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시 쓰기와 음악의 변주
글의 장르는 하나의 음악이며, 글쓰기는 그 장르에 따른 악보와 같다. 연주자는 악보에 적힌 음표와 악상을 따라 자기 악기로 연주한다. 악보에는 하나의 마디 안에 연주되어야 할 음표가 적절한 속도로 분절되어 있다. 하나, 둘, 셋, 넷, 여섯, 여덟 등으로 하나의 음을 소분하는 것이다. 혹시 자신이 즐겨 연주하고 싶은 마디나, 음표의 배열이 있다면, 작곡가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 있다. 코다라는 형식으로 곡의 끝으로 갔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그 반복을 좀 더 다양한 형식으로 곡 전체에 걸쳐 연주하고 싶다면, 그는 한마디, 또는 두 마디에 결처 진행되는 주요 악보를 조금씩, 미세하게 변주할 수 있다. 음의 높낮이는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길고 짧음, 또는 아주 미세한 변주음을 넣는 것이다.
이런 기교는 곡 전체의 주요 음을 유지하면서, 반복으로 지루하다는 인상도 상쇄하면서, 곡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마지막에 역동적인 음악으로 마무리되도록 도울 수 있다. 이제 나의 글쓰기에서 다뤄볼 소재는 바로 이 ‘반복의 변주’에 관한 것이다. 반복되는 변주는 어쩔 수 없이 서사가 느릿하게 흘러가고 길어진다. 이런 현상은 요즘 글쓰기 덕목에서 경계해야 할 요소로 꼽힌다. 글의 서사는 빨라야 하고, 길이는 짧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에서 반복 기법으로서 변주의 가장 큰 미덕은 읽는 이들이 하나의 생각으로 빨리 닫히지 않고, 해당 글에 내재한 다양한 관점을 여러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하여 지루할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 변주로 인해 하나의 주제를 심화할 기회를 갖게 된다.
2. 반복의 변주 방식 네 가지
나의 글에서 반복은 네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째, 날씨의 반복이다. 이는 날씨를 통해 어떤 안정성을 체감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예측 불허의 날씨”, “알 수 없는 날씨”, “계절의 흔들림”은 같은 말은 비슷한 의미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는 한 인간이 하루 동안 세계의 변화를 여러 번 다시 감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유의해야 할 것은 ‘날씨’라는 소재는 단순히 글의 배경을 위한 기능어가 아니다. 나의 글에서 대체로 날씨는 몸을 흔들고, 노래를 고르게 하고, 바카라을 들었다 놓게 하며, 기도와 숲으로 이어지게 하는 최초의 동인(動因)이다. 우리가 알 듯이 날씨는 하루에도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날씨에 대한 서술이 하나로 끝날 수 없는 이유다. 반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봄날씨가 꽃샘처럼 여러 번 바뀌듯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몸의 감각도 한 문장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둘째 묘사의 반복이다. 날씨와 마찬가지로 나의 글은 소재로 삼은 글감에 대한 묘사도 다양하게 변주한다. 이런 묘사의 반복은 소재를 박물관에서 전시 품목을 관람하는 것 같은 태도로 관찰해보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한 면만 보아서는 그 실체를 제대로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관찰로 인해 나의 철학시는 사실이나 사건을 밀고 나가는 전진적 서사라기보다는 나선원형처럼 돌면서 상승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형태가 자연스럽다. 이런 변주적 반복이 나의 글쓰기를 이끄는 보폭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글쓰기는 대체로 에세이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 글쓰기에서 나는 하나의 대상을 단번에 규정하지 않고 둘러보고, 다시 부르고, 다른 장면에 놓아보고, 한참 뒤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노래에서 바카라으로, 바카라에서 사람의 샬롬으로, 다시 숲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직선적 논증이 아니라 묵상적 순환에 가깝다. 하나의 사물을 중심을 두고 내 몸을 움직여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관찰하는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반복과 변주는 글의 정체가 아니라 사유의 심화이다. 한 번 말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말함으로써, 그 사물이 본래 가졌던 삶의 결을 최대한 찾아가 보는 것이다.
