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행복』-메타 서평

“보이지 않게 주어지는 행복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by푸른킴

바카라과 만남―관찰에서 시작되는 철학

철학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사유로서 철학은 추상적인 개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지나치고 만지는 구체적인 세계의 표면에서 비롯된다. 익숙한 일상을 오래 바라볼 때, 사물은 비로소 단순한 배경이기를 멈춘다. 늘 곁에 있었으나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계절의 온도, 식탁 위의 음식, 하루의 빛과 타인의 말투 같은 것들이 저마다의 의미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물은 관찰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개념으로 명명된다.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단지 대상을 부를 수 있게 됨을 넘어, 흩어져 있던 감각과 경험이 하나의 형태를 갖추는 일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기쁨은 ‘카르페 디엠’이라는 이름을 얻고, 이유 없이 가라앉던 순간은 ‘고독’이나 ‘상실’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한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들은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사유의 도구가 된다.

이처럼 관찰은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잠시 머무는 힘이며,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을 다시 출현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많은 것을 흘려보낸다. 아침의 공기, 반복되는 노동, 혼자 남겨진 시간 같은 것들은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쉽게 사소함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관찰은 이 사소함을 다시 삶의 중심으로 불러온다. 평범한 순간이 실은 존재의 깊은 질문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철학은 바깥 세계만을 관찰하지 않는다. 몸 안으로 시선을 돌려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순간에 기뻐하고 두려워하는지 함께 살핀다. 내면의 감정은 외부의 풍경과 분리될 수 없다. 어떤 계절의 냄새는 오래전 기억을 불러오고, 하루의 날씨는 마음의 결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관찰이란 바깥을 보며 동시에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양면의 행위다.


관찰의 유익은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낯섦으로 사유의 문이 열릴 수 있다. 당연했던 것들을 더는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려는 낯설게 하기에서 질문은 시작된다. 행복은 특별한 사건 속에만 있는가, 아니면 반복되는 하루의 결 속에도 깃들어 있는가. 잘 산다는 것과 나에게 맞는 삶의 속도란 무엇인가. 이처럼 낯설게 보기란 결국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를 다시 배우는 일이다.


김신지의 『제철 행복』은 바로 이러한 낯설게 보는 관찰의 힘을 일상 수필의 문법으로 보여주는 바카라이면서, 그 일상을 소개하는 데 머물지 않으려 한다. 『제철 행복』은 여기서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사유가 출발하는 작은 문이다. 나는 이 바카라을 통해 바카라 안의 계절만이 아니라, 그 계절이 열어 보이는 시간과 존재와 행복의 문제를 함께 읽어보려 한다.


이 바카라에서 행복은 멀리 있어서 큰 노력으로 성취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저 계절마다 다르게 찾아오는 감각과 생활의 리듬 안에서 발견되는 익숙한 것이다. 다만, ‘제철’이라는 말은 행복에도 때와 결이 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행복은 봄의 연한 빛 속에서, 어떤 행복은 가을의 쓸쓸함이나 겨울의 고요 속에서 찾아온다. 행복은 계절처럼 변하고, 몸의 감각처럼 미묘하게 모습을 바꾼다.


따라서 『제철 행복』을 읽는 일은 단순히 살가운 문장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삶의 작은 표정들을 바라보며, ‘행복’이라는 개념을 일상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저자의 문장은 특별한 사건에 대한 평범한 관찰이 아니라, 평범한 순간 앞에서 특이한 사건처럼 오래 머문다. 그 머묾 속에서 독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행복의 흔적을 되돌아본다.


이 점에서 이 바카라은 일상의 관찰이 어떻게 철학적 사유와 맞닿는지를 다각도로 일깨운다. 철학은 어려운 언어로만 말해지는 독점적인 학문이 아니다. 때로 철학은 한 계절을 제대로 느끼는 감각 속에, 오늘의 밥상 앞에 잠시 멈추는 가벼운 일상 속에 스며 있다. 삶을 깊이 사유하는 일은 반드시 고도의 기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상을 벗어나 멀리 떠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것들을 더 세밀하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평소 저자의 글을 자주 읽은 것은 아니다. 내가 연구해 온 주제와는 다소 다른 결을 지닌 글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카라 표지에 이끌려 이 바카라을 손에 넣은 뒤, 나는 이 바카라이 단순히 일상의 기쁨을 말하는 산문집에 그치지 않음을 알았다. 오히려 인간이 삶을 어떤 방식으로 감각하고, 자기 삶의 리듬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사유의 서(書)였다. 무엇보다 나를 오래 붙든 것은 제목 속 ‘제철’이라는 단어였다.


