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론을 이렇게 씁니다.”
1. 반론 쓰기에 대하여
반론(反論)은 그저 반대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상대가 주장하는 바를 함께 조각해 보려는 의지를 표명한 글입니다. 상대의 주장을 허무는 것만이 최선은 아닙니다. 반론은 그 주장이 보지 않으려는 것, 혹은 과도하게 벗어나려는 사유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어보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넘칠 수 있는 나의 주장을 향해서도 작은 방파제를 스스로 세워두는 것입니다.
반론은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노력입니다. 반론의 의의는 단순히 “틀렸다”라는 논증을 일방적으로 펼치지 않으려는 데 있습니다. 그 주장이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 왜 온전하지 못한 지, 어떻게 본연의 길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무엇을 살리고 과감히 버려야 하는지를 납득할 만한 어조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주장이 놓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기억의 윤리를 어떻게 훼손할 수 있는지를 차분히 짚어내는 글입니다.
내가 반론의 글을 쓸 때 내딛는 첫걸음은 상대 주장에 담긴 논쟁의 핵심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일어난 사실은 찰나의 순간이기에 누구든지 그 사실의 적확성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해석된 사실’이라는 전제입니다. 다음으로, 그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떤 주장에 방점을 찍는지를 세심하게 분석합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사실관계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주장이 기대고 있는 사유의 방식 자체를 되묻는 것입니다. 그 주장이 어떤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극적으로 어떻게 인간 이해를 호도하는지, 나아가 슬롯적 퇴행을 어떻게 유발하는지를 면밀히 읽어내려 합니다. 이처럼 반론은 문장 하나하나에 대응하기보다, 그 글 전체를 가능하게 한 세계관을 그 글 안에서만 온전히 읽어냅니다. 끝으로 나의 반론 쓰기는 상대 주장에 담긴 추상적·철학적 개념을 관찰합니다. 물론 이런 개념들은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상대가 그런 주제에 전문적 식견이 있거나 평소 천착해 온 주장들이 견실하다면 더욱 유의해야 합니다. 상대의 주장을 존중하면서도 나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개념에 대응할 나만의 철학적 개념을 생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문장을 작성합니다.
나는 반론 쓰기가 일반적인 에세이나 수필을 쓰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문장은 간결해야 하고, 단락도 길게 늘일 필요가 없습니다. 대략 서너 개의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첫 번째 문장은 반론해야 할 이유나 근거를 제시합니다. 두 번째 문장은 상대의 주장이 어긋났음을 나의 문장으로 정중히 제안합니다. 세 번째 문장은 상대의 주장이 어떤 슬롯적 문제를 야기하는지, 그리고 나의 주장이 어떤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적시합니다. 되도록 함축적이고 간결하게 쓰려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을 활용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주장으로 상대에게 반론을 전달해야 합니다.
반론은 글로 쓰였지만 글이 아니라 ‘말’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반론의 결론은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쓰거나 ‘그럴 것이다’라는 추론만으로 왜곡된 주장을 펼치고, 오류가 있는 주장을 모른 척 강조하는 글도 있습니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글 중에서 지나치게 자기주장을 주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좌우’로 갈라지기 쉬운 우리 슬롯에서는 어느 한쪽의 주장이 정론인 듯 압박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도된 이념에서 서술하는 글은 어떤 경우에도 반론다운 반론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반론이 진영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상식(常識)’이라는 터 위에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비겁한 반론은 왜곡된 세력을 등에 업고 내세우는 편향된 주장입니다. 즉, 그들을 옹호하는 세를 통해 자기주장이나 반론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글입니다. 개인적이긴 하지만, 좋은 반론은 ‘인간다움’이라는 인간에 대한 상식적 자기 고백에 기반해야 합니다. 요컨대 나는 반론이 상대의 얼굴을 보며, 나의 얼굴을 감추지 않고 그 마음에 호소하듯 말처럼 들려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론 쓰기의 마지막 이야기는 문장에 대한 것입니다. 반론의 문장은 상대의 글에 대한 나의 대립하는 감정을 품되, 그 정서에 휩쓸리지 않는 문장이어야 합니다. 나의 경우 격한 감정이라면 절제된 형식 안에 제한된 단어로 쓰려 하고, 감정보다는 논리가 더 필요한 경우라면 최대한 개념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를 적절하게 구사하려 합니다.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는 순간의 통쾌함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반론이 오래 남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모든 반론의 의의는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해도 반론의 문장은 정중하면서도 날카롭게 찔러야 하고, 외치면서도 낮은 소리로 말하는 문장이면 좋습니다. 나는 반론의 끝 문장을 주로 동의를 구하는 의문형으로 씁니다. 수사 의문문도 자주 활용합니다. 질문형 결말은 우리에게 윤리적 바카라임을 남겨놓으려는 의도입니다.
