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론(25),작은 이야기 속에서
일상 철학 찾아내기

by푸른킴
“한중담은 일상의 파편을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아주 사소한 눈높이에서
시작해 마침내 나만의 철학적 시선에 도달하는 문학적 철학화의 수행이다.”


I. 이야기 몇 편-뒤섞이며 전진하는 서사

삶은 구슬이 뒤섞인 주머니다. 이것을 생각하다 저것을 떠올리고, 이것에 마음을 쓰다 느닷없이 저것에 솔깃해지는 것이다. 그런 파편들이 다른 이야기들과 어울려 비로소 하나의 아름다운 조각보가 된다. 나는 이것을 ‘미미한 서사(Minor Narrative)’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이다.


1. 빨래방에서

어느 초겨울, 차가운 날씨에 집안이 서늘했다. 아침에 널어둔 빨래가 마를 기미가 없어 특단의 조치로 동네 빨래방 건조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가족 모두 동의하는 눈치였다. 가족 대표로 나를 파송했다.


집에서 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빨래방은 평소 한산했다. ‘저래도 유지가 될까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작은 빨래방에 사람들이 많다. 아빠를 따라와 숙제하는 아이, 과자 간식을 먹다 떨어뜨려 혼나고 청소하는 아이, 젊은 부부, 연로한 부부, 학생 같은 청년, 처음 해보는 사람, 익숙한 사람이 쉼 없이 오고 간다. 어떤 이는 큰 이불 빨래를 한 가방 들고 오고, 어느 외국인 청년은 소소한 빨래를 바구니 몇 개에 담아 들어선다. 이 빨래통은 모두 4개, 네 팀이 자리를 차지하면 그다음부터는 한 타임만 늦어도 한두 시간 마냥 기다려야 한다.


정신없는 이 공간에서 ‘사람살이가 다 그런 거지 뭐’라고 정겹게 생각하면 좋겠지만, 실상은 빨리 내 차례가 와서 40분 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좀 더 크다. 필요한 일이라도 가끔은 그것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삶을 흔들 때가 있다. 그래도 빨래는 마쳐야 한다.


2. 병원에서

평생 겪었던 병원 치료보다 지난 몇 년 병과 더 친근해졌다. 이제는 삼 개월에 한 번씩 정기 검진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야 한다. 검사의 시간이 돌아오면 혈액 검진을 받고 이전 검사들의 결과를 들으며 필요한 조치를 안내받아야 한다.


먼저 이른 새벽, 지난밤부터 유지한 금식 상태로 채혈을 마친다. 결과는 2시간 뒤 담당 의사에게 들어야 한다. 그 사이에 잠시 진료실 앞에서 대기한다. 가끔 시간이 여유로우면 아래 층 휴게실 바카라장에서 국화차 한 잔 주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한다. 그날, 우연히 건너편 바카라장에 섬섬히 꽂혀 있는 바카라 중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이 눈에 띄었다. 가볍게 읽어 볼 요량으로 목차를 살피다가 〈노동과 죽음과 병〉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닿았다. 선 채로 그 짧은 소설을 단숨에 읽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대략 이랬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쳤습니다. 갈수록 그들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 세 가지, 즉 노동과 죽음과 병은 인간을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신의 선물 항목이었습니다.’

실제로 병과 죽음의 문제로 씨름하는 이들에게 이 글이 얼마나 동의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병’이 선물 같다는 확신이 든다. 병이란 어쩌면 어떤 점에서 자신을 정말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사랑받아야 할 원인으로서 병’ 말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지난한 고통으로 인해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잘 가르쳐주고 또 배우기 때문이다. 결국 힘겹다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지혜가 아니다.


3. 어느 부고

이런 일도 있다. 그날 하늘이 맑았다. 모처럼 상쾌한 날이었다. 그 명징하고 푸른 날에 부고를 받았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한 정치인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에 따라 여러 사람의 논평이 이어졌다. 죽음에 대한 논평이란 그리 인간적이지 못한 언사일 수 있지만, 그들의 말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 싶었다.


‘의로운 진보는 현실과 이상 사이를 쉼 없이 움직이는 운동이라 할 만하다. 이 운동의 성패는 스스로는 결코 움직이지 않으려는 현실을, 인간다움이 성취되는 이상으로 끌어당기려는 간절함에 따라 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실상, 현실은 거대한 바위와 같아서, 한 생애에 저 이상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옮기기도 쉽지 않다. 그러한들, 이 운동이 스스로 멈추겠는가.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여전히 이 끝없는 운동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면 그들에 의해 저 현실 바위는 이상의 항구에 안전하게 옮겨질 것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그 길을 가다 가끔 어떤 죽음을 만난다. 어떤 죽음인들 슬프지 않을까. 그 죽음의 내막을 다 모른다 해도, 우리가 이상으로 한 걸음 옮겼다는 징표 같은 죽음이 있다.’-진보 정치인 노회찬님의 부고를 듣고

나는 이렇게 정리한 뒤 이를 ‘진보의 항상성(homeostasis of progress)’이라 이름 붙였다. 진보의 죽음은 그저 끝이 아니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음이 부서지려는 이들’에게 다시 용기를 내어 새로운 출항을 하자는 고동 소리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가진 항상성이란, 어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그 죽음의 발성이 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올곧은 정치는 이 거친 진보의 항해에 자기 몸을 띄우는 일로써 비로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누구이든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부고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어둠이다. 그러나 그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놓칠 수는 없다.