언젠가 가을 단풍이 무르익던 때, 도심으로부터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제철과 사람’이라는 카페를 찾아간 적이 있다. 아담한 공간 안에는 서두르지 않는 온기가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손님을 안내하던 바리스타의 태도는 과장된 친절이 아니라, 알맞은 온도로 건네지는 다정함에 가까웠다. 테이블까지 찾아와 커피와 차를 마시는 법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모습에서, 나는 그가 사람에게도, 계절에게도 알맞은 태도로 정성껏 대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메뉴 또한 흥미로웠다. ‘제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곳에는 마침 ‘상강 커피’가 있었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절기의 이름을 단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계절의 한 장면을 몸 안으로 들이는 일 같았다. 맛보다 먼저 그 이름이 건네는 시간이 있었다. 가을의 서늘함, 계절이 깊어지는 감각, 그리고 지나가는 때를 알아차리라는 조용한 권유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철문으로 된 입구에는 이런 문구도 적혀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제철마다 문득 공간의 따스함과 다정함이 떠오르면 좋겠어요.” 문장 속 ‘제철마다’라는 말 앞에서 문득 걸음이 멈췄다. 그 표현은 시간의 흐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다. 계절마다, 삶의 마디마다 우리가 다시 느끼고 기억해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시간은 저마다의 빛과 냄새를 지닌 채 도착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나는 평소에도 ‘제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의 자리에서 제철을 누리기란 쉽지 않았다. 도시의 시간은 계절보다 빠르고, 생활의 리듬은 자연과 자주 어긋난다. 우리는 봄을 꽃보다 일정표로 먼저 알고, 가을을 바람보다 달력으로 먼저 확인한다. 제철의 감각은 저절로 주어지기보다, 의도적으로 마음을 내고 계획을 세워 찾아가야 하는 유원지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카페에서 한 번, 그리고 이번에는 김신지의 『제철 행복』에서 다시 ‘제철’이라는 말을 만났다. 생각해 보면 내가 공부해 온 고대 문서에서도 ‘때’는 오래된 사유의 주제였다. 코헬렛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라고 말한다.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양이 아니라, 저마다 알맞은 결을 지닌 때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여러 노력을 관찰하면서, 그 ‘때에 알맞은 일’을 시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어쩌면 우리는 제철을 잃어버릴 만큼 뒤죽박죽 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계절의 감각은 흐려지고 삶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지만, 여전히 곳곳에는 제철을 찾고 기다리며 누려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실이 괜히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제철 행복』은 첫 장을 펼치기 전부터 이미 어떤 평안의 감각을 건네는 바카라처럼 다가왔다. 무엇보다 ‘제철’이라는 말은 이 바카라 안에서 단순한 자연의 시간을 넘어, 삶을 제 속도와 제 온도로 다시 살아보라는 조용한 초대가 된다. 이제 바카라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려 한다. 그러나 이 진입은 바카라의 내용을 요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바카라이 어떤 감각의 문법으로 사유의 발판을 마련하는지 살피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다.


바카라의 장르와 논지―감각의 독법에서 사유의 독법으로

『제철 행복』은 에세이다. 굳이 수필과 엄격하게 갈라 부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두 장르 모두 한 사람이 지나온 삶, 살갗에 닿은 감각과 마음에 남은 기억,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사유를 문장으로 옮긴 산문이라는 점에서 같은 뿌리를 지닌다. 다만 이 바카라을 에세이로 명명할 때, 우리는 각각의 이야기를 흩어진 감상의 조각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그 파편들이 바카라 전체를 관통하며 어떤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제철 행복』이 던지는 질문은 선명하다. 행복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때만 찾아오는가, 아니면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처럼 반복되는 하루와 계절의 리듬 속에서도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거창한 개념어로 풀지 않는다. 대신 봄의 빛, 여름의 과일, 가을의 바람, 겨울의 고요처럼 몸에 먼저 와닿는 장면들을 가만히 따라간다. 절기마다 달라지는 공기와 식탁, 산바카라과 날씨, 타인과의 작은 만남 속에서 행복이 어떻게 다른 얼굴로 찾아오는지를 현상학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바카라에서 ‘절기’는 단순한 시간의 구획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아차리게 하는 감각의 이름이며, 흘러가는 하루를 나의 삶에 잠시 붙잡아두어 면밀히 살피고, 그 고유한 삶의 향기를 향유하는 양식이다.


절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달력 위의 글자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늘의 볕이 어제와 어떻게 다른지, 밥상 위에 오른 음식을 통해 어떤 계절이 당도했는지, 늘 걷던 길에서 왜 마음이 조금 다르게 움직이는지를 섬세하게 분별하는 일이다. 그렇게 절기는 무심히 흘러가 버릴 시간을 붙잡아 현재의 표정을 다시 대면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바카라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싶다.


제철을 반복해서 인식하는 삶은 일상 자체를 행복의 자리로 복원한다.
그 행복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같은 일을 매번 다르게 경험하는 감각의 빈도에서 생겨난다.


이 문장은 『제철 행복』을 읽어내는 하나의 길을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인생을 단번에 뒤흔드는 거대한 성취나 극적인 서사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 매일 다시 차려지는 밥상, 익숙한 이와 나누는 다정한 말, 매번 비슷한 듯 다른 계절의 냄새 속에서 조금씩 출현한다. 같은 봄이라도 올해의 봄은 지난해의 봄과 다르고, 같은 음식이라도 오늘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맛은 미묘하게 변한다. 행복은 바로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감각의 해상도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이와 같은 논지를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스물네 절기를 통해 밀도 있게 펼친다. 1년이라는 시간을 스물네 마디로 나누어 따라가며, 각 절기에 무엇을 보고 먹고 느꼈는지, 그때 어떤 생각이 마음에 앙금처럼 남았는지를 차분히 복기한다. 입춘과 경칩, 청명과 소만, 상강과 동지 같은 이름들은 바카라 속에서 박제된 달력의 기호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저자의 생활 내부로 침투해 오늘의 날씨가 되고, 산바카라의 보폭이 되며, 제철 음식의 미각이 되는 동시에 자신을 돌보는 고유한 의식으로 승화된다.


문체는 밝고 산뜻하다. 그러나 그 온기가 결코 가볍게 흩어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다정한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그 장면 너머에 놓인 삶의 태도를 놓치지 않는다. 지금 무엇을 감각하고 있는지, 어떤 때를 통과하고 있는지, 나의 생활은 자연의 리듬과 얼마나 일치해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 바카라의 문장들은 단순한 위안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삶의 속도와 감각의 좌표를 다시 점검하도록 이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이 바카라을 읽는 두 갈래의 길 앞에 선다. 하나는 스물네 절기를 따라 펼쳐지는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을 따라가는 감각의 독법이다. 어떤 계절에 어떤 음식을 올리고, 어떤 날씨가 어떤 마음을 부르며, 어느 순간에 행복이 문득 출현하는지를 다정하게 미행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그 경험들 사이에 조용히 놓인 질문을 읽어내는 사유의 독법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읽기이다. 반복되는 시간을 어떻게 새롭게 영접할 것인가. 일상을 어떻게 행복의 장소로 환원할 것인가. 지금 이 계절을 제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바카라 전반에 시나브로 스며 있다.