셋째, 상상의 반복이다. 나의 글에서 상상은 실제 서사와 허구의 서사가 이어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봄의 끝”이라고 쓴 뒤에, “진초록 여름”을 이어 붙인다. 나는 봄의 끝에 서 있지만, 나의 상상은 이미 여름의 초입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 흔적을 관찰하여 나의 상상에서 증폭하는 것이다. 어느 글에서나 이런 상상의 이동은 한 번의 전환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여러 요소가 이어진다. 햇살, 바람, 늦봄비, 이팝나무 꽃, 노래, 빨래, 바카라상 위의 바카라, 산자고 꽃, 감자 싹, 고사목, 버섯, 약수터, 하산의 길 등이다. 이것들은 봄날의 산바카라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더 세부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현실과 상상의 복합적 요소들이다. 조금씩 같은 주제를 다른 음색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상 같은 것들이다. 나의 에세이의 구성은 일정한 틀에 맞춰진 산문이라기보다 나만의 형식으로 흘러가는 느린 변주곡에 가깝다. 같은 선율이 여러 악기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넷째, 정서의 반복이다. 글이 더뎌지고 늘어지는 것은 글 안에 나의 감성이 복합적으로 스며있다는 것을 밝히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이 지나갔다고 해서 곧장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몸을 맡긴다”, “다시 듣는다”, “다시 묻는다”, “다시 걷는다” 같은 되돌아감의 동사는 내 행동을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나의 정서를 반영한다. 이런 반복은 역동적인 삶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이 내 안에 남긴 흔적을 천천히 만져보고 그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나의 에세이가 느릿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니 속도를 내지 않으려는 이유다. 빠르게 결론으로 향하지도 않는다. 느리게 그 관찰하는 사물 주의에 머무르며, 다양한 시선을 관찰하고 그 관찰의 결과를 비슷한 표현으로 변주한다.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사물을 보며 사유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나의 글에서 반복은 “압축”된 단어와 단어 사이에 사유가 “체류”하는 길을 열어준다. 말끔하게 “정리”된 문장을 추구하면서도 이어지는 감정들 사이를 “되새김”하면서 심화하는 여백을 만들어낸다. 주제를 명확하게 “주장”하면서도 반복되는 정서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울림”을 기대한다. 한 문장을 읽고 다음 문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지만, 같은 풍경 안에서 조금씩 바뀌는 서로 다른 빛을 좀 더 오래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이런 반복의 기법이 글 안에서 오래 살아 있으려면 한 가지가 중요하다. 바로 변주의 필요성이다. 반복되는 말들이 모두 같은 높이에 나란히 놓인 인상을 주면, 의미가 지루하게 전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날씨의 반복은 몸의 감각으로 시작하여 노래의 기억으로 옮겨가며, 바카라과 신앙의 문장으로 깊어지고, 타인의 고통을 향한 탄원으로 넓어지고, 마지막에는 숲의 생태와 하산의 철학으로 정착한다. 여기서 반복은 마치 원을 그리는 것처럼 한 주제를 감싸고 맴돌지만, 같은 자리를 환상방황하는 걸음은 아니다. 나선형에 가깝다. 나갔던 출발지로 돌아가지만 조금 더 다른 지점에 자리한다. 결국, 에세이나 철학시에서 변주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에 대한 느낌이 여러 관점의 자리에서 다시 서술되면 그 본연의 의미에 수렴하는 기법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좋은 글은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음계를 따라 움직이면서 주제를 조율할 때 더욱 빛나는 글일 수 있다.
3. 변주의 예-철학시 “오월삼십일일오늘”
돌아보니더디고내다보니빠르다
머문자리에서붉은꽃은지고핀다
바라보니바람같은계절잘살란다
이 시는 올해 5월 31일에 쓴 것이다. 다른 달에도 마지막 날이 있지만, 유독 5월의 끝날은 마음 한편에 아쉬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일으킨다. 이제 여름으로 들어서고, 여름이 가면 가을과 겨울이 훌쩍 갈 것이라는 어떤 경험이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양이다. 그런 아쉬움과 기대감을 다소 장황하게 <시간론>이라는 주제로 쓴 것과 달리, 이 철학시는 그 마지막 날의 의미를 반복과 변주의 기법으로 이어가며 쓴 것이다. 우선 시의 형식부터 언급해 보려 한다.
형식 면에서 철학시는 짧은 단시다. 짧다는 글의 분량을 의미한다.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글자를 엄격히 조율해야 한다. 이 조율에는 띄어쓰기나 문장 기호의 활용, 단어의 줄임과 조어 등이 동원된다. 한국어의 특징상 이런 장치들을 잘 활용하면 의미는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어 사용에서 가장 난해해지는 경우가 바로 띄어쓰기를 없애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자칫 의미가 뒤섞일 수 있고, 와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로표지판이나 현수막, SNS 메시지 전송에서 난감한 상황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오탈자만 아니라 띄어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띄어쓰기를 없애는 것은 의미 전달과 해석에서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1930년대 초현실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이상의 시 중 몇 편은 띄어쓰기를 없애버린 대표적인 시로 남아 있다. 동시에 이런 형식 파괴의 시는 다소 모험적이긴 해도 오히려 다양한 사유를 일깨울 수 있다. 읽는 이에게 해석의 자유를 넘겨주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철학시 <오월삼십일일오늘>라는 제목은 단순한 정보를 제공한다. ‘5월 31일 오늘’이다. 일기처럼 쓰였다. 이 제목에서 시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띄어쓰기 없는 형식뿐이다. 나는 이런 구조를 통해 오늘, 5월 31일이 어떤 분리될 수 없는 의의를 가진 채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수많은 ‘오늘’ 중에서 유난히 ‘5월 31일’이라는 오늘이 나에게 어떤 생각의 파편을 남긴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시의 내용은 그 파편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낸다.
