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활용, 접속어의 대체, 문장의 재배열
1. 들어가는 글
접속사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세워지는 작은 표지판이다. ‘그러나’, ‘그런데’, ‘그래서’, ‘그리고’ 같은 말들은 앞 문장의 의미를 뒤 문장으로 건네며 독자가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돕는다. 문장이 어디에서 이어지고, 어디에서 방향을 틀며, 어떤 의미 관계 속에서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는지를 밝혀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접속사는 글쓰기의 친절한 안내자라 할 수 있다.
모든 길목에 표지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길을 잃지 않게 하려는 표지판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정작 길 자체의 결이나 길가의 풍경은 가려질 수 있다. 접속사도 마찬가지다. 접속사가 문장마다 앞서 나서면 글은 얼핏 논리적이고 친절해 보이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미세한 긴장, 의미의 여백, 독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할 사유의 간격은 점차 사라진다. 접속사가 의미를 이어주는 대신, 의미가 스스로 이어질 가능성을 미리 닫아버리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접속사를 자주 사용하게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접속사가 없으면 문장이 끊어진 것 같고, 논리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그래서’, ‘그리고’를 덧붙인다. 문장은 당장 매끄러워 보이지만 글 전체를 다시 읽어보면 오히려 산만하고 무거운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 접속사가 글의 방향을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앞에 나서서 글의 호흡을 끊고 시선을 가리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접속사의 폐기가 아니다. 접속사는 필요하다. 다만 접속사는 습관적으로 놓일 말이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서만 조심스럽게 세워져야 할 말이다. 좋은 글은 접속사를 많이 사용해서 논리적으로 보이는 글이 아니라, 접속사가 없어도 문장과 문장이 서로를 부르고 밀어주는 글이다. 접속사의 소극적 활용은 문장을 빈약하게 만드는 부족한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스스로 생겨나는 의미의 관계를 더 깊이 믿는 태도다.
특히 단시 또는 철학시를 쓸 때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진다. 짧은 시 안에서 과잉된 접속사는 언어 사이의 호흡을 무겁게 만들고, 시어 사이의 여백을 지운다. 세 행, 40여 글자 안에 사유를 집약해야 하는 단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접속사가 앞장서서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시어가 스스로 빛날 자리는 줄어든다. 시가 제 몸으로 걸어가야 할 자리에 접속사가 대신 길을 안내하면, 의미는 선명해질 수는 있어도 깊어지기는 어렵다.
나의 경우, 접속사의 소극적 활용은 단순한 문장 기술이 아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설명으로 메우지 않고, 의미가 스스로 건너가도록 남겨두는 글쓰기의 태도다. 때로 좋은 글은 더 많이 잇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잇지 않고도 이어지게 하는 데서 온다.
2. 접속사의 의의
접속사는 앞 문장과 뒤 문장의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리고’는 의미를 나란히 이어주고, ‘그러나’는 앞선 흐름을 뒤집거나 긴장을 만든다. ‘그래서’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고, ‘그런데’는 새로운 국면으로 글의 방향을 조금 틀어준다. 우리 문법에서 이러한 말은 주로 접속부사로 이해할 수 있다. 접속부사는 단순히 문장과 문장을 이어 붙이는 말이 아니라, 문장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드러내는 장치다.
접속부사의 기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병렬의 기능이다. ‘그리고’는 앞 문장과 뒤 문장을 나란히 놓아 의미를 확장한다. 둘째, 역접의 기능이다. ‘그러나’는 앞선 내용과 다른 방향의 내용을 불러오며 문장 사이에 긴장을 만든다. 셋째, 인과의 기능이다. ‘그래서’는 앞 문장을 원인으로, 뒤 문장을 결과로 읽게 한다. 넷째, 전환의 기능이다. ‘그런데’는 논의의 방향을 살짝 틀거나 새로운 국면을 열어준다. 이처럼 접속어는 문장 사이의 관계를 독자에게 미리 알려주는 신호로 작용한다.
이러한 접속부사의 기능은 논리적 글쓰기에서 특히 중요하다. 논증문이나 설명문처럼 생각의 흐름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하는 글에서는 문장 사이의 관계가 흐릿해질 때 독자가 논지를 따라가기 어렵다. 앞 문장과 뒤 문장이 병렬 관계인지, 대립 관계인지, 인과 관계인지, 전환 관계인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글은 쉽게 느슨해진다. 이때 적절한 접속사는 글에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사유의 질서를 세운다. 접속사는 독자에게 “이제 앞의 말과 반대되는 내용을 말하겠다”, “이제 그 결과를 말하겠다”,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논의를 옮기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요컨대, 접속부사는 글쓰기에서 불필요한 장식이 아니다. 잘 쓰인 접속사는 글의 논리와 리듬을 정돈한다. 독자가 글쓴이의 사유를 따라갈 수 있도록 문장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고, 복잡한 논의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돕는다. 특히 긴 문단이나 추상적인 논의에서는 접속사가 독자에게 숨을 고를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준다. 접속사는 문장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작은 장치이지만, 글 전체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제는 접속사의 존재가 아니라 사용의 정도와 자리다. 접속사의 가치는 많이 쓰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필요한 자리에 정확히 놓일 때 비로소 살아난다. 접속사가 과도하게 쓰이면 글은 친절해지는 대신 무거워진다. 독자가 문장 사이의 관계를 느끼기도 전에 접속사가 먼저 그 관계를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접속사는 안내자가 아니라 간섭자가 된다.