여기서부터 이 글은 두 번째 길을 택한다. 곧 바카라의 감각을 따라가되, 그 감각을 발판 삼아 바카라 너머의 시간론으로 나아가려 한다.


『제철 행복』은 1년간 이어지는 스물네 절기를 따라 쓴 생활의 총보이면서, 동시에 그 절기마다 ‘지금-여기’라는 현재의 감각을 더 깊이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건네는 속 깊은 권유다. 계절은 해마다 여일 하게 돌아오지만, 그 계절을 맞이하는 인간은 매번 조금씩 변해간다. 그러므로 제철을 산다는 것은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 지루한 일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간의 궤적 속에서 매번 새로운 나를 발굴하는 일에 가깝다.


이제 이 바카라의 절기 감각을 빌려, 시간 자체의 문제로 걸어가 보자. 바카라의 장면들은 사유의 문턱이 되고, 그 문턱을 넘어가면 생멸을 반복하는 시간의 오래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카라의 철학적 토대―생멸을 반복하는 절기의 속성

앞서 말했듯 『제철 행복』은 절기를 따라 쓴 생활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행복을 새롭게 감각하려는 바카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저자가 말하는 ‘제철’은 단순히 계절에 맞는 음식이나 풍경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그것은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시간 감각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카라의 구성과 문장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바카라은 들어가는 말과 스물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카라의 부제인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이라는 문장은 바카라 전체를 감싸는 하나의 조용한 표지처럼 보인다. 여기서 ‘알맞은 시절’은 앞으로 저자가 따라가려는 스물네 절기를 함축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름과 온도와 표정을 지닌 시간을 뜻한다. 저자는 1년을 그저 열두 달로만 세지 않고, 스물네 번의 미세한 변화로 나누어 바라본다. 그때 시간은 단순한 양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맞이해야 할 결이 된다.


이 바카라의 흐름은 들어가는 말의 첫 문장과 바카라의 마지막 문장 사이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계절을 챙기는 마음은 언제 싹터서 이만큼 자라났을까.”(4쪽)
“한 번뿐인 계절을 귀하게 여기면, 한 번뿐인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싶다. 겨울 숲의 저 나무들처럼, 신의 부재 속에서도 할 일을 찾았던 옛사람들처럼.”(334쪽)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보면, 저자가 절기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저자에게 계절은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마음속에 싹트고, 조금씩 자라나, 마침내 삶의 방식이 된 어떤 감각이다. 계절을 챙기는 마음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한 번뿐인 시간을 귀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에 가깝다. 그래서 바카라의 마지막에 이르면, 절기를 따라 산다는 것은 곧 한 번뿐인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스러움’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때에 맞게 살아가려는 오래된 감각에 가깝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하늘과 땅의 변화, 비와 햇빛, 추위와 더위, 씨 뿌림과 거둠의 리듬 속에서 이어져 왔다. 신의 이름이 희미해진 시대라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때를 나누고, 그때에 맞는 일을 찾으며 살아왔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스물네 절기는 비록 인간이 붙인 이름이라 해도, 삶의 깊은 곳에 자리한 질서에 가깝다. 그것은 달력의 표기이면서 동시에 생활의 약속이고, 오래된 관습이면서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감각의 의식이다.


이제 바카라 안의 절기는 바카라 너머의 철학적 개념으로 넓어진다. 저자가 천착하는 절기는 분명한 사유의 속성을 지닌다. 그것은 사물의 생멸 반복성이다. 우선 저자는 스물네 절기를 네 계절의 흐름 속에 배치한다. 입춘이 봄을 알리고, 대한이 겨울의 끝을 장식한다. 이 절기들이 달의 움직임이 아니라 해의 움직임을 따라 구성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절기는 밤하늘의 달이 차고 기우는 리듬보다, 햇빛의 길이와 그림자의 변화, 땅의 온도와 공기의 결을 더 세밀하게 살핀다. 그래서 절기는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몸으로 겪는 시간이다. 손끝에 닿는 바람, 식탁에 오르는 음식, 발밑의 흙, 창가로 들어오는 빛이 모두 그 시간의 증거가 된다.


봄에는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가 놓인다. 저자는 이 절기들을 비와 싹, 땅이 깨어나는 감각으로 그려낸다. 봄의 시간은 얼어 있던 것이 풀리고, 숨어 있던 생명이 다시 고개를 드는 시기다. 여름에는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가 이어진다. 이때는 햇빛이 계절의 중심을 이룬다. 빛은 길어지고, 열기는 짙어지며, 세계는 생장과 무성함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가을에는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이 자리한다. 낮의 기세가 조금씩 물러나고 밤의 서늘함이 밀려오는 때다. 이슬은 가을의 눈물처럼 맺히지만, 그 눈물은 결실을 위한 양분이 된다. 겨울에는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이 이어진다. 눈과 추위가 계절을 덮고, 생명은 겉으로 물러난 듯 보이지만, 그 고요 속에서도 다음 시간을 준비한다.


