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나의 평범한 최초의 안식

by푸른킴

나의 아침, 안식 — 몸 하나 머물 자리 찾기

7월 어느 9일, 아침 8시. 장마가 잠시 주춤한 사이, ‘비가 올까, 안 올까’를 생각하며 전철역으로 걷는다. 연착한 1호선 전철의 마지막 칸은 사람들로 가득 차 사람 하나 들어서기조차 어렵다. 숨을 잠시 멈추고 몸을 밀어 넣은 뒤, 내 몸 하나 단단히 붙잡으려 스스로 팔짱을 끼고 잠시 눈을 감는다.


감사의 기도라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안식이라 부르는 것만큼은 호들갑이 아니다. 나는 고요히, 무사히 ‘안식함’에 들어선 것이다. 별일 없이 목적지에 내린다면, 그 안식함은 완성될 것이다. 안식이란 풍랑 속에서도 숨이 거칠어지지 않는 일이다. 밀리듯, 안 밀리듯 그 자리에 서서 ‘안식’을 빙빙 돌려 도석(道釋)한다.


헤셀의 안식, 물리적 세계의 틈 영성

안식일에 대한 가장 호감 가는 설명은 아브라함 J. 헤셀(A. J. Heschel)의 것이다. 그가 ‘안식’에 대해 방점처럼 정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시간을 성화하기 위해 공간을 정복해야 한다. 우리는 한 주 내내 공간의 사물을 이용하여 삶을 성화하고, 안식일에는 시간 한가운데 있는 거룩함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이 시들시들할 때도, 우리의 뻣뻣하게 굳은 목구멍에서 기도가 전혀 나오지 않을 때도, 안식일의 순수하고 고요한 안식이 우리를 영원한 평화로 인도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영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사상(思想)의 세계에는 안식일 개념만큼 영적인 힘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개념이 별로 없다.” <김순현 역, 『안식』, 복있는 사람, 2014, 182쪽.>


이 설명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안식일 개념이 사상의 세계에서 풍부한 영적 힘을 가지고 있다.’

헤셀에게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시간의 성화이다. 사람은 한 주 동안 공간의 사물을 다루며 살지만, 안식일에는 그 공간의 욕망에서 물러나 시간 한가운데 있는 거룩함을 맞이한다. 그래서 안식은 물리적 세계를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그 세계의 틈 사이로 영원을 들여오는 일이다. 내 몸이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복잡하고 소란하지만, 그 자리의 시간은 전혀 다른 빛을 받을 수 있다.


던의 안식, 야훼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힘

안식일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마르바 던(M. J. Dawn)의 것이다. 그의 글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 개념을 종합하는 문장처럼 들린다.


“안식일이 마침내 성취될 때, 우리의 나눔과 연약함은 영원히 그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영원히 쉴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주권을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 끝없는 향연을 누릴 것이다.” <전의우 역, 『안식』, IVP, 2010>


이 문장 속에는 그가 바카라 속 여러 곳에서 펼쳐 놓았던 안식의 중요한 개념이 모두 담겨 있다. 곧 ‘그침’, ‘쉼’, ‘받아들임’, 그리고 ‘향연’이다.


마르바 던의 생각 속에서 안식은 자기 안에 갇힌 삶의 길을 멈추고, 야훼의 세계로 들어가 머무는 일이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세계에 야훼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 굴곡진 자아는 야훼의 손에서 곧게 펴진다. 세계는 여전히 어그러져 있을지라도, 인간은 다시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그 속으로 들어설 용기를 얻는다. 그 세계에서 야훼와 나누는 향연이 그려진다.



초공간으로서 안식의 현실, 나의 서재

헤셀이나 던이 그려 내는 안식 개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을 통해 나는 안식이 단지 시간이 아니라, 현실 공간을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새로운 초공간(Meta Topos)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안식은 길을 가다 만나는 부분적 휴식 시간이 아니다. 짐을 짊어진 채 온전히 휴식 공간으로 ‘입성하여’ 머무는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공간에 들어서서 시간을 누리는 일이다. 나에게 서재는 그런 초공간이다.


