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우리 시대에 아모스 5장 24절 공공적 번역 -
*이 글은 오늘 아침 한 청년이 최근 투표와 관련한 시위현장 등에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아모스 5장 24절에 대한 개인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답한 것입니다. 아울러 이 에세이의 글쓰기는 <월간모빌 5월호 하박국>에 근거한, '시대적 질문에 대한 하박국의 지극히 미미한 대안으로서 글쓰기'라는 방법을 실제로 적용한 저의 개인적인 글쓰기입니다. 비평적 견해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선언의 핵심: 흐르기를
아모스 5장 24절은 오래도록 정의와 공의를 말하는 문장으로 읽혀 왔다. 물론 정의가 무엇이며 공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은 중요하다. 정의 없는 슬롯는 방향을 잃고, 공의 없는 공동체는 힘 있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기울어질 위험이 크다. 정의와 공의의 의미를 묻는 일은 신앙적으로도, 슬롯적으로도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말은 따로 있다. 그것은 “흐르게 하라”는 동사형이다. 아모스는 정의를 새로 만들라고 말하지 않는다. 공의를 어떤 집단이 소유하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서 흘러야 할 정의와 공의를 인간의 권력과 제도와 탐욕이 막지 말라는 것이다. 강은 강이기 위해 흐른다. 흐르지 않는 강은 고이고, 고인 강은 썩는다. 정의도 그렇다. 흐르지 않는 정의는 구호가 되고, 흐르지 않는 공의는 장식이 된다.
아모스의 외침은 단순한 종교적 감상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언어가 공적 삶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일깨운다. 이 구절이 들어 있는 아모스 5장 전체는 막힌 물길 앞에서 던지는 슬롯적 질문이다. 누가 물길을 막고 있는가. 누가 흘러야 할 것을 독점하고 있는가. 누가 자기 권력과 이익을 위해 강의 방향을 비틀고 있는가. 누가 정의와 공의를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들이 흘러야 할 자리에는 둑을 세우고 있는가.
이 상황에서 아모스가 외친 것은 바로 이것이다.
“흐르기를, 흐르게 하라. 흘러가면 좋겠다.”
정의와 공의는 야훼의 통치 안에서 이 세계로 흘러야 한다. 인간의 일은 그 흐름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흐름을 가로막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막힌 곳이 있다면, 그곳을 찾아내어 다시 길을 여는 것이다.
하나의 질문: ‘어떻게’ 흐르게 할 것인가
오늘 아침 한 청년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최근 정치적 이슈 속에서 아모스 5장 24절이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며, 정치적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이 구절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 질문에는 조심스러움이 있었고, 동시에 답답함이 있었다. 누군가의 옳고 그름을 서둘러 판정하고 싶다기보다, 혼탁한 말들 사이에서 말씀 자체를 똑바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시대가 어떠하든 성경 구절을 정치적 언어로 가져오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말씀은 특정 정파의 승리를 보증하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모스 5장 24절이 슬롯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명확하다. 다만 이 구절의 핵심은 정의와 공의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만 있지 않다. 그것들이 막히지 않고 흐르도록 하라는 데 있다.
정치가는 정의와 공의를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아니다. 종교 지도자도 그것을 소유한 관리자가 아니다. 제도와 권력은 정의와 공의의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흘러가야 할 길을 막지 않아야 할 바카라임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정의와 공의는 어디에서 막히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시 흐르게 할 것인가.
청년은 다시 물었다. “어떻게”를 고민하는 일이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개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계속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 작음이 무력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거대한 슬롯 문제 앞에서 개인의 실천은 늘 작아 보인다. 큰 강을 말하는데, 내 손에는 작은 돌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강을 막는 것도 때로는 거대한 댐 하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쌓인 작은 돌들이다. 반대로 강을 다시 흐르게 하는 일도 언제나 거대한 선언에서만 시작되지는 않는다.
‘어떻게’는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작아 보여도 계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박국이 거대한 국제 정세 앞에서 노래와 기도로 자기 행동을 결정했듯이,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흐르게 하라는 말은 곧 참여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강 전체를 소유하라는 뜻이 아니다. 강물의 방향을 내 뜻대로 규정하라는 말도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작은 돌 하나라도 내 손으로 치우라는 뜻이다. 사실을 확인하는 일, 침묵하지 않는 일, 바카라임을 묻는 일, 분노를 파괴가 아니라 회복의 방향으로 흘려보내는 일. 이것들이 작아 보여도, 강은 그런 작은 열림을 통해 다시 흐른다.
