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평
프레임의 시선: 전체를 보는 눈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예의
모처럼 일간지 신문을 두 종류로 샀다. 종이신문은 금요일에 가끔 사는 편인데, 펼칠 때마다 신문은 활자가 박힌 종이로 읽어야 제맛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종이신문을 아직 놓지 않는 이유는 ‘편집’의 묘미 때문이다. 종이로 된 신문은 단순히 기사를 나열하지 않는다. 최종 데스크는 한 면 전체를 펼쳐놓고 어떤 기사가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얼마나 큰 지면을 할애해야 하는지, 어떤 사진과 제목을 함께 배치해야 하는지를 매일 판단할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을 설명하는 문장 하나로도 세상의 맥락을 다른 자리에 둘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어떤 기사는 쓰인 그대로 고정되어 사실을 전달할 수도 있지만, 신문은 편집을 통해 ‘사실’의 가치를 심화할 수도 있다. 물론 역으로 오도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엇을 어떻게 ‘놓느냐’라는 판단이 그 기사의 가치와 의의를 고양하는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종이신문의 편집은 사물의 전체적인 구도와 프레임을 바라보는 감각을 일깨운다.
신문 한 면을 바라보다 문득 ‘잘 찍은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바카라장 한쪽에는 기회가 될 때마다 펼쳐보는 사진 작법 바카라이 놓여 있다. 10여 년의 간극을 두고 개정된 그 바카라은 이른바 ‘잘 찍은 사진’에 대해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바카라은 사진이 단순히 기술과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찍은 사람의 ‘의식과 관점’의 문제임을 차분하게 짚어낸다. 이 바카라의 주장은 한마디로 사진이 프레임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다시 말해 관점의 편집이 사진의 가치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누구나 사진기를 손에 들고 다니는 요즘은 어떤 경우에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사진으로서 가치 있는 ‘작품’을 남기지는 않는 것 같다. 전문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진에 자신의 의도적 프레임을 담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의 어떤 장면을 어떤 각도에서 포착할지, 어떤 요소만 남기고 무엇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낼 것인가를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이처럼 신문의 기사처럼 사진 역시 가치 있는 사진을 찍는 핵심적 요소는 기계의 성능만이 아니라 그 기계를 들고 있는 사람이 세계를 보는 관점, 그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 내면의 결이란 의도적 선택, 배제, 주관적 해석을 결정하는 편집의 도구이다.
따라서 신문처럼 편집의 결과인 사진에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생명 앞에 서 있는 방식이 은밀하게 묻어난다. 아무리 경이로운 순간을 붙잡았다 해도 누군가로부터 보편적인 감성적 동의와 이성적 승인을 함께 얻지 못한다면, 그 사진은 생생한 증언일 수는 있지만, 그저 박제된 순간을 덩그러니 멈춰 세운 물건에 그치고 말 것이다.
과거 뉴욕포스트 1면에 이런 사진이 하나 소개된 적이 있다(2012. 12. 5). 게재되었을 당시에 큰 논란이 일었다. 그 사진은 지하철 철로에 떨어지는 한 사람을 사진작가의 기준에서 ‘절묘한 타이밍’에 포착한 것이었다. 신문사는 이 비극적 순간을 담은 사진을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포장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사진 속 주인공은 그 순간에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카메라 셔터가 눌리는 순간과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나는 시점이 잔인하게 겹쳐졌다. 사진기자는 그 순간에 사람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프레임을 선택했고, 신문사는 그 사진을 자기 신문의 1면에 전면 배치하는 ‘편집’을 선택했다. 기자와 신문사에게 특종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진에는 ‘선택과 편집권’만 담겼을 뿐, 인간성의 존중이나 사진보다 인간 우선이라는 긴급성은 부재하는 모순이 스며 있었다. 잘 찍힌 사진일 수는 있으나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순간에는 결코 찍지 말았어야 했을 사진일 수 있다.
