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불후의 명곡―양희은 편

늙은 군인의 노래, 늙어가는 모든 이를 위한 노래

by푸른킴

노래가 여는 아침

이른 아침, 바카라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때면 먼저 노래 몇 곡을 찾는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음악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故 김민기의 1집이나 2집은 아침의 풍경에 잘 어울린다.


한 곡을 몇 번 듣다 보니 알고리즘은 자연스럽게 여러 버전의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그 가운데 몇 해 전 한 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가수 양희은 특집도 있었다. 그날 무대에서 다시 불린 양희은의 노래들 가운데, 내 마음은 유독 세 곡 앞에 오래 머물렀다.

<네 꿈을 펼쳐라> — 윤하 편곡
<한계령> — 쏘냐
<늙은 군인의 노래> — 홍경민


김민기 곡풍과는 결이 달랐지만, 양희은의 차가운 듯 관조적인 음색에 실렸던 '네 꿈을 펼쳐라'와 '한계령'도 윤하와 쏘냐의 세련된 편곡에 힘입어 한 사람이 떨쳐낼 수 없었던 삶의 회한과 동시에 희망을 그려내는 데 손색이 없었다. 이 노래들의 끝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이어진다는 것은 꽤나 있음직한 사유의 여정을 만들어주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노래는 오래전부터 내 삶의 어느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노래였다.


https://tv.nate.com/clip/5106339


노래가 깨우는 기억

어떤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단지 그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불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노래 안에 담긴 어떤 서사가 나의 기억 속에서 자연스레 되살아났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오래 기억하는 노래들은 반드시 내가 직접 겪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지난 세월, 역사의 자리를 지나간 이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뒤따랐을 뿐이다. 뿌연 가스 연기에 뒤덮인 거리에서 두 힘이 대치하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걸어갈지 정한 채 무작정 시위대 속으로 스며든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나의 역사가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압군을 향해 돌 하나 던진 일이 시대의 바카라임을 다한 증표가 될 수도 없다.


다만 그날의 이야기들이 내게 남긴 것은 있다. 바로 그 시절 어떤 노래들을 평생 품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노래들은 나의 훈장이 아니다.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증명해주는 표지도 아니다. 그저 그 시절, 그 자리에서, 내 삶의 전부를 걸어 무언가에 참여하고 싶어 했던 한 젊은 날의 순진한 흔적일 뿐이다.


노래가 안내하는 인생의 마지막 항구

그날 우연히 다시 듣게 된 <늙은 군인의 노래>는,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끝이 닿을 어떤 항구처럼 남아 있다. 그것은 내면화된 기억이며, 아직 가야 할 방향을 비추는 작은 불빛이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나이 들어가는 모든 이에게 바치는 헌정곡’이라 부르고 싶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든, 그의 인생에는 마지막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올 때, 그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이 노래는 그 질문을 조용히 되새기게 한다.


어느 날은 이 노래에 나의 삶을 투사하여 가사를 새로 써본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 글이 어느 바카라장 속에 깊숙이 파묻혔는지 찾을 수 없지만, 기억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아마 그때 나는 이 노래를 통해 내 삶의 마지막 장면을 미리 그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젊은 시절 이 노래를 들을 때 내게는 시위의 현장을 그리워하며 노래로나마 그 시대에 편승해보고 싶은 가볍고도 순진한 역사의식이 있었다. 어쩌면 역사에 대한 설익은 나의 의식을 이 노래 위에 슬쩍 기대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이 노래의 의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낯선 길로 흘러갔다.


노래와 함께 항해했던 투쟁의 계절

다시 불리는 이 노래가 화려하게 편곡되고, 세련된 연주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낯설다. 그 시대를 투사처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노래들은 단순한 향수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발전했다 해도, 이 노래에 실려야 했던 역사의 꿈은 여전히 먼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 노래에는 노병은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직 죽지 않아야 한다는 희망이 들어있다. 그때 불태웠던 삶의 꿈이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못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오래전 일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학교의 3월, 4월, 5월, 6월은 언제나 ‘투쟁’의 계절이었다. 학교는 연일 동맹 휴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고했고, 나는 하릴없이 최루탄 연기 아래에서 비어버린 수업을 에둘러 받아들여야만 했다. 강의가 없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교 잔디밭 한쪽, 나무 그늘 아래 누워버리곤 했다. 결강되고 휴강된 수업을 하늘 아래 낮잠으로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그 삶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물론 후회는 없다. 그 시절을 그렇게 통과하며 얻은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나는 살아가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시대가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자신의 뜻을 삶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웠다. 시대의 바른 길은 언제나 지난한 투쟁을 요구할 뿐, 쉽게 얻어지는 어설픈 결실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시 기억하는 희망가

이제 자연스럽게 나이 들었다. 생각과 삶의 깊이와 넓이는 여전히 미숙하지만, 나의 삶도 바로 그 지점에서 더딘 걸음으로, 미미하게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삼는다.


요즘 나는 <어른의 품위>라는 바카라을 읽고 있다. 문득 생각한다. 품위란 가볍게 지나칠 말이 아니다. 다만 그 태도가 단지 고운 말이나 세련된 행동 속에만 담기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진정한 품위란 자기 시대에 대한 성찰이며, 젊은 날 꿈꾸었던 세계가 지금 이 자리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꿈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 꿈이 흐려지지 않도록 나는 얼마나 애썼는가. 어른의 품위란 어쩌면 그런 질문 앞에 조용히 서는 일이다.

출처. 알라딘


나의 노래는 나의 역사를 대변한다. 내가 역사에 어떻게 참여했는가는 물론이고, 그 지난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이 노래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그 노래가 처음 불렸던 ‘그때-거기’와, 다시 들려오는 ‘지금-여기’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그러나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치열하게 살아보려 했던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의 흔적이 내게는 바로 이 <늙은 군인의 노래>다.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왜 내가 이 노래를 ‘모든 늙어가는 이를 위한 노래’라고 부르고 싶었는지 말이다. 이 노래의 가사 중 “손주 손목 잡고 백두산 구경일세.”가 있다. 그 한 줄 안에는 단순한 노년의 한적한 여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이 있다. 아직 살아갈 이유가 남아 있다는 희망의 선언이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끝내 간직해온 희망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일이다. 비록 그 희망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희망을 향해 기울어진 삶의 자세 자체가 이미 충분한 의미일 수 있다. 블로흐가 말한 ‘아직-아님(Noch-Nicht)’의 희망도 아마 그런 것이리라. 그의 ‘아님’은 단지 ‘없음’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일이다. 비록 끝내 닿지 못한다 해도, 그 방향을 잃지 않는 일이다.


삶은 어디서 출발했든 거친 길과 바다를 지나 마지막 항구를 향해 안착하는 여정이다. 그 길 위에서, 오래된 노래 하나는 여전히 작은 등불처럼 나의 앞에 켜져 있다. 언젠가 그 등불마저 조용히 잦아드는 밤이 온다면, 나는 그 어둠을 내 삶의 동반자라 기꺼이 부를 것이다. 모든 불빛을 품은 뒤에야 비로소 도착하는, 깊고 검은 안식의 바다야말로 늙어가는 이들이 부를 희망가일 것이다.


오늘 당신에게는 어떤 노래가 삶의 기억을 일깨울지, 가볍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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