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은하,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무존재
시간: 망종이 다가오는 어느 초여름,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늦은 오후부터 해가 지고 난 뒤 깊은 밤
장소: 도시 외곽 한적한 천문대 야외 테라스
참여자: 나(슬롯), 바쇼, 벤야민, 헤셀, 레벤슨, 황현산, 어느 천문학자
주제: 검은 안식의 철학과 시학의 현대적 프락시스
#1. 시로 읽는 암흑은하
슬롯자: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느새 날이 더워졌습니다. 오늘이 망종이더군요. 스물네 절기 중 까끄라기가 있는 곡물의 씨를 뿌려 결실을 기다린다는 때라고 합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이 글을 통해 깊은 성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이자 이 대화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주제 시는 「암흑은하」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말은 별이 없거나, 혹은 별이 보이지 않는 은하라는 뜻입니다. 빛나는 것이 없고, 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어둠 자체로 은하라는 이름 아래 우주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평소 ‘밤이 선생이다’라는 주제를 천착하신 황현산 선생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박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이 계시는데, 암흑은하를 주요 연구 주제로 다루시는 천문학자이십니다.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이야기 중반쯤 영상으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자, 그럼 제가 이 단시를 먼저 읽어드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암흑은하
끝내 무별무별 오로지 어둠만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나,
없음이 있음 되는, 무의 가치여
바쇼: 아주 좋습니다. 듣다 보니, 제가 걸었던 밤길이 하나둘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괜찮다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시를 저의 리듬으로 다시 한번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슬롯자: 아, 그것 좋습니다.
바쇼: 네, 그럼 밤길을 걷듯이 리듬을 살려 보겠습니다.
끝-내
무 별 무 별
오로지 어둠만―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나―
없음이― 있음 되는,
무의
가
치
여
일동: 박수
벤야민: 아주 실감 나게 들려주시네요. 이렇게 읽으신 의도를 좀 듣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바쇼: 물론입니다. 사실 저는 밤하늘의 별과 은하를 소재로 한 하이쿠를 두 편 정도 썼습니다. 하나는 에치고라는 지역의 이치부리(市振) 해안을 지나다가 파도가 거세게 치던 밤, 유배지로 유명한 ‘사도’ 섬을 바라보며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시골길을 걷다가 어느 집에서 들려오던 다듬이 소리를 배경으로 지은 시입니다. 그 시에 담긴 소리는 마치 밤하늘 북두칠성까지 올라가 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단시를 듣고 나니, 이 시는 밤하늘 은하수를 노래하는 것을 넘어 그 어둑한 길을 걷는 나의 발걸음이 마치 하늘의 별이 되는 것 같은 상상을 자극했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리듬을 맞춰 읽어드린 것은 보이지 않지만 그 길에 살아 있는 발걸음이 들려온다는 것을 상상한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무의 가치여’라는 시어는 ‘없을 무(無)’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있는 것 같고, 드러나지 않지만 거기 존재하는 것처럼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시어였습니다. 제가 또박또박 읽은 것도 바로 그 점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가 들려드리고 싶었던 것은 ‘무존재의 존재, 그 무한한 가치’였습니다.
슬롯자: 바쇼 선생님, 혹시 지으셨다는 하이쿠 두 편도 같이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바쇼: 아, 부족하지만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거친 바다여, 사도 섬으로 누운 듯이 흐르는 은하수”
“별밤, 북두칠성까지 올라가는 여인의 다듬이 소리”
황현산: 이런 귀한 자리에 참여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언제나 ‘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앞서 들려주신 단시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무례하지만 나섰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끝내 무별무별 오로지 어둠만”이라는 첫 행이 오래 남습니다. 바쇼 선생님이 ‘무 별 무 별’이라고 하나씩 끊어 읽어주신 것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리듬을 따라가다 보니 밤길을 걷는 제가 보였고, 그 어두운 밤 안에서 컴컴한 세계를 응시하는 저의 고요한 눈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바쇼 선생님의 하이쿠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그 고요는 다듬이 소리에 실려 온 적막이었습니다.
이 모순 같은 소리가 어우러진 밤이 마치 한 방울의 낙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만들어 내는 청랑한 호수 같았습니다. 이슬처럼 영글었다 떨어지는 소리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아침이겠지만, 이 단시에서는 그런 흐름이 밤에도 일어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이 단시와 바쇼님의 하이쿠에서 저는 어둠의 소리가 막 세계에 태어나기 전 깊은 호흡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요’라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무별은 별이 없다는 뜻일 테지만, 장자의 철학을 빌리자면 ‘있음의 없음’이기에, ‘무별’은 어둠에 잠시 갇혔다가 다시 드러나는 별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별이 없으므로 더 깊고, 빛나지 않으므로 더 오래 머무는 그런 은하의 세계가 떠오릅니다.