이처럼 한 장의 사진 역시 인간의 ‘가치판단’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아무리 전문가적 지식과 기술이 진가를 드러낸다 해도 그 ‘찰나의 선택’에 인간을 포용하고 옹호하는 판단이 부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오래 훈련해 온 방향으로 손을 뻗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셔터를 누르고, 어떤 사람은 손을 내민다. 어떤 사람은 장면을 소유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생명을 붙잡으려 한다.
어떤 경우이든 모든 전문적 기술의 이면에는 반드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예의’가 담겨 있어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위기의 순간, 전문가의 손은 카메라 셔터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존재를 향해 먼저 뻗어 나가야 마땅하다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 질문은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어떤 전문적 지식을 가졌다 해도 그것에 몰두한 나머지, 철로에 빠진 살아 있는 존재를 건져내는 대신 나의 ‘굳어진 프레임’에 우선 담아내어 성과로 드러내려는 욕구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결국 사진이나 신문에서 프레임과 편집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어떻게 보고,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무엇을 ‘위해’ 볼 것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것을 살리는 시선인지, 아니면 나의 성취와 해석 안에 가두는 시선인지가 ‘편집’이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한편, 그런 편집을 통해 ‘존재가치’와 ‘가치 존재’라는 비슷하나 대립하는 명제 중 내가 어느 것에 우선 기울어졌는지도 드러날 수 있다. 사람은 ‘존재가치’를 ‘가치 존재’보다 우선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존재가치는 그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보다, 어떤 시선으로 세계 앞에 서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가치 존재란 성과와 결실에 의해서만 존재의 의의를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실제로 존재가치에 의해서 세계는 더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경심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존재가치란 결코 화려한 성취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리에서 오래 견딘 시선, 묵묵히 지켜낸 자리, 그리고 사소한 순간마다 살아 있는 것들 앞에서 잃지 않았던 예의가 세월 속에서 빚어낸 조용한 무게다.
존재가치의 추구: 변하는 시대 속에서 성실함이 남기는 발자국
신문과 사진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 오후를 보낸다. 마침 티브이 채널도 이리저리 돌려본다. 우연히 2006년 영화 ‘더 퀸(The Queen)’을 보게 되었다.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경계를 오가는 세련된 편집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존재감과 그 전통을 떠받치는 힘이 사뭇 묵직하게 다가왔다.
영화는 다이애나비의 죽음 이후 영국 왕실이 맞닥뜨린 거대한 정서적 균열을 다룬다.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던 다이애나비를 향해 대중은 폭발적으로 반응했고, 전통적인 왕실의 품위와 침묵을 지키려던 여왕은 그 변화 앞에서 당황한다. 그때 여왕이 뱉은 한마디가 마음을 자극했다.
“가치가 바뀌고 있다.”
짧은 탄식이었는데, 그 안에는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순간의 균열음이 담겨 있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대중은 더는 멀리 있는 왕실, 침묵하는 왕실, 장엄한 의례에 갇힌 왕실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자기 판단이 선명했다. 그들은 소통하는 왕실, 자신들의 슬픔을 함께 표현해 주는 새로운 상징을 원했다. 며느리의 죽음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인지했고, 자신은 가치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통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동시에 가치의 유행이 바뀔지언정, 오랜 세월을 지탱해 온 본질적인 무게는 쉽게 뒤엎을 수 없다는 사실도 버릴 수 없었던 고민이 컸던 모양이다.
나는 그 대목에서 여왕이 선택한 ‘가치’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했다. 그 말이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일까, 아니면 어떤 일의 결실과 성과를 대하는 태도일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존재가치’와 ‘가치 존재’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앞서 말한 대로, ‘가치 존재’란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남겼는가에 따라 평가되는 존재다. 그것은 업적과 역할, 지위와 효용을 통해 드러나는 가치다. 세상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기억하고 판단한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 누가 더 많은 결과를 냈는지, 누가 더 눈에 띄는 영향력을 가졌는지를 묻는다. 결국, 가치 존재는 어떤 존재를 본연의 자리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바깥에서 밀려오는 조건에 가깝다. 성과가 사라지면 존재가치는 미미해져 결국 흔들리고, 기록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의 존재감은 희미해지며, 시대의 기준에서 멀어지면 쉽게 다른 존재로 대체되는 인간의 비인간화다.
