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시 4-13 무가치 해설]
‘무가치’라는 무한가치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제목 비평

by푸른킴
*이 글에는 제목 이외에 드라마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글 전체에 대한 교정도 완전하게 마무리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나의 철학시와 드라마의 제목 만으로 나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옮겼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무가치’라는 무한가치에 관한 무가치한 사유

2026년 4월, 드라마 한 편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여느 드라마가 그러하듯,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에서 시작한 끝에 최종 방송에 이르러서는 꽤나 회자했다는 평을 받았다. 나는 그 드라마를 아직 제대로 보지 않았다. 이 글에는 그 드라마의 내용이 한 단락도 들어있지 않는데 이유는 내가 그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은 채로 이 드라마의 이야기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드라마의 제목은 바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다. 지금까지 전해 들은 몇 마디 말만 가지고는 솔직히, 이 드라마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직 분명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는 그 드라마 제목에 들어있는 네 개의 단어가 내 삶을 의미 있게 조망하는 성찰로 이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작했겠지만, 이 글은 드라마 평이 아니라 ‘모두, 자신, 무가치함, 싸우다’에 대한 나의 추론적 해설이다. 이를 위해 나는 나의 철학시 한 편을 이렇게 적었다.


무가치

무더위가 피어나는 날
한가지만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너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나, 무가지


이 단시는 하나의 철학을 담고 있는데 다름 아닌 ‘무가치는 곧 무한가치이다’라는 것이다. 한 가지만 먼저 말해두면, 무가치에서 ‘무(無)’는 보잘것없다거나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있음이 없는 상태’, ‘없는 것이 있을 뿐인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동의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글 역시 무가치한 것에 몰두하는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런 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를 긍휼히 여겨야만 하는 그 무가치함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일은 우리 모두를 무한가치로 이끌 것인데, 바로 살아있는 것이 자기 생존에 대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저마다의 방식을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무엇보다 내가 솔깃했던 표현은 ‘싸운다’라는 행동이다. 이 싸움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 그 상대가 자신일 것일 테니 말이다.


2. 나의 철학시의 논지

단시 해설에서 반복하는 말이지만, 철학시는 가벼운 일상을 미분하듯 관찰하고, 그 파편들을 잘 모아 나만의 철학 개념을 도출하는 단시를 의미한다. ‘철학시’를 자기 철학의 한 방법으로 천착한 리처드 로티의 말을 빌리자면, “담론을 거치지 않는 진리에의 접근 같은 것은 없다.”(79쪽) 이 말은 나의 철학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짐작할 수 있듯, 나의 단시 「무가치」는 이 드라마가 갈수록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처음부터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 그것을 자신의 관심사 목록에 올려놓았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추론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시 1행은 바로 그 추론적인 슬롯적 배경을 시적으로 창작한 것이다.


이 철학시에서 핵심 개념은 바로 ‘무(無)’다. 이를 고려하여 나의 철학시를 다시 읽으면, 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 ‘없다’라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가치’란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서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단어의 틈을 헤집고 들어서면, 이 ‘무’는 ‘있음의 없음’이며, ‘없음이 있음’이고, ‘곧 있음으로 변화할 없음의 상태’다. 그렇게 보면, ‘무가치’는 단순히 가치가 없다, 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치 있음이 잠시 보이지 않는 상태이고, 가치 없음이 삶에서 순간적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상태일 뿐이다. 결국, 가치 있음이 곧 되돌아올 수 있는 임시적인 없음의 순간이며, 삶의 자리다.


이런 ‘무’의 의미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2행의 ‘한 가지’다. 1행의 첫 글자인 ‘무’와 연결해서 읽으면, 이 말은 ‘무한가지’가 된다. 여기서 ‘무한가지’는 단순히 수없이 많은 가지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의 가지를 은유한다. 곧 나를 지탱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가리킨다. 그 한 가지만 있다면, 사람은 무가치함에 완전히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삶은 그 ‘한 가지’를 찾는 순례다. 마치 무더위 속에서 자신과 싸우는 나에게 필요한 지혜를 반복해서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나의 시를 좀 더 설명해 보려 한다.


무더위가 피어나는 날: 이 드라마가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날이 한 여름처럼 더웠던 적이 있었다. 올해는 기후 변동마저 변이를 일으킨 듯했다. 4월 어느 날, 갑자기 무더운 날씨가 며칠 이어졌다. 평소라면 겨울의 끝자락이 봄날을 조금 흔드는 정도의 변덕은 있더라도, 따뜻한 봄의 정취가 삶을 다독이는 시기였을 것이다. 이런 평온해야 할 시기에 느닷없이 온도가 치솟았다. 빠르게 반팔로 갈아입는 이들이 늘어났고, 시원한 음료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단 며칠 동안, 사람들은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일에 괜히 신경을 써야 했다. 무더위가 마치 봄날의 기이한 꽃처럼 우리 삶 속에 피어올랐다.


