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나의, 가볍거나, 바람 같은 서재

by푸른킴


1.

내 앞, 그러니까 내 눈이 나뭇잎의 모양새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숲이 있다고 합시다. 그 숲에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상황에서, 혹시 내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꿋꿋하게 서 있는 저 나무들 속에 바람이 불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 해도 나는 굳이 그 숲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 즉 숲의 변두리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들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바람, 아니 폭풍의 시작은 늘 미풍이니 말입니다.


서재 앞, 그러니까 초록 짙은 아카시 나무 아래, 내 눈이 먹이를 찾아 날아드는 작은 새가 어떤 모양으로 땅에 내려앉는지 궁금할 때, 그 날개 끝을 눈여겨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텃밭이 있다고 합시다. 혹시 내가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감자와 옥수수 속에 어떤 거대한 삶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해도, 나는 굳이 가까이 걸어가 그 밭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가장 변두리의 감자 더미 속으로, 어디선가 순식간에 날아든 새들이 쉴 새 없이 고개를 내리 찧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시작은 작은 새가 먹다 남긴 양식 한 톨이 땅속에서 죽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니 말입니다.


2.

지난 몇 년간 서재 월서각을 서너 번 옮겼습니다. 다 이유가 있었지만, 돌아보니 자주 기억되는 풍경은 양평에 머물 때의 것입니다. 그 서재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었고, 바로 위로 넓은 텃밭이, 그 뒤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더 멀리는 산으로 들어서는 오솔길이 있었습니다. 서재에 머무는 날이면, 아침이나 저녁이나 창 너머로 바라보는 풍경에는 언제나 새와 바람, 그리고 여러 소리가 생동했습니다.


그날도 구름이 수시로 드나들던 아침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었고, 잠깐 맑아진 하늘 사이로 흐린 기운이 조금 오래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바람은 조금 더 숲 안으로 들어갔고, 그때마다 숲의 나무들은 밀려드는 바람에 몸을 맡겨 춤을 추듯 넘실거렸습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그 춤사위가 부드러운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멀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해가 높아질수록 새들이 좀 더 자주 밭에 내려앉았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이 밭을 일구던 분이 떨어뜨려 놓은 양식을 찾아, 새들은 대부분 두 마리씩 짝지어 날아들었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내 눈에 펼쳐지는 저 풍경을 보면 새들에게 저 밭은 더 없는 생명의 저장소일 것입니다. 그들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내려앉을 때 일으키는 하강의 신호음은 거칠고 단호했습니다. 그 소리가, 새들에게는 그저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일뿐이라 해도, 그것이 만들어 주는 풍경은 갈수록 생의 의지가 무뎌져 가는 나를 한 번 더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점심이 가까워질수록 새들도 자신의 지저귐을 노래가 아니라 생존의 소음처럼 더 간절히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것마저 좋았습니다. 자신이 품고 있던 삶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각인하려는 그 노력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길이 달라졌지만, 산으로 난 틈 길, 그러니까 산과 밭 사이로 난 얇은 등산길로 몇몇 사람들이 요란한 웃음이 섞인 이야기와 함께 내려오던 풍경도 여전히 눈에 선합니다.

3.

다시 옮긴 서재는 도시의 변두리에 자리했습니다. 이전 서재와는 풍경이 사뭇 다르지만, 여전히 비슷한 느낌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드물고, 새와 나무와 하늘이 보이며, 길 건너 산으로 오르는 둘레길도 있어서 나의 서재로는 딱 좋습니다.


어느 날 밤, 마침내 선교사 언더우드의 일대기가 담긴 바카라을 펼쳤습니다. 오래전부터 그 바카라은 바카라상 거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손 뻗으면 닿을 그 바카라을 거기에 오랫동안 그대로 두었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날은 잠을 조금 미루고, 일부러 바카라상 스탠드의 백열전구만 켜 둔 채 바카라장을 넘겼습니다. 실감하기 어렵고, 바카라으로 읽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근대 조선과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익숙한 듯 낯설었습니다. 몇 장을 넘기다가 번역자가 남긴 이 대목에서 좀 더 머물렀습니다.


“이 바카라은 아직도 그 명성과 활동에 비해 너무나 덜 알려진 언더우드의 생애와 활동을 그런대로 잘 묘사해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기가 보여주는 공통적인 한계점이 이 바카라에서도 발견된다. 바로 전기 주인공의 실수나 한계점이 정직하게 표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런 점을 아예 묵살하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변명 혹은 변호를 한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전기 주인공의 공적이 과장되어 있거나 진실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바카라을 단지 번역만 하지 않고 곳곳에 역주를 달았는데, 이는 현재 밝혀진 사실에 입각하여 그런 오류나 한계점을 바로잡아 보려고 한 것이다.”