1행 돌아보니더디고내다보니빠르다: 이 시어들은 5월 31일이 나에게 주는 정서를 말들을 이어 붙여 표현한다. 나의 의도는 날들이 ‘빠르다’라는 느낌을 글로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지나 보면 한참 어릴 때는 더디게 지나갔던 날이었는데, 앞으로 올 날들은 무척 빠를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날이 바로 나에게는 5월 31일이다. 이유가 있을까? 없다. 내 몸이 맞닥뜨리는 시간의 흐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시어는 일정한 리듬이 변주된다. 바로 ‘~니’가 같은 위치에서 반복된 것이다. 이 서술형 어미는 ‘동작이 과거 시간에 대한 회상’과 연관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내다보니’에서는 시간의 반복과 축적이 연상된다. 결국, 이 시행에서 나는 시간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나의 반복된 행동을 서로 대구 되는 동작(돌아보고-내다보는)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이런 동작의 결과 나의 정서는 ‘더디고 빠르다’는 감각이다. 또한 이 시행은 같은 태도를 변주한다. 시간을 바라보는 것인데, ‘돌아보고, 내다본다’라는 것은 시간에 대한 나의 관찰을 시점만 달리하여 행동한 것이다.
2행 머문자리에서붉은꽃은지고핀다: 이 행은 모호성과 동시성을 표현했다. 5월 31일이 어떤 날인가 하는 것을 꽃의 생멸을 관찰하는 나의 태도로 서술한 것이다. 띄어쓰기가 없음으로 시 안에서 나의 행동은 빠르게 지나간다. 다만 그 빠르기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다. 바로 반복이며, 변주이다. 우선 모호성은 ‘머문자리’와 ‘붉은꽃’이라는 표현이다. 머문 자리라는 것은 1행의 감각을 일깨운 자리다.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날 ‘머물렀던 자리’가 있으리라는 여백을 남긴 것이다. ‘붉은꽃’ 역시 마찬가지다. 5월 31일 즈음에 붉은 꽃이 하나 둘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자신의 붉은 꽃을 떠올릴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동시성이다. 이 동작은 ‘지고핀다’라는 표현에서 관찰할 수 있다. 주목해 보면, 나는 ‘피고진다’라고 쓰지 않았다. ‘지는 것이 먼저이고 피는 것이 나중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는 붉은 꽃을 모란으로, 피는 붉은 꽃을 작약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꽃은 지고 피는 시간이 계절이라는 큰 범주에는 맞물리겠지만, 날짜 하나에는 일어나기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을 알면서도 나는 이 두 꽃의 지고 피는 일이 5월 31일에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의도는 하나다. 지고피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5월 31일은 적어도 나에게는 계절의 사건이 찰나에 교차하는 날이다. 여기서 이런 나의 감정을 담은 반복적 표현이 ‘~은’이다. ‘붉은꽃은’이다. ‘붉은꽃이’아니라 반복하는 리듬을 변주하기 위해 ‘붉은꽃은’이라고 썼다. 이런 반복은 이 붉은 꽃에 일어난 사건도 다시 주목하게 한다. 주격조사 ‘은’은 주어를 동작의 주체로 표현하지 않고, 동작의 영향을 받는 관계적 주어로 이해하게 한다. 다시 말해, ‘지고피는 붉은 꽃’의 상태를 보여준다. 5월 31일이기 때문이다.
3행 바라보니바람같은계절잘살란다: 이 시어에서도 나의 정서는 빠름에 대한 아쉬움과 기대이다. 특히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이 자칫 나의 의도와 다르게 읽힐 가능성도 있다. 가장 주목할 구절이 바로 ‘계절잘살란다’이다. 본래 의도라면 ‘계절, 잘 살란다’가 되어야 한다. ‘잘 살란다’는 나의 말이기 때문이다. ‘바라보니 바람같은 계절, 잘 살란다’이다. 그런데 띄어쓰기가 없는 탓에 이 말을 ‘꽃’이 하는 말처럼 읽을 수 있다. 특히 ‘바라보니’와 연결되어 ‘내가 보고 있는데 꽃이 나를 보고 비람 같은 계절이니 잘 살라고 했다는 의미도 가능하다. 사실, 이런 해석의 오해조차 나의 철학시에는 가능하다. 반복과 변주의 의도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기법적으로도 이 행에서 반복의 요소는 수사적으로 다음 네 가지다. 첫째, 앞 두 명사에 ’ㅂ’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두었다. 둘째, 뒤의 다섯 글자에는 말이 굴러가도록 ‘ㄹ’ 음을 부각했다. ‘계절잘살란다’ 셋째, 1행과 2행을 견줘보면, ‘~니’와 ‘~은’을 그대로 반복했다. 넷째, 마지막 단어를 ‘~란다’를 가져와 ‘나의 의지’를 도드라지게 반영했다. 이러한 수사적 표현은 글자 자체의 배열에 중점을 둔 것이면서 반복과 변주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결과적으로 셋째 행은 첫째 행과 둘째 행을 이어받아 결론처럼 기능한 구절이다. 내가 붉은 꽃이 지고 피는 것을 바라보았더니 나를 스쳐가는 계절이 바람 같다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문득 그 순간에 아쉬움을 넘어 삶에 대한 의지도 다시 스며든다. ‘잘살란다.’ 이처럼 셋째 행에서도 ‘빠르다’는 나의 정서가 도드라진다. 바람의 계절이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이 셋째 행은 내가 이 빠른 계절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윤리의 문제가 담겨있다. 빠른 계절,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결국, 이 철학시는 세 행이 ‘사건(현상)-전개(확장된 상황)-결말(나의 윤리)’라는 틀을 잘 유지한다. 다른 면에서 이 시는 내가 철학시를 왜 쓰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를 들려주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그 ‘어떻게’는 단순히 시의 기교가 아니라 시의 세계를 관찰하는 태도이며, 그 관찰을 기술하는 방식으로서 곧 세계를 번역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철학시에서 반복과 변주가 갖는 의의와 이 기법을 통해 내가 이 세계의 현상을 어떻게 번역하는지를 정리해 볼 차례다.
