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학적 글쓰기’는 왜 필요한가?”
ㅡ어느 대화에서 받은 질문의 답을 갈무리함.
"글쓰기는 삶을 설명하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다시 번역하는 영성의 발현이다. 한중담의 서사는 사건을 직선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동일한 중심 질문을 화두삼아 나선형으로 순환하며 끝내 자기 성찰에 이르러야 한다. 나에게 한중담의 글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쓰는 자신을 번역하고 퇴고하는 프락시스.다. 그 수행을 통과한 언어만이 타인에게도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다."
1. 글에 담긴 자기 권력
더위가 무기 같다. 유럽에서는 목숨을 빼앗고 위협하기까지한다. 손쓸 수 없다. 버텨야 한다. 기후의 문제인가? 어쩌면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인간이 문제일지 모른다. 그가 타인의 삶을 빼앗는다. 그 반성하지 않는 인간의 태도가 근원적 원인일지 모른다. 자기 세계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성을 건축하며 멈춰서지 않으려는 무모한 자기 권력형 인간말이다.
2. 멈춤ㅡ자기한계 인식의 지혜
작년 안식월 동안, 나는 중국 전국시대 도가 철학자 장자(莊子,본명 莊周, 기원전 369?~ 286)의 생각을 조금 읽었다. 입문에도 모자라는 초보적 성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뜻밖에도 나의 목회 경계 너머를 조망하는 어떤 도움을 얻었다. 특히 ‘멈춤’의 유익이다. 인간이 이 세계와 어울리는 자연스러움과 틀을 넘어선 자유로움은 ‘멈춤’이라는 디딤돌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멈춤의 가치는 인간이 자기 삶의 표피를 뚫고 그 본질을 향해 파고들어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멈춤과 관련해서 나는 세 개의 용어를 주목했다. 자쾌(自快), 자화(自化), 찰기시(察基始)다. 자쾌는 스스로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자화는 자신의 ‘자신됨’을 성취하는 태도다. 이를 통해 스스로 이 세계와 연결된 존재로 나를 인식한다. 찰기시는 드러난 일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지적 성찰이다. 그 일의 표상이 아니라 ‘시작과 근원’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 용어들은 다른 말 같지만 나는 같은 의미범주에서 읽는다. 장자가 추구하는 큰 개념의 세 지류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그 큰 개념은 명확하다.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 자유 철학’이다. 이는 삶의 흐름에서 자신을 경계와 틀에 끼워 넣지 않고 경계 너머 세계와 자신을 ‘조화하려는’ 자연 동화의 태도다. 장자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틀에 갇히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갈 때 자유롭다. 마치 흔들리는 길을 걷는 나그네 같은 존재라는 인상이 짙다. 그러니 그 길에서 스스로 자기 몸을 조절하여(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전진하면서) 경계 너머를 누리려면 자기 해체가 필연이다. 그렇다고 이 해체가 현실도피는 아니다. 현실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는 더 적극적인 현실대응이다. 표면이 아니라 뿌리를, 인간 본성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속살을 치밀하게 관조하는 실천 지혜다. 이 지혜 아래 자쾌, 자화, 찰기시가 연동된다.
나는 이 세 요소로 구성된 현실지혜가 두 가지 저력을 함의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사람이 자기 한계를 즐겁게 인식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용기있게 자기 경계를 넘어서게 추동한다는 것이다. 한계 인식과 자기 초월의 힘이다. 이 힘으로 사람은 자기 틀을 해체할 수 있고, 세계와 ‘관계’할 수 있으며, 그 속을 소요유(逍遙游)하며 자기 즐거움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거칠게 말했지만, 이런 장자의 성찰에서 나는 신학적 함의마저 발견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 세계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를 자유하며 경계를 해체한 창조자의 깊은 마음을 성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3. 나의 글쓰기 반성
신학을 공부한 이래, 히브리텍스트에 발을 딛고 세계를 읽어보려 애썼다. 그간 나름 여러 글을 썼지만, 어느 해부터 나는 장자가 주창한 큰 개념을 빌어온 신학적 함의에 근거하여 나의 신학적 글쓰기 방식을 반성했다.