물길이 막힌 슬롯의 한 단상
오늘은 1987년 6월 10일을 기억하는 날이다. 우리 슬롯가 민주주의의 강으로 들어서기 위해 권위주의의 둑을 밀어냈던 날이다. 그날의 외침은 이미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한 번 얻었다고 영원히 보존되는 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은 계속 흘러야 강이다. 한때 흐른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늘의 물길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아모스 5장 24절이 한국 슬롯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자주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구절은 독재에 저항하는 구호였고, 막힌 슬롯를 다시 열어 달라는 기도였으며, 인간의 존엄이 제도 안에서 흐르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는 외침은, 권력이 시민의 숨통을 조이던 시대에 민주주의의 물길을 다시 열라는 명령으로 들렸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다시 묻는다.
그 강은 지금 어디에서 막히고 있는가.
최근 선거 과정에서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사안을 곧바로 거대한 음모나 선거 전체의 부정으로 단정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정의와 공의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분노를 삼키면, 정의의 언어는 오히려 불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신중함이 무심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기된 문제가 실제 행정상 오류였는지, 현장 대응의 미비였는지, 혹은 시민의 권리 행사에 실질적 지장을 준 사안이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이 그 일을 자신의 권리가 막힌 경험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감각 또한 가볍게 넘길 수 없다. 투표용지 한 장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슬롯에서 투표용지는 시민의 뜻이 공적 세계로 흘러 들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물길이다. 한 사람의 한 표는 거대한 강물 속의 작은 물방울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물방울들이 모여 공적 의사를 이루고, 권력을 세우며, 권력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문제 제기는 단순한 행정 착오의 언어로만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가 제도 안으로 흘러 들어가야 할 바로 그 순간, 물길이 끊겼다고 느껴질 수 있는 사건이다.
강 전체가 오염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막힌 자리를 별일 아닌 것으로 넘길 수도 없다. 막힌 곳을 확인하지 않으면 아래로 흐르는 물길은 마르기 시작한다. 민주주의의 강도 그렇다. 한 번의 균열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그 균열은 다음번 더 큰 불신의 물길이 된다.
이 사안에서 정의와 공의는 복잡한 말이 아니다. 시민에게 부여된 참정권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행사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선거관리 기관이 허락하는 편의도 아니다. 시민이라면 마땅히 갖는 권리이며, 민주슬롯가 스스로를 민주슬롯라고 부를 수 있는 최소 조건이다.
따라서 투표용지 부족 문제는, 사실관계가 명확히 확인되어야 할 행정적 사안인 동시에 공적 신뢰와 연결된 시민적 사안이다. 특히 젊은 세대가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묻는 것은 단지 내가 지지한 후보의 당락에 내 표가 반영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내 표는 민주슬롯 안에서 주어진 권리대로 제대로 흘러갔는가.
내 몫의 물방울은 역사의 강물에 합류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한 시민이 자기 존재가 공적 질서 안에서 누락되었다고 느끼는 문제다. 투표소 앞에서 자기 권리의 흐름이 막혔다고 느낀 시민의 분노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민주주의 안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통증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분노를 비웃거나 의심하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한다. 왜 어떤 세대는 참정권 침해라는 말에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가. 왜 어떤 시민은 선거 절차의 작은 균열에서도 자기 존재의 배제를 느끼는가. 왜 공정성이라는 말이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이토록 예민한 정치적 언어가 되었는가.
이 질문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제도만 말하다가 사람을 놓치게 된다. 반대로 사람의 분노만 말하다가 제도의 바카라임을 놓치게 된다. 민주주의는 사람과 제도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어느 한쪽이 막히면, 다른 한쪽도 결국 메마른다.
강물을 막을 수 있는 권력은 없다
여기서 아모스의 본문은 오늘의 현실과 만난다. 아모스가 말한 정의와 공의는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슬롯 안에서 약자의 권리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재판의 자리에서 진실이 어떻게 취급되는가,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이 그 풍요의 바닥에 놓인 타인의 눈물을 볼 수 있는가를 묻는 말이었다.
