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우연히 만난 망각

by푸른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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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 물레길을 따라 갈대숲과 연꽃길을 걷다 보면 두물경에 닿는다. 알다시피 이곳은 금강산에서 흘러내려온 북한강과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만나 비로소 한 강이 되는 지점이다.

어느 날, 이 길을 걸었다. 풍경은 고요하게 역동한다. 모처럼 비가 개고 날이 흐릿하게 맑아지는 오후, 서로 얽힌 듯 굽어 있는 이 길과 저 길을 휘돌며 오붓하게 걷는 이들이 나무와 숲 사이를 바람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 배 한 척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간다. 물결이 일고, 조용하던 두 물에 파문이 인다. 바로 직전까지 서로 다른 길을 따라 꿋꿋이 내려왔을 두 물, 지금 여기에서 서로를 만났을 때 무슨 이야기부터 꺼냈을까. 혹시 우연처럼 출렁이는 저 물결이 두 물줄기가 함께 수다를 떨며 즐거워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 아닐까.

2.
바람이 잦아들며 비구름을 걷어가고, 조금씩 하늘이 맑아진다. 두 물의 만남을 좀 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에 좀 더 가까운 길이었다. 한적하게 비어 있는 길을 걸으니 조금 덥기는 해도 제대로 산바카라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걷다가 아주 우연히, 풀숲 안쪽에 비석 하나가 땅에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볍지 않지만 낯익은 구절이 큰 글자로 비석을 가득 채워 새겨져 있었다. 멀리서도 선명했기에 어떤 반가움에 이끌려 비문 앞쪽으로 다가갔다. 비문 뒷면에 이 비석이 이곳에 세워진 내막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 비문은 기억을 위한 흔적이었다.

30년 전, 이 장소에서 뜻밖의 사고가 있었다. 한 사람이 삶을 달리했고, 그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물로 던졌던 이 지역 어른의 죽음이 있었다. 이 비문은 그들을 잊지 않으려는 남은 사람들의‘기억저항’이었다.

비문에 따르면, 이 슬픈 사건의 주인공은 요트선수이자 문학에 삶을 엮어 살았던 젊은이였다. 그의 「햇빛이 조금만 짧았어도」라는 시의 제목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제목은 거친 강 위에서 치열하게 생존의 몸을 움직였을, 짧았던 그의 삶과 묘하게 뒤섞인다. 발목에 닿는 수풀을 헤치며 걸어 나오는데, 두물경은 두 물이 만나는 곳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만나는 자리라는 생각이 흐른다.


3.

사실 이 비문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비석의 제목처럼 새겨진 문장이었다. 나는 비석을 돌아가며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틈에 망각이 깨진다.


50년대 말 독일 유학 후, 60년대 혼돈의 고국에 돌아와 잠깐의 교편 생활과 예사롭지 않은 결혼생활을 끝으로 삶을 마감한 전혜린. 그는 삶의 무게를 지고 굳게 일어서 보기 위해, 허공을 가르듯 이상적 삶에 천착했다. 하지만 그 삶을 스스로 오래 끌지 않았다. 그 제목에 실린 그녀의 치열했을 삶이 이 낮은 풀밭 아래 누군가의 비문에 오롯이 새겨져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용은 어둑한 수필이어서 가물했다. 그 시절 어린 내가 타국에서 겪었던 그녀의 삶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바카라 제목은 그날 한번 보고 결국 잊지 못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더 이상 되새겨야 할 필요가 없다고 흘려보낸 이 문구를 우연히 이 낯선 공간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 나는 마치 저 강물인 양, ‘내가 어디서 왔는가’를 묻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답하려 했던 미숙한 시절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이 비문은 그 치기 어린 시절을 바로 어제인 듯 데려와 내 앞에 두었다. 존재는 이렇게 가볍다. 기억과 망각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가벼움 말이다.


4.

빛바랜 그 수필집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완전히 망각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내 삶의 존재의 기원과 종말에 관해, 신앙과 철학의 틈바구니에서 나름 치열하게 탐색했던 나의 20대를 오늘 이 두물머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한편으로 기뻤다. 내 기억 속 문구는 머리가 아니라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여전히 삶의 어느 자리, 내 몸 어딘가에는 망각에 저항하듯 나의 기억들이 세포처럼 뚜렷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삶을 무심히 흘려보내는 어느 순간에 나를 만나, 내 몸의 오랜 기억을 일깨워 주기 위해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연히 흐르는 강가에 서서 시간이 내 삶을 감싸며 맴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니, 멋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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