다시 말하지만, ‘존재가치’란 한 사람이 무엇을 이루기 이전에, 그가 어떤 시선과 태도로 세계 앞에 서 있는가에서 흘러나오는 고유한 무게다. 그것은 성과보다 깊고, 기능보다 오래가며, 지위보다 조용하다. 존재가치는 어떤 일을 했느냐와는 상관없다. 오히려 외부의 영향과는 상관없이 존재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어떤 마음으로 감당했는가, 어떤 자리에서 오래 견디며 자신을 지켜냈는가, 살아 있는 것들 앞에서 어떤 예의를 잃지 않았는가를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몸과 말과 침묵과 반복된 하루 속에 배어 있는 숨결이다.
‘가치 존재’ 그 숨결이 위로 올라가며 자기를 증명하려는 힘을 요구하고, 존재가치는 아래로 내려가 견디며 살아내는 힘에 가깝다. 물론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지만, 어느 쪽을 먼저 붙드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전혀 달라진다.
여왕의 말을 생각해 보면, ‘가치가 달라졌다’라는 말은 ‘왕’의 ‘가치 존재’보다 ‘존재가치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뜻일 수 있다. 여왕의 말속에는, 전통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며 변화는 언제나 가벼운 것도 아니라는 가치판단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전통은 고집이 될 수 있고, 변화는 허영이 될 수 있다는 판단도 감지된다. 그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왕족’이라는 존재의 무게감이 감지된다. 또한, 왕조가 감당해야 하고, 드러내어야 할 삶의 무게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자기 인지의 무력감도 느껴진다. 따라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을 조용히 들려주는 것 같다. 존재감을 위협하며 밀려오는 시대의 힘에 의해 가치가 흔들릴 때,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오래 숙성된 태도로 지켜내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것은 말로 주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며 한 사람이 끝없는 수양으로 자기 몸에 새겨 넣을 때 비로소 제 의미를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전통과 가치의 변화 속에서 진정한 존재감을 드러낸 또 한 명의 인물을 어느 야구 경기에서도 보았다. 왕실의 무게가 제도와 전통의 한복판에서 오래 견딘 태도라면, 그라운드 위에서도 나는 비슷한 존재의 무게를 본 적이 있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가네모토 토모아키다. 한국명 김지헌인 이 선수는 재일동포 3세로 연속 경기 풀이닝 출전 1,492경기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사실 그의 야구 인생은 화려한 스타의 출발과는 거리가 멀었다. 프로 입단 초기에는 ‘프로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라는 혹평을 받으며 방출 대상에 올랐던 무명이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부각되지도 않았고, 가능성도 희미해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상태를 도리어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기회로 삼았다. 21년의 선수 생활 중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것은 후반기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빛났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절정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이름 없이 반복한 훈련, 매일의 몸을 배신하지 않는 성실함이 쌓인 결과였다.
그가 이적한 한신 타이거즈는 그의 헌신 덕에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팀이 하위권을 전전할 때도 매일 수만 명의 팬들은 오직 ‘가네모토’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존재감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그가 언제나 홈런을 치기 때문도, 그의 기록이 늘 승리를 보장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팬들은 그가 서 있는 자리, 배트를 쥐는 방식, 부상 속에서도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는 몸의 언어에서 깊은 신뢰를 보았다.
