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꽃은 더위에도 지지 않는다.

by푸른킴
지지 않음은 뜨거운 계절에 패하지 않는 강인 함이며,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단단함이다.


계절을 맞이하는 방식

비가 더위를 내던지고 가버렸다. 걸을 때마다 그늘을 찾는다. 더위는 몸을 서두르게 만든다. 대서로 가는 길에 몸이 과속한다.


급하게 복사출력을 해야 해서 무인점포를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었다. 열기가 대단하다. 다행히 복사 매장은 한가했다. 다만, 냉방시설이 고장이라서 숨이 턱 막힌다. 시원한 곳을 찾아 잠깐잠깐 드나들며 일을 마쳤다. 다시 전철역으로 조금 더 걸었다. 늦은 오후 빛나는 햇살이 여름 열기에 빛을 바랐다.


사람들은 계절을 감각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달력이나 시계를 먼저 바라보기도 하면서 하루를 쪼개며 시간에 쫓긴다. 해가 길어져서 더 그렇다. 어떤 이는 과일을 찾거나 놀이터를 찾는다. 철 지난 과실이 맛도 지나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득 도로를 따라 나란한 계절의 초화(初花)들이 싱그럽게 피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꽃들은 어떻게 자기 계절을 알아서 꽃을 피울까.


다시 태어난 고무나무 여린 연녹색 잎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고무나무 새싹은 계절을 따라 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분명 며칠 전에는 아무 기색이 없었으니 말이다. 서재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뜨거운 여름을 잠시 잊게 해 준다. 그러니 저 여린 연두색 잎은 여름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밀고 나와야 할 때가 되었고, 밖에서 바람이 끌어당겨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려드는 계절의 힘 앞에서도 조급해지지 않고, 폭염에 패하지 않으며,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 조용히 잎을 틔웠던 것이리라.


가만히 꽃을 바라보면 순간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머문다고 멈춰버린 것은 아니다. 꽃잎을 쉽게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자기 몸을 수축하고 팽창하며 자기 리듬으로 역동한다.


본래 사람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리듬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었다. 머물고, 멈추며 밖의 율려(律呂)를 안의 박동을 조율할 줄 알았다. 길을 걷다 철 이른 탓에 수줍어하는 것 같은 코스모스 한 송이를 보면 낯선 풍경을 오히려 반길 줄 안다. 그 어색한 표정의 꽃을 반기는 이유는 계절의 질서를 넘어 시간이라는 틀을 넘어, 어떤 꺾임에도 패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먼저 피워냈기 때문이리라.


꽃은 지지 않는다. 나도 다시 핀다

전철 안이 시원해서 기분이 딱 알맞았다. 땅 위의 열기를 잠시 잊고 있으니 다른 세계 같다. 조금 여유롭게 시간을 잊는다. 길가에 꽃들도 더위에 지지 않고, 쉽게 스러져 떨어지지 않은 채 다시 자기 꽃을 피울 것이다.

어쩌면 삶의 아름다움이란 바쁘게 살아낸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계절을 자기만의 리듬으로 살아내며 스스로 삶의 꽃을 피워낸 순간에서 완성되는 듯하다.


꽃은 더위에도 지지 않는다. 세상의 기세에 쉽게 패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먼저 지는 것은 뜨거운 계절이 아니라, 그 더위에 조급해져 스스로 패하고 떨어져 버리는 나의 마음이다. 나도 꽃을 따라 다시 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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