한가지만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너: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더위에 대응해 왔다. 그중 대표적인 방법이 피서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다르기는 해도, 피서에는 대체로 사람들이 공감하는 한 가지 방식이 있다. ‘더위를 아예 피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산곡미풍(山谷美風)’, 곧 산골짜기의 아름답고 시원한 바람을 찾아 가차 없이 자기 삶을 자리를 떠난다. 그렇게 피서는 자기 자리를 잠시 벗어남으로써, 여름 더위가 아예 자신에게 닿지 못하게 하려는 인간의 지혜가 응집된 대응바카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경험했다. 피서는 지속될 수 없고 더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철 더위를 피하자고 자기 살림을 아예 산속으로 옮기지 않는 한, 누구라도 더위를 완전히 피해 살아갈 수는 없다. 지구의 극점으로 가버리지 않는 한 말이다. 어디든 때가 되면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더위와 함께 자기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피서에서도 당연히 되돌아와야만 한다.

생각해 보면, 모든 피서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때로는 돌아온 뒤 더위에 대한 면역력만 떨어뜨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참 묘하게도 사람은 이 반복적인 순환고리 안에서도 자신이 붙잡은 그 ‘한 가지’가 더위와 맞서는 지혜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더위에 지면서도 다시 지지 않으려는 자기만의 의지와 방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런 누군가를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그런 피서의 행동 자체가 더욱 심한 더위를 만들어내는 일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나, 무가지: 이 시의 세 번째 행은 결국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치열한’ 모습이 된다는 것을 상상한 구절이다. 여름이 오기 전 지난겨울 추위에 대응했던 때보다 더 강단 있게 자신을 독려한다. 문제는 이 치열함의 대상이 더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다. 무더위는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우주 질서의 자연스러움이다. 사람은 그런 현상에 따라야만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어느 날 더위가 삶에 들이닥치는 순간부터, 사람은 더위가 더는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게 된다. 더위 앞에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순응하거나, 피하거나, 견디는 방법뿐이다. 무모하게 대응하거나,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기만의 방식을 치열하게 찾는 것은 무모한 싸움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더위 앞에 선 한 사람은 누구와, 무엇과 치열하게 대립하는지 분명해진다. 결국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는 더위에 지치고, 더위에 대응할 방법을 쉽게 찾지 못하는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맞선다. 이 대립을 가장 흔한 말로 바꾼다면 ‘싸움’ 일 것이다. 싸움은 나와 상대 사이의 갈등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을 때 선택되는 최후의 자기 해결바카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혜로운 해결바카라이라기보다, 우선은 내가 선택한 미련한 나의 해결바카라이다. 생각해 보면, 이 싸움은 곧 내가 나와 갈등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의 단시는 바로 이 점을 눈여겨본 것이다.


덧붙여, 나의 단시는 이 싸움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라는 단어 뒤에 쉼표를 찍은 것이다. 이것은 그다음에 이어질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뒤에 ‘무가지’라는 단어를 만들어 덧붙였다. 짐작할 수 있듯, 우선 ‘나, 무가지’는 ‘내가 무가지’라는 말로 읽을 수 있고, 동시에 ‘나뭇가지’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


먼저 ‘내가 무가지(無可智)’라로 쓴 것은 ‘내가 알 수 있는 일은 없다’라는 의미의 조어(造語)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도무지 지혜로 붙잡을 수 없는 상태가 있다’라는 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보통 말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연상하게 한다. 다만 불가지론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 자체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음’이라는 인식의 한계에 가깝다면, 나의 ‘무가지’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는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환경과 자기 상태를 아직 찾지 못한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무가지’는 앎의 부재라기보다, 앎을 삶에 맞게 적용할 슬기로움, 곧 상황 적합적 지혜(智)의 부재를 뜻한다.


다른 관점에서 이 시어는 ‘나뭇가지’의 파자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사람은 어쩌면 알면서도 괜한 싸움을 반복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바람에 무작정 흔들리며, 다른 가지와 부딪히는 나뭇가지와 닮아있다. 가지는 바람을 이길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사람 역시 더위를 완전히 이길 수는 없지만, 더위 앞에서 흔들리고 부딪히며 자기만의 대응 방식을 찾아간다.

결국 이 철학시는 표면적으로는 무더위, 피서,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구조를 유지하려 했다. 무더위는 현실이고, 피서는 지혜이며, 해마다 반복되는 대응은 인간이 가진 유한성의 증거다. 동시에 한 가지 더 말하려고 했다. 이 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시다. 내가 의도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각 시행의 첫머리를 ‘무-한가-치’로 연결하여, 마치 삼행시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가치, 무(한)가치, 무가지로 이어지는 말의 흐름을 통해 ‘무(無)’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하려는 것이다.


무더위에 대응하는 피서는 더위에 관한 지식이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위에 대응하는 나의 슬기로운 생활에 관한 문제다. 다만 그 지혜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상황과 환경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는 유한한 처방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찾아오는 더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때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해 피서의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면 모두가 그렇다. 힘들게 다녀온 뒤 오히려 더 피곤한 삶을 살면서도, 그 지혜 찾기 싸움을 반복한다.


그렇다고 피서를 가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무더위 앞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피서를 계획한다. 그 과정이 모두가 자신과 싸우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피서는 더위를 피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내가 무엇을 붙잡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것인지를 되묻는 절기적 예식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그 지혜 찾기의 싸움은 겉으로는 쓸데없고 무가치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지탱할 ‘한 가지’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무가치란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자기 지혜를 찾지 못한 존재가 흔들리며 버티는 시간이고, 그 흔들림 끝에 무한가치로 되돌아갈 길을 새롭게 여는 삶의 자리다. 흔들리면서도 자라 가는 나뭇가지처럼, 인간은 무가치해 보이는 싸움 속에서 끝내 자신만의 가치를 다시 피워낸다.