과거 오사카 교세라 돔에서 그가 타석에 서는 것을 직접 보았을 때 나는 멀리서도 그의 존재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단기적인 업적만이 아니라, 그가 풍기는 ‘존재가치’라는 사실이다. 가치 존재라는 성과는 어느 순간 지나가고 기록은 언젠가 깨지지만, 존재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태도와 시간에서 흘러나오는 고유한 기운이며, 나아가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자유와도 직결된다.
이러한 존재가치는 스스로 고집부려 얻어내는 독선적 결과도 아니다. 남들 위에 서겠다는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획득되는 명예도 아니다. 사소한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아니 자기 자신이 비로소 전심으로 씌어주는 보이지 않는 관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스스로 쓰는 왕관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씌워지는 신뢰의 면류관이다.
결국, 존재가치란 말보다 몸에 밴 의식으로 먼저 도착하는 삶의 태도이다.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하기 전에, 그의 삶에서 먼저 발화하는 비가시적 언어다. 성실하게 누적된 시간이 빚어낸 선물이다. 그런 선물은 어떤 연설보다 깊고, 어떤 선언보다 오래 남는다. 그러므로 존재가치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간직하고, 어떻게 간직하게 하며 살 것인가와 연관된다. 그 말 안에 얼마나 살아 있는 삶의 숨결이 담겨 있는가의 문제이다.
언어의 두 지평: 의도적 언어와 함축적 언어
나는 존재가치 역시 인간 스스로 선택한 편집과 프레임에 의해 그 의의가 도드라지거나 폄훼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언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의도적으로 확장하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 언어’이다. 이 둘은 엄격히 구분되면서도 같은 결을 가질 수도 있다.
의도적 언어는 주로 정치적 연설이나 거대 담론에서 발견된다. 그 언어는 대체로 거대하고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주목한다. 마냥 확장되는 언어는 목소리가 높고 문장은 화려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안에는 구체적인 삶의 체온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지만, 누구도 당장 일상에서 살아낼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도적 언어의 문제는 그것이 거짓이거나 성취 불가능한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그 말들이 너무 쉽게 사람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점이다. 거대 담론은 자주 삶의 뿌리를 잃고 구호가 될 여지가 크다. 이때 말은 진리를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자신을 장식하는 깃발이 될 위험이 있다. 그 언어는 더는 이웃을 향해 걷지 않고, 높은 연단 위에서 자신을 과시할 뿐이다.
반면 함축적 언어는 어렵고, 미미하고 낮게 보인다. 또한 마치 시와 같아서 한참 생각해야 사람의 귀와 마음에 조용히 스며든다. 역설적으로 작고 미세하며, 손으로 붙잡을 수 있고 발로 달려가 직접 확인하고 관찰해 볼 수 있는 일상의 언어이기도 하다. 자기 발아래 일어나는 삶을 관찰하면서 찾아낸 세계마저도 너무 거대해서 그것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함축적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결코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삶의 주변 이야기를 조용히 건네도 충분하다. 그 이야기 속에는 거대한 구호가 없을지 모르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마음, 이웃과 나누는 소박한 웃음,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직하게 들려주는 힘이 있다.
함축적 언어는 작지만, 결코, 빈약하지 않다. 오히려 작기 때문에, 더 깊어질 수 있다. 씨앗 하나에 숲이 들어 있고 물 한 방울에 하늘이 비치듯, 함축적 언어는 작은 사물과 사건 안에 삶의 근본을 담아낼 수 있다. 이 함축 언어는 멀리 있는 추상으로 사람을 압도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사물로 영혼을 깨운다. 한 송이 꽃, 한 그릇 밥, 따뜻한 눈빛, 지친 어깨 위에 잠시 얹힌 손 같은 사소한 것들이 오히려 세계를 가장 정직하게 증언한다. 존재가치 자체를 주목하려고 노력한다.