접속사를 잘 쓴다는 것은 접속사를 능숙하게 많이 배치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접속사가 필요한 자리와 필요하지 않은 자리를 구별하는 감각에 가깝다. ‘그러나’가 없어도 대비가 충분히 느껴지는 자리, ‘그래서’가 없어도 인과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리, ‘그리고’가 없어도 이미지와 이미지가 나란히 놓이는 자리에서는 접속사가 오히려 글의 밀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문장 사이의 빈 곳은 반드시 메워야 할 결핍이 아니다. 때로 그 빈 곳은 사유가 머무는 자리이며, 글의 깊이가 발생하는 자리다.
정리하면, 접속사의 의의는 역설적으로 그 절제 안에서 완성된다. 접속사는 글의 필수 장치이되, 언제나 선명하게 앞에 나서서 자기를 드러내야 할 장치는 아니다. 어떤 연결은 접속사에서 생기지만, 어떤 연결은 문장의 배치에서 생기고, 어떤 연결은 단어의 반복과 호응에서 생기며, 또 어떤 연결은 독자의 사유 속에서 완성된다. 좋은 글은 이 여러 연결의 방식을 함께 다룰 줄 아는 글이다. 때로 접속사가 물러난 자리에서 문장은 더 조용히, 더 깊게 서로에게 닿는다.
3. 「만춘입하」를 통한 예시
내가 단시를 쓰며 지속해서 연습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단시에서 한 글자, 한 단어는 단순한 의미 단위가 아니다. 그것은 시의 호흡이고, 이미지의 방향이며, 사유가 머무는 자리다. 그런데 접속사가 지나치게 드러나면 시어와 시어 사이의 긴장이 느슨해진다. 독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할 이미지의 간격을 접속사가 미리 설명해버리기 때문이다. 시는 설명이 아니라 응축을 통해 깊어진다. 특히 단시는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 이어진 것보다 비워진 것 속에서 의미를 만든다. 예를 들어 나의 단시 「만춘입하(晩春立夏)」는 다음과 같다.
이팝나무 꽃잎꽃잎 하롱하롱
느린 봄바람 마지못해, 똑똑똑
여름 깨우는 봄 햇살, 만춘 입하
— 단시, 「만춘입하(晩春立夏)」
이 시에는 접속사가 없다. 1행의 “이팝나무 꽃잎꽃잎 하롱하롱”은 늦봄의 풍경을 가볍고 느리게 펼쳐놓는다. ‘꽃잎꽃잎’이라는 반복은 꽃잎이 하나의 덩어리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낱낱이 흩어지며 내려앉는 감각을 만든다. ‘하롱하롱’은 그 낙하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늦춘다. 여기서 봄은 아직 머물러 있고, 세계는 급히 다음 계절로 넘어가지 않는다.
2행의 “느린 봄바람 마지못해, 똑똑똑”은 이 정지된 듯한 풍경에 미세한 움직임을 더한다. 봄바람은 빠르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느린’ 바람이며, ‘마지못해’ 움직이는 바람이다. 그 느린 바람의 끝에서 ‘똑똑똑’이라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봄이 물러나고 여름이 다가오는 순간이 소리로 감각화되는 것이다.
3행의 “여름 깨우는 봄 햇살, 만춘 입하”에서는 계절의 전환이 완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름을 깨우는 주체가 여름이 아니라 ‘봄 햇살’이라는 점이다. 봄은 사라지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여름을 불러내는 계절이다. 늦봄과 초여름은 단절되지 않는다. 봄의 끝은 여름의 시작을 품고 있고, 여름의 도래는 봄의 마지막 빛 속에서 열린다. 제목인 “만춘입하”는 바로 이 경계의 감각을 응축한다.
이 시는 1행, 2행, 3행 사이의 사유의 흐름이 접속사 없이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꽃잎의 낙하, 봄바람의 느린 움직임, 봄 햇살이 여름을 깨우는 장면은 각각 독립된 이미지처럼 놓여있지만 이 이미지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꽃잎은 봄의 끝을 보여주고, 바람은 그 끝을 움직이게 하며, 햇살은 다음 계절을 깨운다. 접속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는 세 이미지 사이를 직접 건너가게 된다. 그 건너감 속에서 시의 여백이 생긴다.
만약 이 시에 접속사를 넣는다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될 수 있다.
