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꽃에 대한 사유
10여년 전, 성서 공회에서 일했던 날의 기억이다. 어느 이른 아침, 평소처럼 지하철역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걸었다. 거리로는 500미터 남짓이다. 가볍게 산바카라하듯 걸을 수 있는 거리다. 가는 길에 작은 분식점이 하나 있었고, 그 문 앞에는 화분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맨 앞에는 사랑초가, 그 뒤로 고무나무 꽃이 싱그러웠다.
사랑초는 아침저녁으로 꽃이 피었다 진다. 그날도 꽃잎이 기지개를 켜듯 이제 막 피어날 참이었다. 반면 고무나무 꽃은 한 번 피면 꽤 오래 머문다. 앞으로도 서너 날은 더 갈 것 같았다. 사랑초와 달리, 아침마다 지나가는 길에 고무나무 꽃을 보면 기분이 참 좋았다. 이것도 편애인가 싶었다.
약간 흐리고 비가 흩뿌리듯 내리는 날이면, 커피 향기보다 이 꽃들의 보이지 않는 향기를 눈에 담으며 경쾌하게 걷곤 했다. 고무나무 꽃이 떨어지지 않는 한, 두 개의 꽃은 나란히 꽤 오랫동안 피어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대는 아마도 흰색과 미지근하게 강렬한 노란색이 서로 묘하게 어울려 있어서 그랬던 것 같고, 그 꽃들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은 내 마음이 만든 어떤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바로 그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점심 무렵, 아침에 지나온 그 길을 따라 다시 걷다가 꽃잎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여린 사랑초는 아무 일 없는데, 꼿꼿했던 고무나무 꽃잎만 떨어져 있었다. 하나는 아직 나무에 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무에 남은 꽃잎 하나가 더 안쓰러웠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떨어진 꽃에 닿았다. 이제 막 떨어졌는지, 모양과 색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생생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가만히 앉아 낙화 한 잎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 꽃잎은 떨어진 것이었음에도, 땅바닥에서 다시 곱게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떨어진 자태가 흐트러짐이 없어 더 그랬던 것 같다.
문득, 오늘 그 낙화를 찍어둔 사진을 다시 보고 있으니, 꽃은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만 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땅에 닿은 뒤에도 그 빛과 모양을 잃지 않은 이 꽃잎은 여전히 꽃이 아닌가? 떨어짐은 끝이고, 소멸일 텐데, 그 꽃잎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끝은 사물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그것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인간의 눈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꽃이 흐려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오늘 내 삶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 꽃잎은 그날처럼 다가올 운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꽃이 지금 나에게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특별한 일 때문은 아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올 즈음, 다시 그 꽃이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서서 꽃잎을 찾았다. 다행히 날아가지도, 밟히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잘 머물러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한밤까지 이 떨어진 꽃을 여기에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곱게 주워 담는다고 해서 꽃이 소생할 리는 만무하다. 이제 천천히 더 말라갈 일만 남았으니 말이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의 카메라를 열었다. 꽃잎에 가까이 다가가 사진에 담았다. 색은 조금 흐릿했지만, 그런 대로 보기 좋았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떨어졌다고 슬퍼하지 마. 내가 오래 간직해 줄게.”
그날 나는 그 꽃을 사진에 담았다.
사실, 사진을 남기는 일이 꽃을 살리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을 한 번 더 바라보고, 그 앞에 잠시 멈추고, 마음 한쪽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소멸을 조금 늦추는 방식일 수 있다. 존재의 소멸은 어쩌면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무도 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지나쳐버릴 때 비로소 시작되는 불특정한 사건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소멸’을 원치 않는다면, 거창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 앞에 조금만 멈춰 서 주면 된다. 한 번 더 바라보고, 마음에 담아두면 된다. 어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땅에서 사진으로 남겨지고, 사진에서 마음으로 오래 기억된다. 떨어진 꽃은 더는 나무에 피어있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내 삶에서 오래도록 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