불행히도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대부분 정치적이고 의도적인 언어가 우선한다. 소리는 크고, 말은 많아진다. 인간을 향한 연민의 숨결은 적고, 거친 숨만 내몰아 쉰다. 선언은 넘치고 실천은 메마르다. 이런 시대에 경전의 언어는 언제나 함축적이다. 평범한 이들의 삶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러 성인의 말이 그렇다. 예를 들어, 1세기 예수만 보더라도 씨 뿌리는 사람, 잃어버린 양, 겨자씨, 누룩, 포도원, 밥상, 우는 사람, 길가에 쓰러진 이웃을 주목했다. 예수의 언어는 세상을 정복하라는 권력의 옹호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본질적인 힘을 내포한, 그러나 일상의 언어였다. 기원전 4세기 장자 역시 삶의 미세한 이야기를 통해 거대한 질서를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일상의 지혜를 변주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리에게 거대 담론의 허세를 걷어낸 ‘시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말과 글로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말이 직업이 될수록 말은 쉽게 삶에서 떨어져 나온다. 글을 오래 쓰는 사람일수록 글을 잘 쓰는 일보다, 글이 삶을 배반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는 일이 더 절실해진다.
“지금 나의 유일한 일은 주님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 계속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단순하고 사랑 넘치는 관심으로 이 일을 합니다... 이것은 내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카르멜 수도회의 평수사였던 로렌스 형제의 이 고백은 읽을 때마다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그는 평생 요리하는 일과 신발을 수선하는 하찮은 일상에서 ‘신의 임재’를 관찰하려고 연습했다. 복잡한 언어로 하나님을 해명하기보다, 단순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삶은 세상이 복잡할수록 단순한 일상의 영성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증명했다. 그의 삶은 존재가치가 곧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거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한편,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삶에서는 언제나 함축적 언어가 압도한다. 이 언어는 높은 강단이나 거대한 구호에서 떨어지지 않고, 부엌의 연기와 신발 밑창의 먼지, 길가의 꽃잎 사이에서 조용히 길어 올려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참된 배움과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참된 배움은 높고 먼 관념으로 단숨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손에 닿고 발에 밟히는 가까운 자리에서부터 자신을 낮추어 익히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존재가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는 오래된 지혜의 길 지도에서 다시 살아난다. 존재가치는 높은 곳에서 갑자기 획득되는 빛나는 명패가 아니다. 아래에서 배우고, 낮은 자리에서 견디며, 사소한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동안 몸에 배는 삶의 향기다.
요컨대, 가치 존재가 위로 오르려는 이름이라면, 존재가치는 아래에서 숨 쉬며 깊어지는 이름이다. 참된 공부는 결국 존재가치를 향한다. 낮은 곳에서 배우는 사람만이 높은 곳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는다. 하학의 자리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숨을 듣고, 타인의 숨을 존중하며,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서 조용히 머리 숙이는 법을 배운다.
하학상달: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진짜 공부
하학상달은 일상에서 찾아내는 지혜의 공부이다. 가끔 독서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온몸이 무거워지며 눈꺼풀이 내려앉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앉아서 잠과 미련하게 싸우기보다 무조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문밖의 나무와 풀, 꽃들이 숨 쉬는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몸이 먼저 움직이면, 마음은 뒤늦게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이 ‘하학상달’은 조선시대 문인 안정복의 《하학지남(下學指南)》에 나오는 대목이다. 즉 “아래에서 배워 위로 도달한다.” 공자의 말씀을 옮긴 이 구절에서(『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 ‘아래’란 바로 삶에 가까이 있는 것, 즉 우리 삶에 가깝고 사소하여 알기 쉬운 일상의 도리와 윤리를 뜻한다. 사물을 대하는 태도, 인간의 도리, 날마다 행하는 평범한 행실을 바로 닦기 위해 우리는 공부를 하고 바카라을 읽는다는 의미다. 공부는 머리 위의 관념을 수집하기 전에, 발밑의 삶을 바르게 밟아나가는 일이라는 가르침이다.