이팝나무 꽃잎꽃잎 하롱하롱
그러나 느린 봄바람 마지못해, 똑똑똑
그리하여 여름 깨우는 봄 햇살, 그래서 만춘 입하
— 접속사를 사용한 단시, 「만춘입하(晩春立夏)」
이렇게 바꾸면 의미 관계는 더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는 1행과 2행 사이에 어떤 전환이나 대립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와 ‘그래서’는 2행과 3행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 있음을 설명한다. 이 경우는 이 단시가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바로 그 선명함 때문에 시의 호흡은 무거워진다. 꽃잎과 바람과 햇살 사이에 놓여 있던 희미한 간격이 접속사에 의해 명쾌한 설명으로 메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설명이 때로 의미를 과도하게 확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접속사들을 넣어서 읽으면 특히 “그러나”는 시의 이미지를 필요 이상으로 역접의 관계로 논리화한다. 1행의 꽃잎과 2행의 봄바람 사이에는 분명 변화가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뒤엎어진 관계는 아닌 것 같다. 꽃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느리게 움직이는 장면은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계절의 끝을 다른 감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를 넣는 순간 독자는 두 행을 대립 관계로 규정하여 읽을 수 있다. 접속사 하나가 시 전체의 이미지를 박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나의 논리 관계로만 시어를 좁혀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와 “그래서”도 마찬가지다. 여름이 깨어나는 장면은 앞선 꽃잎과 바람의 결과로 읽힐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단순한 인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늦봄의 꽃잎, 느린 바람, 봄 햇살은 함께 계절의 문턱을 만든다. 이 관계는 원인과 결과라기보다 수렴과 응축에 가깝다. “그래서”를 넣는 순간 시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산문적 문장이 된다. 여백은 줄어들고, 시적 긴장은 약해진다.
이 차이는 접속사의 문제가 단순히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접속사는 의미를 연결하지만, 동시에 의미를 제한할 수도 있다. 어떤 접속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문장 사이의 관계는 병렬이 되기도 하고, 역접이 되기도 하며, 인과가 되기도 한다. 산문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시에서는 그 규정이 오히려 이미지의 다층성을 줄일 수 있다. 시어와 시어 사이의 관계는 때로 명확히 설명될 때보다, 살짝 비워져 있을 때 더 깊어진다.
내가 「만춘입하」에서 접속사를 아예 덜어낸 것은 단순한 생략이 아니다. 꽃잎과 바람과 햇살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비추도록 남겨두기 위한 선택이었다. 접속사가 없기 때문에 시는 더 많은 감각의 통로를 열어 주는 것 같다. 꽃잎의 낙하에서 봄의 끝을 보고, 바람의 느림에서 계절의 머뭇거림을 느끼며, 햇살의 깨움에서 여름의 도래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사유의 연결 고리는 접속사가 없어도 시 안에서 또 그것을 읽는 사람 안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결국 단시에서 접속사의 소극적 활용은 시적 응축을 위한 필요한 방법이다. 접속사를 줄인다는 것은 의미를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스스로 이어질 수 있는 공간을 더 넓게 열어주는 일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 시어와 시어 사이를 모두 말로 메우지 않을 때, 시어 사이에서 넓게 일어난 사유가 그 빈자리로 채워진다. 여기서 시는 설명을 넘어 감각이 되고, 감각을 넘어 사유를 찌르는 자극이 될 수 있다.
「만춘입하」는 바로 그 접속부사의 절제가 사유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보여준다. 늦봄의 꽃잎은 떨어지고, 봄바람은 마지못해 움직이며, 봄 햇살은 여름을 깨운다. 그 사이에 ‘그러나’도, ‘그래서’도, ‘그리고’도 필요하지 않다. 계절은 접속사 없이도 넘어가고, 시는 설명 없이도 이어진다. 좋은 문장 역시 그러하다. 모든 관계를 말로 잇지 않아도, 때로 문장들은 서로를 향해 이미 걸어가고 있다.
4. 「희망의 합주」에서 접속 부사의 절제-세계의 틈을 열어주는 한 방식
접속어의 절제는 단시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단시는 언어의 응축과 문장의 배열을 통해 사유를 톺아내려는 철학시다. 짧은 형식 안에 감각과 사유를 함께 담아야 하기에, 단시에서 한 단어는 쉽게 지나가는 말이 아니다. 한 단어가 시의 호흡을 바꾸고, 한 문장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므로 접속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도 단순한 문장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시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열어 보일 것인가의 문제와 닿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접속어는 넓은 의미에서 문장과 문장, 시어와 시어, 이미지와 이미지를 이어주는 말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그런데’, ‘그럼에도’처럼 문장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은 문법적으로 접속부사에 가깝다. 접속부사는 문장 사이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대립하는지, 나란히 놓이는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지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접속부사는 문장 밖에 놓인 작은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를 강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접속부사를 소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접속부사를 무조건 배제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접속부사가 시의 논리를 먼저 드러내며 문장을 선도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말이다. 접속부사는 필요할 때 문장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시어와 시어 사이에 이미 흐름이 생기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이미 은밀한 호응이 생긴 자리에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쓰지 않음은 단순한 생략이 아니다. 때로 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접속의 가능성이 더 깊어진다. 접속부사가 앞에서 문장을 끌고 가는 대신, 뒤에서 문장들이 서로 닿도록 후견하는 것이다.