실제로 나의 서재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안식의 즐거움을 눈으로 보여 준다. 바람이 숲으로 빨려 들어가고, 밤에 갇혀 있던 햇살이 파란 하늘과 함께 어둠의 휘장을 열어젖힌다. 둥지에 머물러 침잠한 듯 웅크렸던 새들은 소리와 함께 질주한다.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음악처럼 펼쳐진다. 모든 것이 내 몸에 닿는 감각으로 실감 난다.

그러나 안식은 서재에만 머물지 않는다. 안식은 조용한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만약 내 앞에 삶의 무질서가 지속된다면, 그것은 여러 요인 가운데서도 안식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이 사라진 삶은 호흡을 잃고, 호흡을 잃은 삶은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진다.


안식의 본질적 개념, 몸의 저항

흔들릴 것 같지 않던 헤셀과 던의 안식 개념은 월터 브뤼그만(Walter Brueggemann)의 사유에서 한층 더 확장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안식은 좋은 물질을 소유하는 일로 전도되어 가는 것 같다. 안식마저 좋은 상품이 된 것이다. 의로운 안식의 질서는 ‘안식’이라는 이름 아래서 나쁜 권력에 의해 맥없이, 그리고 빈번하게 뒤집힌다. 그런 일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일어나고, 또 받아들여진다. 전도된 안식은 그 뒤집힌 공의에 저항할 힘마저 소멸시키는 듯하다.


여전히 쉼에 대한 열망은 그대로이다. 어디서나, 언제나 휴식을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은 마련되어 있다. 다만 그것은 새 창조를 이끌어 내는 시공간이 되지 못한다. 전도된 안식은 곧 위장된 안식이다.


이 지점에서 브뤼그만은 안식을 저항으로 재명명한다. 그에게 안식은 단순한 휴식 상품이 아니다. 안식은 안식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세계에, 참된 안식으로 저항하는 행동이다. 더 많이 생산하라, 더 많이 소유하라, 더 많이 증명하라, 더 많이 불안해하라는 제국의 명령 앞에서 멈추는 일이다. 그 멈춤은 무기력한 퇴각이 아니라, 다른 주권에 속해 있음을 몸으로 고백하는 행위이다.


브뤼그만이 보기에 바로의 이집트는 끝없는 생산의 체제이다. 그곳에서 사람은 벽돌을 만들고, 더 많은 벽돌을 만들도록 내몰린다. 마침내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 벽돌처럼 굳어 간다. 제국은 사람에게 안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멈춤과 쉼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노동력으로 축소되고, 이웃은 어느새 무의식적인 경쟁자가 된다. 세계는 안식을 말하면서도, 안식을 위해 더 많이 쌓아 올리라고 명령한다.


이 점에서 브뤼그만의 안식은 바로의 뒤집힌 질서에 대한 거절이다. “나는 더 이상 벽돌만 만드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일이다. “나의 가치는 생산량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나와 내 이웃과 짐승과 땅까지도 하나님의 숨 안에서 쉬어야 한다”라고 선언하는 일이다.


안식은 피로해진 개인에게 회복을 선물하는 사적 질서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질서를 착취의 수단으로 만들어 가는 체제에 대항하는 공적 저항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소비와 다르다. 저항으로서 안식은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동이다. 더 좋은 곳, 더 맛있는 것, 더 멋진 장면을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 쉼은 종종 또 다른 노동이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안식은 휴식과 달라진다. 휴식은 피로를 달래는 일일 수 있지만, 안식은 피로를 생산하는 질서 자체를 의심하는 일이다. 휴식은 다시 일하기 위한 중간 정거장일 수 있지만, 안식은 내가 일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기억하는 시간이다. 휴식은 소비될 수 있지만, 안식은 소비되지 않는다. 안식은 하나님의 충분하심 안에 머무는 일이며, 결핍의 불안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세계에 맞서 숨을 되찾는 일이다.


