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해석은 없다

by푸른킴

1. 낯선 강연, 본문 해석의 열정을 마주하다

고대 경전을 ‘해석한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만약 누군가에게 그런 해석의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고대 언어의 습득, 배경지식의 탐구, 텍스트 이론, 정치행정적 자격증의 획득이면 충분한가? 설령 그런 자격이 있다 해도, 그 해석의 결과는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역설적으로 그 답 또한 자명해 보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가 바로 그것이다. 작은 강물 한 줄기가 거대한 바다에 당도한들 그 바다가 완전히 새로워질 리 만무하듯, 굳이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고대 경전의 해석은 단순히 언어가 다른 바카라을 옮기는 일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경전의 해석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해석은 본문 위에 군림하는 최종 판결이 아니라, 본문의 결을 오늘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의 과정이다. 둘째, 정답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본문 앞에 응답할 수 있을 뿐이다. 셋째, 그 응답은 일회적이지 않으며, 과거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묻는 과정을 반복한다.


내가 오늘 이 당연한 질문을 다시 상기해 보는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진행되었던 강연 때문이다. 그 강연은 하버드대학교 고대근동학과 피터 머시니스트(Peter Machinist) 교수의 “제국에 저항하기: 정신적 공간의 탐색(Isaiah 10:5-15)”이라는 주제였다.


대략 30여 명이 참석한 이 강연은 통역 없이 60분간 이어졌다. 솔직히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통역 없이 듣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답답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참여자들 중에는 원어 소통에 문제가 없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번역’이 필요했다. 어쨌든 어려움 속에서도 노교수와 청중은 더 마음을 기울여 강연에 참여했다. 한참을 듣다 보니 언어의 장벽과 상관없이 그분의 성서 ‘해석’ 열정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마지막 질의응답까지 두 시간 남짓, 순조로운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2. 강연의 논지

요즘, 그날의 기록을 다시 꺼내보면서 그의 강연을 통해 내가 배웠던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있다. 강연의 요지는 이사야 10장에 숨겨진 수사학적 전복이었다. 그 논지는 대체로 이러했다.


먼저 그는 이사야 10장 5–15절이 하나의 독립된 단락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쿰란 이사야 사본’을 근거로 그렇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이 견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15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이 과연 5절의 서론에 이어지는 결론이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는 ‘막대기’와 ‘지팡이’라는 단어가 수사학적으로 반복 사용된 근거를 제시하며, 6–14절이 두 구절 사이를 잇는 촘촘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근거로 사용한 핵심은 이사야서가 앗수르, 곧 아시리아 자료를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맞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제1이사야, 통상 이사야 1–39장의 저자는 왜 앗수르 자료를 사용했을까? 이를 풀어가는 첫 번째 근거로 본문에 사용된 ‘1인칭’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본문 5절에 사용된 1인칭은 분명 ‘야훼’를 가리키지만, 10절과 14절 등에서 사용된 1인칭은 ‘앗수르 왕’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본문이 앗수르 왕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대변하고 있다는 관찰이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제1이사야는 이 자료를 있는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예언적 의도에 맞게 수사적 변형을 시도했다고 부연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8절이다. 히브리어 본문 8절에는 ‘사르’(sar, 고관)와 ‘멜렉’(melek, 왕)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된 아카드어, 곧 앗수르어는 ‘샤루’(šarru, 왕)와 ‘말쿠’(malku, 고관/왕)이다. 주목할 점은 히브리어와 아카드어의 발음이 비슷하지만, 이스라엘과 앗수르 체제 내에서 그 위상과 의미가 미묘하게 엇갈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사야는 앗수르 제국의 언어를 비틀어 수사적 전복을 시도한 것이다.


즉 8절에서 앗수르 왕이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라고 호언장담하는 언술은, 역으로 “제아무리 왕이라 칭하는 자들이 대제국 앞에서는 일개 고관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앗수르의 폭력적 자만을 고발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 앗수르 자료를 가공하여, 앗수르 왕 스스로가 모든 왕들의 왕인 것처럼 날뛰지만 사실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도구, 곧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예언자적 조소를 담아낸다.


이사야는 이 단락을 통해 친앗수르 성향의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거대한 제국의 틀을 가진 앗수르의 힘에 기대고 싶은 충동이 일겠지만, 앗수르는 결국 왕이신 하나님의 고관 정도의 도구로만 쓰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본질적 힘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앗수르 자료를 활용한 진정한 의도는, 제국의 언어를 전복함으로써 앗수르라는 거대 제국이 가진 힘의 허상을 폭로하고, 그 외풍에 흔들리지 말며, 오히려 저항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Mental Space)을 확보하도록 촉구하려는 데 있다.