바쇼: 제 하이쿠를 잘 받아주신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황 선생님의 ‘밤에 대한 사유’를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황현산: 영광입니다. 사실 제 이야기는 ‘밤, 별, 나아가 무별과 은하’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사유이지만, 우선 ‘밤’에 대해서 짧은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 말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통해 더 깊어지리라는 기대를 갖고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밤이 선생이다’라는 문학적 논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밤, 간단히 어둠이라고 확장할 수도 있을 텐데, 이것을 ‘시간’으로 보지 않고 ‘공간’으로 이해합니다.
얼핏 밤은 사물을 감추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물을 품어주는 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또한 감추는 듯하지만, 오히려 낮과 밝음이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것을 일러주기 때문입니다. 낮은 누구나 선호하지만, 밤은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밤이나 어둠 안에서는 몸이 느릿해집니다. 그 ‘느릿해짐’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관찰하기에 아주 좋은 속도입니다. 마치 천천히 내딛는 걸음처럼 자기 안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별무별’이라는 표현을 속보(速步)가 아니라 ‘완보’(緩步)로 읽어주신 것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말은 그저 별이 없다는 뜻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느 별이 마치 나의 걸음을 따라 함께 걸어주는 발걸음처럼 들렸습니다.
헤셀: 황 선생님, 문학가다운 관점이 새롭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도 나눈 것처럼 저는 ‘안식’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안식’은 ‘낮’보다 ‘밤’과 더 깊이 연관된 것 같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난 뒤 찾아오는 밤은 인간에게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주 야훼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난 뒤 ‘안식했다’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 상황도 역시 ‘밤’이었을 것입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 안식의 순간에 야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좋았다(토브)’라는 말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작은 표식이 ‘밤’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과장일 수도 있지만, 야훼께서는 자기 안식처를 ‘밤’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시를 들으면서 야훼가 안식하는 밤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없음이― 있음 되는,”이라는 대목에서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때의 ‘없음과 있음’은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바로 ‘있음의 없음, 그 없음의 있음’이라는 일련의 창조의 보이지 않는 과정입니다. 안식이란 이 과정의 마지막 결실인 셈입니다. 결국 이 시를 통해 저는 안식이란 무의 시공간이어서, 마치 오래전 장자 선생께서 지나가듯 말했던 ‘무무(無無) 세계’를 재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슬롯자: 시작부터 이야기가 상당히 깊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헤셀 선생님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헤셀: 하하, 제가 급한 마음에 그만 이야기를 서둘렀네요. 안식은 느릿하다는 인상인데, 저는 그 안식을 빠르게 말하는 걸 보니 인간은 역시 자기 한계가 있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조금 더 부연해 보자면, 안식은 황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무엇보다 안식은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카이로스를 제공합니다. 앞서 단시에서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나”라는 구절은 제가 생각하는 안식의 핵심을 잘 드러냅니다. 안식 안에서 존재는 생산성을 멈춥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멈춤은 존재의 소멸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내지 않아도, 성과를 보이지 않아도, 자기 숨을 유지하는 존재는 이미 충분합니다. 안식의 색이 ‘검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관점입니다. 저의 견해처럼 슬롯자님의 사유의 핵심이기도 한 ‘검은 안식’은 바로 그 ‘어둠,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존재하는’ 성소입니다.
벤야민: 아하, 이것 참 대단한 사유입니다. 밤을 검은 안식으로 설명하다니 심오합니다. 질문이 막 솟아납니다. 차츰 저의 궁금증이 풀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우선 이 단시에 대한 제 소감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슬롯자: 네, 좋습니다.
벤야민: 저는 시간과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결국 제가 천착한 이런 주제는 보이는 세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너머(beyond)’를 ‘지금-여기’로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인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단시에서도 저는 그런 시공간의 흐름을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는 이 단시에서 제 평소 생각을 더 심화할 새로운 변수를 찾았습니다. 바로 ‘밤’이라는 배경입니다. ‘어둠’, ‘보이지 않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시야와 시선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고,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것이 어둠에 들어서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빛 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어둠이 밀려오면 갑자기 특별한 세계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별은 밤을 빛내는 작은 빛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별이 반짝이면 뭔가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은하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런데 만약 ‘별마저 사라진 밤’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어둠 중의 어둠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시를 듣다 보면, 그 어둠마저도 완전한 어둠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입니다. 어둠 어딘가에 ‘빛’이 스며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빛, 어둠을 균열하는 찰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견줘보면, 과거와 미래는 모두 어둠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밤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역시 어둠입니다. 현재 역시 존재하지 않으니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어둠에 상응합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 현재는 모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는 있었던 사실이고, 미래는 그 과거가 도달할 사실입니다. 현재는 있었던 것과 있을 것 사이에 유동하는 ‘있음’입니다. 결국 저는 이 단시에서 있음의 없음과 없음의 있음을 시공간 개념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점에 아주 고무되었습니다.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나―
라고 읽어주신 바쇼 선생님 덕분에 이런 생각이 더 깊어졌습니다.