4. 예측 못 한 결항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곁들여야겠다. 제주로 여행을 갔던 때였다. 섬을 떠나기 전날, 폭풍과 함께 모든 항공편과 배편이 결항했다. 3일 정도 예정된 일정이었는데, 느닷없이 나오는 길이 열리길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첫 3일은 예정되었다지만, 그 뒤 3일은 마냥 갇혔던 셈이다.


사실 섬 안에 오랫동안 삶을 지탱할 뿌리를 내려둔 이들에게는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다. 당장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니 잠시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떠나기 위해 입도한 이들에게 이 느닷없는 시간은 ‘유배지’와 다름없다. 이 섬이 오랫동안 사람을 가둔 자연 감옥이었다는 역사 증언들이 생생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인위적으로 누군가를 가두려고 애쓰지 않아도 비와 바람이 나서면 속절없다.


그날 예상치 못한 잔류를 지루하게 보내고 있을 즈음, 나는 어느 시장에서 뜻밖의 시간을 가졌다. 아주 우연히, 휴가를 보내고 있는 이웃을 만났다. 낯선 땅에서 정해지지 않은 만남은 오히려 즐거운 추억이다. 돌이켜보면, 풍랑에 갇혀서도 서두르거나 마음 쓰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이들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폭풍 속에서 지체된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그다음 날에는 여유가 없어 들르지 못했던 한 헌바카라방에 들러 망중한을 보냈다. 거기서도 우연히 오래된 바카라을 만났다. 《이중섭의 서한집》이다. 그림과 편지가 정갈하게 어우러진 바카라을 손에 들고 돌아 나오는데, 내일 새벽 떠날 시간이 석양처럼 스르르 사라져도 좋을 것 같았다.


또한 갇힌 시간 동안 ‘거친오름’ 정상에서 바다같이 푸른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것도 기억에 남는다. 폭풍 속에도 삶을 지탱할 만한 기막힌 체감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폭풍우 치는 중에 비바람을 뚫으며 걷고 걸어, 백석 시로 제목을 삼은 제주 북촌의 한 카페에서 몸을 피하며 따뜻한 커피를 마신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창밖으로 거칠게 휘몰아치는 파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거대한 포말이 내몸을 뒤덮는 것 같아도 백석의 ‘시 한 구절’을 되새기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짜릿했다. 다음날 섬을 떠날 시간이 사뿐사뿐 다가왔고, 어젯밤에는 그 틈에 다시 비가 밤새 사분사분 내렸다. 폭풍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선물 같은 추억을 언제 누렸을까 싶다.


5. 허물어진 쉼터

예전 서재로 쓰던 집 근처, 산바카라을 즐겼던 산길에 쉼터가 하나 있었다. 그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하나가 더 있으니, 내가 걸어본 길에는 모두 두 개가 있는 셈이다. 물론 앉아서 쉴만한 정자도 몇 군데 있긴 하다.

쉼터는 모름지기 ‘쉬어가라는 곳’이겠지만, 이곳은 쉼터이면서도 누구도 쉬어가지 않는 듯하다. 홀로 흐르는 시간만 나무를 해지게 만들며 맴돌다가는 듯하다.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듯이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다. 걷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에둘러 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나름 합당하게 말하면 ‘쉬어가는 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더욱 심증이 가는 이유는 쉼터 주변으로 쓰레기가 거의 감춰져 있듯 버려진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쉼터에 쉬어가는 이가 거의 없다!


쉼터가 이곳에 세워진 지 오래된 흔적이 역력하다. 누군가 멋들어지게 ‘쉼터’라고 써 붙여둔 편액도 색이 많이 바랬다. 조금 떨어져서는 검은색 글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사방으로 기둥을 박아두었다. 굵기와 모양은 탄탄해 보이지만, 퇴색된 정도로 보면 왠지 왜소하고 갸름해서 곧 지붕에 눌려 바닥으로 낙엽처럼 나뒹굴 것만 같다. 안으로 발을 들여보면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걸상 같은 의자를 만들어두었다. 물론 표면은 거칠다. 입구는 뻥 뚫려서 안쪽 의자에 앉아 있으면 한 걸음 떨어진 길을 걷는 이들의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벽이라고는 그럭저럭한 키의 어른 허리춤에서 어깨 정도 되는 높이로 판자만 다닥다닥 붙어 빙 둘러쳐져 있는 정도다. 운치 있어 보이지만, 바람에 비가 실려 들이치거나 바람만 거세게 불어도 앉아서 쉬기보다는 내친걸음을 계속 가는 것이 더 나을 것만 같다.


생각하다 보니 ‘쉼터’에 사람이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 것 같다. 다름 아니라, 이 ‘쉼터’가 자리한 길이다. 오롯한 오솔길 같은 길옆에 있다. 이 쉼터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오르막이 있다. 쉽지 않은 경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친 숨을 내쉬고 산을 올라 다시 평평한 길을 한참 걷는다. 오르막에서 바튼 숨을 내몰아 쉬었다가 이 길에서 평정심을 되찾는다. ‘쉼터’는 이 헐떡이는 숨이 ‘기분 좋게’ 몸을 감돌며 가라앉을 때쯤에 있다.