결국 15절은 이러한 5–14절의 수사적 전복의 결론으로서 앗수르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 선언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3. 매끄러운 해석을 의심하라: 고대 본문의 길을 걷는 법

이날 강연의 핵심은 주제 그 자체에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노학자가 고대 경전을 대하는 태도 자체에 있었다. 이 점은 경전을 해석하려는 이들이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한 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전 읽기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고대의 본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전 해석자는 본문을 현대, 즉 자기가 서 있는 자리까지 쉽게 끌어당겨 오려한다. 본문을 현대의 언어로 매끄럽게 다듬어 설명하려 한다.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거친 대목들을 보기 좋게 깎아내고, 그렇게 박제된 본문으로부터 정형화된 교훈을 유추하는 것이다. 하지만 머시니스트가 보여준 태도는 오히려 고대의 본문으로 돌아가 그 본문이 걸어간 거친 길을 뒤따라가는 것이었다. 그 길 위에서 얻어진 수확들을 본문 고유의 틀 안에서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4. 울퉁불퉁한 본문이 가진 예언자적 의도

그렇게 고대 경전이 안내하는 길을 찾아 따라가 보면, 거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울퉁불퉁한 표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질서해 보이는 단어의 배열, 간격이 이완된 문장 구성, 이질적인 요소들이 엉성하게 엮여 있는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하나의 단어는 단 하나의 뜻으로 고정되지 않고 여러 의미를 내포하며 확장되고, 단어와 단어 사이는 깊은 심연이나 계곡을 이루기도 한다. 글의 흐름은 아홉 굽이 치는 강물처럼 구불구불 흐르고, 글이 시작하고 마치는 경계선조차 명확히 찾지 못해 헤매게 만든다.


이처럼 고대 본문의 불연속적 현상은 오늘날 해석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다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 낯설고 험난한 지형이 바로 ‘본문의 길’ 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이다. 비록 어렵더라도 끝까지 텍스트가 안내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의지의 여부다. 경전은 그 문 앞에 설수록 당연한 해법보다도 글과 문장이 넝쿨처럼 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 텍스트가 처음 생성되던 때, 단어와 문장이 기계적으로 배열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요한 대로 수공업처럼 다듬어 문장에 포함했을 여지가 크다. 결국 하나의 문장이라도 어느 방향으로 해석의 길이 열릴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해석자는 그 길 어딘가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석자는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서둘러 봉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낯섦을 통해 본문의 뒤를 올바르게 따라가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스스로 일깨워야 한다. 머시니스트 교수가 보여준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는 오랜 학자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이 당황스러운 본문의 길을 어떻게 지혜롭게 추적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5. 텍스트의 저항

우리 앞에 놓인 고대 경전은 처음부터 낯선 대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익숙하다고 느낀다. 단숨에 매끄러운 설명으로 전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본문을 현대적 언어로 정갈하게 다듬어두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본문의 어그러짐마저 곧장 펴버릴 수는 없다. 고대 경전은 그런 매끄러운 설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석자의 진짜 의무가 요구된다. 익숙함의 표피를 걷어내고 텍스트의 첫 표면, 그 원초적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비논리와 부자연스러움, 엉켜 있는 편집의 흔적들, 서로 다른 고대 문헌 자료들이 뒤섞인 ‘문학과 사상의 혼합물’ 같은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혼합 양상이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말하는 자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속의 언어와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전복하는 행위야말로, 야훼의 세계와 야훼의 언어가 이 땅에 어떻게 현존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언자적 활동일 수 있다.


앞서 다룬 이사야는 바로 그와 같은 ‘문학적 저항’을 통해 궁극적으로 야훼의 ‘에차’(‘etsah, 계획/뜻)를 극대화하여 드러낸다. 거대 제국 앗수르가 왜 더 이상 제국으로 군림할 수 없는지에 대한 야훼의 전략적 구상이 그 뒤틀림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앗수르 왕이 아무리 정복 전쟁의 최고봉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사방에 과시한다 해도, 그를 향한 야훼의 최후 각본은 결국 ‘몰락’이다. 이사야는 자신이 살아가던 현세 안에서 이 거친 이야기를 꿰뚫어 보고, 간파하며, 증언했던 것이다.


6. 매끄러운 모든 것을 의심하라

우리는 왜 경전을 해석하는가? 나 말고는 이 본문을 이해할 사람이 없어서인가? 아니다. 사실 본문을 매끄럽게 가공해 놓으면 누구라도 그 이야기를 읽고 표면적인 뜻은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경전의 해석자’라는 자리에 서는 이유는, 고대 경전이 이미 ‘엉켜 있는 본문’ 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 엉킴을 억지로 풀어 없애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왜 그렇게 엉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직시하며 본문 자신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경전 해석자’의 소명은 해석을 가장한 지배가 아니라 번역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번역은 단순히 고대어를 현대어로 옮기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본문의 결, 균열, 낯섦, 저항을 가능한 한 훼손하지 않은 채 공적 언어 안으로 옮겨오는 신학적 작업이다. 다시 말해 번역은 본문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이 본래 지니고 있던 거친 풍광을 오늘의 독자 앞에 정직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고대 본문의 해석은 미려한 화술로 뜻을 가공해 내는 기술만은 아니다. 그것은 얽히고설킨 텍스트의 모양새 뒤에 숨은 거룩한 의도를 파악해 내는 작업이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본문을 막연히 내가 서 있는 안락한 자리로 끌어당겨 현대적 언어로 치장하는 소통 전문가가 아니다. 본문의 첫자리까지 내려가 그 언어와 글의 출입문을 찾아내는 탐구자다. 그 자리에 함께 서서 본문이 흘러가는 거친 길을 신실하게 뒤따라가는 순례자다. 마침내 왜 그런 지형이 만들어졌는지를 실체화하는 ‘신학적 번역자들’이다.


그날 노교수의 열강은 나에게 고대 경전을 해석하는 자의 기본자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내 앞에 놓인 본문을 향해 끊임없이 회의적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다시 말해 “매끄럽게 하려는 그 모든 것을 의심하라!” 나아가 거칠더라도 공공을 위한 번역만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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