요컨대, 무가치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아니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치가 흔들리며 머무는 자리다. 무가치란 가치의 부재가 아니라, 아직 나를 지탱할 한 가지를 찾지 못한 상태이며, 인간은 그 한 가지를 찾는 반복적 싸움 속에서 무가치한 시간을 무한가치로 되돌린다. 사람은 무더위 앞에서 피서를 계획하듯, 자기 삶의 더위 앞에서 끝없이 자신과 싸우고, 그 싸움 속에서 자신을 지탱할 한 가지를 찾아낸다. 그 한 가지가 발견되는 순간, 무가치한 시간은 비로소 무한가치로 되돌아가는 길이 된다.


3. 드라마 제목에서 읽는 철학적 관점: 모두, 자신, 무가치함, 싸우고 있다

드라마의 각 에피소드가 이 제목을 어떻게 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드라마의 서사나 인물, 사건에 대해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제목만으로도 하나의 철학적 관점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문장은 단순히 어떤 드라마의 제목이라기보다, 한 인간이 자기 삶 안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존재론적 문장처럼 읽힌다.


나는 이 제목을 네 단어로 나누어 읽어보려 한다. 모두, 자신, 무가치함, 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네 단어는 따로 떨어진 낱말들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논리적 흐름을 이룬다. ‘모두’는 이 문제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말하고, ‘자신’은 그 모두 안에서 내가 결코 빠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무가치함’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마주한 존재가 내리는 불안정한 가치 판단이며, ‘싸우고 있다’는 그 판단을 최종 판결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생의 몸짓이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은 범위에서 출발해, 주체를 지나, 판정에 이르고, 끝내 저항으로 나아가는 문장이다.


먼저 ‘모두’는 이 제목의 가장 넓은 들판이다. 여기서 모두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이라는 말에는 늘 해석학적 함정이 있다. 모든 것은 정말 예외 없는 전체인가? 우리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의 고통, 판단, 싸움의 방식을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모든’은 언제나 불가지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 누구도 모든 삶을 완전히 알 수 없고, 누구도 모든 사람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대신 말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이 제목의 ‘모두’를 수학적 의미의 ‘전원(全員), 전체’로 읽기보다, ‘누구라도’ 혹은 ‘어떤 사람이라도’라는 가능성의 범위로 읽으려 한다. 특정한 사람만 자기 무가치함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약한 사람, 특별히 비합리적인 사람, 특별히 실패한 사람만 그런 싸움에 놓이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어느 순간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흔들릴 수 있다. 합리성이라는 것도 대체로 상대적 가치 판단 안에서 작동한다. 누군가에게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절박한 방식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는 예외 없는 숫자가 아니라,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인간 조건의 범위다.


그다음에 오는 말은 ‘자신’이다. 이 단어는 제목의 범위를 갑자기 안쪽으로 접어 넣는다. ‘모두’라고 말하면 우리는 흔히 타인들을 먼저 떠올린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나 아닌 사람들, 어딘가에서 각자의 문제를 겪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그 시선을 곧바로 되돌린다. 모두가 싸우고 있다면, 그 모두 안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 ‘모두’라는 말속에서 나만 조용히 열외가 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은 이 제목의 가장 날카로운 단어다. 그것은 문제가 바깥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내가 바라보는 타인만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도 이 문장의 대상이 된다. 자기 자신은 이상한 존재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것 같고, 가장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가장 낯설게 다가온다. 그래서 자기(self)는 일차적 타자다. 나는 나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가장 오래 해석해야 하는 타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적은 때로 자신 안에 있는 자기이고, 자신의 아군 역시 자신과 함께 머무는 자기다. 나는 나를 밀어붙이기도 하고, 나를 변호하기도 한다. 나를 의심하기도 하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제목에서 ‘자신’은 단순한 소유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삶에서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하는 내면의 타자를 가리킨다. 결국 이 드라마 제목이 가리키는 싸움의 무대는 바깥 세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라는 가장 가까운 낯섦의 자리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마주하는 ‘무가치함’은 무엇인가? 이 단어는 제목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무가치함은 단순히 가치가 없다는 뜻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무가치함은 언제나 하나의 판단이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내가 나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타자가 나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판단이 과연 최종적인가 하는 점이다.


우선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일에는 묘한 자기모순이 있다. 내가 나를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나는 이미 어떤 가치의 기준을 붙잡고 있다. 나는 아무 기준 없이 나를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 내가 도달하지 못한 삶, 내가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가능성, 타인과 비교하며 생겨난 결핍감 같은 것들이 그 판단의 배경에 놓인다. 그러므로 자기 무가치 판단은 완전한 무가치의 증명이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자기 평가의 흔들림에 가깝다.