이처럼 절기의 배열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가 붙드는 첫 번째 속성이 드러난다. 모든 절기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입춘은 봄을 세우고, 춘분은 낮과 밤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지나게 하며, 곡우는 봄비를 통해 여름으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 입하는 여름을 세우고, 하지는 빛의 정점에 이르며, 대서는 더위의 끝에서 다음 계절을 예감하게 한다. 입추와 추분과 상강, 입동과 동지와 대한 역시 저마다 계절의 문을 열고, 중심을 지나, 다음 계절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된다.


여기서 특히 ‘입(立)’이라는 한자어가 중요하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에서 ‘입’은 단순히 어느 계절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넘어, 하나의 계절이 비로소 세워진다는 뜻을 품고 있다. 계절은 갑자기 도착하지 않는다. 먼저 세워지고, 자라고, 무르익고, 물러난다. 절기는 이 과정을 아주 작은 마디로 나누어 보여준다. 그러므로 절기는 정지된 점이 아니라 흐름 속의 마디다. 봄은 여름을 향해 기울고, 여름은 가을을 품으며, 가을은 겨울의 그림자를 데려오고, 겨울은 다시 봄의 가능성을 속으로 간직한다.


대한은 이 흐름을 잘 보여주는 절기다. 이름만 보면 가장 큰 추위처럼 들리지만, 실제 생활 감각에서는 소한보다 덜 춥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래서 대한은 겨울의 주조음이라기보다, 계절이라는 긴 연주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심벌즈나 팀파니에 가깝다. 그것은 겨울의 절정을 다시 한번 울려 알리면서도, 동시에 끝난 자리 너머에서 입춘의 문이 곧 열릴 것임을 예고한다. 끝은 닫힘이 아니라 다음 시작을 품은 여운이다.


결국 저자의 관점에서 스물네 절기는 개별적이지 않다. 따로 놀지 않는다. 상호 관련되고 연대한다. 각각의 절기는 고유한 얼굴을 지니지만, 앞뒤 절기와 깊이 이어져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일 년 열두 달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생멸을 반복한다. 싹트고, 자라고, 무르익고, 시들고, 다시 쉬었다가 또다시 깨어난다. 네 개의 계절과 스물네 개의 절기는 하나의 거대한 강처럼 흘러가며, 그 강물 속에서 우리의 생활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므로 저자가 말하는 절기의 첫 번째 속성은 ‘따로 그러나 연속해서 함께 흘러감’이다. 다시 말해, 절기는 흘러감이다.


두 번째 속성도 있다. 절기는 단지 흐르기만 하지 않는다. 절기는 사람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놓는다. 물론 매 절기에 경험하는 삶은 사람마다 다르다. 저자의 경험 역시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이에게 입춘은 새로운 마음을 내는 날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추위에 웅크리는 날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게 곡우는 봄비의 반가움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축축한 마음의 날씨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절기에 대한 경험은 일반화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개별적인 경험 끝에서 저자는 반복되는 시간이 어떻게 삶을 갱신하는지를 사유한다.


바카라 곳곳에는 그런 문장들이 흩어져 있다. 저자는 절기를 따라 산다는 것이 한 해를 사계절이 아닌 이십사 계절로 촘촘히 겪는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것은 눈앞의 계절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기회가 스물네 번 찾아온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또 입절기를 두고 배웅과 마중의 시간이라 부른다. 한 계절을 보내고 다른 계절을 맞이하는 일은 단순한 날짜의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를 바꾸는 일이다. 지나간 것을 놓아주고, 다가오는 것을 맞이하는 일이다.


희망에 대해서도 저자는 같은 감각을 보여준다. 희망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어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하는 사람의 마음에 새것처럼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절기의 시간과 닮아 있다. 봄이 매번 같은 방식으로 오지 않듯, 희망도 이미 완성된 물건처럼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시 움직이는 순간, 낡은 시간 속에서 새롭게 생겨난다. 그러므로 절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갱신의 반복이다.


저자가 땅의 봄을 말하며 이른 봄나물을 찾아 먹는 일을 떠올리는 장면도 중요하다. 계절의 변화는 머리로 먼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몸에서, 입안에서 먼저 느껴진다. 봄나물을 먹는 일은 작은 식사의 행위이지만, 그 안에는 땅이 먼저 알아차린 봄을 몸속으로 들이는 감각이 있다. 절기는 관념이 아니라 생활의 자리에서 만져지는 변화다. 그래서 저자가 절기가 관찰과 기록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단순한 설명 이상이 된다. 절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비와 바람을 기록하고, 씨앗과 수확의 때를 기억하며 남겨온 생활의 지혜다.


이 점에서 절기는 큰 시간을 작은 시간으로 쪼개는 방식이기도 하다. 저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을 때, 큰 질문은 작은 질문으로, 큰 시간은 작은 시간으로 나누어보라고 말한다. 1년이 막막하다면 다만 봄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보는 것. 이 문장은 『제철 행복』의 시간 감각을 잘 보여준다. 삶 전체를 한꺼번에 감당하려 하면 우리는 쉽게 지친다. 그러나 오늘의 볕, 오늘의 밥, 오늘의 산바카라, 오늘의 마음으로 시간을 나누면 삶은 조금 덜 막막해진다. 절기는 거대한 시간을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크기로 잘라주는 다정한 단위다.


그러므로 저자가 말하는 절기의 두 번째 속성은 변화이다. 절기는 삶을 갱신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반복적으로 찾아온다. 그것은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듯 보이지만, 결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지난해의 입춘과 올해의 입춘은 이름은 같아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지난해 먹은 봄나물과 올해 먹는 봄나물은 같은 계절의 음식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몸과 마음은 이미 달라져 있다. 절기는 되돌아오지만, 그 절기를 맞이하는 삶은 매번 조금씩 새로워진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의 절기론은 자연스럽게 시간론으로 이어진다. 이 바카라이 보여주는 시간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하나는 순환성이다. 시간은 절기를 따라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봄은 여름으로, 여름은 가을로, 가을은 겨울로 흘러가고, 겨울은 다시 봄을 향해 문을 연다. 다른 하나는 변화성이다. 돌아온 시간은 언제나 같은 얼굴이 아니다. 시간은 우리의 삶 어느 자리에 머물러 감각을 바꾸고, 기억을 깨우며, 마음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놓는다. 절기는 순환하지만, 인간은 그 순환 속에서 변한다.