그런데 그 앞으로는 얼마 가지 않아 봉우리 정상이 있다. 정상 등정을 앞둔 최종 베이스라고 하기에는 정상에 너무 가깝다. 억지춘향격으로 이래저래 따져보면 ‘쉼터’에서 억지로 쉬어가야 할 이유가 더 흐릿해진다. 정말 숨이 넘어가거나 체력이 바닥난 사람이 아니라면 에둘러 ‘쉼’을 선택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얼른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발아래 세계를 내려다보는 호사를 누리고 싶을 것이다. 나의 단출한 생각만으로도 ‘쉼터’는 스스로 삭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사람이 머물지 않고 손길이 타지 않으면, 나무는 쉽게 삶을 마친다. 기실, 이곳에 이 쉼터를 만든 이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이 ‘쉼터’를 볼 때마다 늘 걸음만 멈춰서서 애처로운 듯 한 번 쳐다보기만 한다.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고작 하는 일은 길가에서 이런저런 각도로 사진 한 장 남겨두는 것이다. 그것도 한 번 찍으면 서운할 듯하여 두 장 정도 찍어둔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쉼터이지만 쉼터일 수 없는 슬픈 쉼터’를 바라봐주는 어떤 연민 같은 것이, 그 앞을 지나가는 이가 피해 갈 수 없는 의무처럼 몸을 내리 누리는 듯하다.


그렇게 산을 돌아 내려와 찍어둔 사진을 다시 꺼내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사실 사진에는 쉼터 풍경만 찍혀있지만, 사진 밖, ‘쉼터’ 앞에는 둥그런 나무 둥지 의자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운치 있는 작은 터가 있었다.


뜻밖에 그 장면이 슬며시 떠올랐다. 나름 ‘쉼터’ 앞에 또 새로운 ‘쉼터’가 있었던 셈이다. 이름 걸린 ‘쉼터’와 달리 이 공간에는 이름도 없고, 지붕도 없고, 벽도 없고, 긴 의자도 없다. 아예 사방으로 열려있다. 열린 공간에 겨우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나무 둥지 의자가 덩그러니 내던져져 있다. 그런데 가끔 그곳에는 여러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몇 사람 안 되고,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 밑동 같은 나무 의자에 조금 불편할 텐데도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눈다. ‘쉼터’를 지척에 두고 ‘쉼터’ 같지 않은 쉼터에 사람들이 쉬어가는 것이다. 별것 아닌 듯해도 길을 걷다 만나는 이 장면에 늘 묘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쉼터’ 같지 않은 ‘쉼터’를 ‘쉼터’라고 부르는 것은 뭔지 모르게 마음 한편에 스멀스멀한 어색함을 밀어 올리는 것 같다. 별것 아닌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생각해 보면 내 세계에는 꼭 ‘쉼터’여야 하는데 ‘쉬어갈 수 없는 듯한’ ‘쉼터’가 제법 있는 듯하다. 아주 가끔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이들을 ‘쉼터’라는 이름 아래로 적극 초대하겠다는 곳도 있다. 그런 곳이 정작 ‘쉼터’라고 하지만 ‘쉼터’ 같지 않을 때도 있어 보인다. 스스로 삭는 중에 허름해져서 그럴 수도 있고, 길을 걷는 이들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만큼 멀어져 적절한 위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뭐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분명한 것은 ‘쉼터’가 정작 ‘쉼터’가 되는 것만이 ‘쉼터’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이지 않겠는가.


사진 한 장을 보면서 별생각이 다 들긴 하지만, 그날 초겨울 눈바람에 걸었던 그 길이 시도 때도 없이 오롯이 떠오른다. 길 곳곳에 만들어진 모든 ‘쉼터’가 누구라도 쉬어가고 싶은 곳이면 좋겠다. 허름해도 쉼터는 쉼터이니 말이다.


6. 이야기 종합

후덥지근한 서재에서, 창밖의 습한 바람을 피하다가 유용한 ‘정보’와 상관없는 이런 삶의 파편을 한데 모아 정리하려는 나는 누구일까? 철학자 한병철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나는 ‘나레이터’이다. 흩어진 이야기 안에서 내 삶의 ‘서사’를 찾아보려는 사람이다. 레오 리오니를 따른다면, 그의 그림바카라 《프레드릭》의 주인공처럼 한여름 이야기를 모아 한겨울에 친구들을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조각을 모아 이야기의 보자기를 만들어보려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파편 같은 이야기를 모아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간단히 말하며, 나의 파편적인 이야기가 하나로 모여 어떤 ‘서사’가 될 때,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적 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나’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와 연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한병철의 걱정에 대해 나의 ‘서사 만들기’가 공동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희망이다.

나의 일상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에 흐르는 공동의 서사라면, 모든 사소한 우연 속에 내가 놓칠 수 없는 어떤 필연적 사건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해도, 삶이란 그런 서사에 의해 조금씩 회전하며 전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내일도 말이다.


II. 한중담(閑中談): 작은 장면이 먼저 말하게 하는 글쓰기

앞서 늘어놓은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우연히 건져 올린 삶의 편린들이다. 빨래방의 눅눅한 기다림, 병원 복도의 조용한 대기, 맑은 날 도착한 부고, 폭풍에 갇힌 섬, 아무도 쉬지 않는 산길의 쉼터는 처음부터 하나의 주제를 향해 가지런히 놓인 사건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만 살다가 마주친 작은 장면들이었고, 지나고 나면 쉽게 잊힐 만한 사소한 경험들이었다.