타자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타자가 나를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슬롯가 어떤 일을 쓸데없다고 말할 수 있고,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무의미하다고 낮출 수도 있다. 그러나 타자의 시선이 곧 존재 전체에 대한 최종 판결이 될 수는 없다. 타자의 판단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상황적이며, 때로는 오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나의 전부가 아니라, 어느 한 장면일 뿐이다. 따라서 타자의 관점에서 결정되는 무가치함 역시 잠정적인 판정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내가 앞서 말한 ‘무’의 관점이 다시 중요해진다. 무가치함의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뜻이 아니라, 가치 있음이 아직 보이지 않는 상태일 수 있다. 가치 없음이 순간적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상태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무가치함은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존재를 둘러싼 임시적 판단이다. 어떤 삶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시선이 그 삶의 가치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마지막 단어는 ‘싸우고 있다’이다. 나는 이 말을 구체적인 물리적 충돌로 읽기보다, 관용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읽는다. 이 제목에서 말하는 싸움은 아군과 적군의 전투도 아니고, 나와 주변 사람들의 직접적인 충돌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가깝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타자의 판단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무가치하다는 임시 판정을 내 삶의 최종 결론으로 삼을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내면의 대립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제목이 ‘싸운다’가 아니라 ‘싸우고 있다’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싸운다’는 말이 하나의 성향이나 반복되는 습관처럼 들린다면, ‘싸우고 있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싸움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싸움은 이미 끝난 과거의 사건도 아니고, 언젠가 시작될 미래의 가능성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삶 한가운데서 계속되는 상태다. 그러므로 이 제목의 싸움은 어떤 결말을 이미 얻은 싸움이 아니라,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지속되는 자기 존재의 과정이다.


이 싸움은 때로 명분이 없어 보인다. 싸우지 않아도 될 순간에도 사람은 싸운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전투에 스스로 나가, 자신의 전투력을 무모하게 증명하려 한다. 자기 스스로의 명분을 위해,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스스로에게 입증하기 위해 치열한 모습을 연출한다. 그렇게 보면 싸움은 미련한 자기 해결바카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미련함 속에는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내려진 무가치의 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싸우고 있다’는 단순히 나와 대적자 사이에 일어난 갈등에 저항하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무가치하다는 잠정적 판단을 최종 운명으로 확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이다. 나는 나를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나와 싸운다. 동시에 나를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타자의 시선과도 싸운다. 더 깊게는, 그런 판단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피곤한 나 자신과도 싸운다. 이 싸움은 언제나 고결하지도 않고, 언제나 지혜롭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나의 가치가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제목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단순히 “사람들은 왜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힘든가?”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무가치함을 정의하는가? 누가 어떤 삶을 무가치하다고 판정할 권리를 갖는가? 자신인가, 타자인가, 슬롯인가, 아니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간인가?


나는 이 질문이 이 제목에서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철학적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면, 그 싸움은 자기 가치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사람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과는 싸우지 않는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아직 스스로 포기하지 못한 가치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아직 지켜야 할 한 가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무가치함과 싸운다는 것은 무가치함을 제압하려는 자기 증명이 아니라, 무가치함이 최종 판결이 아님을 자기 몸으로 입증하기 위해 자기 몸을 밀어 넣는 일이다.

하여 제목에서 말하는 대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두 가지 사실을 세밀하게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모두가’라는 주격 조사 ‘가’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무가치함’이라는 소유의 형식이다. 주격 조사 ‘가’는 본래 문장 안에서 동작의 주체를 명확하게 적시한다. 문장 안에서 주체가 따로 길게 설명되지 않아도, 이 조사는 누가 움직이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는 ‘모두’에 담긴 개체의 주어적 성격을 명확히 드러낸다. 모두는 추상적인 군중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는 주체들이다.


또한 ‘자신의 무가치함’이라는 말에 담긴 무가치함의 발생 기원이다. 무가치함은 단순히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물론 타인의 시선이나 슬롯의 기준이 그 판단에 깊이 개입할 수 있다. 이 제목은 끝내 그것을 ‘자신의’ 무가치함이라고 부른다. 그 말은 무가치함을 판단하고, 받아들이고, 대항하는 주체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타인도 아니고 세계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끼거나 만들어낸 어떤 것에 대응하고 있다. 서술어 ‘싸우고 있다’는 그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만들어낸 싸움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이 정말 무가치하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분투하고 있다.


4. 무가치함의 철학적 개념: 무, 가치, 함(행동)

