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 사는 탓에 중서부나 동부로 가는 비행기는 기본이 4-5시간이라 달에 한번 출장은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힘들다. 요즘은 한 달 동안 어디 안 보내고 집에 있게 해 주면 안분지족의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대신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처음으로 가보게 된 주들이 정말 많다. 그중에서 오하이오는 출장으로 여러 번 다니게 되면서 신시내티를 제외한 주요 대도시들은 대부분 방문을 해보았다. 조직 개편 이후 클리브랜드의 근교 사무실의 디렉터에게 보고하는 체계로 바뀌면서, 클리브랜드에서 하는 미드이어 미팅을 다녀왔다.
과거 영광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지만 뭔가 크게 정이 가지는 않는 도시. 미적인 매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건축물 스타일로 보자면 광활한 시카고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다운타운이 공허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한강처럼 도시의 중앙을 쿠야호가 강이 관통하고 있어서 다리가 굉장히 많고 북쪽으로는 이리 호수를 사이에 두고 캐나다와 마주하고 있다. 지도를 보니 얼마 전에 이야기를 남기고 온 나이아가라와 그렇게 멀지가 않다. 미국의 석유왕 록커펠라가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해 돈을 모아 뉴욕으로 갔다고 한다.
클리브랜드 미술관 (Cleveland Museum of Art)을 찾았다. 미시간 디트로이트 미술관과 대적할만한 오하이오의 대표 미술관이다. 클리브랜드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고흐의 작품이 좀 멋있을 것 같아서 가기 전부터 기대감이 컸다. 인상주의방에 가면, 모네의 수련을 등 뒤로 맞대고 고흐의 그림 4점이 벽에 걸려있다.
꽤 작은 그림으로, 보고 구도가 참 특이한 그림이네,라고 생각했다. 걸어가는 방향으로 길이 뚫려있지 않아 어딘가 답답한 느낌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고흐가 완성된 그림에 만족하지 못해, 커플만 남겨놓은 채 나머지를 잘라냈다고 한다. 오른쪽이 원작의 스케치.
필립스 콜렉션에서도 봤었던 Road Menders at St. Remy. 필립스 콜렉션에 있는 그림이랑은 좀 다르다 싶어서 사진을 다시 찾아봤는데 클리브랜드에 있는 이 작품에는 파란색이 많이 들어가 차갑고, 필립스 콜렉션의 작품은 노란색과 옥색이 중심이라 훨씬 따뜻한 느낌을 준다. 구조가 비슷한데 색 하나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필립스 콜렉션의 그림이 더 좋았다.
클리브랜드 미술관에서 제일 시간을 많이 보냈던 그림. 고흐가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죽기 1년 전 그린 그림이다. 처음 입원했을 땐 방 밖에서 그림 그리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밖에서도 그림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어두워지기 전의 가을, 노랗게 물든 포플러 나무가 춤을 춘다.
이번에 깨달은 건데 나는 고흐의 인물화보다는 (자화상 제외) 춤추는 풍경화와 꽃 정물화를 좋아하고, 웅장하고 멋진 건축물 안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 그림, 스테인글라스 때문에 성당을 좋아하는 것 같다. 취향이 점점 더 좁아지면서 견고해지는 것 같다.
요즘은 미술관에 가면 피사로의 그림을 찾아보게 되는데, 아쉽게 피사로의 작품은 한 점 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물감을 과하게 섞기보다는 자연에 존재하는 색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낸 그림이다. 부들부들한 텍스쳐가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이모가 오르세인가 오랑쥬리에서 좋아한다고 얘기했던 모딜리아니. 옷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긴 코도 그렇고 귀여우면서 예쁜데 우수에 잠겨있다. 그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데 어딘가 모르게 색감은 피렌체 같으면서도 인물의 분위기는 프렌치 같은 것이 되게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내 돈을 내면서까지는 오고 싶지 않지만 회사에서 또 가라고 하면 마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퇴근 후에 자투리 시간으로 케이스 웨스턴을 짧게 둘러보고,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 미술관에 겨우 몇 시간을 짬 내 돌아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이블 벨트인 줄 알았을 만큼 교회가 많고 노예 제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남부에서 북부나 캐나다로 올라가던 자들의 거점이 되어주었던 클리브랜드에 언젠가 다시 오게 된다면 미술관뿐만 아니라 다운타운과 공원들, 그리고 성당들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