나의 단시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숨결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 숨결은 접속어 없이도 움직일 수 있고, 때로 접속어가 없을 때 더 길고 깊게 호흡한다. 단시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관계를 말로 밝혀두는 일이 아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남겨진 빈자리에서 독자의 사유가 움직이도록 하는 일이다. 접속어가 물러난 자리는 끊어진 자리가 아니라, 의미가 스스로 건너가는 자리다. 그곳에서 시는 설명을 줄이고, 감각과 사유를 동시에 열어놓는다. 예를 들어 다음 두 문장을 보자.
봄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여름은 문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접속부사가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문장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첫 문장의 ‘아직’은 봄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다. 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머뭇거리고 있다. 두 번째 문장의 여름은 이미 문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다. 아직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곧 자기 차례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이때 봄과 여름은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턱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이어져 있다.
여기에 굳이 ‘한편’, ‘그러나’, ‘그런데’를 넣지 않아도 문장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접속부사가 없기 때문에 두 계절은 더 가까이 맞닿는다. 봄의 머뭇거림과 여름의 움직임 사이에는 명확한 논리보다 미세한 정서가 먼저 흐른다. 봄은 떠나지 못하고, 여름은 서둘러 밀고 들어오지 않는다. 두 계절은 문턱에서 서로의 기척을 듣는다. 이 은밀한 관계는 접속부사가 빠져 있을 때 더 섬세하게 감지된다.
만약 이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이어 쓴다면 어떨까.
봄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은 문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가 들어가는 순간 두 문장 사이의 뜻은 선명해진다. 그 선명한 의미는 대립이다. 봄이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그와 반대로 여름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식으로 읽힌다. 독자는 두 계절을 서로 맞서는 관계로 받아들이기 쉽다. 물론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는 어느 정도 긴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단시에서 붙잡고 싶은 세계는 단순한 대립보다 더 섬세한 이어짐에 가깝다.
봄과 여름은 서로를 무작정 밀어내지 않는다. 봄은 여름을 배척하지 않고, 여름은 봄을 거칠게 몰아내지 않는다. 봄은 조금 더 머물고 싶어 하고, 여름은 아직 문 안쪽에서 몸을 일으킬 뿐이다. 두 계절은 나가고 들어오는 문턱에서 서로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인다. 이 장면에는 계절의 윤리가 있다. 먼저 온 것은 물러날 줄 알고, 뒤에 오는 것은 기다릴 줄 안다. 세계는 그렇게 단번에 교체되지 않고, 서로의 잔향을 받아들이며 천천히 넘어간다.
이런 정서적 상황에서 ‘그러나’는 의미의 결을 다소 거칠게 만든다. 접속부사가 끼어드는 순간, 두 문장은 대립 외의 다른 관계를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봄과 여름 사이에 흐르던 머뭇거림, 배려, 수용, 기다림의 감각이 ‘그러나’라는 말 아래에서 역접의 구조로 좁아진다.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정서, 곧 계절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는 윤리의 길을 접속부사가 가로막는 셈이다.
이처럼 나의 단시에서 접속부사는 단순한 문법 장치가 아니다. 접속부사를 선택한다는 것은 세계의 속과 그 정서를 어떻게 공감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어떤 접속어를 놓느냐에 따라 세계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같은 장면이라도 ‘그러나’를 놓으면 대립의 세계가 되고, ‘그리고’를 놓으면 병렬의 세계가 되며, ‘그러므로’를 놓으면 결론을 향해 좁아지는 세계가 된다. 접속어 하나가 세계를 읽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를 쓰면 세계는 대립한다.
“그리고”를 쓰면 세계는 나란히 선다.
“그러므로”를 쓰면 세계는 결론을 향해 좁아진다.
“그럼에도”를 쓰면 세계는 상처를 지나 버틴다.
이 네 문장은 접속부사가 단지 문장 사이의 논리 관계만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접속부사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품고 있다. ‘그러나’는 앞의 세계와 뒤의 세계를 맞세우고, ‘그리고’는 둘을 나란히 놓아 함께 보게 한다. ‘그러므로’는 앞선 사건을 뒤의 결론으로 밀어가고, ‘그럼에도’는 부정적 조건을 지나 남아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게 한다. 접속부사는 작지만 강하다. 그것은 문장의 방향을 정하고, 독자의 해석이 걸어갈 길을 미리 놓는다.