무가치함은 일반적으로 사소한 것, 뚜렷한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 들인 수고에 비해 예상되는 가치가 현저히 낮은 것 등을 아우르는 용어이다. 결과적으로 그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상승되거나 심화될 리 없는 것들처럼 보이는 상태를 가리킨다. 무엇보다 ‘무가치함’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촉각이나 느낌을 직접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에 인간이 맞서 싸울 수 있는 여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그렇다면 ‘무가치함’이 인간이 실제로 대적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왜 사람은 이 무가치함에 적극 대응하는가? 도대체 ‘무가치함’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우선 무가치하다는 판정부터 생각해 보려 한다. 이는 곧 그 무가치함의 판정 기준과 직결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그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을 테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다분히 수치의 높고 낮음과 대중이 보내주는 호응의 강약일 것이다. 높은 숫자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무가치하다고 여겨진다. 대중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 그것은 무가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판정 기준은 무가치함이 물성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 손에 잡히는 성과, 즉각적으로 확인되는 반응이 없다면 가치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면, 가치는 물질과 물체, 손에 잡히는 어떤 것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가치철학은 ‘아름다움의 철학’, 곧 미학과 추학의 문제까지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가치가 주관적 영역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는 높은 수치로만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내 마음에 아름다운 것, 내가 느끼고 생각하기에 ‘해볼 만하다’라는 판단이 서는 것에서도 가치는 충분히 생겨난다. 어떤 일은 대중의 호응을 즉각적으로 얻지 못해도,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삶을 버티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결국 무가치함이란 두 가지 판정 기준에 의해 만들어지는 주관적 가치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절대적으로 낮은 계량화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가치에 대한 상대적 판단이다. 수치가 낮기 때문에 당연히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또한, 나 또는 타인이 보기에 그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가치해 보이는데도 끝내 무가치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낮은 수량화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에서 폐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이다. 특히 타인의 관점이 아니라 적어도 나의 판단과 기준에 의해 해 볼 만하다고 여겨지는 일일 때, 무가치함은 더는 무가치함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무가치함은 물량적 치환보다는 주관적 자기 판단의 기준과 더 절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무가치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이런 관점에 대한 유의미한 실마리는 바로 ‘함(行動)’, 즉 인간의 본능적인 저항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싸우고 있다’는 표현은 바로 그 무가치함에 대한 자기 주관이 적극 반영되어 있음을 함의한다. 이 싸움은 무형의 전투다. 무가치함은 눈에 보이는 적(敵)이 아니기에 무기를 겨눌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 실체 없음은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가장 강력하게 자극한다. 눈에 보이는 더위 앞에서 피서(避暑)라는 일시적 행동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내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쓸데없는 행동’,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허무한 감각까지 피할 수는 없다. 실체가 없고, 그 판단의 상당 부분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기에, 무가치함은 내가 가는 곳, 내가 머무는 곳 어디에나 따라온다. 결국 그것은 자기에 의한, 자기의, 자기를 향한 싸움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무가치함은 언제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문제다. 어떤 이가 무가치하다고 해서 실제로 그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수치에 의한 계량화라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면, 타인의 가치 판단은 타인의 기준에서만 적용될 여지가 크다. 모두가 공유하는 절대적인 무가치함의 현상을 제외하면, 무가치함은 언제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다시 붙잡을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실체 없는 허무처럼 자신을 위장한 채 다가온다고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허무라고 판단한 것에 순응하는 순간, 나의 존재 자체가 바람처럼 흔들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근원적 이유는 그 무가치함이 자기 존재를 통째로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도록 방어하기 위함이다. 앞서 내가 ‘무가치함’을 무와 가치와 함으로 파자하여 생각한 것은 바로 이 ‘무가치함’에서 ‘싸우고 있다’라는 ‘함(행동)’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함’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가 ‘무(無)’에 이끌려 스스로 소멸하는 재난 같은 상태를 자기 몸으로 저항해보려는 실존적 움직임이다.


무엇보다 ‘함’이라는 행동은 ‘무가치함’을 가치 없음으로 단정하지 않았다는 실존적 증거 행위이다. 사람은 정말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 것에는 오래 매달리지 않으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가 ‘싸우고 있다’라는 것은 아직 무언가 남아 있다고 믿어보려는 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가치가 잠시 장막 같은 눈에 가려져 있을 뿐이기에, 그 가려진 눈의 장막을 걷어보려는 도도한 저항이다. 그렇게 보면 ‘함’은 단순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치를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찾아가는 자기 영웅적 서사의 한 단락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는 ‘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오래전 장자는 ‘무’를 단순히 ‘없다’는 상태로 판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있음의 없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시 ‘있음’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잠정적 없음이라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무위’는 자기 성찰적 철학 행위가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의 상태가 아니라, 억지로 무엇을 이루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사물과 삶이 스스로 드러나는 자리를 기다리는 행위에 가깝다. ‘무로 되어가기’는 스스로 ‘무’를 선택한 것이며, 그 선택은 없음 속에서 다시 있음의 가능성을 살피는 일이다.


숫자 0 역시 무를 상징한다.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은 수학적 논증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적 은유다. 말하자면, 0은 없음을 의미하는 기호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없음이 있음’을 기표한다. 다시 말해 ‘0’은 없음의 있음을 드러내는 기호다. 달리 말하면 ‘0’은 사이 있음의 흔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어떤 자리의 한가운데에도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다. 0은 1과 -1 사이에 놓인다. 1이 있음의 세계를 가리키고, -1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결핍이나 허구의 세계를 가리킨다고 은유한다면, 그 둘 사이의 0은 있음과 없음, 실제와 허구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삶은 언제나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가치는 그 사이의 자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요컨대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행위에서 무가치함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 없는 것 같지만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태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행위다. 실존적 몸부림인 것이다. 비록 미련해 보이고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을지라도,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행동하고 부딪히는 그 과정 자체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알다시피 무가치함과 싸우는 일의 승패는 확률적으로 낮은 성공률을 보인다. 오래 걸리기도 하고, 다 끝나고 나서도 자기 현실을 타격하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호응과 칭찬보다는 핀잔과 비아냥을 감수해야 할 때도 많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에서 무가치함과 싸우는 일의 의의를 알 수 있다. 모두가 싸우고 있는 이 무가치함은 무수히 많은 실패를 동반하지만, 겨우 몇 번의 성공만으로도 충분히 ‘무가치하지 않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야구에서 열 번의 기회 중 일곱 번의 타격을 실패하고 세 번의 성공적인 타격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가치하다는 것은 끝내 성공률 0% 일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는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세 번의 성공 자체만은 아니다. 그 세 번의 성공을 위해 한 사람은 경기에 앞서 무한히 많은 스윙 연습을 무가치하게 반복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반복은 경기장 밖에서는 아무런 성과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공을 치지 않는 스윙, 관중이 보지 않는 연습, 기록지에 남지 않는 실패들은 쉽게 무가치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바로 그 무가치해 보이는 반복이 몇 번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든다. 더 깊이 말하면, 설령 그 반복이 끝내 눈에 보이는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반복은 이미 자신에게 내려진 무가치함의 최종 판결을 미루고 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아직 몸이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아직 다시 한번 휘둘러볼 힘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무가치함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무