4. 반복과 변주의 의의
반복과 변주의 방식은 오늘날 글쓰기 환경과는 다른 결을 지닌 기법이다. 요즘의 글쓰기는 대체로 압축, 속도, 즉각적 명료성, 정보 전달력을 미덕으로 삼는다. 긴 글을 잘 읽지 않으려는 시대이고, 영상이나 그림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확신도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나의 문장은 오히려 역으로 흘러간다. 체류, 되돌아봄, 의미의 누적, 정서의 재방문을 택한다. 그것은 느린 걸음이지만, 나름의 의의가 있다.
첫째, 반복은 글 안에 ‘호흡’을 만든다. 반복은 단순히 같은 말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을 여러 층위로 옮겨놓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피부 겉에 닿는 감각으로 다가오던 것이, 조금 뒤에는 기억으로 번지고, 다시 성찰로 깊어지며, 끝내 타인의 고통과 세계의 불안정성에 대한 윤리로 정착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빠른 결론보다 글 속에 머무는 체류감을 제공한다. 글은 대개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곧장 밝히기를 요구받지만, 나의 글은 이 글 속에서 나의 어떤 마음이 여기까지 걸어왔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읽는 사람은 정보를 얻기보다 한 사람의 내면 리듬 안으로 함께 들어간다. 이런 반복 기법은 산문, 묵상문, 에세이, 독서기, 신앙적 사유문에서는 큰 미덕이 될 수 있다. 이 글들에서 반복은 음악의 후렴처럼 작동한다. 되돌아오는 말들 속에서 읽는 사람은 안정감을 얻고, 조금씩 깊어지는 의미의 음영을 감지한다.
둘째, 반복은 의미를 ‘나선형’으로 쌓아간다. 반복은 하나의 주장을 향해 직선으로만 전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풍경을 여러 번 바라보며 점점 다른 의미를 얻게 한다. 이 방식은 현대의 빠른 독서 습관과 쉽게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끝까지 읽는 이에게는 더 오래 남을 수 있다. 나의 철학시에서 보았듯이, 나는 특정한 하루의 의미를 ‘돌아보고-내다보고-바라보는’ 과정으로 서술했다. 그 동작은 원형처럼 돌고 도는 듯하지만, 같은 자리에 머물지는 않는다. 돌아보는 시선은 과거를 데려오고, 내다보는 시선은 다가올 시간을 부르며, 바라보는 시선은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세운다. 끝내 그 움직임은 ‘잘 살아야겠다’라는 나의 의지에 머문다. 이런 글쓰기는 다시 읽는 즐거움을 보상으로 제공한다. 처음 읽을 때는 그저 풍경처럼 읽히던 문장이, 다시 읽으면 기도처럼 다가오고, 또다시 읽으면 삶의 윤리로 도드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반복은 고유한 문체적 표지를 만든다. 오늘날 글쓰기에서 어려운 것은 “잘 쓰는 것”만이 아니다. “누구의 글인지 알아볼 수 있게 쓰는 것” 또한 중요하다. 매끄럽고 정확한 글은 많지만, 고유한 숨결이 있는 글은 드물다. AI와 다양한 글들이 쏟아지는 SNS, 포털, 블로그의 물결 속에서 나의 글이 어디에 정초 하는지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반복적 변주는 그런 점에서 문체적 자산이다.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들이 서로 하나의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안에서 그 단어들은 단순한 재사용이 아니라, 작은 세계를 만든다. 그것은 곧 글의 시작이 ‘관찰’이고, 글의 끝이 ‘여백’을 남기려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그러나 반복적 변주는 언제나 미덕으로만 남지는 않는다.