접속어를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세계를 대하는 자세를 조율하는 일이다. 문장이 대응하고, 조화하며, 멈추고, 전진하고, 오르고, 내려가는 방식을 정하는 일이다. 접속부사가 들어가면 세계는 더 분명해질 수 있다. 그러나 때로 그 분명함은 세계의 틈을 닫는다. 반대로 접속부사가 물러나면 문장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생긴다. 그 침묵 속에서 독자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스스로 건너간다. 그 건너감이 곧 사유의 시작이다.
단시에서 접속부사의 절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시는 짧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아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단시가 된다. 시어와 시어 사이에 남은 틈,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놓인 간격,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의 긴장이 단시의 깊이를 만든다. 접속부사를 줄인다는 것은 그 틈을 방치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틈이 스스로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다. 이제 이 문제를 나의 단시 「희망의 합주」를 통해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우중 우여곡절, 공 움직이기 전 모든 부동
원형극장 팡파레, 제일구 비껴난 볼
5. 단어의 재배열 — 접속사 없이 문장을 단단하게 잇는 방법
접속부사를 절제하는 것은 단순히 접속부사를 빼는 일이 아니다. 접속부사를 쓰지 않는 대신, 문장 안팎의 다른 요소들을 더 정교하게 배열해야 한다. 접속부사가 사라진 자리가 그대로 비어 있으면 문장은 끊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미지의 순서, 사건의 흐름, 조사와 연결어미의 조율, 단어의 반복과 대조, 소리와 쉼표의 호흡이 들어오면 문장은 오히려 더 단단해질 수 있다. 접속부사를 절제한다는 것은 결국 문장의 연결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다시 말해 실제 문장 안에서 시어의 배열로 구현된다.
접속부사 없이 문장을 단단하게 잇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이미지와 사건의 논리적 배치다. 둘째는 조사와 연결어미의 조화로운 활용 또는 의도적 생략이다. 셋째는 단어의 대조와 반복, 그리고 소리와 문장부호를 통한 리듬의 조직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된 기법이면서도 실제 시 안에서는 함께 작동한다. 단시는 짧은 형식이므로 하나의 기법만으로 의미를 충분히 밀고 가기 어렵다. 여러 요소가 동시에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
첫째, 이미지와 사건의 논리적 배치가 중요하다. 원인이 되는 장면을 앞에 두고, 그 결과나 반응에 해당하는 장면을 뒤에 놓으면, 굳이 ‘그래서’라는 접속부사를 쓰지 않아도 시간과 사건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때 글쓴이는 이미지의 순서를 믿어야 한다. 모든 관계를 접속부사로 설명하려 하지 말고, 이미지가 놓인 순서 자체가 독자에게 의미를 말하도록 해야 한다.
「희망의 합주」의 1행을 보자. “우중 우여곡절, 공 움직이기 전 모든 부동”이라는 표현에서 먼저 제시되는 것은 비 오는 상황과 우여곡절이다. 이어서 공이 움직이기 전의 부동이 놓인다. 이 두 이미지는 서로 다른 상황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긴장된 장면을 이룬다. 비가 오고, 경기는 지연되었고, 사람들은 기다렸으며, 마침내 첫 공이 던져지기 직전의 순간에 도달한다. 이 일련의 흐름은 ‘그래서’나 ‘그리하여’ 없이도 읽힌다. 이미지의 배열 자체가 사건의 흐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중’과 ‘부동’의 관계다. ‘우중’은 바깥의 상황을 말한다. 비가 오는 세계다. ‘부동’은 그 세계 안에서 잠시 멈춘 모든 시선과 몸의 상태를 말한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지만, 경기의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멈추어 있다. 바깥의 움직임과 안쪽의 정지가 한 행 안에 함께 놓인다. 이 대조만으로도 시적 긴장이 생긴다. 접속부사가 없어도 독자는 그 사이의 관계를 감지한다.
둘째, 조사와 연결어미의 조화로운 활용 또는 의도적 생략이 있다. 단시에서 조사는 자주 생략된다. 이는 단순히 글자 수를 줄이기 위한 선택만은 아니다. 명사와 명사를 그대로 맞붙이면, 설명적 관계가 줄어드는 대신 이미지의 밀도가 높아진다. 예를 들어 ‘원형극장 팡파레’라는 표현에는 ‘원형극장의 팡파레’라는 말이 숨어 있다. 여기서 ‘의’를 넣으면 의미 관계는 더 분명해진다. ‘의’를 생략하면 두 단어는 더 가까이 맞붙는다. 원형극장과 팡파레는 소유나 소속의 관계를 넘어 하나의 울림으로 결합한다.
‘모든 부동’도 마찬가지다. 이 표현은 “모든 것이 부동이다”가 줄어든 말이다. 문법적으로 완전한 문장으로 풀면 의미는 더 쉽다. 그러나 그렇게 풀어 쓰면 시의 압축은 약해진다. ‘모든 부동’이라고 쓰는 순간, 멈춤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의 시선, 몸, 기대, 경기장의 공기까지 모두 굳어 있는 듯한 인상이 생긴다. 조사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증폭된다.