저항으로서 안식은 거친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고요한 숨이다. 그 고요는 드러나는 힘보다 스며드는 힘이 깊다. 안식은 소란스럽게 세계를 전복하지 않지만, 세계가 내 안에 심어 놓은 불안을 조용히 무효화한다. 안식은 칼을 들지 않지만, 제국이 쥐여 준 벽돌을 내려놓게 한다.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근본적인 명령 하나를 거부한다. “너는 쉬지 말라”는 명령, “너는 늘 부족하다”는 명령, “너는 더 생산해야만 가치 있다”는 명령을 거부한다.


나의 안식, 몸 하나 지켜 내는 일상 자체

안식에 대한 여러 고찰은 안식을 사유하는 데, 또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오늘 하나를 더 말하려 한다. 바로 ‘나의 안식’이다.


나의 안식은 만원 전철 안에서 내 몸 하나 머물게 하며 나를 고요한 시공간으로 안내하려는 노력이다. 그 노력 자체가 나에게는 안식이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가방을 추스르고, 스스로 팔짱을 낀 채 내 몸 하나를 붙잡는 일도 나의 안식이다.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호흡을 잃지 않는 일, 연착과 장마와 출근의 조급함 속에서도 걸음을 서두르지 않으려는 자기 절제도 그렇다.


안식이 저항이며, 야훼의 세계에 들어서는 일이며, 물리적 세계에 틈 하나 내는 영성이라면,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다. 안식은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안의 숨 하나를 고르게 쉬는 자기 리듬이다.

언젠가 나는 안식을 이렇게 정리했다.


“안식은 몸의 안과 밖,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을 질서 있게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순간들, 곧 시간의 모음이며 공간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과 그 삶이 다한 것들이 누리는 삶의 최후의 혜택이기도 하다. 이 안식의 순간을 지나야 비로소 사람은 한 뼘만큼 자란다. 여행을 하든, 머물러 있든, 이날은 새로운 창조의 날이다. 무엇보다 타인을 위한 삶을 보낸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나의 정의는 안식이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었다. 오늘, 나는 이 정의의 균형추를 조정하기 위해 한 줄을 더 보탠다.


바로 안식은 ‘어떻게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 나는 안식을 거친 환경 안에서도 영혼의 숨을 고르는 일이며, 동시에 영혼을 불안과 성과의 노예로 만들려는 세계의 요구를 거절하고 나의 걸음으로 걷는 일로 다시 되새긴다.


장맛비, 만원 전철, 몸 하나 안식

장맛비가 쏟아지고, 김창완의 노래,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를 듣는다. 이런 풍경에 비하면 안식을 사유하는 일이 너무 고상해 보인다. 하지만 안식의 고상함은 땅의 바닥에서 시작되고, 내 안의 굴곡진 자아로부터 출발한다. 가지런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헝클어진 가장 작은 세계, 곧 내 몸을 야훼의 손에 던질 때, 그 몸이 곧게 펴지는 것을 경험한다.


안식은 나와 이웃을 굽게 만드는 권력의 손길로부터 멀어지는 결단이다. 안식은 홀로 평온해지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사람다워지는 길이다. 나만 숨 쉬는 것이 아니라, 내 곁의 사람도 숨 쉬게 하는 질서이다. 나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 멈춤으로 타인의 삶을 착취하지 않는 의로움이다.


이 안식의 시공간이 온전히 자신을 놓아주고, 동시에 타인을 받아들이는 의식과 행동으로 채워지는 초공간(超空間, Metatopos)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실현되는 땅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나라는 쉼 없는 생산의 왕국이 아니다. 그 나라는 불안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는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벽돌의 수로 사람을 헤아리지 않고, 숨의 평화로 생명을 알아보는 나라이다.


오늘은 비가 계속 내린다. 며칠 전에는 아침 햇살이 별같이 반짝이던 때도 있었다. 그 틈으로 평화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비가 몰고 오는 바람이 서재의 창가에도 머물고, 장마철 전철의 닫힌 문틈에도 잠시 스민다.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내 몸은 늘 그대로다. 하여 다시 생각한다.


안식이란 내 앞의 풍랑이 사라진 뒤에야 가능한 풍경이 아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내 몸의 숨이 거칠어지지 않는 일이다. 안식은 그 숨을 빼앗으려는 세계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야훼의 숨으로 깊은 호흡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내 몸이 곧 그의 안식이 일어나는 최초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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