결국 반론 쓰기란 논리를 세우는 기술이면서, 인간을 지키는 문장의 윤리라는 것이 나의 지론입니다. 반론은 반대편을 무너뜨리는 논리적 망치가 아니라, 상대의 주장으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인간다움의 윤리를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는 일입니다. 해석된 사실이 일으킬 수 있는 오류를 함께 바로잡고, 고통의 무게를 되돌려놓으며, 해석의 이름 뒤에 숨으려는 윤리적 바카라임을 붙잡는 일입니다. 나의 반론 쓰기는 단순한 의견 표명을 넘어, 시대의 무감각에 맞서는 ‘공부하는 자’의 윤리적 태도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2. 반론의 예
오늘 뜻하지 않게 반론 하나를 써야 했습니다. SNS에 올린 나의 반론문을 그대로 옮겨둡니다.
<어느 노장자의 주장에 대한 행인의 반론>
오늘 느닷없이 SNS에서 내게 공유된 그 ‘해석된 사실’은 우리 슬롯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퇴행을 옹호할 수 있으며,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이치에서 벗어난 인간이 자기 성찰의 힘마저 스스로 조롱하는 어리석음을 방조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를 인용하며 5·18 역사를 상식에서 어긋나게 희화한 행위를 ‘시간의 필연적 진보’나 ‘발전론적 사고’, ‘이념의 자기모순’으로 재해석하는 최진석 님의 사유는, 발전된 문명 아래서도 인간다움은 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회피하는 주장처럼 들린다.
“왜곡”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해도, “5·18을 법에 가두는 것”으로라도 그날 그 땅의 사람들이 겪은 최악의 슬픔만큼은 인간의 손에 의해 함부로 경시되지 않도록 지켜야 하지 않을까.
3. 반론의 해설
이 반박문의 제목처럼, 나는 ‘노장자(老莊者, 老長者)’와 ‘행인(行人)’의 대조를 의도적으로 구상하여 노장 철학의 핵심, 특히 장자의 우화를 은유했습니다. 노년의 중후한 장자 전공자의 주장을 지나가는 행인이 살짝 반박한다는 뜻도 함께 담았습니다.
덧붙이자면 ‘노장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노년의 장자 전공자라는 물리적 나이와 이력을 뜻하는 것을 넘어, 노장(老莊) 사상 그 자체를 체화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학문적 권위와 거대한 산’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나의 반박은 평생을 그 철학에 천착해 온 이의 중후함과 그가 가진 슬롯적 발언권의 무게를, ‘행인’이라는 가벼운 존재와의 대비를 통해 다루고자 했습니다. 그저 길을 지나가던 평범한 이(상식과 예의를 가진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장자 철학의 핵심인 소요유(逍遙遊)나 무대(無待)를 생각할 때, 어떤 권위나 고정관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길을 걷는 ‘행인’이라는 설정이야말로 가장 장자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또한 나는 이 반론을 통해 나의 평정심이 무너지지 않았음을 ‘살짝’의 미학을 통해 표현하려 했습니다. 중후한 노학자의 거대한 담론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런데, 그 길에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상식’은 두고 가셨네요?”라고 툭 던진 것입니다. 평소 반론을 쓸 일이 거의 없지만, 가끔 이런 문장을 쓰면서 반론을 나 자신을 반박하는 도구로도 활용하려는 의지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세계는 모두 나의 자발적인 어긋남으로 인해 피곤해진다는 것을, 고대의 지혜자인 코헬렛(전도자)에게 이미 배웠기 때문입니다.
반론(反論)은 반론(半論)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