그러나 사소한 장면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벼운 의미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장면은 한참 뒤에야 제 속뜻을 드러낸다. 빨래방의 건조기 안에서 뒤섞이는 옷가지들처럼, 우리의 기억도 처음에는 서로 엉켜 돌아간다. 병원 복도에서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어떤 생각은 오래 앉아 있어야 비로소 자기 차례를 얻는다. 폭풍에 묶인 섬처럼, 계획이 멈춘 자리에서 삶은 뜻밖의 문을 열기도 한다.


한중담은 바로 그런 장면들을 내 삶에 소환하는 글쓰기다. 그것은 일상의 파편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소한 장면을 천천히 바라보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감각과 감정과 물음을 길어 올린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경험이 어떤 삶의 개념으로 번져갈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므로 한중담의 일상에서 철학으로 나아가는 서사적 전진이 명확한 글이다. 그 철학은 글의 마지막에 드러난다. 익숙한 철학 개념이 글의 앞에서 그 길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다 끝내 새로운 철학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한중담은 철학적 개념보다 삶의 한 장면이 주도하는 글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본 대로, 빨래방의 습기, 병원 복도의 침묵, 부고를 받은 맑은 날의 이상한 잔인함, 제주 바람의 거친 체감, 허물어진 쉼터의 퇴색한 편액 등이다. 그다음에야 철학이 만들어진다. 철학은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불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이미 품고 있던 사유가 천천히 응고되어 글의 끝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한중담이다. 다만, 한중담은 단순히 한가한 중에 쓰는 글이거나 아무 일 없는 무료할 때 쓰는 글이 아니다. 해야 할 일들 사이에 의도적으로 벌려놓은 틈, 지나간 일을 다시 불러 천천히 바라보는 여백, 마음이 한쪽으로만 기울어지지 않도록 잠시 비켜서는 느린 시간이 바로 한중담의 글쓰기 자리다. 달리 말해 이 글쓰기는 얼핏 보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생산하려는 지적 생산의 글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빨리 지나가버린 하루의 작은 장면을 다시 붙들어 그 장면이 내게 남긴 미세한 울림을 끝까지 들어보면서 궁극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창출해내는 느린 글쓰기의 전형이다.


1. 한중담의 글쓰기 5단계 프로세스

파편 같은 이야기 안에도 나는 의도적으로 몇 가지 글쓰기 과정을 반영한다. 이 과정은 기계적인 순서라기보다, 장면이 사유로 깊어지는 느린 흐름에 가깝다. 이 과정이 언제든 달라질 수 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철학적 개념을 도출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에 따라 중요한 것은 글의 처음에 내가 관찰하거나 경험한 장면을 충분히 살아 있게 두는 일이다. 개념은 그 뒤에 따라온다. 장면이 아직 숨을 쉬기도 전에 개념을 덮어씌우지 않는다. 설명보다 바라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1단계: 일상의 관찰

첫 단계는 사소한 장면을 붙드는 일이다. 바람에 마르지 않는 빨래, 병원 복도의 대기 의자, 맑은 날 도착한 부고, 폭풍에 묶인 섬, 아무도 쉬지 않는 산길의 쉼터처럼 대단하지 않은 순간들이 글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장면을 너무 빨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빨래방을 공동체의 은유로, 병원을 돌봄의 철학으로, 쉼터를 환대의 개념으로 곧장 바꾸어버리면 장면은 자기 온도를 잃는다. 먼저 빨래방에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세제 냄새와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병원에는 금식한 몸의 허기와 채혈 뒤의 나른함과 이름이 불릴 때까지의 초조함이 있어야 한다. 쉼터에는 바랜 편액과 거친 나무 표면과 그 앞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의 무심한 걸음이 있어야 한다. 한중담의 관찰은 사유의 재료를 모으는 일이지만, 동시에 삶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예의이기도 하다.

2단계: 일기 같은 가벼운 에세이 ‘만들기’


두 번째 단계는 관찰한 장면을 일기 같은 에세이로 풀어내는 일이다. 이때 글은 너무 반듯한 논증의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처음에는 조금 헐겁고 느슨해도 좋다. 기억은 본래 가지런히 걸어오지 않는다. 어떤 냄새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표정이 떠오르며, 뒤늦게 그때의 마음이 도착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현장의 공기, 냄새, 빛, 소리, 몸의 감각을 충분히 적어야 한다. 단 5분의 경험이라도 그 안에 머문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50분의 이야기로 넓어질 수 있다. 시간을 미분하듯, 한순간 안에 접혀 있던 결들을 천천히 펼치는 것이다.


이때 서둘러 결론으로 가면 안 된다. 빨래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솔직한 마음, 병원에서 병을 선물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두렵고 불편한 마음, 제주에 갇혀 있으면서도 처음에는 조급했던 마음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 좋은 한중담은 아름다운 깨달음만 기록하지 않는다. 깨달음 이전의 초조함, 짜증, 망설임, 민망함까지 함께 적는다. 그래야 글은 살아 있는 사람의 기록이 된다.


3단계: 주요 개념의 포착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념을 명시한다. 내가 겪은 이야기 속에 어떤 화두가 숨어 있었는지 묻는 것이다. 이때 개념은 밖에서 가져와 붙이는 표지가 아니라, 장면 안에서 천천히 솟아오르는 이름이어야 한다.