이에 힘입어 저는 이 시어의 힘이 파편성에 있다고 봅니다. 몇 단어 되지 않지만, 그 짧은 형식 안에서 하나의 우주론이 열리기도 합니다. 현대 문명은 모든 것을 조명하고, 노출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시어는 그 빛의 연속성을 끊습니다.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나”는 하나의 모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를 드러내는 변증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빛나지 않음(定)
빛남(反)
나(合)
입니다.
어둠과 빛, 이 둘이 어우러진 ‘나’입니다. 어둠이 과거이고 빛이 미래라면, 나는 현재 빛과 어둠이 복합된 존재인 셈입니다. 결국 이 시어 안에서 어둠, 있음과 없음, 존재와 무존재가 한순간에 충돌합니다. 바로 그 충돌의 찰나에서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발생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헤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검은 안식’일 것입니다.
레벤슨: 슬롯자님, 이거 좀 쉬었다 해야겠습니다. 밤하늘의 별이 창창한데 얼굴만 보면서 이야기가 너무 깊어집니다. 간식을 나누면서 티타임을 가지는 건 어떨까요? 제가 가서 좀 사 오겠습니다. 원하시는 것 주문해 주세요. 아니, 카페가 멀지 않으니 가볍게 밤길을 걸으면서 함께 다녀오는 것은 어떤가요?
슬롯자: 벤야민 선생님의 말씀은 상당히 밀도가 높군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히려 그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나 이미 지나간 것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방식이다”라는 말씀 같습니다. 어떤가요?
벤야민: 아, 그 정도면 일단 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차츰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슬롯자: 다행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섹션을 잠시 멈추고 쉬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쉬고 난 뒤, 벤야민 선생님의 말씀을 좀 더 이어가겠습니다.
(모두 가볍게 웃으며 카페에 들어섰습니다. 별 모양의 조명이 은은하게 흐르는 실내에는 저음의 바리톤 가수가 부르는 The Music of the Night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The darkness of the music of night.”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이 노래를 조용히 부르고 있었습니다.)
#2. 밤의 시학, 잃어짐의 미학
슬롯자: 밤길을 같이 걸으니 기분 전환도 되고 아주 좋습니다. 그럼 이제 벤야민 선생님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보겠습니다.
벤야민: 네, 아까 드린 말씀에 조금 더 이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밤’이라는 어둠은 시공간 개념에서 역사 이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이해란 늘 ‘현재’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는 시간 말입니다. 밤도 역시 낮의 사건이 이어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낮의 시간이 더는 효력을 갖지 않는 공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밤은 낮의 연장선이면서도 낮과 단절되고, 낮과 다르면서도 같은 사건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레벤슨: 아, 그렇게 이해하시는군요. 듣고 보니 저 역시 히브리적 창조의 그림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히브리 텍스트에 의하면, 창조 이전에는 혼돈이 있었고, 물 아래로는 흑암과 깊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흑암이 정확히 어둠에 상응하는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이 흑암이 볼 수 없는 시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바닷속, 빛이 더는 들어오지 못하는 그 심해의 분위기가 풍기니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흑암은 컴컴하면서도 뭔가 존재하는 공간,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떤 형식을 만들어낼 가능성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깊음’ 역시 내려갈수록 빛은 줄어들고, 그 뒤로 어둠이 짙게 스며들며 뒤따라오는 어둠의 길입니다. 이것은 창조 현상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어둠, 밤, 흑암, 깊음 등이 창조의 원천이자 원초적 현상인 셈입니다.
황현산: 이런 주제가 저에게는 생소하긴 하지만, 꽤 흥미롭군요. 제가 쓴 수필집의 제목인 『밤이 선생이다』라는 주제가 더 심오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바카라의 제목은 본래 프랑스 속담인 “La nuit porte conseil.”에서 빌려온 것인데, 그 뜻은 “밤은 조언을 가져다준다, 밤이 생각의 스승이다.”라는 뜻입니다. 밤, 어둠의 시간이 낮에 가려진 사유의 틈을 열어주고, 빛으로 포장된 생각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의미를 창발한다는 의미를 그대로 담았습니다. 벤야민 선생님의 말씀도 그렇지만, 레벤슨 선생님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창조’ 사상에 ‘혼돈, 흑암, 깊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해 주신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어둠은 소멸의 시간이 아니라 창조와 생성의 시간이라는 것에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 생각해 보니 앞서 들려주신 “없음이 있음 되는”이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無)가 ‘있음에서 없음으로, 다시 없음에서 있음으로’라는 생멸의 과정을 함축한 말이라는 점도 저의 사유와 닮아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이 단시의 중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없음은 소멸이 아니라 전환이고, 잃어진 것, 보이지 않는 것, 말해지지 않은 것은 창조의 토대로 이행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밤의 시학, 잃어짐의 미학’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상실은 새로운 시작이며, 밤은 낮이 말해주지 않은 것을 들려주는 ‘가르침의 시공간’입니다.