아모스의 언어를 오늘의 민주슬롯 속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시민의 권리는 제도 안에서 제대로 흐르고 있는가. 약한 사람의 목소리는 공적 절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존엄은 행정의 편의나 권력의 계산보다 앞에 놓이는가.
민주주의의 성숙은 상대를 더 날카롭게 공격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서로의 통증을 더 정확히 이해하여 함께 해법을 찾아가는 데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제도만 고치려 하면 민주주의는 차가운 절차로 굳어지고 만다. 반대로 제도에 대한 바카라임 없이 감정만 위로하려 하면 민주주의는 뜨거운 분노 속에서 길을 잃는다.
우리는 둘 다 해야 한다. 막힌 곳을 찾아야 하고, 흐름의 방향을 지켜야 한다. 제도의 바카라임을 물어야 하고, 사람의 통증을 들어야 한다. 사실을 확인해야 하고, 불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도 살펴야 한다.
아모스의 시대도 물길이 막힌 시대였다. 북이스라엘은 겉으로는 풍요로웠고 종교적 열심도 있었다. 제사는 계속되었고 예배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삶의 자리는 불공정으로 가득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팔았고, 신 한 켤레 값으로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겼다. 재판은 굽어졌고, 힘없는 사람들은 억눌렸으며,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제단 곁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물 아래에는 누군가의 눈물이 있었다. 포도주는 거룩한 잔에 담겼지만, 그 풍요의 바닥에는 빼앗긴 사람들의 몫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모스가 외친 것은 더 세련된 종교생활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다. 선을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선은 마음속에만 머무는 고운 감정이 아니었다. 재판의 자리에서, 시장의 자리에서, 노동의 자리에서, 슬롯적 관계 전체에서 드러나야 할 삶의 질서였다.
아모스 5장 24절은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정의와 공의를 설명하라는 말이 아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져버리는 일을 그치라는 말이다. 공의는 땅속에 묻힌 돌처럼 버려져서는 안 된다. 땅에서부터 다시 솟구쳐 흘러야 한다. 정의는 강단 위의 문구가 아니라 메마른 땅을 적시고 사람을 살리는 물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구절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다만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사유화된 정치가 아니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질서 전체를 묻는 공적 정치다. 누가 약자의 권리를 막고 있는가. 누가 자기 확신으로 불공정을 정당화하고 있는가.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물길 위에 둑을 세우고 있는가. 아모스의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다.
바카라임을 묻고, 분노를 흐르게 하라
이번 사안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와 선거관리 기관을 향한 엄중한 바카라임의 요청이다.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먼저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실제 부족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지역과 어느 현장에서 발생했는지,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시민의 투표권 행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수량을 산정했는지, 그 결정은 정당한 절차를 거쳤는지, 현장에서 부족 사태가 발생했을 때 왜 신속하고 일관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도 설명되어야 한다.
시민의 권리가 막힌 것으로 경험된 자리에는 반드시 바카라임의 언어가 세워져야 한다. 선거관리 기관은 민주주의의 수로와 같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가 공적 결과로 흐르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그 수로가 막히거나 막혔다고 여겨질 때, 슬롯 전체의 신뢰는 흔들린다. 막힌 곳을 찾아내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바카라임이다. 다시는 그 자리에서 물이 멈추지 않도록 길을 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분노의 방향이다. 분노는 필요하다. 막힌 물길 앞에서 아무 감각도 없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마비에 가깝다. 그러나 분노가 사실을 삼켜서는 안 된다. 공정성을 요구하되, 공정성을 훼손하는 허위와 과장을 경계해야 한다. 제도에 대한 불신을 말하되, 그 불신이 모든 공적 질서를 불태우는 냉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의와 공의는 막힌 곳을 뚫고 흘러야 하지만, 그 흐름은 사실과 바카라임과 절제의 강둑 안에서 더 깊어진다. 강둑은 강을 억압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강이 늪이 되지 않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있다. 마찬가지로 사실 확인과 바카라임의 절차와 언어의 절제는 분노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분노가 회복의 힘이 되도록 길을 내는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강을 갈아엎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의와 공의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강을 막은 숨은 돌을 들어내어 치우는 일이다. 민주주의라는 강이 다시 흐르도록, 참정권이라는 물길이 누구에게도 막히지 않도록, 더 정직하게 묻고 더 엄중하게 고치는 일이다.