빨래방에서는 ‘공동체’라는 큰 말보다 먼저 ‘함께 기다림, 연대감’이 보인다. 병원에서는 ‘고통의 의미’라는 거창한 주제보다 먼저 ‘돌봄을 받아야 할 몸’이 보인다. 제주 결항에서는 ‘우연’이라는 추상어보다 먼저 ‘뜻밖에 주어진 하루’가 보인다. 쉼터에서는 ‘환대’라는 철학적 개념보다 먼저 ‘쉬어가도 괜찮다는 안도감’이 보인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좋은 개념은 장면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장면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우연의 환대’라는 말이 좋은 까닭은 그것이 제주에서 만난 이웃, 헌바카라방의 오래된 바카라, 거친오름의 하늘, 북촌 카페의 파도 소리를 다시 불러오기 때문이다. ‘참된 환대의 자리’라는 말이 좋은 까닭은 그것이 허름한 쉼터와 이름 없는 나무 둥지 의자를 동시에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4단계: 연관된 철학과의 조용한 연동


네 번째 단계에서는 내가 찾아낸 개념을 기존의 철학적 사유와 연결해 본다. 다만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역시, 철학자의 이름이 장면보다 앞서 나와서는 안 된다. 철학은 내 경험을 권위 있게 보이게 하려는 장식이 아니다. 이미 내가 겪은 장면이 충분히 사유하고 있을 때, 그 사유를 조금 더 넓은 세계와 연결해 주는 낮은 다리여야 한다.


예를 들어, 빨래방의 기다림을 이야기할 때 리쾨르를 먼저 설명할 필요는 없다. 먼저 각자의 빨래를 들고 모인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사적인 생활이 한 공간에 잠시 널리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충분히 바라본 뒤에야 우리는 인간이 흩어진 사건들을 이야기로 엮으며 자기 삶을 이해한다는 리쾨르의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병원 복도의 대기 역시 마찬가지다. 톨스토이의 문장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금식한 몸과 채혈 뒤의 기다림과 진료실 앞의 침묵을 먼저 놓아야 한다. 그 침묵 안에서 병이 나를 얼마나 불편하게 붙들고 있는지, 동시에 나를 돌보게 만드는지 느낀 뒤에야, 병과 죽음이 인간을 서로 사랑하게 한다는 톨스토이의 역설이 몸에 닿는다.

요컨대, 철학과의 연동은 이렇게 나의 개념이 우선하고, 그 뒤에 나의 개념을 보완하거나 논증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좋다. 즉, 장면이 먼저 말하고, 철학은 그 말이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도록 뒤에서 받쳐준다.

5단계: 나의 철학 개념 도출

마지막 단계는 나만의 언어로 개념을 명명하는 일이다. 한중담의 끝은 타인의 철학을 요약하는 데 있지 않다. 부족하더라도 내 삶의 장면에서 길어 올린 말을 내 언어로 세우는 데 있다.

‘진보의 항상성’, ‘우연의 환대’, ‘공동의 기다림’, ‘불편한 은총’, ‘참된 환대의 자리’ 같은 말들은 바로 그런 시도다. 이 말들은 완성된 철학 체계라기보다, 내가 삶을 통과하며 얻은 작은 이정표다. 중요한 것은 이 개념들이 추상적 정의로만 남지 않는 것이다. 각각의 말은 반드시 하나의 장면을 품고 있어야 한다. ‘공동의 기다림’은 빨래방의 건조기 앞에서만 제대로 살아나고, ‘우연의 환대’는 폭풍에 묶인 제주에서만 온전히 숨 쉬며, ‘참된 환대의 자리’는 아무도 쉬지 않는 쉼터와 이름 없는 나무 의자 사이에서 비로소 자기 몸을 얻는다.

그러므로 한중담의 개념은 이미 있던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작은 경험을 오래 주워 들고 있다가, 마침내 그것이 품고 있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일이다.

2. 왜 미시 서사인가

어쩌면 철학은 언제나 거대한 체계로 완성되기 전에, 한 사람의 구체적인 물음에서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인류의 해방, 이성의 진보, 역사의 필연적 발전 같은 거대한 말을 통해 자기 삶의 방향을 설명하려 했다. 그런 말들은 때로 큰 지도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 지도를 보며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가늠하려 했다.


그러나 큰 지도는 모든 골목을 다 보여줄 수 없다. 지도 위에는 길이 분명히 나 있지만, 실제로 그 길을 걷는 사람의 젖은 신발, 식은 손, 멈칫거리는 숨,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까지는 표시되지 않는다. 거대한 서사가 세계의 윤곽을 그려준다면, 작은 서사는 그 세계를 살아내는 한 사람의 체온을 보여준다.


내가 한중담에서 붙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미지근한 체온이다. 빨래방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조급함,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불안, 맑은 하늘 아래 정치인의 부고를 받아 든 뒤 밀려오는 이상한 슬픔, 제주에 갇혀 처음에는 초조하다가 어느새 선물 같은 시간을 받아들이게 되는 마음, 허물어진 쉼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연민. 이런 것들은 역사의 큰 구호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은 실제로 이런 작은 감각들 속에서 흔들리고, 견디고, 조금씩 변한다.