번역자가 이 바카라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넌지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에는 공과(功過)가 함께 있을 터인데, 이 바카라이 ‘사실의 객관성’을 충분히 담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달리 보면 번역자로서 자기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밤은 깊었고, 바람은 짧게 여러 번 우는 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번역자의 가벼운 탄식을 들었고, 멀리 원저자의 마음의 부드러운 변명에도 한 번, 가볍게 끼어들어 보았습니다. 이 바카라의 저자가 언더우드와 삶의 자리를 함께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녀는 ‘사실의 객관성’보다 ‘사실의 해석된 객관성’을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 글을 그 모습대로 두는 것도 좋을 법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언더우드라는 인간의 결함 너머, 그 인간 자체를 자신이 이해하려 했다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세계 무엇인들 ‘사실의 객관성’을 오롯이 담보할 수 있는 글이 있을까요. 신의 계시라는 경전마저도 해석된 사실이 가득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밤이 늦어 바카라을 덮었습니다.


4.

다시 아침, 바람이 거칠고 하늘은 구름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흘렀습니다. 어제 읽고 덮었던 바카라을 조금 더 읽다가, 오전 끝 무렵에 커피를 한잔 내렸습니다.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거름종이를 올려 두는 과정을 습관적으로 거쳤습니다. 3주 정도 지난 킬리만자로 피베이를 평소보다 조금 많은 양으로 내렸습니다. 예상대로 그 맛은 생각과 달리 조금 강하고 진했습니다.


커피의 진한 맛이란 곧 ‘쓴맛’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쓴맛을 ‘커피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500원 동전 하나에 채워질 만큼의 양을 단번에 들이켜며 찰나의 맛을 직험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에스프레소’라는 이름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간직해 온 그 맛이 그대로 드러날 때 비로소 ‘커피가 이 맛이지’ 하는 쾌감을 만끽합니다. 물론 나는 쓴 커피보다는 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바로 그 맛을 떠올릴 수 있는 커피를 좀 더 좋아합니다.


오늘 나의 커피도 평소보다 조금 ‘쓴맛’에 가까웠습니다. 기대와 달라 아쉬웠지만, 그대로 마실까 몇 번 고민하다 결국 뜨거운 물을 곁들였습니다. 겨우 입맛에 맞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득 쿠키를 곁들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카라상 저편에 남아 있던 쿠키 몇 개를 가져다가 커피 옆에 두고 먹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바카라상에서 일어나 서너 걸음만 걸으면 가져올 수 있는데도 그것이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천천히,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어 쿠키 서너 개를 가져왔습니다. 힘을 쓴 덕분에 쓴맛은 훨씬 부드러워졌습니다. 마음속에서 ‘잘했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나의 ‘작은 일’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도로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은 충분히 타당합니다. 행복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는 말도 받아들일 만합니다.


별것 아닌 일을 겪었지만, 이런 사소한 일들은 수시로 많은 판단을 요구하는 나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무엇보다 ‘사실의 객관성’을 집요하게 캐묻는 시대를 받아들이는 데 유익합니다. 이런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갈 현명한 답들은 수시로, 또 제한 없이 제공됩니다. 그 어느 것도 쉽게 ‘정답’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을 보는 일, 밭에 날아드는 새들의 소리를 듣는 일, 바카라의 서문을 읽고 그 속에 담긴 생각을 듣는 일, 생각만큼이나 진하게 내려진 커피를 마시는 일은 모두 나에게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언제나 내 삶의 찰나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나의 사실을 곧바로 자기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나 역시도 나에게 일어난 ‘사실’에 대해 온전히 객관적인 이해자가 아니라, 주관적 해석자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에 열 명도 채 오가지 않는 이 한적한 서재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 해도, 내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전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된 나의 사실’이 됩니다. 나는 사실의 경험자이자, 동시에 그 사실의 해석자입니다. 사실의 경험은 순간에 머물지만, 사실의 해석은 수없이 변주되며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실에 주어지는 많은 답은 결국 모두 ‘사실의 해석적 객관성’ 위에 놓여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해석적 객관성’이란, 어느 사실이라도 그 사실을 해석하는 사람의 지금 환경, 그 사실로부터 기억된 단어들, 그 사실을 함께 겪거나 나눈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이미 지나온 시간의 간극까지 함께 고려할 때 주어지는 객관성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의 주관이 혼자만의 방에 머물지 않고, 타인의 공감과 대화 속에서 잠시 객관성의 빛을 얻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실과 해석’에 있어서 모두 조금씩 달라지는 인간, 곧 ‘변화하는 인간(Homo mutans)’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사실을 말할 때, 나는 늘 그 사실의 주변을 맴돌다 사실 뒤에 자리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내가 본 바람은 지나갔고, 새들은 날아올랐고, 커피의 온도는 달라졌고, 바카라장을 넘길 때 내 안에 머물던 감정도 처음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해석의 말은 언제나 일어난 사건보다 늦습니다. 그렇게 해석은 언제나 사실보다 조금 뒤에 옵니다. 그러나 늦게 도착했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과 무관한 허망한 이해는 아닐 것입니다. 달리 보면, 그 늦음 때문에 우리는 일어난 사실을 다시 관찰하고, 분해하고, 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이 내 안에서 어떤 해석의 결과로 남았는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해석된 객관성이란,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져 버릴 사실을 붙잡아 지금 여기에서 계속 변주하여 생존하게 하는 작은 지혜의 등불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5.