바쇼: 황 선생님은 역시 문학가다운 발상을 보여주시는군요. 사실 오늘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밤의 가치’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제 경험상 길을 걸을 때 밤은 모든 창조를 방해하는 절대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고, 심지어 걸으면서 어디서 어떤 위협이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밤이 없으면서도 있다는 사유는 여러모로 의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 몸이 어둠에 들어간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풀 베개 삼아 비 내리는 밤을 듣는데, 어둠 속의 개 짖는 소리”라는 저의 하이쿠가 지금 막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통해 고요하고 적막한 밤의 정취를 극대화한 시”라고 평가해 주시지만, 사실 저로서는 조금 아쉽습니다. 이 하이쿠 안에서 나그네가 길을 걷다 밤이 되어 노숙해야만 하는 순간, 비까지 내리면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지만, 거기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면, 이 상황에는 한적한 기분보다는 ‘길을 잃어버리거나, 찾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경험하는 공포감’도 스며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은 사유의 대상일 때는 적막감이 주는 의미가 크지만, 경험의 순간일 때는 그 적막감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의 감정이 더 크게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공포나 불안감, 두려움’이 스며 있는 시공간을 일컬어 ‘밤, 어둠, 흑암, 깊음’과 연관 지어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빛이 있어도 밤이고, 어둠이면서도 밝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헤셀: 아, 실존적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매끄러운 사유의 대상으로서 밤이나 어둠이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어둠을 물리적인 현상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영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어둠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자아가 비켜서는 ‘시공간적 여백’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안식은 보통 금요일 밤부터 시작합니다. ‘밤’이 출발인 것입니다. 이 시간으로부터 영원을 향한 시공간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노동을 멈추고, 인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분투하던 모든 노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저의 용어로 말하자면, “시간의 성전(Sanctuary in time)”인 것입니다. 저의 견해에 따르면, 어둠은 불안이나 공포의 시공간이 아니라 소유와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안식이라는 영원을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요하고 거룩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둠이나 밤을 실존적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어둠은 그저 빛이 없음이 아니라 빛이 있거나, 심지어 빛과 무관하더라도 빛의 존재를 일깨우는 모든 시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슬롯자: 저희의 논의가 이제, 어둠과 밤은 빛이 없는 현상만이 아니라 인간 실존이 경험하는 공포, 두려움, 불안한 요소까지 포함한 용어라는 데 모아졌습니다. 문득 시인 고 윤동주님의 「참회록」 중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시에서 ‘밤’은 낮의 반대말이 아니라, 자신을 압박하는 삶의 고통이나 질문 앞에서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만 하는 실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잠정적으로 두 번째 섹션에서 나눈 주제를 정리하면, “밤과 어둠은 빛과 밝음이라는 요소만이 아니라, 그런 구체적인 요소가 없더라도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사유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함의한 상징적 용어가 될 수 있다”인 것 같습니다.
벤야민: 네, 어느 정도 우리 이야기가 함축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있는 것 같은 의미의 잔광이 일어나는 현상도 하나의 개념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슬롯자: 그렇다면 이 시에서 ‘없음’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는 것이 더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다른 방식의 ‘있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선생님들의 말씀 속에서 간헐적으로 제시되었던 대로, ‘비가시성’, ‘잠복성’, ‘잔존의 철학’ 등이 모두 ‘없음의 있음, 있음의 없음’을 함의하는 용어인 것 같습니다.
바쇼: 짧은 시일수록 여백이 중요하고, 깊은 사유일수록 다양한 관점이 심화될 자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서 제가 다시 읽었던 이 단시에도 역시 여백과 심화가 잘 자리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단시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상상하게 도와주지만, 실제로는 별 하나 없는 하늘을 떠올리게 합니다. 별이 없는 그 어둠은 텅 빈 것이 아니라 곧 눈에 나타날 수많은 별이 존재하는 밤인 것입니다. 이때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어둠에, 밤에 적응하는 일입니다. 기다리는 것이죠. 이 단시는 제가 길을 걸을 때 발견했던 것처럼 어둠 아닌 어둠 속에 천천히 떠오르는 희미한 암광 같습니다.