결국 무가치함과 싸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을 찾아가기 위한 ‘시지프스의 돌멩이’와 같다. 인간의 무모한 욕심의 변형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부여된 어떤 훈련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돌멩이가 반드시 정상에 도달한다는 보장이 아니다. 신화에서 시지프스의 돌은 끝없이 굴러 떨어지고, 그의 형벌은 반복된다. 그 반복은 겉으로 보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아무 결론도 만들지 못하는 형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무가치함과 싸우는 일은 그와 조금 다르다. 그 싸움은 반드시 성공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무가치함이 나를 완전히 판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무가치함과 싸우는 행동은 성공을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최종 판결을 유예하는 몸의 항변이다. 설령 결론이 늦게 오더라도, 설령 실패가 더 많더라도, 설령 끝내 세상이 알아주는 성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행동은 아직 가치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사람은 완전히 무가치하다고 믿는 일에 자기 몸을 계속 내어주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고, 반복하고, 다시 시도한다는 것은 그 일이 아직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패가 계속된다고 해서 그 싸움이 곧바로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패 속에서도 계속되는 행동은, 무가치함이 최종 판결이 아니라 아직 지나가는 과정임을 드러낸다.


결국 무가치함에 대응하는 인간의 치열한 ‘함(행동)’은 보이지 않는 무(無)의 공간에서 자신이 찾아낼 수 있는 ‘한 가지’ 가치를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 실체가 없기에 대적할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기에 내가 비로소 새로운 가치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발견인 것이다. 이 싸움이 계속되는 한, 실체 없던 무가치함은 비로소 인간의 행동을 통해 무한가치라는 단단한 실체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5. 무가치가 무한가치로 나아가는 단 하나의 요소

나의 철학시에서 나는 무가치함이 ‘무한 가치’로 가지처럼 뻗어나갈 것을 기대했다. 이제 이 제목에 대한 마지막 논의를 다루려한다. 나는 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제안할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고대 히브리 철학자 코헬렛의 자기 고백을 하나 인용하려 한다.


“나 코헬렛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어요. 내 마음을 기울여 연구하고 조사했지요. 지혜를 가지고서요.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는 온갖 일에 대해서 그렇게 했지요. 지독하게 힘든 일이었어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힘겹게 해 나가도록 하신 것이었어요. 나는 보았어요, 해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는 온갖 일을요. 그런데요, 아, 모든 일이 허무했고 바람을 붙잡으려는 것이었어요! 굽은 것은 곧게 할 수 없고, 없는 것은 셀 수 없지요.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어요. ‘내가, 아, 위대해졌고 지혜도 늘어났구나. 그래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을 다스렸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되었지. 내 마음으로 지혜와 지식을 많이 살펴보았지.’ 또한 마음을 기울여 지혜를 알아보려고 했어요. 얼빠진 것과 어리석은 것을 알아보려고도 했고요. 그런데 알게 되었어요, 이것 또한 바람을 붙잡으려는 것임을요. 지혜가 많으면 울분도 많아지고, 지식이 더하면 아픔도 더하거든요.”


이 고백에 따르면, 코헬렛은 세상이 왜 이렇게 굽어져 있는지, 왜 모순투성이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기 전 재산과 모든 삶을 쏟아부었다. 그는 마음을 기울여 연구했고, 지혜를 가지고 조사했으며,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는 온갖 일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바람을 붙잡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지혜가 많으면 울분도 많아지고, 지식이 더하면 아픔도 더하다”는 고백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면 그의 탐구는 무가치한 결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온 힘을 다해 세계를 살폈으나, 남은 것은 허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다른 가능성을 본다. 코헬렛의 무가치함과의 싸움은 단순히 허무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허무를 보았고, 허무를 피하지 않았으며, 허무를 언어로 남겼다. 그 결과 그의 고백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한 가지’를 우리에게 유산처럼 남겨주었다. 나아가 그의 지혜는 ‘무한가치’를 가질 만큼 삶의 다양한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그가 무가치함과 싸운 결과, 적어도 나는 이 세계의 선과 악, 가치와 무가치를 인간의 지혜만으로 쉽게 최종 판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 불가능한 판단의 자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말의 무한가치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경우이든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나의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어떤 일을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 있고, 어떤 시간을 허무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무가치한 것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갖느냐이다. 그것을 치열하게 맞닥뜨리는지, 아니면 다른 이의 모습을 보고 괜한 핀잔을 주고 마는지 돌아볼 일이다. 내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일이 정말로 무가치한 지, 아니면 아직 그 가치를 알아볼 눈을 얻지 못했을 뿐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무가치가 무한가치로 나아가는 하나의 요소를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바로 ‘무가치함의 수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수용은 체념이 아니다. 수용은 “나는 무가치하다”라고 주저앉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그 판단이 생겨난 자리까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무가치해 보이는 시간을 억지로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최종 판결로 삼지도 않는 태도다. 다시 말해 무가치함의 수용이란, 무가치함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가치함 속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한 가지를 기다리는 일이다.