너무 포괄적이긴 하겠지만, 결국 나에게 일어나는 사실은 끝내 ‘해석’으로만 기억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판단’은 당사자에게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검증하는 일조차 반드시 나의 몫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내게 더 필요한 것은 검증보다 ‘해석’의 타당성을 주목하는 일입니다. 만약 내가 ‘해석자’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나는 먼저 ‘과거 사실에 대한 지금-여기 나의 해석 태도가 공정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정성의 토대에는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인식의 자기 유한성이 놓여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자기 해석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기록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어떤 사람은 대화로 그것을 견디며, 어떤 사람은 오랜 침묵 속에서 그 사실이 자기 안에서 다시 말 걸어오기를 기다립니다. 나에게는 서재에서 겪는 일상의 경험이 새로운 해석의 지혜로 나를 데려갑니다. 숲의 변두리에서 바람을 보고, 밭의 가장자리에서 새들의 소리를 듣고, 밤의 바카라상 앞에서 한 번역자의 마음을 듣고, 오전의 커피잔 곁에서 내 작은 움직임을 살피는 일은 모두 내가 나의 유한성을 배우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오래전 코헬렛이 붙들었던 한 단어 곁에 나를 잠시 머물게 합니다.


히브리성경 전도서(Qohelet, Ecclesiastes)의 코헬렛은 이것을 ‘헤벨(Hebel)’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헛되다’는 상투적인 의미에 갇힌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말에 가깝습니다. 그가 힙합의 가사처럼 후렴구에 반복하며 전하는 이 말은 이 땅의 삶에 대한 인식의 유한성을 솔직하게 선언하고 고백하는 진솔한 명제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기보다, ‘나는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는 사유에 닿아 있습니다.


코헬렛의 관점에서 보면, ‘알지 못하니’ 신의 자유로운 행동의 이면을 관찰하고 캐묻겠다는 의지가 생깁니다. 한편으로는 ‘신의 자유’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유의 실체를 자기 삶 속에서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탐구를 위해 코헬렛은 신의 마음 안으로 직접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신의 의지를 자기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다시 말해 코헬렛은 삶의 모든 것이 ‘헤벨’이라는 거대한 사유를, 자기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해석함으로써 이해한 것입니다. 그는 인식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신의 뜻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그 뜻을 더듬어 해석하는 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에게 야훼라는 신은 사건을 일으키는 사실의 주인이고, 그는 그 신이 일으킨 사실에 대한 해석을 수없이 반복하며 신의 의지를 주도하는 중핵으로 접근해 가려는 사람입니다. 끝내 그 중심에 도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코헬렛의 ‘헤벨’은 포기의 언어라기보다 겸손한 추적, 관찰의 언어에 가깝습니다. 알 수 없으므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으므로 더 조심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 알지 못하므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품고 더 낮은 자세로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신앙의 해석은 바로 그 낮은 소리를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가진 사실이 절대화될 수 없고, 내가 내린 판단이 계시처럼 확정적일 수 없기에 내가 본 것과 들은 것과 겪은 것을 그저 조심스레 모두 앞에 내려놓는 일 말입니다.


이처럼 서재의 오전은 예기치 못한 존재들의 방문으로 풍성해지는 사건으로 가득합니다. 숲의 바람, 먹이를 찾는 새들, 이름 모르는 등산객들의 발걸음, 익숙하지만 새로운 바카라, 커피와 쿠키, 그리고 한 끼의 양식 같은 생각 한 토막이 모두 내가 겪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늘 더 반가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YHWH의 ‘영원’에 닿아 있는 한 말씀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말씀이 이른 아침 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조용히 내려오는 일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세계에서 내가 겪은 사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나의 밖에서 나의 안으로 들어오는 경전의 한 톨, 한 잎 말씀은 중요한 매개체가 됩니다. 그것은 나의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넘어, 나를 사실에 대한 온전한 해석자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우, 경전의 한 말씀은 내가 본 바람을 다시 보게 하고, 내가 들은 새들의 소리를 다시 듣게 하며, 내가 마신 커피의 쓴맛과 내가 집어 든 쿠키 몇 조각의 수고까지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게 합니다. 그 ‘말씀’은 내가 소유한 사실을 확증해 주기보다, 내가 사실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나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 물음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앎이 얼마나 얇은지, 나의 판단이 얼마나 가벼운지, 그럼에도 그 가벼움 속으로 얼마나 깊은 은총이 스며들 수 있는지를 배웁니다.


나에게 어느 서재의 오전은 단지 하루 중의 한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이 숲의 변두리를 흔들고, 새들이 밭의 가장자리로 내려오고, 바카라 한 권이 오래된 밤을 건너 아침의 생각으로 이어지고, 커피의 쓴맛이 뜨거운 물과 작은 쿠키 곁에서 부드러워지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거대한 세계와 만나는 해석의 순간입니다. 그 모든 사소한 사실들 사이로, 위로부터 한 말씀이 천천히 내려와 나의 해석을 고요히 만져주는 사건입니다. 오늘은 이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신약성서 골로새서 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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