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생성형 AI와 Agent는 단순히 새로운 IT 도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유지되어 온 컨설팅과 SI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재정의하고 있다. 과거의 컨설팅 산업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많이 투입하는 구조였다면 앞으로의 AX 산업은 소수 정예 FDE와 AI Agent,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단순히 개발 인력을 많이 보유한 회사가 아니라 고객의 비즈니스 문제를 AI 기반으로 빠르게 해결하고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회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