한편, 하학(下學)은 낮은 것만 배우라는 뜻이 아니다. 낮은 곳을 통과하지 않은 높은 앎을 경계하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높고 깊은 진리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일상의 사소한 윤리와 가까운 관계의 바카라임, 몸에 밴 태도와 반복되는 행실을 소홀히 하면서 고상하게 말하는 진리는 쉽게 공중에 떠서 흩어진다. 고대 지혜자 코헬렛의 언어로 말하면, ‘헤벨’이다. 땅에 닿지 않은 진리는 사람의 두 발을 허공에 뜨게 만든다.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다 결국 피곤해지고 만다.
하학이라는 방식으로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공부,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일상의 태도가 몸에 배어 체화되는 순간, 어느덧 삶의 도약(上達)이 일어난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것이 진짜 공부라는 것이다. 땅바닥의 사소함에서 시작하여 저 높은 위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이 평범하고도 위대한 역설이 마음을 친다. 아래에서 배우는 일은 느리고 답답하며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와 성과의 문법에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을 밟지 않고 하늘에 이를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하학상달’의 길은 단순한 가치 존재를 획득하는 공부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모두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그것은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숨결을 배우고, 사소한 생명들의 숨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공부이다.
어느 날 숲 둘레길에서 차근차근 천천히 걷는데, 나비 한 마리가 리듬을 타듯 나무와 나 사이를 오간다. 제 몫의 꽃에 사뿐히 앉아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모습이 경이롭다. 작은 손바닥만 한 날개로 하늘거리는 자태를 숨죽여 바라본다. 그 가녀린 날갯짓이 일으키는 미세한 공기의 결이 내 주위를 순회한다. 더위 속에서 나비가 일으킨 작은 바람이 온몸에 청량한 생기가 되어 스며드는 기분은 참으로 상쾌했다.
사실 나비의 날갯짓이 내 몸을 식힐 만큼 큰 바람을 일으켰을 리는 없다 해도 그 작은 나비가 일으키는 가벼운 물결은 때로 실제보다 더 섬세하게 세계를 받아들이게 도와준다. 작은 생명이 흔드는 공기의 결을 느끼는 순간, 내 안에 쌓여 있던 무거운 열기도 가라앉았다. 그때 다시 깨달았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대한 결심만이 아니다. 때로는 나비 한 마리, 꽃잎 하나, 발끝에 닿는 흙의 감각이 더 깊은 스승이 된다. 생존은 나비가 일으키는 가벼운 바람에서 시작된다.
‘위’를 버리고 ‘아래’로 걷는 용기
가볍게 간식을 먹고, 늦은 오후, 아더 W. 토저의 글을 읽는다. 『하나님을 추구하다』다. 그는 날카로운 침 끝처럼 현대 교회의 맥을 정확히 짚어낸다. 촌철살인 같은 지혜가 가득하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지만, 너무 흔해서 가볍게 여겨지는 공기나 음식처럼, 오늘날 우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낮은 자리의 가치들을 너무 쉽게 상실해 버렸다. 토저에 따르면, ‘목적이나 비전’보다 ‘방향’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 것이다. 목적과 비전은 언제나 사람을 흥분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계획을 세우게 만든다. 그러나 방향이 틀린 목적은 아무리 웅장해도 결국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데려간다. 화려한 문명 속에서 현대인들은 세상의 목적을 얻는 대신, 인간으로서 존재가치를 향해 가는 방향을 잃어버린 듯하다. 돛을 높이 달았다고 해서 항해가 바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돛이 어떤 바람을 맞고 있는가이다.