여기서 앞선 드라마의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이 제목이 말하는 ‘무가치함’ 앞에는 ‘자신의’라는 말이 붙어 있다. 이 문장 구조를 다시 읽어보면,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로 갈라진다. 하나는 무가치함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무가치함’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라면, 모두가 ‘자신’이라는 무가치한 대상과 날마다 싸우는 셈이다. 어쩌면 그런 자기와의 투쟁이 이 세계가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공의로움을 유지하려고 분투하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한 지혜자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욥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물었고(욥7:6), 시편의 어느 시인은 자신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처럼 낮추어 말하기도 했다(시22:6). 그러나 그런 말은 단순한 자기 폄하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자리에서 날마다 지혜를 얻기 위해, 무가치해 보일 정도의 일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태도에 가까웠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포기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한계 안에서 다시 하나님과 세계와 자신을 묻는 일이었다.


오늘의 나의 삶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현상을 관찰하고, 글을 쓰고, 길을 걷는 일일지 모른다. 겉으로 보면, 그 일들은 단숨에 수치로 계량되지 않는다. 특별한 성과를 곧바로 만들어내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는 일이 많다. 누군가에게는 무가치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무가치해 보이는 행동 속에서 내 삶을 지탱하는 한 가지를 찾는다. 계절의 변덕을 보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드라마 제목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나만의 철학시를 얻어낸다. 바로 이 반복이 내게는 무가치함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무가치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조차, 결국 내가 무한가치를 가진 ‘하늘 아래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배우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무가치함을 수용한다는 것은 나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이다. 포기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나의 가치,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가치, 아직 보이지 않는 한 가지의 가치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가치함의 수용은 무가치함을 무한가치로 바꾸는 단 하나의 요소다. 그것은 허무를 끌어안은 채, 허무 너머에 있을 한 가지를 향해 다시 걸어가는 인간의 조용한 결단이다.


6. 결론: 검은 안식의 시학으로 읽는 무가치의 무한가치

앞의 논의를 모아서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드라마를 보지 않았기에 드라마 보는 일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세간의 비평은 조금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다. 이제 한 번에 몰아서 볼 생각이긴 하다. 어쨌든 이 드라마는 제목에 이미 세계와 사람과 삶의 형식을 이해해보고 싶은 동기를 충분히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제목을 오래 들여다는 무가치한 일을 하다가 나는 그 제목이 내 안에서 불러낸 철학시와 그 철학시가 다시 열어준 사유의 길을 따라갈 수 있었다.


나의 단시 「무가치」는 무더위, 한 가지, 치열함, 무가지라는 작은 말들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에서 무더위는 현실이고, 피서는 지혜이며, 자신과의 싸움은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더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더위를 완전히 이길 수 없다. 다만 잠시 피하고,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자기 자리에서 더위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이 반복은 얼핏 무가치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쓰러지지 않게 하는 한 가지를 찾아낸다.


그런 점에서 무가치는 단순히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계속 말한 ‘무(無)’는 없음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있음의 없음이고, 없음이 있음이며, 곧 있음으로 변화할 수 있는 잠정적 없음이다. 무가치함은 가치가 완전히 소멸한 폐허가 아니라, 가치 있음이 잠시 보이지 않는 상태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가치가 어둠 속에서 쉬고 있는 자리다. 그렇기에 무가치함은 끝이 아니라, 다시 가치가 돌아올 수 있는 검은 안식의 자리다.


나는 이 지점을 ‘검은 안식의 시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검다는 것은 단순히 절망을 뜻하지 않는다. 검다는 것은 아직 빛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이고, 아직 말이 태어나지 않은 자리이며, 아직 가치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리다.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지가 아니다. 안식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치가 다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검은 안식이란, 무가치하다고 여겨진 존재와 행동이 완전히 폐기되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자기 가치를 품고 돌아올 수 있도록 어둠 속에서 머무는 시간이다.


이 시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는 어둠 속에 함께 놓인 존재들의 이름이다. 그것은 예외 없는 숫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자기 삶의 가치 앞에서 흔들릴 수 있다는 인간 조건의 범위다. ‘자신’은 그 어둠을 남의 일로만 돌릴 수 없게 만드는 단어다. 모두가 싸우고 있다면, 그 모두 안에는 나도 있다. 나는 타인의 무가치함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무가치함 앞에 서 있는 당사자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가장 가까운 타자이고, 가장 오래 해석해야 할 존재다.