연결어미도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예컨대 “공이 날아가고, 배트에 맞고, 관중이 환호하며, 끝내 한숨을 쉬었다”라고 쓰면 사건의 흐름은 분명하다. ‘-고’, ‘-며’ 같은 연결어미가 장면들을 차례로 이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단시에서는 이러한 연결어미가 많아질수록 문장이 설명적으로 흐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슈웅ㅡ 따악, 와아ㅡ끝내 한숨, 다시 초구”처럼 연결어미를 줄이고 소리와 쉼표의 배열로 흐름을 만들었다. 연결어미를 모두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그 기능을 소리와 리듬 쪽으로 옮긴 것이다.
셋째, 단어의 대조와 반복, 그리고 소리와 문장부호를 통한 리듬의 조직이다. 이는 단시에서 매우 중요한 기법이다. 접속부사를 줄이면 문장 사이의 관계가 헐거워질 수 있다. 이때 단어의 반복과 대조, 의성어와 의태어, 쉼표와 장음표는 문장을 다시 묶어주는 장치가 된다. 이들은 접속부사처럼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관계를 감각하게 만든다.
「희망의 합주」에서는 의성어와 쉼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슈웅ㅡ’은 공이 날아가는 소리다. 이 소리는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의 속도와 방향을 열어준다. ‘따악’은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다. 순간의 충돌이 이 짧은 소리 안에 들어 있다. ‘와아ㅡ’는 관중의 함성이다. 이 소리는 경기장 전체가 한순간 솟아오르는 장면을 만든다. 세 소리는 하나의 사건을 각각 다른 위치에서 포착한다. 투수의 입장, 타자의 입장, 관중의 입장이 한 행 안에서 함께 울린다.
이 점에서 「희망의 합주」의 소리들은 단순한 효과음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하나의 합주를 만든다. 공이 날아가는 소리, 공이 맞는 소리, 관중이 반응하는 소리는 시간상 거의 동시에 이어진다. 그점을 염두에 두면서도 나는 그것들을 모두 분리해 놓았다. ‘슈웅ㅡ’과 ‘따악’과 ‘와아ㅡ’ 사이에는 짧은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은 접속부사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소리의 순서와 쉼표, 장음표가 그 사이의 긴장을 조율한다. 독자는 이 소리들을 읽으며 장면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게 된다.
쉼표 역시 이 시에서 중요한 접속 장치다. 쉼표는 단순히 문장을 쉬어가는 기호가 아니다. 단시에서 쉼표는 호흡의 방향을 정하고, 감정의 낙차를 조율한다. “우중 우여곡절,” 다음의 쉼표는 그 난감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한숨처럼 작동한다. 비가 오고,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 시간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쉼표는 그 시간을 잠시 붙잡아둔다.
“원형극장 팡파레,” 다음의 쉼표는 기대감이 고조되는 순간을 감춘다기보다 오히려 드러낸다. 팡파레가 울리고, 경기장은 이제 곧 시작될 사건을 향해 열린다. 이 쉼표는 소리가 울린 뒤 잠깐 남는 여운과 같다. 관중은 숨을 고르고, 시선은 공을 향한다. 접속부사가 없어도 이 쉼표 하나가 장면의 전환을 만든다.
“슈웅ㅡ 따악, 와아ㅡ끝내 한숨”에서 ‘따악’ 뒤의 쉼표는 더욱 중요하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관중은 짧은 기대를 품는다. 혹시 좋은 타구일까. 혹시 기다림 끝에 무언가 열리는 것일까. 곧바로 그 기대는 한숨으로 내려앉는다. 이때 쉼표는 기대와 실망 사이의 아주 짧은 문턱이다. 접속부사로 쓰자면 ‘그러나’가 들어갈 자리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러나’를 쓰지 않고 오히려 쉼표를 두었다. 그 쉼표 안에서 독자는 스스로 기대와 어긋남의 관계를 감지한다.
장음표 역시 리듬을 만든다. ‘슈웅ㅡ’의 긴 선은 공이 날아가는 시간을 늘인다. ‘와아ㅡ’의 긴 선은 함성이 경기장 안에 퍼지는 시간을 보여준다. 이 표시는 단순한 시각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소리의 지속을 눈으로 보이게 하는 장치다. 접속부사가 의미의 방향을 알려준다면, 장음표는 시간의 길이를 느끼게 한다. 이렇게 단시는 말의 의미뿐 아니라 말의 모양과 소리까지 활용해 문장 사이를 잇는다.
이처럼 접속부사를 절제한다는 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연결 구조를 섬세하게 다루는 일이다. 접속부사를 줄였기 때문에 이미지의 순서가 더 중요해지고, 조사의 생략이 더 중요해지며, 쉼표와 소리의 배치가 더 중요해진다. 접속부사가 담당하던 연결의 기능을 여러 언어적 요소가 나누어 맡는 것이다. 이때 문장은 겉으로는 짧아지지만, 안쪽의 관계는 더 촘촘해진다.