야훼를 신앙하는 이들은 더욱 이 문제 앞에서 침묵할 수 없다. 참정권은 세속 정치의 영역에만 갇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존엄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인정받는가의 문제다. 공정한 삶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시장의 불공정뿐 아니라 선거의 불공정에도 민감해야 한다. 커피 한 잔의 가격 뒤에 숨은 생산자의 눈물을 보아야 하듯, 투표소 앞에서 자기 권리의 흐름이 막혔다고 느낀 시민의 분노도 보아야 한다.
그 분노를 더 맑은 강으로 이끌어야 한다. 의혹은 사실로 검증되어야 하고, 바카라임은 제도로 물어야 하며, 분노는 파괴가 아니라 회복을 향해 흘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 공적 삶과 만나는 자리다. 신앙은 현실을 외면하는 고요가 아니라, 현실의 물길을 더 맑게 하려는 바카라임이다.
자기 합리화라는 가장 교묘한 둑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아모스 시대 사람들도 자신들의 불공정한 삶에 나름의 이유를 붙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풍요를 정당한 결과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 앞에서 자기 확신은 언제나 옳음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합리화는 정의의 흐름을 막는 가장 교묘한 둑이 된다.
자기 합리화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악한 얼굴로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신앙의 언어를 입고, 때로 상식의 이름을 쓰며, 때로 현실론의 표정을 한다. “어쩔 수 없다”, “이 정도는 괜찮다”, “다들 그렇게 한다”, “큰 문제는 아니다”라는 말들이 쌓일 때, 강은 조용히 막힌다.
공정한 삶은 단지 선한 마음을 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와 구조와 선택의 문제다. 내가 사는 방식, 내가 누리는 편의, 내가 방치한 침묵, 내가 세운 작은 둑 하나까지 돌아보는 일이다. 정의와 공의는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흐름이다. 흐름을 막는 자리에 내가 서 있다면, 아무리 바른말을 해도 나는 강의 편에 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와 공의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어디에서 막혔는지 보아야 한다. 누가 그것을 막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혹시 내가 그 흐름 위에 작은 둑 하나를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야훼를 인식하며 보이지 않는 그를 찾는 사람은 막힌 강 앞에서 그저 관망만 할 수 없다. 흐르게 해야 한다. 정의가 물 같이 흐르게 해야 한다.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해야 한다. 그것을 막는 권력은 아무리 크다 해도 야훼 앞에서는 정당하지 않다. 그것을 막는 자기 합리화는 아무리 그럴듯해도 신앙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강물을 계속 흐르게 하는 힘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흐르도록 부름 받은 강이다. 우리의 일은 그 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설명하는 데 머무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일은 그 강을 막지 않는 것이다. 이미 막힌 곳이 있다면, 그곳을 치우고 길을 내는 것이다.
공정한 삶이란 바로 그 물길 곁에 서는 삶이다. 강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고, 강이 흘러가도록 자신을 낮추는 삶이다. 그렇게 흐르는 강가에서 사람은 다시 살고, 공동체는 다시 숨을 쉬며, 교회는 비로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집이 된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며, 그것이 아무리 작아 보여도 계속하는 것이다. 작은 돌 하나를 치우는 일, 막힌 자리를 묻는 일, 사실을 확인하는 일, 바카라임을 요구하는 일, 분노를 회복의 방향으로 흘려보내는 일.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어떤 경우에든 한 표의 행사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내가 야훼의 정의와 공의가 흐르지 않게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성찰하여 프락시스를 실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이것이다.
흐르게 하자.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그 강을 막지 말자.
그 강 앞에서 변명하지 말자.
그 강이 지나가야 할 자리에 우리의 삶을 열어 두자.
정의와 공의는 우리가 결정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흘러야 할 ‘주어진’ 생명의 질서다.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일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정의와 공의의 주인이 아니다. 다만 그 흐름을 막지 않을 바카라임이 있다. 이미 막힌 곳이 있다면, 그곳에 길을 낼 바카라임이 있다.
그 흐름을 독점할 수 있는 권력은 없다.
그 흐름을 사유화할 수 있는 정파도 없다.
그 흐름을 변명으로 막아설 수 있는 신앙도 없다.
다만 그 흐름에 참여하는 바카라임이 있을 뿐이다.
흐르게 하자.
계속해서 흐르게 하자.
그것이 오늘,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아모스가 우리 슬롯와 교회와 각 사람에게 남기는 가장 단순하고도 두려운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