그의 말은, 우리가 하늘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 예수의 길도 마찬가지다. 그의 길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성전 꼭대기나 세상 권력을 양도받을 높은 산 위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그런 높은 곳, 화려한 곳, 박수가 쏟아지는 곳에 위치시키려 하지만, 정작 그분은 그 반대편 극점인 ‘낮은 곳’에 말없이 서 계신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삶의 방식 역시 하학상달이다. 그는 내려가는 하향성을 끝내 ‘죽음’까지 유지했다. 그것은 무능력의 표시가 아니라 신의 아들로서 누리는 권리를 자유로 바꾼 삶의 편집이었고 프레임이었다. 올라갈 수 있어도 올라가지 않고, 증명할 수 있어도 증명해 내려 애쓰지 않으며, 소유할 수 있으나 소유하지 않는 소요유의 자유였다. 그 낮음 속에 오히려 하늘의 참된 권위가 있었다.
이처럼 태초부터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분은 이미 가장 낮은 ‘아래’로 내려와 존재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고백은, 가장 높은 진리가 가장 낮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왔다는 선언이다. 사소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아래의 삶이야말로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어린아이 한 명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루만지셨던 예수의 친절과 배려 그 자체다. 아래의 삶을 차근차근 살피는 비능률과 시행착오를 견디는 것만이 참된 ‘위’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자기 삶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시대는 어떤가. 무조건 ‘위’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려 한다. 먼저 높아져야 영향력을 얻고, 먼저 커져야 의미가 생기며, 주목받아야 진리가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 나 역시 ‘위’에 머물고자 하는 은밀한 허영을 품은 채, 아래에 흩어진 소중한 가치들을 짓밟고 지나치진 않았는지 두려워진다. 말로는 낮은 곳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높은 곳의 인정과 박수를 기다리고, 예수의 방향을 말하면서도 정작 내 발은 낮은 자리와 반대편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쉽게 쓰여진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인 윤동주의 이 고백이 나 자신을 향한 뼈아픈 고발로 들린다. 의도하든 하지 않든 나 역시 거대 담론과 화려한 수사 뒤에 숨어 사소한 일상의 실천을 회피하는 일이 많으니 말이다. 쉽게 쓰인 시가 부끄럽다면, 쉽게 말해지는 신앙과 학문은 얼마나 더 부끄러워야 하는가. 인생은 이토록 어렵고 사람의 하루는 이토록 무거운데, 우리의 언어가 너무 쉽게 하늘만을 말하고 있다.
하학상달의 방향은 거대한 이상을 말하는 자는 누구나 낮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공부에 몰두해야 한다는 의미다. 위대한 비전을 내세우며 곁의 작은 생명을 지나치지 않는 일이고, 높은 자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전에 낮은 자리의 숨소리를 먼저 듣는 일이다. 들어주는 이 없어도 자기 말을 수양해야 한다. 결국 방향이 바르다는 것은 시선이 바르다는 뜻이며, 눈앞의 작고 연약한 것들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일 수 있다. 보이는 작은 세계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라 또한 온전히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숨 쉼: 다시, 보이는 미시 세계를 향하여
오래전 연구원에서 정해진 출퇴근을 하며 틀에 박힌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60분의 점심시간은 어떤 것보다도 소중했다. 아주 유익했다. 그 짧은 휴식이 얼마나 긴요한지 배웠다. 가벼운 식사 후 잠시 산길을 따라 산바카라하다 한적한 벤치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시간은 순식간이었지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매번 같은 길을 걸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자주 보던 사물 속에서 매번 새로운 결을 발견할 때마다 신기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늘 물었다.
‘너는 오늘, 어제의 그것에서 다시 무엇을 보았느냐?’
이 질문은 반복된 산바카라을 통해 내가 배운 삶의 핵심 주제였다. 생뚱맞긴 하지만,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던져진 질문도 그것이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어느 날 그는 이 질문에
“살구나무 가지를 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때 하늘에서는
“네가 잘 보았다”
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참고. 예레미아 1:11-12)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제대로 눈여겨보는 행동이, 곧 보이지 않는 신비와 맞닿아 있음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막연한 관념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을 설명하지 않았고, 추상적인 명제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눈앞에 있는 가지 하나를 보았다. 그 사소한 징후를 통해 진리가 드러난다.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깊은 뜻도 조금씩 열리는 법이다. 지천에 널린 작은 꽃 하나, 즉 미시 세계에 주목하지 않는 한, 거시 세계를 마음으로 그려내기는 불가능하다.