첫째, 자계(自界)다. 나는 나의 경계를 나도 모르게 스스로 설정하며 산다. 틀에 갇힌 것이다. 교회도 신학도 '야훼의 무형의 진리'에 근거한다는 것을 자주 잊는 것이다. 그 지혜가 예수의 삶의 방식으로 구현되었응 을 놓치는 것이다. 둘째, 자쾌(自快)다. 삶의 즐거움을 외부에 기대려는 태도다. 땅의 유대(有待)를 버리고 무대(無待)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놓친 것이다. 무대는 오직 야훼만을 기대하는 이상적 현실이다. 무릇 인간이 자유 하는 원천이다. 물론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적 존재다. 그러나 목회의 궁극적 즐거움은 타인에게서보다 자신에게서 먼저 비롯한다. 셋째, 자화(自化)의 망각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이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자주 무시한다. 고집스럽게 내 생각을 지키려 한다. 인간이 물화(物化)의 존재라는 것을 경시한다. 장자의 곤(鯤)과 대붕(大鵬), 호접몽(胡蝶夢) 이야기가 이런 나를 경각한다. 넷째, 찰기시(察基始)를 지나치는 것이다. 거의 자주 표면과 결과에만 눈이 먼저 이끌린다. 피상에만 몰두하는 삶은 자기 정체성을 퇴색시킨다. 결과에 함몰된 삶은 인간 본성의 진면목을 놓친다. 갇힌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 자리에서 생명의 근원을 살폈기에 곡(哭)이 아니라 노래(歌)를 선택했다. 보이는 슬픔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근원, 즉 본향으로 돌아간 인간을 환송한 것이다. 죽음에서도 자유하는 인간의 근원을 관찰한 것이다. 요컨대 나는 나의 목회를 성찰한다. 자기 한계를 수용한다. 자기를 넘어 이 세계와 조화하며 즐거움을 찾는다. 궁극적으로 표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근원’을 천착한다. 목회는 이런 자기 성찰의 삶의 방식을 온 몸으로 입증하는 것이라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5. 글쓰기라는 프락시스
돌이켜보면, 나는 장자의 철학으로 ‘멈춰서기'를 배웠고 그 멈춤은 궤도에서 잠시 비껴나보는 것임을 알았다. 그 비껴난 자리에서 나의 목회 프락시스(praxis)를 구현한다. 숲, 산, 바다, 호수, 도심 같은 길을 침묵으로 홀로 걷는다. 그 길에서 묻는다. 나의 신학적 글쓰기는 이 시대에 ‘왜 필요한가?’ 나는 나에게 냉정하게 답한다. “나의 글쓰기는 궁극적으로 흙으로 귀환해야 할 인간의 한계상황, 그 ‘아파르’(히브리말로 ‘흙’)의 본성을 다시 생각하여 일러줄 바카라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말해 ‘나(我)’는 나(己)에게 글쓰기로 바카라이라는 결실의 직업이 아니라 그저 생의 근원을 탐구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는 글쓰기가 신학자가 지켜내야할 ‘찰기시의 사명자’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시대를 불문하고 항구여일한 진리를 현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 번역이 삶의 자리를 따라 다시 적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란 신학적 글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이 ‘흙으로 돌아가는 물화의 존재임을 수용해야 한다고 나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는 지적 수양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나(吾)’ 는 변화를 피해갈 수 없는 피조물이다. 나(我)는 결코 ‘나(己)’에 갇혀서는 안 된다. 이 틀에 갇히지 않고 불가피한 변화의 운명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나(我, 吾)에게 유익하다. 나를 가두는 틀을 넘어 경계를 해체하여 자유로운 존재로 전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6. 새로운 성찰, 소요유
따라서 나의 신학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명확하다. 무엇보다 나의 삶은 나에게 주어진 길을 더 길게, 더 멀리 더 오래 걸으며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소요유(逍遙遊)여야 한다는 것이다. 길의 경계 너머를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 나가며 물화를 더욱 빈번히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동화(動化), 물화하려는 행동의 두께도 더욱 두터워졌으면 좋겠다. 결국 목회, 즉 나의 신학적 글쓰기는 인간다움의 글쓰기여야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장자의 글을 공부하며 나는 다시 나에게 권고한다. '목회는 신학적 인문학적 글쓰기로서 전진이 아니라 멈춤의 능력으로 꽃피는 나무다. 이 나무의 뿌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 나는 자쾌, 자화, 찰기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나에게 수시로 지혜로운 퇴고와 반성을 물처럼 주어야 한다. 그 물기는 지나온 길을 비껴나 잠시 멈춰서서 나아갈 길을 전망하게 하는 양분을 수여한다. 결과적으로 목회는 어떤 직업보다도 인간 본성의 근원에 대한 퇴고와 반성을 세찰(細察)하는 치열한 프락시스다.'(2025.7.10)
7. 인문의 물줄기에 부는 거룩한 바람
1년이 지난 오늘, 그 사이 글쓰기는 나름 견실해졌으나 장자의 흔적은 여려졌고, 궁극적으로 예수의 삶의 방식은 딱딱한 틀만 몇 개 남은 듯하다. 무엇보다 "자기 세계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성을 건축하며 멈춰서지 않으려는 무모한 자기권력형 인간"은 그가 남긴 글로 판명될 수 있다는 것을 잊었다. 어찌보면 여러 장르의 다양한 글을 쓰는 힘은 조금 늘었을지 모르나 자기 성찰의 프락시스를 무심하게 지나가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워지는 듯하다. 자기 사유로 신을 인식하려는 글쓰기는 자기를 거쳐 나갈 때비로소 타인에게 안전하게 닿는다. 사유와 세계 사이에 그 '거룩한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하여 신학적 글쓰기를 넓은 바다로만 자긍하면서 인문이라는 수많은 물줄기를 망각한다면, 바다라도 마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나의 글쓰기는
자기 성찰로 꽃피는 씨앗이다.
(2026.7.10덧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