이 순환성과 변화성은 이 바카라의 행복론과 깊이 연결된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큰 성취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야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고 미미한 일상을 더 촘촘하게 바라볼 때, 삶은 충분히 행복의 자리가 될 수 있다. 1년을 네 계절로만 살 때에는 놓치기 쉬운 것들이, 스물네 절기로 나누어 바라볼 때에는 조금 더 자주 눈에 들어온다. 봄이 왔다는 말 하나로 지나칠 수 있는 시간을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로 다시 나누어 겪을 때, 우리는 행복해질 기회를 더 자주 얻는다.


그리하여 저자는 행복을 막연히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찾아오는 미래의 보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행복은 지금 당장 붙잡아서 누려야 할 현재의 권리에 가깝다. 물론 그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봄의 시금치, 여름의 옥수수, 가을의 고구마, 겨울의 붕어빵처럼 작고 평범한 것들 속에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행복은 더 자주 우리에게 온다. 계절이 반복되어 돌아올 때마다, 같은 음식도 다른 맛이 되고, 같은 길도 다른 풍경이 되며, 같은 하루도 다른 마음으로 다가온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행복론은 ‘제철’을 붙잡아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향유하는 카르페 디엠의 변주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순간을 소모하라는 조급한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아차리고, 그때에 알맞은 감각을 정성껏 받아들이라는 절제와 순응의 권면에 가깝다. 제철을 산다는 것은 시간을 장악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흘러가는 절기 속에서 지금의 나를 발견하고, 다시 돌아오는 계절 속에서 조금 달라진 나를 맞이하는 일이다.


이제 다시 바카라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려 한다. 『제철 행복』이 보여준 절기의 순환성과 변화성은 단지 계절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유익한 때란 무엇인가를 묻는 더 오래된 시간론의 문을 연다.

바카라의 확장―‘인간에게 유익한 때’라는 시간론

『제철 행복』은 가벼운 일상 수필집에 머물지 않는다. 이 바카라은 스물네 절기를 따라 일상의 자잘한 궤적을 기록하면서도, 그 안에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반복되며, 그것이 우리 삶의 자리를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를 묻는 생활철학적 에세이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바카라이 품고 있는 논지는 단순한 일상 예찬을 넘어, 시간론의 지평 위에서 한 번 더 확장해 볼 수 있다.


그 확장의 중심에는 “인간에게 유익한 적절한 때”라는 실존적 관점이 놓인다. 시간은 그저 허공으로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추상적 흐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이 되어 우리에게 당도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과 실존적 깨달음, 삶의 방향성을 선물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론과 고대 히브리 지혜자인 코헬렛의 시간관, 그리고 김신지가 말하는 제철 행복론은 하나의 흐름 위에서 만난다.


먼저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 이해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시간이 우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흐르는 절대적이고 고정된 배경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간은 관계적이다. 인간이 놓인 자리, 그곳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사건, 그리고 몸이 감각하는 미묘한 변화에 따라 시간은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


같은 하루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고,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길게 늘어진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같은 5분이라 해도, 도시의 소음 속에서 무심히 흘려보낼 때와 호젓한 산바카라길에서 봄의 야생화 한 송이를 발견하여 눈을 맞출 때의 시간은 전혀 다른 질감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시간은 단순히 숫자로 계량되는 물리적 단위가 아니라, 사건과 감각과 인간의 의식이 서로 스며드는 자리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주관적 경험의 총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제철 행복』이 스물네 절기를 따라 일 년의 시간을 촘촘하게 나누어 읽어내는 방식은 대단히 흥미롭다. 저자는 일 년이라는 거대한 순환의 시간을 네 개의 계절이나 열두 개의 달이라는 성긴 망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다시 스물네 개의 작은 마디로 세밀하게 분절하고, 그 미세한 틈새 사이에서 일어나는 빛의 변화, 바람의 결,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맛, 마음에 일어나는 작은 흔들림을 관찰한다.


시간은 작게 쪼개고 나눌수록 빈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풍요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하루를 통째로 뭉뚱그려 지나쳐버리면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무채색의 날 같지만, 제철이 건네는 작은 변화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 시간은 이미 우리 삶에 유일무이한 시간으로 각인된다. 존재의 변화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의 정밀한 결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을 가질 때, 삶은 조용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로벨리의 관계적 시간론은 『제철 행복』이 제안하는 독법과 맞닿는다. 시간을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시계의 시간을 많이 소유하거나 물리적으로 오래 살아남는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가능한 한 섬세하고 깊게 감각하는 일이다. 같은 봄이라 할지라도 입춘의 봄과 경칩의 봄, 곡우의 봄이 품은 공기의 무게는 저마다 다르다. 같은 가을이라 해도 처서의 가을과 백로의 가을, 상강의 가을이 데려오는 바람의 온도는 판이하다. 저자는 이 미세한 해상도의 차이를 놓치지 않는다. 시간의 결을 잘게 나누어 바라볼수록, 우리는 삶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성실하게 새로워지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시간의 관계성과 변화성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삶의 태도를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 흘러가는 시간이 인간에게 어떤 실존적 의미를 주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 어떻게 삶을 살찌우는 유익한 때가 되는지를 묻기 위해서는 코헬렛의 깊은 시간론을 함께 겹쳐 읽어야 한다.