넷째, 반복은 사유의 밀도가 아니라 오히려 사유의 지연, 느슨함, 늘어짐으로 읽힐 수 있다. 시대는 점점 빠르게 글을 쏟아내고, 바카라을 출판하며, 독자는 핵심만 빠르게 파악하기를 원한다. 읽어야 할 글이 많고, 오래 읽을 수 없으며,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글의 부족함일 수도 있고, 문해력의 아쉬움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반복은 고상한 “리듬”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늘어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특히 온라인 글쓰기에서는 첫 몇 문단 안에 방향이 선명하지 않으면 독자가 이탈하기 쉽다. 나의 글은 천천히 스며드는 글이다. 그러므로 반복이 충분히 매혹적이지 않으면, 독자는 뒤로 갈수록 집약되고 펼쳐지는 사유의 자리에 함께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반복을 포기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반복의 가치를 잘 드러내는 감각적 선명성은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날씨를 말하더라도 한 번은 빛으로, 한 번은 바람으로, 한 번은 몸의 피로로, 한 번은 창밖의 이팝나무로 다르게 열어주는 식이다. 반복은 유지하되, 입구는 매번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
다섯째, 반복은 비의지적 자기 표절이 될 수도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쓰는 것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 변주가 힘을 가지려면 반복되는 말들이 매번 다른 층위로 이동해야 한다. 앞에 썼던 대로 뒤에 다시 쓰는 것은 심하게 말해 ‘자기 표절’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반복되는 단락마다 다른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 좋다. 감각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성찰로, 성찰에서 윤리로, 윤리에서 생태로 이동하는 것이다. 반복을 자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반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정서, 같은 단어, 같은 문장 구조가 비슷한 거리에서 반복되면 독자는 “이미 들은 말”이라고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반복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변주 폭의 문제이다.
좋은 반복은 의미의 지층을 바꾼다. ‘붉은 꽃’을 바라보는 행위, 5월 31일이라는 하루가 내 안에서 변주하는 형식은 그날의 의미를 새롭게 보도록 돕는다. 반대로 위험한 반복은 같은 감정을 같은 어조로 한 번 더 말할 때 생긴다. 그때 문장은 깊어지기보다 어색한 잔향만 길어진다. 그러므로 반복은 반드시 다른 자리로 옮겨가야 한다. 같은 사물을 다시 부르더라도, 그 사물이 입고 있는 시간과 정서와 윤리의 옷이 달라져야 한다.
여섯째, 추상어의 반복은 늘 유의해야 한다. 추상어가 반복될 때 글의 생기는 약해질 수 있다. 나의 글은 대체로 감각적 이미지가 강하다. ‘붉은 꽃’이나 ‘바람’이 그런 예이다. 다른 철학시나 에세이에서도 이팝나무 꽃, 루이보스차, 빨래, 창문, 고사목, 버섯, 약수터, 산자고 꽃 같은 사물들을 자주 활용한다. 이런 것들은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한다. 반면 “불확정성”, “실천”, “본질”, “성찰”, “회복” 같은 추상어가 자주 반복되면 글의 밀도는 높아지는 듯하지만, 읽는 동안 숨이 찰 수 있다. 반복 변주를 잘 활용하려면 추상어보다 사물을 반복시키는 편이 유익하다. “불확실성”을 반복하기보다, 마른 약수터에 물이 언제 다시 흐를지 모른다는 장면을 보여주는 편이 더 낫다. 사물에 깃든 사유를 드러낼 때 글은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결국 나의 철학시나 에세이에서 반복과 변주는 글쓰기 자체가 ‘느림’을 선택한다는 것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오늘의 글쓰기는 짧은 문장, 강한 메시지, 빠른 결론, 분명한 입장을 요구한다. 그런 기준에서 나의 글쓰기는 우회적이고 느리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느림이 나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유지한다. 단번에 소비되는 ‘좋은 글’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하여 글 속에서 함께 걷는 사건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산바카라은 곧 산. 바카라을 읽고 쓰는 글쓰기’라는 나의 기대도 여기에 있다. 비록 나의 반복적 변주는 현대적 효율성의 문법과는 결을 달리하지만, 빠름으로 인해 피로감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 대해서는 하나의 작은 응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빨리 읽히는 글이 아니라, 천천히 남는 글. 이것이 나의 글쓰기의 자리이다.