출처:교보문고

리오타르가 말한 미시 서사는 바로 이런 작은 이야기들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내게 미시 서사는 먼저 빨래방의 건조기 소리이고, 병원 복도의 낮은 기침 소리이며, 제주 바람에 흔들리던 하루이고, 산길에 홀로 낡아가던 쉼터의 침묵이다. 이 장면들을 충분히 바라본 뒤에야, 나는 비로소 거대한 서사 이후에도 여전히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야기는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고, 더 구체적인 자리로 내려왔을 뿐이다.


한중담은 그 낮은 자리에서 시작하는 글쓰기다. 세계를 한눈에 설명하려 하기보다, 한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견디고 사랑하고 기억하는지를 적어보려는 글쓰기다.


3. 한중담의 실제: 다섯 개의 구슬 낱알

이제 앞서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가져와 내가 한중담에서 철학적 개념을 끌어낸 과정을 좀 더 언급해 두려 한다.


3.1. 빨래방, 각자의 생활이 잠시 널리는 곳

초겨울 아침이었다. 집안 공기는 서늘했고, 아침에 널어둔 빨래는 좀처럼 마를 기미가 없었다. 축축한 옷가지들은 집 안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고, 그 눅눅함은 단지 빨래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 전체의 기분처럼 번져 있었다. 결국 동네 빨래방 건조기를 쓰기로 했다. 가족 대표처럼 빨래를 들고 집을 나섰다.


평소 한산하던 빨래방은 그날따라 붐볐다. 아빠를 따라와 숙제를 하는 아이가 있었고, 과자를 먹다 흘려 혼나고 청소하는 아이도 있었다. 젊은 부부와 연로한 부부가 있었고, 처음 기계를 써보는 듯한 사람과 익숙하게 동전을 넣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는 커다란 이불 빨래를 한가득 들고 왔고, 외국인 청년은 소소한 빨래를 바구니 몇 개에 나누어 담아 들어왔다.


그곳에서 나는 뜻밖의 공동체적 감동을 먼저 느낀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빨리 내 차례가 와서 40분 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살이가 다 그런 거라고 정겹게 생각하기보다, 내 시간표가 밀리지 않기를 바랐다. 필요한 일이라도 가끔은 그것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삶을 흔들 때가 있다. 그러나 빨래는 마쳐야 했다.


그때 건조기 안에서 옷가지들이 뒤섞여 돌아갔다. 수건과 양말, 속옷과 티셔츠, 각자의 몸에 닿았던 사적인 물건들이 둥근 통 안에서 한동안 함께 구르며 물기를 털어냈다. 빨래는 철저히 사적인 것이지만, 빨래방은 이상하게 공적인 장소였다. 각자의 생활이 잠시 한 공간에 널리고,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나는 ‘공동의 기다림’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공동체란 반드시 아름다운 뜻으로만 시작되지 않는다. 때로 공동체는 불편한 순서, 밀리는 시간, 어쩔 수 없는 기다림 속에서 생긴다. 각자 다른 물기를 지닌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서 뒤섞이고, 그 뒤섞임 속에서 조금씩 마르고 따뜻해지는 시간. 빨래방의 기다림은 그런 작고 눅눅한 공동체의 은유였다.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을 굳이 불러온다면, 인간은 흩어진 사건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이야기로 엮으며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빨래방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건조기 안에서 돌고 있던 옷가지들처럼, 그날의 내 경험 속에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3.2. 병원 복도, 사랑받아야 할 이유로서의 병

삼 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간다. 이제 병원은 낯선 장소라기보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되었다. 검사의 시간이 되면 전날 밤부터 금식하고, 이른 새벽 채혈을 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몸은 숫자로 번역되고, 나는 그 숫자가 어떤 의미인지 의사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한다.


병원 복도의 시간은 이상하다. 모두가 조용히 앉아 있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각자의 몸을 데리고 와서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린다. 어떤 이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어떤 이는 눈을 감고, 어떤 이는 보호자의 손을 잡고 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완전히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병원은 우리가 평소 잊고 지내던 몸을 다시 앞으로 불러내는 장소다.


그날 나는 휴게실 바카라장에서 톨스토이의 단편을 꺼내 읽었다. 〈노동과 죽음과 병〉이라는 짧은 이야기였다. 병과 죽음이 인간을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문장은 병원 복도에서 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문학적 문장으로만 남지 않았다. 집의 편안한 의자에서 읽었다면 지나쳤을 말이, 채혈을 마치고 진료를 기다리는 몸에는 조금 다른 무게로 내려앉았다.


물론 병을 쉽게 선물이라고 말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실제로 병과 죽음 앞에서 씨름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은 너무 가벼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고통은 해석되기 전에 먼저 견뎌져야 하고, 설명되기 전에 먼저 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병은 어떤 점에서 나를 다시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병은 나를 내몸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나를 방치하지 못하게 했다. 내몸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살피고, 누군가의 걱정과 돌봄을 받아들이게 했다.


나는 이것을 ‘불편한 은총과 사랑받을 원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병은 불편하다. 병은 삶을 좁히고, 계획을 흔들고, 몸을 낯설게 만든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사람은 때로 자신을 다시 돌보는 법을 배운다. 또한 타인의 걱정과 밥과 손길이 드나드는 문을 연다. 병은 약함의 이름이지만, 그 약함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배운다.