전도서 3장 1절 이하에서 코헬렛은 이때의 문제를 인간의 실존적 삶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그는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때가 있다고 노래한다. 낳을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은 것을 뽑아내야 할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이 오래된 지혜의 노래는 단순히 인간사에 다양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는 인간이 마땅히 온몸으로 감당하고 배워야 할 알맞은 시절이 있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히브리어 ‘에트 러콜-하페츠’다. 이 말은 단순히 모든 일에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기계적 뜻을 넘어, 인간의 삶 내부에서 어떤 일이나 사건이 가장 알맞고 적절하게 발생하는 결정적 때가 있음을 의미한다. ‘에트’가 흘러가는 때와 시간을 뜻한다면, ‘헤페츠’는 일과 뜻, 바람과 즐거움,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실존적 유익과 깊이 관련된 단어다. 따라서 ‘에트 러콜-하페츠’는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크로노스적 시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깊은 유익과 깨달음, 새로운 삶의 방향을 건네는 적절한 사건의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은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사건이 가장 알맞은 때에 인간의 삶에 도착할 때, 그 시간은 인간의 영혼을 깨우고 삶의 태도를 다듬는 유익의 자리가 된다. 이 점에서 코헬렛의 시간론은 헬라 철학의 카이로스 개념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카이로스는 시곗바늘이 양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곧 크로노스와 구별된다. 크로노스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가”를 묻는다면, 카이로스는 “지금이 무엇을 행하기에 알맞은 때인가”를 묻는다. 카이로스는 어떤 사건이 가장 적절하게 발생하여 인간의 삶에 근원적인 의미와 변화를 일으키는 질적인 시간이다.


앞서 무심코 지나쳤던 기쁨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언급했듯, 이 카이로스적 순간을 포착해 내는 일이야말로 삶을 예술로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는 덧없이 사라지는 찰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삶의 좌표를 새롭게 이해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며, 이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적절한 사건의 시간이다.


코헬렛이 말하는 때 역시 이러한 카이로스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낳을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는 서로 모순되고 대립하는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혜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각각의 때는 인간에게 저마다 대체 불가능한 유익을 건넨다. 죽음의 때는 삶의 유한성을 절감하게 하여 역설적으로 오늘을 사랑하게 만들고, 심는 때는 자연의 순리 앞에서 기다림을 배우게 하며, 우는 때는 인간의 근원적 연약함을 인정하게 하고, 웃는 때는 삶이 여전히 다정한 선물일 수 있음을 감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코헬렛이 노래하는 때는 단순히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적 점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과하며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는 배움의 시간이다.


나는 이것을 코헬렛의 시간에 대한 야누스적 사유라고 부르고 싶다. 시간은 언제나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이다. 시작의 시간 안에는 이미 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끝의 시간 안에는 다시 시작될 가능성이 숨어 있다. 기쁨은 슬픔의 기억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며, 깊은 상실의 고통은 도리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코헬렛이 일러주는 지혜는 삶의 어느 한 단면, 어느 하나의 시간만을 절대화하여 절망하거나 오만해지지 않는 태도에 있다. 지금이 비록 울 때라 할지라도 그 울음의 장막 안에서 인생 전체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 지금이 비록 웃을 때라 해도 그 웃음이 영원할 것처럼 자만하지 않는 것. 삶의 여러 마디와 때를 입체적으로 함께 바라볼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을 관조하는 깊은 시간 감각을 얻게 된다.


이제 다시 『제철 행복』으로 돌아오면, 이 바카라이 사계절의 절기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야누스적 사유와 깊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입춘은 봄의 시작을 선포하지만 여전히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겨울의 끝자락을 품고 있으며, 상강은 가을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도 서릿발 같은 겨울의 도착을 예고한다. 밤이 가장 긴 동지는 언뜻 암흑의 정점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 순간부터 다시 낮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는 빛의 전환점이 된다.


절기는 언제나 하나의 얼굴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간 계절에 대한 다정한 배웅이면서 동시에 찾아올 계절에 대한 마중이고, 하나의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이며, 사라짐이면서 다시 돌아옴을 약속하는 순환의 징표다. 그러므로 절기를 따라 산다는 것은 어느 한 계절의 영광이나 기쁨만 붙드는 일이 아니라, 부단히 변화하는 시간의 두 얼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다.


이로써 로벨리와 코헬렛, 그리고 김신지의 시간론은 “인간에게 유익한 적절한 때”라는 하나의 관점 위에서 만난다. 로벨리는 시간이 절대적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와 사건 속에서 매번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코헬렛은 그 사건의 시간이 인간에게 존재론적 의미와 지혜를 건네는 알맞은 때임을 노래했다. 김신지는 그 알맞은 카이로스의 때가 거창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마다 찾아오는 우리 생활의 작고 사소한 변화 속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음을 수필의 언어로 보여준다. 결국 그에게 ‘제철’이란, 소외된 현대인에게 유익한 사건으로 다정하게 당도한 카이로스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이 확장의 끝에서 다시 글쓰기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제철 행복』이 시간의 철학을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저자가 그 시간을 기록하고 수집하는 방식에 있다. 시간은 지나가지만, 기록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현재의 사건으로 불러낸다.