요컨대, 반복과 변주의 의의는 줄여야 할 글쓰기 습관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더 정치하게 다듬어야 할 형식이라는 데 있다. 반복은 글에 호흡을 주고, 의미를 나선형으로 쌓으며, 문체적 고유성을 만든다. 사물을 오래 바라보는 힘, 감각에서 윤리로 나아가는 힘, 읽는 이를 빠른 결론이 아니라 깊은 체류로 이끄는 힘이 있다. 동시에 위험한 요소도 배제할 수 없다. 변주의 폭이 좁아지면 늘어짐이 되고, 추상어가 반복되면 관념성이 짙어지며, 현대 독자의 빠른 독서 습관 앞에서는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반복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사유의 층으로 글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되돌아오되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되 그 말이 새로운 사물의 몸을 입고 나타나게 해야 한다. 글쓰기에서 반복은 숲을 걷는 일과 같다.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지만, 매번 다른 빛과 바람과 그림자가 나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5. 나의 철학시 〈오월삼십일일오늘〉에서 반복과 변주가 말하는 삶의 윤리
앞서 본 대로 나의 철학시는 압축된 시어를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긴 사유로 풀어내는 시학이다. 짧은 시어 속에서 궁극적으로 삶의 윤리로 수렴한다. 시 자체는 작고 짧다. 그러나 그 작은 시 안에는 오래 풀어낼 수 있는 생각의 주름이 접혀 있다. 다른 면에서 내게 단시는 하나의 완성된 결론이라기보다, 더 깊은 사유를 불러내는 작은 씨앗에 가깝다. 시는 작게 태어나지만, 해설을 통해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하나의 세계관으로 번져간다.
이 철학시의 윤리는 마지막 단어인 ‘잘살란다’에 있다. 5월 31일은 해마다 돌아오고, 해마다 다른 감정을 남긴다. 비록 같은 날이 반복되지만, 그날이 내 안에 남기는 감정은 매번 조금씩 다르다. 나는 그 반복 속에서 하나의 고유한 윤리를 강화한다. 바로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다. 나는 이 말을 바람에게서 듣는다. 바람이 나를 휘감고 지나가는 동안, 나는 나의 의지를 바람에게 전한다. 다음 해, 다시 그 바람이 나에게 돌아오는 날, 바람은 나의 이 말을 그대로 가지고 올 것이다. “잘 살았는가?” 하고 묻듯이 말이다.
다른 면에서 내가 이 특정한 날을 염두에 두는 것은 이 즈음이 교회력에서 ‘거룩한 바람의 절기’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다. 바람을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바람이 건네는 말을 들으며, 바람에 휘감겨 자기 삶을 전적으로 전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즈음의 바람은 자기 안으로 굽어진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슬롯성과 관계성, 더불어 살아가는 타자성을 일깨운다. 그것은 ‘바람의 슬롯관계성’, 곧 코이노니아의 바람이다.
그런 점에서 ‘잘살란다’라는 말은 나의 이익을 위한 분투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나와 관계된 것들의 자리를 지키며,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나의 의지를 반영한 말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성의 다짐이다. 나는 그 다짐을 반복하고 변주한다. 해마다 같은 날을 맞이하지만, 그날의 바람은 매번 다르게 불고, 그 바람 앞에서 나의 다짐도 매번 새롭게 조율된다.
나의 철학시는 일상적 감각에서 철학적 명명을 끌어내려한다. 이 점에서 나는 이 철학시의 마지막 시어인 ‘잘살란다’를 ‘지연과 여백의 안식으로 구현하는 공동체성’이라 이름 붙인다. 철학시에서 개념은 사물을 오래 바라보다가 그 안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사유의 덩어리다. 이것은 나의 시에서 중요한 태도다. 철학적 시는 자칫 관념의 언어가 되기 쉽다. “존재”, “시간”, “소멸”, “기억”, “윤리” 같은 말이 너무 앞서 나오면, 시는 금세 무거워진다. 이 말들은 장면을 보기 전에 개념의 무게를 먼저 느끼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날의 달력을 보고, 세월을 떠올리며, 길을 걷고, 바람을 맞은 뒤에야 사유의 개념으로 들어선다.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거대한 사유의 꼬리를 붙잡는 것이다. 떨어지는 꽃잎에는 시간이 있고, 부모의 잔소리에는 세대의 윤리가 있으며, 앨범 위의 먼지에는 상실과 보존의 감각이 있다. 내가 일상을 바라보는 이유는 일상 너머로 빠르게 넘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깊은 질서를 보기 위해서다.
물론 이런 나의 태도에도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일상의 감각에서 철학적 명명으로 너무 빨리 올라가는 일이다. 이 경우 일상의 감각은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구성한 예시가 되어버릴 수 있다. 꽃잎이 충분히 꽃잎으로 머물기도 전에 “이행”이나 “인계”라는 개념으로 흡수될 위험이 있다. 철학적 이름이 빛나기 위해서는 그 이름이 붙기 전의 감각이 충분히 살아 있어야 한다.
나의 철학시에서 윤리가 도출되기 위해서는 초기 감각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날짜, 바람, 꽃잎이 개념이 되기 전에, 먼저 날의 의미, 바람의 촉감, 꽃잎의 빛과 가벼움, 떨어지는 속도와 흔들림이 오랫동안 내 몸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바람이 철학이 되기 전에, 먼저 바람의 느림과 서늘함, 피부에 닿는 희미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철학은 감각을 넘어설 때보다, 감각의 내부에서 서서히 배어 나올 때 더 깊고 아름답다.