‘무가치함’은 이 검은 안식의 중심에 놓인 말이다. 무가치함은 존재의 최종 판결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향해 내린 흔들리는 판단일 수 있고, 타자가 나를 향해 던진 부분적 판정일 수 있으며, 시대가 수치와 호응을 기준으로 만들어낸 임시적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시선도 한 존재의 가치를 완전히 판결할 수는 없다. 무가치함은 실체가 아니라 판단이고, 그 판단은 언제나 다시 물을 수 있다. 누가 무가치함을 정의하는가? 누가 어떤 삶을 무가치하다고 판정할 권리를 갖는가? 이 질문이 남아 있는 한, 무가치함은 아직 끝난 말이 아니다.

‘싸우고 있다’는 이 검은 안식이 멈춘 정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정적임을 보여준다. 싸움은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무가치하다는 잠정적 판단을 최종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몸의 대답이다. 사람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과는 싸우지 않는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못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아직 지켜야 할 한 가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은 무가치함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무가치함이 최종 판결이 아님을 몸으로 밀고 가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함(행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무가치함의 ‘함’은 단순한 명사형 어미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드러내는 자리다. 무가치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실체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 안에 새로운 가치를 채워 넣을 수 있다. 실체가 없기에 대적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기에 비로소 내가 나의 행동으로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 무가치함에 대응하는 인간의 치열한 함은 보이지 않는 무의 공간에서 자신이 찾아낼 수 있는 한 가지 가치를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


검은 안식의 시학은 무가치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흰 빛으로 서둘러 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검은 자리에 머문다. 무가치해 보이는 반복, 실패가 더 많은 연습,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 글쓰기, 길을 걷는 일, 현상을 오래 바라보는 일, 자기 자신을 다시 묻는 일들을 쉽게 폄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아직 빛나지 않을 뿐, 자기 안에 가치를 품고 쉬는 행동들일 수 있다. 검은 안식은 무가치한 시간이 아니라, 가치가 다시 태어나기 전의 깊은숨이다.


코헬렛의 고백도 이 자리에서 다시 읽힌다. 그는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는 온갖 일을 살폈고, 그 모든 일이 허무하며 바람을 붙잡으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허무의 고백은 무가치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수많은 사람에게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지혜의 유산이 되었다. 코헬렛은 허무를 제거하지 않았다. 허무를 수용했고, 그 허무를 언어로 남겼다. 그 수용이야말로 무가치가 무한가치로 나아가는 단 하나의 요소였다.


이제 나는 나의 철학시 「무가치」를 다시 읽는다. 무더위가 피어나는 날, 한 가지만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너,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나, 무가지. 이 짧은 시는 결국 무가치함이 사라지는 장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가치함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게 하는 한 가지를 찾는 인간의 장면을 말한다. 나는 무가치함을 완전히 이기지 못한다. 누구도 자기 무가치함을 완전히 추방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한 가지를 찾고, 다시 행동하며, 검은 안식의 시간을 지나갈 수는 있다.


결국 무가치라는 말은 나를 어둠에 밀어 넣고 끝내버리는 자기 죽음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쉬고 있는, 생존하는 가치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가치함은 나를 폐기하는 판결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한 가지를 향해 걸어가게 하는 어두운 초대장이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행동이 계속되는 한, 무가치함은 더 이상 무가치함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수용과 행동을 통해 무한가치라는 단단한 실체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흔히 세계가 가치 있다고 판정되는 몇몇 위인들의 탁월한 결과물로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을 보고 빙산 전체를 보았다고 말하는 일에 가깝다. 세계는 눈에 띄는 성취만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는 무가치한 자신을 솔직히 대면하면서, 온갖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 위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름 없는 반복, 실패가 더 많은 연습,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돌봄, 당장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사유와 노동이야말로 세계의 깊은 곳을 받치는 검은 안식의 시간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들을 개미처럼 일한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몇몇 빛나는 베짱이들의 노래만을 발전의 상징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개미와 베짱이의 우열이 아니다. 오히려 빛나는 노래조차 보이지 않는 반복의 어둠 위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세계는 한쪽의 탁월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가치해 보이는 무수한 움직임과 드물게 드러나는 빛나는 성취가 서로 기대어, 겨우 하나의 삶과 세계를 밀고 간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무가치함은 사라져야 할 어둠이 아니라, 받아들여져야 할 검은 안식이다. 그것은 날마다 마주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는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안식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지탱할 한 가지를 찾고, 그 한 가지를 붙들고 다시 걷는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말은 모두가 불행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아직 자기 안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사람은 바람을 이기지 못해도 바람 속에서 자란다. 무가치한 시간처럼 보이는 그 검은 안식 속에서, 인간은 끝내 무한가치의 가지를 자라게 하여 나와 너와 우리의 꽃을 시나브로 피워낸다.


무가치함은 가치의 죽음이 아니라 가치의 은거이다. 인간은 그 은거한 가치를 자기 안으로 수용하고, 그것과 싸우듯 행동함으로써 자기 삶에서 꺾였던 한 가지를 기필코 다시 찾아낸다. 그때 무가치함과 싸우는 일은 삶에 잠재된 무한가치의 가지를 피워내는 검은 안식의 시학이 된다.


이제 드라마를 정주행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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