기록과 수집―지나간 시간을 현재의 사건으로 되살리는 일

『제철 행복』의 매력적인 서술 방식은 시간과 그것을 붙잡아두는 기록에 대한 깊은 헌신에서 나온다. 저자는 매일의 일기를 통해 휘발되기 쉬운 글의 소재들을 낚아채고, 자기 삶에 반복해서 찾아오는 소박한 장면들을 보석을 고르듯 가만히 수집한다. 바카라 속의 문장들은 맑고 경쾌하다. 그래서 바카라장을 덮고 나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재래시장에 나가 파릇한 제철 채소를 장바구니에 담고 싶어지거나, 집 근처 공원에 선 나무들이 어떤 색깔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저자는 독자에게 무거운 위로나 거창한 도덕적 조언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오늘 하루를 성실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작고 구체적인 구실들을 마련해 준다. 하루하루의 절기가 이미 우리 삶에 거저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유쾌하게 귀띔해 주는 것이다.


저자의 글쓰기는 작고 사소해서 쉽게 잊히는 것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에게 행복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문턱이 아니다. 행복은 오늘 당장 내 몸으로 실행 가능한 구체적인 감각이다. 계절의 결에 맞는 제철 음식을 챙겨 먹고, 늘 걷던 출퇴근길의 가로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바라보며, 오늘의 바람 냄새가 어제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살갗으로 느껴보는 일이다.


얼핏 보면 지극히 가볍고 소박해 보이지만, 문장을 찬찬히 뜯어보면 삶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행복의 꼬리를 슬쩍 건드려 깨워주는 힘이 있다. 딸과 어머니 사이의 살가운 농담, 아내와 남편이 나누는 현실적이면서도 애틋한 말들, 가장 친한 친구와 동네 카페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누는 듯한 다정한 어조 속에서, 독자는 어느새 자기 삶의 낡은 담벼락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며 미소 짓게 된다.


이 바카라은 기록과 수집을 기반으로 삼은 서사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자기 자신을 세상의 소소한 행복을 모으는 수집가처럼 위치시킨다. 무심히 흘러가 허공으로 사라질 뻔한 찰나의 감정과 풍경을 문장으로 붙잡고, 그 기록의 아카이브를 통해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저자의 언어는 시각적이며 감각적이다. 그의 문장은 독자에게 억지로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저 눈앞에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그 그림 안으로 계절의 냄새와 온도와 맛이 한꺼번에 들어오게 만든다. 그렇게 저자에게 기록이란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박제해 두는 창고가 아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을 오늘 우리에게 다시 유익한 사건으로 부활시키는 능동적인 삶의 양식이다.


이 독특한 글쓰기를 통해 저자는 삶의 궁극적인 가치를 소유에서 존재의 지평으로 옮겨놓는다. 겉보기에는 그저 제철에 나는 맛있는 음식, 계절을 탈 때 필요한 소소한 물건들, 혹은 특정한 계절의 장소를 권하는 듯하지만, 바카라의 시선이 끝내 향하는 종착지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라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계절을 통과하고 있으며, 그 계절의 마디 속에서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이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바카라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들이고 축적하는 소유하는 삶보다, 지금의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존재하는 삶의 위대함을 예찬한다. 제철의 값비싼 사물들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내게 거저 주어진 제철의 감각 안에 가만히 머무는 일. 계절을 내 뜻대로 소유하기 위해 붙잡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다시 겸손하게 발견하는 일. 그것이 이 바카라이 조용히 노래하는 삶의 방향성이다.


바로 이 존재의 자리에서 우리는 크로노스의 무심한 흐름으로부터 카이로스의 의미 있는 지평으로 이동한다. 『제철 행복』은 우리를 1월부터 12월까지 기계적으로 지나가는 메마른 시간의 궤도에서 과감히 이탈시켜, 매 순간 의미가 샘솟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옮겨놓는다. 무심히 흘러가는 1년의 시간을 스물네 절기의 마디로 다시 촘촘하게 나누는 순간,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흐름을 멈추고 인간에게 실존적 의미가 발생하는 자리가 된다. 입춘은 달력 위의 무미건조한 하루가 아니라 해이해진 새 마음을 다시 세우는 결단의 때가 되고, 상강은 서늘한 가을의 끝이 아니라 내 삶의 속도를 늦추라고 계절이 다정하게 울려주는 영혼의 알람이 된다.


바카라으로 바카라 너머를 읽으려는 이 메타서평의 시선은 바카라의 전체 구조에서 한 절기의 심장부로 좁혀진다. 여러 절기 가운데 유독 상강이 오래 마음에 남는 까닭은, 그 안에 시작과 끝, 빛과 어둠, 행복과 안식의 두 얼굴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상강, 그리고 검은 안식의 철학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바카라이 노래하는 스물네 절기 가운데, 가을의 마지막 자락에 자리한 상강을 오래 기억하고 사랑한다. 나의 외로운 서재가 경기도 이천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던 시절, 가을의 끝에서 차가운 겨울로 건너가는 서늘한 길목에 이르면 새벽마다 넓은 들판 위로 하얗고 투명한 이슬이 가득 내려앉곤 했다. 그 이슬은 눈에 보이는 차가운 물방울에 불과했음에도, 서재 문을 열고 나설 때면 이상하게도 온 우주의 정수가 담긴 듯했다.


저자가 바카라 속에서 말하듯, 이슬이 서리로 바뀌는 상강은 계절이 크게 바뀌는 시기다. 저자는 상강에 내리는 차가운 서리를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라는 계절의 다정한 알람으로 바꾸어 읽어낸다. 그 문장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어떤 아름다운 계절은 시각적인 풍경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깨우는 고요한 소리로 오기 때문이다. 상강의 그 시린 새벽마다, 나는 계절이 내 서재의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며 이제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라고 속삭이던 카이로스의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나에게도 계절이 울려주는 그 내밀한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이러한 시간의 순환은 눈부신 꽃과 풍요로운 열매가 펼치는 화려한 향연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강은 빛나던 초록의 생애가 서리라는 차가운 결정을 입고, 소멸을 향해 엄숙히 고개를 숙이는 지점이다. 숲의 나무들에게 겨울은 화려한 잎의 외피를 벗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계절이다. 아무것도 감추지 못한 채 앙상한 몸으로 숲을 지켜내야 하는 어둠의 시간이기도 하다.