이렇게 형성된 윤리는 생각의 단계에만 머물 수 없다. 철학시를 통해 구축한 나의 윤리는 생각의 단계에서 행동의 단계로 이행되어야 한다. 단절 없이 이행되어야 하고, 중간에 소멸되지 않도록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실현하는 방식이 곧 글쓰기다. 개방된 글쓰기다. 글쓰기는 감각을 사유로 옮기고, 사유를 다시 삶의 태도로 돌려보내는 통로다.
이처럼 나의 철학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윤리는 프락시스다. 나는 세계가 단순히 사유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날짜, 계절, 사물, 사건은 서로 이 세계를 구축하는 요소들이다. 나는 어느 것도 가볍게 밀어내지 않는다. 심지어 어느 것도 가볍게 보지 않으려 한다. 가을을 좋아한다고 해서 봄과 여름과 겨울을 가볍게 다루지 않으려 한다. 어느 한 계절이 다른 계절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자리를 넘겨주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세심하게 관찰하려 한다.
특히 계절의 변화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계절을 이어가게 만드는 공동체성에 기반한 넘겨줌이다.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하나가 승리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다. 하나가 조용히 물러나고, 다른 하나가 조심스럽게 건너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의 끝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계절은 순환하기에 새로운 시작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나지 않는다. 이번의 끝은 곧 다음의 시작일 것이고, 다음의 시작은 다가오는 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반복과 변주의 정서는 계절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는 이 구조를 인간의 삶으로 가져온다. 코헬렛이라는 지혜자는 이 점을 제대로 관찰하여 자기 글에 시의 형태로 남겼다.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오지만,
땅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지요.
해가 떴다가 해가 지지요.
동트는 곳으로 숨 가쁘게 움직이고요.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되돌아 북쪽으로 불지요.
돌고 돌며 불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고요.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는 채워지지 않지요.
강은 흘렀던 곳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흐르고요.
모든 것이 지쳐 있어요.
누구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보아도 눈에 차지 않고, 들어도 귀에 채울 수 없고요.
일어났던 일이 일어날 것이고, 사람들은 하던 일을 하겠지요.
해 아래 새것은 하나도 없어요.
(전도서 1:4-9)
이 인용은 반복이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세계를 지속시키는 질서임을 보여준다. 해와 바람과 강물은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듯하지만, 바로 그 되돌아옴 속에서 세계는 다시 움직이고, 다시 이어지고,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코헬렛은 세계의 변화를 반복, 회귀, 불만족성 등의 질서로 파악했다. 이처럼 세계의 요소들은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나의 철학시에서 다뤘던 것처럼 부모의 잔소리는 사라진 소리가 아니라, 자식의 내면에서 다시 걸어오는 기억의 발소리가 된다. 지나간 사랑은 단순히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마음의 깊이를 만든다. 실패는 폐기되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지혜의 밑자리가 된다. 떠난 것은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고, 남은 것은 온전히 혼자 남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복과 변주를 주목하는 사유는 속도와 폐기를 강조하는 시대에 대한 조용한 반론이 될 수 있다. 오늘의 세계는 새것을 빠르게 요구하고, 낡은 것을 쉽게 밀어낸다. 그러나 나의 시는 새것이 옛것의 잔광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작은 이전 시간을 지우며 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 시간이 남긴 빛과 흔적과 상처 위에서 조심스럽게 열린다. 이때 반복은 낡은 것을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라, 사라진 것 안에 남아 있는 빛을 다시 읽어내는 일이다.
이 세계관은 어떤 경우에도 따뜻함과 상대를 받아들이는 품격에 기반한다. 나는 변화 속에서도 예의를 보고, 상실 속에서도 회복의 기미를 보려 한다. 계절의 변화, 나이 듦, 부모의 부재, 계절의 사라짐, 관계의 끝 같은 주제를 다룰 때에도 절망은 희망과 완전히 분리된 언어가 아니다. 절망이 없다면 희망이라는 말 자체도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안에서 다음 존재에게 건네지는 조용한 빛을 찾으려 한다.
이것은 언필칭 ‘무가치함’이기도 하다. 나의 철학시의 반복과 그 변주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시대에 부응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비평하지 않는다. 다만 그 무가치함을 끝내 버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나의 글쓰기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무가치함에 대한 땀 흘리는 수고는 결국 이 세계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작은 사례가 된다.
나의 철학시를 비롯한 모든 글쓰기는 ‘검은 안식의 철학’에 기반한다. 삶의 어둠이 곧 밝음의 조건이 된다. 의미 있는 일에만 종사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도 전력투구하는 것이 나의 시가 말하는 안식이다. 그 어둠에서 안식은 더 깊고 단단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반복하고 변주하는 것은 단순한 문체적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려는 태도이며, 쉽게 사라지는 것의 자리를 오래 바라보려는 실천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철학시는 작은 것의 존재론을 향한 공동체성의 윤리를 지향한다. 거대한 사상으로 작은 사물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물 안에서 거대한 사상의 기미를 발견하려 한다. 날짜 하나, 꽃잎 하나가 계절의 윤리를 품고, 먼지를 털어내는 손길이 기억의 문제를 열어준다. 나는 그것에서 나의 삶의 방향을 다시 조정한다.