슬롯자: 아, 이 단시의 제목이 「암흑은하」인데, 이 지점에서 이 제목과 연관되는 생각의 흐름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은하를 구성하는 요소는 ‘별, 가스, 암흑물질’이라고 하는데, 암흑은하에는 특히 ‘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은하’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 논쟁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논의를 정리하자면, 밤과 어둠은 단지 빛의 부재가 아니라, 빛이 있더라도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 앞에 서게 되는 모든 실존적 시공간을 가리키는 상징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잠시 쉬었다가 섹션 3에서는 본격적으로 은하와 관련된 논의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한 10여 분 뒤에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쉬는 사이, 헤셀이 황현산을 찾아가 말을 건다. 바쇼, 레벤슨, 벤야민도 준비된 간식을 먹으며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3. 어둠은 어둠으로, 검은 안식의 지혜
레벤슨: 슬롯자님~, 오늘 대화가 아주 유익합니다. 늘 느끼는 바지만, 여러 선생님의 생각이 평소 제 생각을 자극하고, 또 새롭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저와 바쇼 선생님, 벤야민 선생님이 함께 나눈 이야기인데요. 아까 이번 섹션에서는 ‘암흑은하’를 주제로 논의한다고 하셨지요. 아무래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저희가 좀 밝지 못하니, 천문학자 한 분을 연결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슬롯자: 아,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마침 최근에 암흑은하 관련 주제로 주목받는 분이 계셔서, 그분과 영상으로라도 연락이 가능한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후)
슬롯자: 다행히 지금 시간이 가능하다고 하시고, 또 뜻깊은 주제라며 흔쾌히 동의해 주셨습니다. 다만 준비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하셔서, 저희가 먼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뒤에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헤셀 선생님이 황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던데, 어떤 이야기였는지 혹시 나눠주실 수 있으실까요?
헤셀: 아, 제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좀 여쭤본 것입니다. 황 선생님도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황현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저는 히브리 중세 철학, 아시는 대로 카발라 신학에 기반한 철학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안식’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식이 ‘밤, 어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유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존과 직결할 때는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삶 전체가 ‘어둠’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어둠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실존적 관점에서는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지배한다는 점을 실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 선생님에게 문학의 관점에서 어둠이 삶을 포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여쭸습니다. 문학의 관점에서 ‘어둠’을 실존의 주제, 현대인의 윤리와 관련된 주제로 읽는 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말입니다. 이 점은 황 선생님이 직접 한 번 더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황현산: 아, 제가 아직 사유가 일천하지만, 부탁하신 대로 아는 만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빛나야 한다고 강요받습니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성과를 보이도록 요구받습니다. 밤과 낮은 물리적인 구분이 있지만, 의식과 삶의 방식으로는 구체적인 경계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밤에도 낮처럼, 굳이 복잡한 존재 증명 없이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고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밤이 만들어내는 불안과 두려움이 상당 부분 상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럴 뿐입니다. 인간은 이제 낮에도 밤처럼 공포와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밤의 요소가 사라졌는데도 세계는 어둠이고, 밤인 것입니다. 이제 ‘밤’의 정의는 물리적 현상만이 아니라, ‘밤’을 구성하는 요소가 없어도 어둠이라 말하고 빛 없음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가 천착하는 문학은 바로 이 새로운 정의의 ‘밤’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여러 선생님의 사유가 지향하는 시대에 비하면 오히려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밤의 정의를 구성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밤’을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점입니다. 한 예로, 시인 고 김현승님의 「밤은 영양이 풍부하다」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전략>
한 시대 안에는 밤과 같이 해체(解體)나 분석(分析)에는
차라리 무디고 어두운 시인들이 산다
그리하여 토의의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밤은 상상으로 저들의 나래를 이끌어 준다
‘밤은 시인들의 거주지’라는 표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문학 작품이 ‘밤’을 인간의 실존과 직결하여 해석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결국 문학에서 ‘밤’은 ‘해가 지고 빛이 사라진 상태’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삶의 뿌리부터 흔들고 인간의 몸 바깥과 안을 아울러 위협하는 모든 요인을 일컫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밤은 저 멀리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으로부터 파생한 현상의 총체적인 지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문학에서 어둠은 ‘검은 안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빛이 있어도 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빛의 문명에 대한 존재론적 저항이기도 합니다. 은하가 꼭 ‘별’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벤야민: 그렇군요. 아주 실제적인 관점입니다. 제 생각에 그런 문학적 태도는 일종의 저항 같습니다. 이런 저항은 매우 정치적인 문학을 함의하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가시성의 체제입니다. 보이는 것만 가치가 있고, 측정되는 것만 존재한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속성, 그 속성으로 실체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앞서 우리가 나눈 단시가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무별이어도 은하이다.’ 이것은 정해진 규칙과 체제 밖에서 그 체제의 의미를 일깨우는 말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 그대로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사라졌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잔존하는 실체, 실패했더라도 다시 살아나는 씨앗, 어둠이라도 빛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단시이지만, 문명의 조명 장치 전체를 향해 던지는 검은 돌멩이 같습니다.