결국 접속부사 없이 문장을 단단하게 잇는 방법은 문장 안팎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미지와 사건은 시간의 흐름을 만들고, 조사와 연결어미의 생략은 의미를 응축하며, 반복과 대조는 긴장을 만들고, 의성어와 쉼표는 감각의 리듬을 조율한다. 이 모든 요소가 함께 작동할 때, 접속부사가 없어도 문장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은 더 조용하고 단단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닿는다.
접속부사의 절제는 결핍이 아니라 재배열이다. 빠진 말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다른 언어적 힘들이 감당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접속부사를 쓰지 않아도 문장이 이어지려면, 시어들은 서로를 향해 정확히 놓여야 한다. 단어 하나의 위치, 쉼표 하나의 자리, 소리 하나의 길이가 모두 문장의 연결에 관여한다. 단시는 바로 그 미세한 배열의 예술이다.
이 점에서 접속부사 없이 문장을 잇는 일은 단지 문장을 간결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더 조용히, 그러나 더 촘촘하게 포착하려는 태도다.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도, 단어와 단어가 서로 기대고, 이미지와 이미지가 서로를 비추며, 소리와 쉼표가 사유의 호흡을 만들어낼 때 문장은 단단해진다. 접속부사를 절제한 문장은 비어 있는 문장이 아니라, 여러 언어적 힘이 안쪽에서 서로를 잇고 있는 문장이다.
6. 세계의 틈에서 발생하는 철학적 개념
「희망의 합주」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접속부사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단어로 전환하면서 문장을 재배열하기도 했다. 앞서 본 대로 다행히 장면들은 끊어지지 않았다. 사용된 단어들만으로도 이 시의 배경과 사건은 충분히 그려진다. 비가 오는 상황, 공이 움직이기 전의 정지, 경기장을 감싸는 팡파레, 빗나간 첫 공, 타격음과 함성, 끝내 한숨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리고 다시 초구로 되돌아가는 장면이 서로 이어져 있다. 이 서사는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 ‘그럼에도’ 같은 접속부사 없이도 움직인다.
한편, 이 단시에는 접속부사가 아니면서도 접속적 기능을 수행하는 단어들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우여곡절’, ‘비껴난’, ‘끝내’, ‘다시’ 같은 표현들이다. 이 단어들은 문장과 문장을 노골적으로 이어주는 접속부사는 아니다. 그러나 시 안에서 사건과 사건, 정서와 정서, 기대와 어긋남을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이 단어들은 접속부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는 않지만, 접속부사가 하던 기능의 일부를 시어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 점은 중요하다. 접속부사를 절제한다는 것은 연결의 기능 자체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연결의 기능을 문장 바깥에서 문장 안쪽으로 옮겨놓는 일에 가깝다. 접속부사는 대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관계를 설명한다. 반면 ‘우여곡절’, ‘비껴난’, ‘끝내’, ‘다시’ 같은 단어들은 문장 안에서 사건의 결을 만들고, 독자가 그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상상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이 단어들은 접속부사는 아니지만, 접속적 에너지를 품은 말들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우여곡절’은 이 시의 서사가 어떤 힘겨운 상황에 기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말은 단순히 일이 복잡했다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는 기다림, 지연, 불편, 기대, 초조함이 함께 들어 있다. ‘우여곡절’이라는 말 하나가 시의 배경을 단번에 열어준다. 독자는 그 말을 통해 이 장면이 단순히 비 오는 야구장의 풍경이 아니라, 무엇인가 쉽게 시작되지 못하고 지체되던 시간 이후의 장면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둘째, ‘비껴난’은 예상되는 결과와 어긋난 상황을 암시한다. 공은 던져졌다. 모두가 그 첫 공을 기다렸다. 아쉽게도 그 공은 기대한 자리로 들어오지 않고 비껴난다. 여기에는 분명 역접의 정서가 있다. 하지만 시는 굳이 ‘그러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껴난’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대와 어긋남의 관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접속부사처럼 앞 장면과 뒤 장면을 대립시키지는 않지만, 그 사이에 생긴 균열을 조용히 드러낸다.
셋째, ‘끝내’는 상황의 결과를 연상시킨다. ‘끝내 한숨’이라는 표현에는 기다림과 기대가 하나의 결과로 내려앉는 순간이 담겨 있다. 여기서 ‘끝내’는 단순한 시간 부사가 아니다. 그것은 앞선 장면들이 어떤 정서적 결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공의 움직임, 팡파레, 타격음과 함성이 지나간 뒤, 남은 것이 한숨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한다. ‘끝내’는 인과관계를 노골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그 결과의 무게를 독자에게 느끼게 한다.