오늘 나는 주변에서 어떤 작은 것을 보았는가. 거칠게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고, 맑아진 하늘 아래 잔잔히 흐르는 물을 보았으며, 만개한 꽃과 바닥에 툭 떨어진 송이들을 보았다. 살아 있는 꽃과 떨어진 꽃이 함께 놓인 자리에서, 생명의 찬란함과 소멸의 고요함이 한 장면 안에 머물고 있었다. 그 미세한 틈새에서 세상을 운행하는 세밀한 손길을 느낀다. 마음이 움직이고 몸이, 발이 따라나선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찰나의 순간마다, 돌아서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소중한 일상의 풍경들을 만난다.
노란색 꽃 뒤에 수줍게 숨어 있는 작은 열매,
정갈한 나무 벤치와 기꺼이 썩어 거름이 되는 나무뿌리,
비 오기만을 기다리는 정겨운 징검 돌다리,
불타듯 떨어지는 저녁 태양과 나란히 서 있는 꽃들,
바닥에 낮게 깔려 하늘을 우러러보는 야생화,
오롯이 숨죽여 우주와 숨을 주고받는 나비,
그리고, 그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이다.
이 사소한 장면들은 모두 하학의 자리에서 만난 상달의 스승이다. 낮은 곳에 있고 작은 곳에 있으며, 그냥 지나치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들이다. 멈추어 바라보면 그것들은 저마다의 언어로 삶을 가르친다. 꽃은 피고 지는 법을, 나무뿌리는 썩어 살리는 법을, 징검돌은 기다리는 법을, 나비는 가벼운 몸으로 우주를 통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렇게 미미하게 움직이는 모든 길은 다시 ‘바람, 인간의 숨’으로 모인다.
어느 때나 내가 보낸 하루는 짧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일 없지만, 그 안에서는 무한한 존재가치들이 뒤엉켜 역동한다. 신문 한 면을 바라보던 프레임의 감각도, 한 사람의 존재감이 남기는 조용한 무게도, 시처럼 낮게 내려앉는 언어도, 아래에서 배워 위에 이르는 공부도, 예수께서 서 계신 낮은 자리도 결국은 하나의 물음으로 수렴된다.
‘나는 살아 있는 것들 앞에서 그것들과 함께 숨 쉬고 있는가.’
하학의 자리는 거창한 이념의 출발점이 아니라, 숨 쉬는 생명들과 함께 머무는 가장 낮은 땅바닥이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상달의 신비를 다시 배운다. 낮은 꽃잎 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눈, 바닥에 떨어진 꽃 한 송이를 함부로 밟지 않는 발, 나비의 가녀린 날갯짓에서 생명의 바람을 느끼는 마음. 그 작은 배움들이 모여 마침내 사유의 성숙으로 이끈다.
할 수 있는 대로, 나는 스스로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변방으로 물러나고, 더 낮은 곳에서 내 앞의 사물을 관찰한다. 더 작은 것들 곁에서 지혜를 배우며, 더 조용한 숨결 속에서 진리를 더듬는다. 하학상달은 저 코헬렛의 지혜 습득 방식이기도 하다. 낮은 곳에서 숨 쉬는 삶의 지평은 그렇게 열린다. 숨 한번 내쉬는 이 짧은 찰나의 시간 속으로, 살아 있는 작은 소리가 공기를 따라 내 삶을 감싸고 흘러간다. 주변이 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면 비로소 나도 살아 숨을 쉴 수 있다.
오늘도 깊은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다시 생명의 숨을 가슴 깊이 들이마신다. 하학의 자리, 이 낮은 땅바닥에 참된 하늘의 구원이 살포시 내려와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