나무는 찬바람 한복판에서 눈으로 덮인 검은 침묵을 묵묵히 통과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검은 안식의 시간은 생명이 스스로를 비워내고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여 다음 생을 준비하는 가장 고요한 의식이 된다. 모든 것을 드러내고 비워내야만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음을, 겨울나무는 온몸으로 증명한다. 이때의 어둠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음 계절을 품기 위해 잠시 빛을 낮추는 시간이며, 생명이 다시 시작되기 전 자기 안으로 깊이 돌아가는 시간이다.


신이 부재하는 것만 같은 황량한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상강은, 겨울나무들이 매서운 삭풍을 맞이할 채비를 마쳤음을 알리는 경종이다. 동시에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존재가 제 할 일을 찾도록 일깨우는 엄숙한 타종이기도 하다. 저자가 바카라의 마지막에서 신의 부재 속에서도 할 일을 찾았던 옛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절기는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체계라기보다, 신의 침묵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인간이 자기 삶의 리듬과 의무를 다시 발견하도록 돕는 오래된 표지에 가깝다.


결국 스물네 절기를 따라 누리는 제철 행복이란 찬란한 발산의 순간뿐 아니라, 쓸쓸한 소멸과 어둠마저 기꺼이 받아들이는 안식의 의례다. 행복은 더 이상 밝고 따뜻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행복은 생멸하는 세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오직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기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계절의 화려한 정점뿐 아니라 서리가 내리는 침묵 앞에서도, 차가운 어둠을 영혼의 아늑한 안식처로 받아들이는 지혜. 『제철 행복』이 보여주는 행복은 바로 그 자리에서 더 깊어진다.


바카라으로 돌아와 보면, 상강의 검은 안식은 바카라 너머에서 길어 올린 나의 사유이지만, 그 사유는 결국 『제철 행복』이 건넨 제철의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바카라은 나를 밖으로 밀어냈고, 밖에서 얻은 사유는 다시 바카라을 더 깊게 읽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카라으로 바카라 너머를 읽는 메타서평의 원운동이다.


결론―제철행복론, 오늘 영접해야 할 삶의 친구

저자는 행복을 아득한 미래의 보상이나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지금-여기라는 현재의 자리에서 당장 붙잡아야 할 실존적 권리로 바라본다. 속도의 도시 속에서 제철의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다 해도, 우리가 시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변화의 마디를 다정하게 따라 걸을 수 있다면, 메마른 일상은 언제든 다시 축제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저자가 절기를 따라 산다는 일을 한 해를 사계절이 아닌 이십사 계절로 촘촘히 겪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복해질 기회는 거대한 사건이 올 때 한 번 열리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마디마다 스물네 번씩 조용히 찾아온다.


인간의 삶은 스물네 개의 절기를 따라 자연과 보폭을 맞추며 걸어가는 유기적인 과정이다. 어제는 무심히 지나쳤던 산바카라길의 야생화를 오늘 새롭게 발견하듯, 우리는 소멸과 탄생이 교차하는 절기의 틈새에서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영접한다. 이 바카라은 흘러가 버릴 오늘을 잘 보낼 작고 구체적인 구실을 마련해 준다. 눈부신 빛의 순간은 물론, 어둡고 시린 검은 안식의 시간까지도 삶을 이루는 소중한 조각임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삶은 철의 빛을 따라 스스로 수놓은 무늬와, 그 무늬를 묵묵히 받쳐주는 빈 배경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 된다. 행복은 그 깊은 관찰 속에서 조금씩 빈도를 얻는다.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있어 우리 삶은 새로고침된다. 계절의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은근한 힘이다. 이 다정한 바카라을 읽고 나면, 어느새 우리 마음의 밭에도 얼어붙은 땅을 뚫고 봄이 밀려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불현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오늘 우리에게 도착한 계절의 맛을 온몸으로 음미하고 싶은 충동도 일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 속에 움트는 스물네 개의 마디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깊은 겨울의 정점에서 지난봄부터 걸어온 길을 다정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자기 성찰이라는 가장 성숙한 영혼의 결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제철 행복은 결국 지나온 절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절기 사이를 보이지 않게 잇는 단 하나의 점, 곧 현재의 즐거움을 붙잡는 일이다.


나는 이 현재를 ‘0’의 자리라고 부르고 싶다.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불안이 잠시 물러난 자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 순수한 공백의 자리 말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제때 느끼는 제철의 즐거움은 흐르는 시간을 넘어 영원의 지혜와 다정한 친구가 된다.


서두에 던졌던 질문, “보이지 않게 주어지는 행복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라는 물음에 이제 이 바카라을 덮으며 답할 수 있겠다. 행복에도 분명 유효기간은 있다. 그것은 제철의 음식처럼, 계절의 빛처럼,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서만 온전히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매 순간 시간의 해상도를 높여 제철의 카이로스를 알아차리는 사람에게, 그 유한한 행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의 감각은 기록되고, 기억되고, 다음 계절에 다시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제철의 행복은 짧게 머물지만 깊게 몸에 새겨진다.
『제철 행복』은 그 짧고 깊은 머묾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바카라이다.
그리고 이 바카라을 통해 바카라 너머를 읽는 일은, 결국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이미 도착해 있는 알맞은 때를 다시 알아보는 일이다.
그것이 이 바카라이 우리에게 건네는 생의 철학,
결코 바래지 않는 행복의 유효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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