3.3. 맑은 날의 부고, 진보의 항상성

그날 하늘은 지나치게 맑았다. 모처럼 상쾌한 날이었다. 그런데 그런 날 부고를 받았다. 나와 직접적인 인연은 없는 한 정치인의 죽음이었다. 죽음은 언제나 한 사람의 것이지만, 어떤 죽음은 시대의 공기 속으로 번져간다. 그날도 그랬다. 사람들은 저마다 논평했고, 애도했고, 때로는 차갑게 말했고, 또 때로는 너무 빨리 의미를 붙이려 했다.


나는 죽음 앞에서 논평이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어떤 죽음인들 슬프지 않을까. 그 죽음의 내막을 다 알 수 없더라도, 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세계의 한 모서리는 어두워진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질문을 남긴다. 그가 붙들었던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그가 움직이려 했던 현실은 얼마나 무거웠는지, 그가 멈춘 뒤에도 그 운동은 계속될 수 있는지 묻게 한다.


정치란 어쩌면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 거대한 바위 같은 현실을 조금이라도 이상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일이다. 한 생애 동안 그 바위를 손가락 한 마디 옮기기도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바위 앞에 선다. 누군가는 몸을 기울이고, 누군가는 밀고, 누군가는 그 무게에 눌려 쓰러진다. 그런 죽음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끝났다고만 말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진보의 항상성’이라고 부른다. 진보의 죽음은 진보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부서지려는 이들에게 다시 출항을 알리는 고동소리일 수 있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멈추었지만, 그 침묵이 남은 이들의 목소리를 깨우는 일이 있다. 어떤 죽음은 역사가 이상 쪽으로 아주 조금 움직였다는 아픈 징표처럼 남는다.


리오타르의 미시 서사를 떠올린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이념의 승리만이 아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구체적인 슬픔과 상처, 그 죽음이 남긴 작은 파문을 기록하는 일이다. 큰 말들이 자주 사람을 지워버릴 때, 작은 서사는 다시 한 사람의 얼굴을 불러온다. 진보가 추상적 구호로만 남지 않으려면, 그것을 살아내다 사라진 이들의 이름과 숨결을 잊지 않아야 한다.


3.4. 폭풍에 갇힌 섬, 지체된 시간의 선물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던 날, 폭풍 때문에 모든 항공편과 배편이 끊겼다. 처음부터 그 섬에 머물기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잠시 기다리면 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떠나기 위해 들어온 사람에게, 갑자기 나갈 수 없는 섬은 감옥처럼 느껴진다. 여행의 마지막은 돌아감이어야 했는데, 돌아가는 길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마음이 조급했다. 예정된 일정은 끝났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섬 밖에 있었다. 그런데 시간은 내 계획과 상관없이 더 머물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그 지체된 시간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하나씩 피어났다. 시장에서 휴가 중인 이웃을 우연히 만났고, 들르지 못했던 헌바카라방에 가서 《이중섭의 서한집》을 만났다. 거친오름 정상에서는 바다같이 푸른 하늘을 향해 드러누웠고, 폭풍우 치는 북촌의 한 카페에서는 파도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계획대로 돌아갔다면 이 모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폭풍은 나를 붙잡았지만, 동시에 내가 보지 못했던 하루를 열어주었다. 삶에는 그런 시간이 있다. 내가 만들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처음에는 방해처럼 느껴졌지만,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선물처럼 남는 시간 말이다.


나는 이것을 ‘우연의 환대’라고 부르고 싶다. 우연은 처음부터 다정한 얼굴로 오지 않는다. 때로 우연은 결항, 지체, 고립, 어그러진 일정의 얼굴로 온다. 그러나 그 자리에 조금 더 머물러 있으면, 우연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계획하지 않은 만남, 오래된 바카라, 비바람 속의 커피, 파도 앞에서 문득 되살아나는 시 한 구절. 우연은 삶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비밀스러운 방식일 수 있다.


벤야민의 사유를 빌리자면, 사건은 그냥 지나가면 단순한 해프닝이 되지만, 그것을 다시 이야기로 붙들 때 비로소 경험이 된다. 현대인은 많은 일을 겪지만, 그것을 삶의 지혜로 엮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폭풍에 갇힌 제주가 내게 남긴 것은 단순한 불편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획의 바깥에서 삶이 건네는 환대의 경험이었다.


3.5. 쉬어갈 수 없는 쉼터

예전 서재 근처 산길에는 쉼터가 하나 있었다. 산바카라할 때마다 그 앞을 지나곤 했다. 누군가 멋들어지게 ‘쉼터’라고 써 붙인 편액은 색이 많이 바랬고, 조금 떨어져서는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둥은 아직 서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지붕의 무게에 눌려 언젠가 낙엽처럼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곳은 분명 쉼터였지만, 이상하게 아무도 쉬어가지 않았다. 쓰레기도 거의 없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깨끗하게 이용했다는 뜻이라기보다, 애초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는 표시처럼 보였다. 위치도 어중간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숨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즈음에 있고, 정상은 또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말 숨이 넘어가거나 체력이 바닥난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거기서 쉬어갈 이유가 흐릿했다.