그 중심에 나의 글쓰기가 있다. 나의 글쓰기는 이른바 문전(紋電)이다. 여기서 ‘문(紋)’은 삶의 결이고, ‘전(電)’은 그 결을 따라 흐르는 미세한 떨림이다. 그러므로 문전은 단순히 문장을 쓰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남은 감각과 기억과 상처의 무늬가 언어를 통해 다른 자리로 건너가는 일이다. 글이 문장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의미다. 이 문전은 나의 시학을 설명하는 중요한 은유다. 문전은 아직 떠나지 않은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이 함께 서 있는 자리다.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닌 자리다. 상실과 생성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는 자리다. 나는 그 문턱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다.
나의 철학시의 윤리는 사소한 감각을 존엄하게 만드는 데 있다. 나는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만 두지 않는다. 상실을 단순한 결핍으로만 보지 않고, 다음 존재를 깨우는 잔광으로 읽으려 한다. 언어를 새로 짓고 겹쳐 부르며, 익숙한 세계를 조금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짧은 시어 속에 긴 사유를 접어 넣고, 그 사유를 해설로 천천히 펼쳐낸다.
다시 나의 철학시는 5월 31일을 지나 6월로 들어섰다. 내가 가장 잘 버텨내야 하는 여름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이 문은 나름 좁은 문이다. 들어서면 큰길이 아니라 오솔길이 있다. 그 오솔길은 좁고 험하지만, 나를 지탱하는 은총의 길이다. 발밑의 꽃잎을 더 잘 볼 수 있고, 나무와 풀과 새의 기척을 세심하게 들을 수 있다. 이 문턱을 넘어 끝까지 가면 가을이 있고, 그 계절에 나의 기억의 우편함을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철학시에서 반복과 변주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작은 것은 작지 않다.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사라지지 않는다.
끝은 닫힌 벽이 아니라, 누군가 조용히 두드리고 지나간 문전이다.
6. 세계의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힘으로서 사소한 자기 투쟁, 글쓰기
결론적으로 나의 철학시에서 반복과 변주는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세계를 오래 바라보는 글쓰기의 태도이자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음악의 한 선율처럼 시작된 반복이 날씨와 사물과 상상과 정서를 지나며 조금씩 다른 음색을 얻고, 마침내 한 사람의 윤리로 수렴한다. 나는 같은 말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물을 다른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려 한다. 날씨는 몸의 감각이 되고, 꽃은 시간의 표지가 되며, 바람은 공동체성의 부름이 되고, 하루의 끝은 다음 삶을 향한 문전이 된다. 이런 점에서 나의 글쓰기는 직선으로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글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되돌아오며 깊어지는 글이다. 되돌아오되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반복하되 같은 의미에 머물지 않으며, 변주하되 처음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글이다.
물론 이 방식은 오늘날의 빠른 글쓰기 환경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압축, 속도, 명료성, 정보 전달력을 중시하는 시대에 반복은 자칫 늘어짐으로 읽힐 수 있고, 변주의 폭이 좁아지면 자기 표절처럼 보일 수도 있다. 추상어가 앞서면 사물의 생기가 약해지고, 철학적 명명이 너무 빨리 도착하면 꽃잎은 꽃잎으로 머물기도 전에 개념으로 흡수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나의 글쓰기에서 반복은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형식이다. 같은 정서를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라, 감각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성찰로, 성찰에서 윤리로, 윤리에서 공동체성으로 옮겨가는 일이어야 한다. 반복은 유지하되, 그 반복이 매번 새로운 사물의 몸을 입고 나타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철학시는 작은 것의 존재론을 향한 글쓰기다. 작은 것은 작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사라지지 않으며, 끝은 닫힌 벽이 아니라 누군가 조용히 두드리고 지나간 문전이다. 내가 반복과 변주를 통해 붙잡으려는 것은 바로 이 문전의 감각이다. 아직 떠나지 않은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이 함께 서 있는 자리, 상실과 생성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는 자리, 한 계절이 물러나며 다른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자리 말이다.
나의 철학시는 세계의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힘으로서 사소한 자기 투쟁으로서 글쓰기다. 이 일은 단숨에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지만, 세계의 숨결을 고르게 하기 위한 지속적인 작업으로서는 충분하다. 세계의 덜컹거리는 문턱을 오래 바라보며, 사소한 감각을 존엄하게 만들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 안에서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므로 반복과 변주는 나의 글쓰기에서 줄여야 할 습관이 아니라, 더 깊이 의식하고 더 섬세하게 벼려야 할 시학이다. 빨리 읽히는 글이 아니라 천천히 남는 글, 단번에 소비되는 문장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 묻는 문장, 이것이 나의 철학시가 반복과 변주를 통해 도달하려는 글쓰기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