슬롯자: 아, 그런 대화를 나누셨군요. ‘절대적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더라도 본래 실체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려는 ‘암흑은하’가 바로 그런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논의의 방향을 이렇게 조정해서 바로 이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 마침 암흑은하를 깊이 연구하신 천문학자가 연결되었습니다.
슬롯자: 황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느닷없이 연락드렸는데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소개와 함께 암흑은하와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천문학자 황: 천문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 기존에 약 10개 정도만 알려졌던 암흑은하 후보를 새롭게 142개 추가로 발견한 연구를 저희 팀에서 발표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암흑은하’라는 말은 모순입니다. 은하는 암흑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문학계에서 이 말은 암흑을 은하라고 부르자는 잠정적인 합의일 뿐입니다.
이 말 속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은하를 구성하는 절대적 요건인 ‘별’이 없다고 해도 은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스와 암흑물질만으로도 은하의 속성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하라는 이름에는 모순이 있지만, 은하의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은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별 없는 은하도 역시 은하의 세계인 것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런 명명은 과학적으로도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암흑은하가 별빛이 거의 없거나 관측하기 어려운 물질 구조를 가리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은하를 별빛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우주는 별빛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질, 관측되지 않는 중력, 희미한 흔적들이 우주의 구조를 지탱합니다. 결국 암흑은하는 그 결핍, 무의 상태에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중요한 주제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쇼: 오호, 다시 듣고 보니 더 선명해집니다. 슬롯자님, 앞서 읽은 단시에서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나”라는 구절이 바로 이 암흑은하의 과학적 은유이군요. 빛이 없어도 빛나는 속성 말입니다. 길이 없는 듯해도 길의 특징을 갖춘 길도 수없이 많은데, 그 길을 걸으면 ‘암흑 순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천문학자 황: 그렇습니다. 가능합니다. 우주적으로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을 붙들고 있습니다. 하여 천문학의 관점에서 어둠은 단순한 우주의 배경이 아닙니다. 어둠은 빛을 아우르는 우주의 구조입니다. 별빛이 있어야만 은하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사라져도 은하는 완전체의 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암흑은하는 빛을 표면적 상징으로 돌릴 수 있다는 뜻이고, 관측되지 않는 요건 속에서도 우주는 자기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입니다.
슬롯자: 사실 저희가 앞서 논의했던 여러 주제 중에서 ‘검은 안식 우주-카오스모스’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이 용어는 어둠과 밤이라는 혼돈 속에서도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체계가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추론적 사유, 실존적 입증 정도였는데, 지금 천문학의 개념에서 ‘암흑은하’라는 말로 좀 더 실체를 갖는 사유가 된 것 같습니다.
황현산: 그렇게 보니, 처음 제시된 단시의 의미가 조금 더 실감 나는 것 같습니다. 이 시는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삶은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기를 추동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삶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어져 매듭지어질 때가 태반입니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빛이 어둠을 총체적으로 지배한다고 해도 어느새 어둠이 다시 스며듭니다. 밤은 어둠 속에서 어둠의 방식으로 빛나는 실체입니다.
얼핏 제가 이해한 바로는 아마도 이것이 ‘검은 안식’인 것 같습니다. 밤을 통과해 아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밤의 한복판에서 미량의 빛으로도 세계가 밝음을 유지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는 빛으로만 유지될 수 없기에, 어둠이야말로 빛의 세계를 위한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밤의 성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쇼: 천문학자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참고하니, 암흑은하는 곧 내 몸으로 만나는 모든 세계를 일컫는 용어인 것 같습니다.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니 말을 줄일수록 세계는 자기 속살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이 단시에서도 “무별무별”이라는 표현을 제가 하나씩 끊어가며 읽었는데, 사실 그 느낌이 아주 묘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부정(無-無) 속에서 이상하게 리듬이 생긴 것입니다. 별이 없다는 말이 두 번 이어지면서 나의 걸음이 떠올랐고, 그 밤에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그 ‘없음의 순례’가 내 몸에 어떤 파동을 물결처럼 일으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물결 속에서 나의 감각이 아주 작게, 그러나 깊게 흔들렸다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헤셀: 바쇼 선생님, 그 흔들림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안식의 숨결입니다. 숨의 길입니다. 안식은 정지이지만 죽은 멈춤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정지입니다. 우리가 서로 공유해 가고 있는 ‘검은 안식’은 어둠 속 안식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간다’는 저 옛 시인이 경험한 ‘안식’이기도 합니다. 그 어둠에 들어설 때 비로소 모든 존재가 자기 숨을 되찾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쇼 선생의 말에서 자주 제 사유가 살아 움직이는 몸을 얻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허공에 맴돌며 흐느적거리는 생각이 한자리에 내려와 탄탄한 걸음으로 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는 나의 사유가 실제로 여기 있으면서도, 또 마치 없는 것 같은 실재감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 맞습니다. 저 역시 이 단시의 마지막 표현, “무의 가치여”에 천문학적 관점을 적용해 봤는데, 그렇게 읽으니 이것은 단지 무(無)를 찬미하는 허무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가치 체계의 전복입니다.