나는 그 쉼터를 볼 때마다 안으로 들어가 앉지는 않았다. 다만 길가에 멈춰서서 사진을 찍었다. 한 장만 찍으면 서운할 듯해 두 장쯤 찍어두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쉼터이나 쉼터일 수 없는 슬픈 쉼터’를 그냥 지나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그곳을 바라봐주는 일이 지나가는 사람의 작은 의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쉼터 앞에는 이름도 없고 지붕도 없는 작은 터가 있었다. 나무 둥지 의자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그곳에 앉았다. 오래 머물지는 않아도, 몇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 있는 쉼터는 비어 있고, 이름 없는 자리는 사람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참된 환대의 자리’라는 말을 떠올린다. 쉼터는 쉼터라는 이름 때문에 쉼터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 잠시 머물러도 괜찮다고 느낄 때, 무거운 숨을 내려놓아도 흉이 되지 않겠다고 느낄 때, 그곳이 비로소 쉼터가 된다. 환대란 거창한 제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여기 잠시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한병철의 정보 슬롯 비판을 떠올린다면, 유용성과 효율만으로 볼 때 이 낡은 쉼터와 이름 없는 나무 의자들은 별 가치 없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필요하다.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곳, 생산하지 않아도 쫓겨나지 않는 곳, 잠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곳. 그런 자리가 사라질 때 인간은 자기 ‘서사’를 잃는다.


그러므로 참된 쉼터는 구조물이 아니라 마음의 형식이다. 그저 정보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서사’를 만드는 도구다. 쉼터가 쉼터일 수 없는 것이 그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허름해도 쉼터는 쉼터여야 한다. 아니, 어쩌면 진짜 쉼터는 조금 허름한 곳에서 더 잘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너무 반듯한 곳은 사람을 긴장시키지만, 조금 낡은 곳은 우리에게 말없이 속삭인다. 괜찮다, 잠시 앉아도 된다. 그것이 ‘서사’다.


III. 나레이터라는 정체성, 조각보를 꿰매는 글쓰기

후덥지근한 서재에서 창밖의 습한 바람을 피하며, 유용한 정보와 아무 상관없는 삶의 파편들을 한데 모으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마도 나레이터다. 정보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사건이 빠르게 소비된다. 오늘의 일은 내일이면 밀려나고, 내일의 일은 또 다른 정보에 덮인다. 그러나 서사는 사건을 머물게 한다. 사건이 머물 때, 삶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다시 불러 앉혀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나레이터는 거대한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가 버릴 뻔한 작은 장면들을 붙들어 다시 이야기의 자리로 데려오는 사람이다. 남들이 무심히 지나친 구슬들을 주머니에 담아두었다가, 어느 날 그것들이 서로 닿아 내는 희미한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을 떠올린다. 남들이 겨울을 위해 양식을 모을 때, 프레드릭은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았다. 겉으로는 쓸모없어 보였지만, 겨울이 깊어졌을 때 그것들은 공동체를 견디게 하는 온기가 되었다.

한중담의 글쓰기도 그러하다. 빨래방의 기다림, 병원의 고통, 맑은 날의 부고, 폭풍에 갇힌 섬, 아무도 쉬지 않는 쉼터는 당장 유용한 정보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이 모일 때, 우리는 삶을 조금 다르게 견딜 수 있다. 빨래방의 기다림은 공동의 시간이 되고, 병원의 고통은 돌봄의 언어가 되며, 부고의 슬픔은 남은 자들의 걸음이 되고, 폭풍에 갇힌 섬은 우연의 환대가 되며, 허름한 쉼터는 참된 환대의 자리를 묻게 한다.


이처럼 미시 서사는 작아서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작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거대한 서사는 세계를 한눈에 설명하려 하지만, 작은 서사는 한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견디고 사랑하고 기억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작은 이야기가 모여 비로소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와 연동된다.


나의 한중담에는 여러 사유의 흔적이 배어 있다. 리오타르는 큰 지도의 시대가 저문 뒤에도 작은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했고, 한병철은 정보가 많아질수록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를 경계하게 했으며, 벤야민은 지나간 경험이 현재를 일깨우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리쾨르는 흩어진 사건들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는지를 생각하게 했고,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은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공동체의 겨울을 어떻게 견디게 하는지 보여주었다.

출처. 교보문고



하지만 이들의 이름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작은 장면들이었다. 철학은 그 장면들을 대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장면들이 이미 하고 있던 말을 조금 더 멀리 들리게 해준다. 그러므로 한중담에서 철학은 높은 단상이 아니라 낮은 배경음이어야 한다. 장면이 먼저 빛나고, 철학은 그 빛이 오래 꺼지지 않도록 조용히 심지를 지켜주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가지런히 전진하지 않는다. 자주 뒤섞이고, 느닷없이 지체되며, 때로는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멈추어 선다. 그러나 바로 그 뒤섞임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사라진 이의 목소리를 깨우며, 누군가에게 참된 쉼터가 되어준다. 한중담은 그 뒤섞임을 외면하지 않고, 그 지체의 시간을 이야기로 바꾸는 글쓰기다.


그러므로 한중담은 작은 이야기를 작게 버려두지 않는 일이다. 나의 사소한 하루를 조금 더 크게 읽어내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아주 한가한 듯,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다시 한 편의 한중담을 만든다. 삶의 젖은 빨래와 병원의 침묵과 폭풍의 지체와 허물어진 쉼터를 한데 모아, 내가 어떻게 살아가며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이 세계 속에서 나에게 스스로 물어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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