오늘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코헬렛 선생의 사유도 일맥상통합니다. 가치가 언제나 생산과 축적과 가시성에만 매여 있다면, 그것은 참 아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시는 허무한 것처럼 보이는 삶의 표면을 뚫고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느낌이 강합니다. 무가 가치가 되어 ‘유(有)’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무’가 더 깊은 ‘무’가 되면서 심화하는 것입니다.
레벤슨: 그렇습니다. 암흑은하는 히브리 철학으로 말하자면, 창조의 요건이 없더라도 창조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특히 창조는 멈춤이라는 순간에서도 창발합니다. 혼돈은 끝이 아니라 창조의 심연입니다. 잔존은 폐허가 아니라 씨앗이며,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창조의 전조입니다. 그래서 천문학의 암흑은하가 그러하듯, 단시 「암흑은하」도 비존재이거나 소멸의 시가 아니라, 비존재의 존재, 소멸의 생성을 깊이 사색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문학자 황: 저는 여러분의 대화를 잘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주를 볼 때도 여러분의 생각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관측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우리의 시야와 도구가 닿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는 과학이 측정하지 못한 존재감을 먼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잠시 여러분이 나눴다는 시를 훑어 읽어봤는데, 이 시는 천문학의 언어를 더욱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레벤슨: 한 가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덧붙이고 싶습니다. 바로 ‘부활의 시학’입니다. 이 단시는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부활’이라는 용어를 떠올렸습니다. 부활은 반드시 찬란한 빛의 사건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 부활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으로도 올 수 있습니다.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나”는 부활의 한 형식입니다.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처럼 보이는 어둠 안에서 이미 다른 생명의 형식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슬롯자: 대화가 생각보다 훨씬 폭넓고 깊어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추상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언어들이 제시되었다는 점이 아주 좋습니다. 이제 이야기의 결론을 모아보려고 하는데, 그에 앞서 저도 한 말씀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 사이에 각자 자신의 결론을 준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저의 단시와 여러분이 나눠주셨던 생각들, 그리고 ‘검은 안식’이라는 틀이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문학적, 철학적 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제 오늘의 대화를 한 분씩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천문학자 황 선생님께 부탁드리고, 차례대로 이어가겠습니다.
천문학자 황: 암흑은하는 별 없는 은하를 통해 빛나지 않는 존재의 가치를 말합니다. 은하의 세계는 반드시 ‘별’이라는 요건을 갖춰야 하지만, 우주에는 그 핵심적 구성 요소 없이도 은하의 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세계는 결핍마저도 본연의 속성을 유지하는 틀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암흑은하가 더욱 많이 발견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헤셀: 어둠은 결핍이 아니라 안식이며, 없음은 부재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있음입니다. 이 단시에서 읽을 수 있듯, 어둠은 부활의 전초이며, ‘검은 안식’은 모든 실체의 존재론입니다. ‘잃어짐의 시학’, ‘잔존의 철학’, 그리고 ‘검은 안식 우주-카오스모스’를 한꺼번에 품고 있습니다.
황현산: 오늘 논의는 문학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함의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 단시는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것이 아니며, 빛나지 않아도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잃어졌어도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헤셀: 맞아요. 존재는 자기 빛을 증명하기 전에, 먼저 자기 어둠 안에서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벤야민: 또한 문명은 그 어둠을 읽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도 일러줍니다. 역사는 남겨진 것보다 남겨지지 않은 것에서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결핍과 여백을 복원하고 채워가는 것, 말해지지 않은 것에서 남겨진 말을 듣는 경청의 태도가 절실합니다.
바쇼: 별 없는 밤에도 별은 살아 있습니다. 어둠을 걷는 몸이 어둠을 물리칠 수 없고, 모든 어둠은 때가 되면 0.1%의 빛만으로도 물러간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삶은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저물고, 어둠으로 부활합니다.
레벤슨: 그럼요. 혼돈 속에서도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혼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원천으로 작동합니다.
천문학자 황: 저도 한마디 더 붙이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주가 보이는 세계를 붙들고 있습니다.
슬롯자: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아직 밤하늘의 별빛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오늘 밤 ‘어둠’을 주제로 선생님들의 깊은 사유를 읽고 들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밤이 선생이다’라며 어둠의 시학을 천착해 오신 황현산 선생님이 참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저의 단시와 황 선생님의 문학적 비평의 관점을 견줘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현산 선생님에게 밤은 낮의 논리가 지배하지 못하는 시간, 즉 과거의 기억과 억눌린 진실이 되살아나는 ‘지성적 성찰과 각성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검은 안식’의 씨앗을 심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부터 ‘검은 안식’은 빛의 폭력과 생산성으로부터 도망쳐 숨어드는 ‘존재론적 쉼과 회복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심화되었습니다. 이제 어느새 저에게 밤은 결핍이나 공포가 아닌, 낮이 제공하지 못하는 ‘진실의 거처’로 전환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 공포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역시 ‘사소한 것과 파편’에 가닿아 있었습니다. 황 선생님께서는 역사가 놓쳐버린 사소한 파편들을 복원하여 현재를 비판하는 ‘알레고리적 이야기’를 찾아내셨다면, 저는 언어의 최소 단위인 의성어와 부사어를 통해 이야기에 드러나지 않은 채 담겨 있는 ‘사건의 진동’ 자체를 포착하려 했습니다. 선생님이 사물을 통해 이야기를 복원하려 하셨다면, 저는 “쩌억!” 하는 소리처럼 창조의 첫 순간이 주는 직접적인 타격을 전하고 싶었던 셈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선생님의 견해를 통해 언어를 대하는 태도를 더욱 수련할 수 있었습니다. 황 선생님은 시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 번역될 때 사라지는 ‘잉여의 의미’를 신비롭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고통스러운 번역을 스스로 시도하셨습니다. ‘정확한 문장’으로 시적 신비에 접근하려 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언어가 고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사라는 도구와 조어라는 기법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무별무별’ 같은 조어적 부사는 중의적입니다. 별이 없음과 별이 빛나는 장면을 동시에 포착한 것입니다. 가끔 문장도 파격으로 구성하고, “파아악!” 같은 소리로 의미를 깨우기도 합니다. 의미 너머 세계를 직접 타격하며 ‘비-의미적 소통’마저도 꿈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와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배운 바가 많습니다. 황 선생님의 사유가 비판적 지성을 통해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여 미래를 바꾸려는 ‘선형적 저항’이라면, 저는 아예 시간의 트랙에서 내려와 수직으로 정지하는 ‘카이로스의 정지’, 수평으로 이행하는 ‘크로노스의 멈춤’을 지향합니다.
단시 속 “없음이 있음 되는”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시간의 관점을 해체한 것입니다. 이 과정은 단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무한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황 선생님이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는 시민의 지성’을 함의하면서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충분한 안식의 지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결국 황현산 선생님의 시학은 어둠 속에서도 끝내 지성의 빛을 찾아내려는 ‘낙관주의적 투쟁’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근거해 저 역시 무조건적으로 빛을 흠모하는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어둠의 존재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그 낙관적 분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 결과 어둠의 깊이를 온전히 긍정하는 ‘심연의 안식’을 추구한 것입니다.
끝으로 황 선생님께서 “어둠 속에서도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며 지성적으로 저항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어둠 자체가 가장 완벽한 공부이자 안식이다”라는 수행적 존재론으로 이 세계에 저항하려 했습니다. ‘밤을 통과하여 끝내 아침으로 걸어가는 지혜’와 ‘밤의 한복판에 영원한 성소를 짓는 용기’는 늘 공존할 수 있습니다. 암흑은하는 이런 사유가 종합된 단시이자 철학시입니다. 무(無)존재의 공간에서 눈부신 어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결론은 이렇게 남길 수 있겠습니다.
검은 안식은 어둠의 철학이며, 없음의 존재론입니다.
혼돈과 잔존의 시학이며, 부활의 우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단시 「암흑은하」는 빛의 세계에서 밀려난 모든 존재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이자 삶의 지속성에 대한 확신입니다.
빛나지 않아도 괜찮다.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대의 어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우주다.
이제 오늘 대화를 끝으로 철학시에 대한 네 번의 토론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깊은 밤, 별 없는 하늘 아래서도 우리는 서로의 어둠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읽는 법을 조금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