넷째, ‘다시’는 하나의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님을 표현한다. ‘다시 초구’라는 말에는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이상한 힘이 있다. 보통 끝은 마침표로 상징되지만, 이 시에서 끝은 오히려 새로운 처음으로 열린다. ‘다시’는 그런 전환의 감각을 품는다. 이 말은 ‘그런데’나 ‘그렇지만’, 또는 ‘그럼에도’와 대응할 수 있지만, 그 접속부사들보다 더 짧고 더 깊게 작동한다. ‘다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이 다시 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위에서 보듯이, 이 단시에서 나는 접속부사를 최대한 절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접속적 기능을 다른 단어들 안으로 변환하려 했다. 이것은 접속부사의 단순한 생략이 아니다. 문장의 여백을 넓히고, 의미가 독자의 사유 속에서 천천히 심화되도록 하려는 선택이다. 접속부사가 문장 사이의 관계를 미리 말해버린다면, 이러한 단어들은 관계를 암시한다. 접속부사는 길의 이름을 알려주지만, 이 단어들은 독자가 그 길을 직접 걸어가도록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희망의 합주」는 사건의 단순한 진행을 말하면서도, 그 사건이 창발시키는 철학적 개념을 붙잡으려는 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적 개념은 거창한 추상어가 아니다. 그것은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생겨나는 사유의 이름이다. 비 오는 야구장, 지연된 경기, 움직이기 전의 공, 빗나간 첫 공, 타격음과 함성, 한숨, 다시 시작되는 초구가 서로 부딪히고 겹치면서 하나의 생각을 만들어낸다. 그 생각은 희망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이 시에는 야구장에서 겪은 풍경을 바탕으로 한다. 모처럼 찾아간 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폭우는 아니었기에 경기 개최 여부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기다림은 길어졌고, 경기장 안팎의 움직임은 자꾸 지연되었다. 게다가 사은품 지급을 위한 통제가 이어져 한동안 입구 앞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비는 계속 내렸지만, 다행히 경기는 늦게나마 시작되었다. 1행의 “우중 우여곡절, 공 움직이기 전 모든 부동”은 바로 그 시간의 압축이다.
이 행에서 중요한 것은 “공 움직이기 전 모든 부동”이다. 비가 오는 중에, 투수가 첫 번째 공을 던지기 직전의 순간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다. 경기장은 움직이기 시작하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이 부동은 단순한 정지가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빈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가능성이 응축된 정지다. 공 하나가 움직이기 전, 기대와 불안과 예감이 모두 그 정지 속에 모여 있다.
이 시에는 그 긴장감이 극적인 서술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사건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우여곡절’이라는 말을 앞에 놓았다. 이 말은 이 시에서 감정의 접속사처럼 작동한다. 정확히 말하면 접속부사는 아니지만, 사건과 정서 사이를 이어주는 접속적 기능을 한다. ‘우여곡절’은 기다림의 난감함, 비 오는 날의 불편함, 시작되지 않는 경기 앞에서의 초조함을 한꺼번에 불러온다. 사건을 묘사하면서도, 그 사건에 어떤 감정이 깃들어 있는지를 넓게 펼쳐주는 것이다.
2행의 ‘비껴난’도 마찬가지다. 오래 기다린 끝에 경기는 시작되었다. 투수의 빠른 공이 던져졌다. 그러나 그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 제1구에 대한 기대가 허무하게 빗나간 것이다. 이때 ‘비껴난’은 단순히 공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기대와 어긋남 사이의 정서를 품은 말이다. 제1구와 볼 사이에 생긴 허무, 기다림 끝에 맞닥뜨린 작은 실망, 시작되었으나 곧장 충족되지 않는 마음의 낙차가 이 말 안에 스며 있다.
3행의 ‘끝내’와 ‘다시’도 단순한 부사어가 아니다. ‘끝내’는 앞선 기대가 한숨으로 내려앉는 순간을 붙잡는다. ‘다시’는 그 한숨 이후에도 처음의 자리가 다시 열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끝내’가 낙하라면, ‘다시’는 회귀다. ‘끝내’가 한 번의 좌절을 가리킨다면, ‘다시’는 그 좌절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시작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 둘 사이에서 「희망의 합주」의 철학적 개념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공이 움직이기 전에는 모든 것이 멈추어 있다. 그 멈춤은 아무것도 없는 정지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이 응축된 부동이다. 공이 던져지고, 소리가 터지고, 관중의 기대가 솟아오르며, 다시 한숨으로 내려앉는다. 그 내려앉음의 끝은 끝이 아니다. “다시 초구”라는 말은 야구 경기에서 한 회가 실패로 끝난 뒤에도 다음 회에 다시 처음처럼 시작할 수 있는 열린 기회를 함의한다. 이것은 야구에 담긴 희망의 이상한 구조를 반영한다.
희망은 곧장 성공으로 가는 직선이 아니다. 희망은 실패를 피해 가는 길도 아니다. 오히려 희망은 빗나감과 한숨을 지나 다시 처음을 여는 원형의 운동에 가깝다. 야구에서 한 번의 실패는 모든 경기의 끝이 아니다. 헛스윙을 해도, 공이 비껴나도, 한숨이 나와도, 다시 타석이 오고 다시 공이 던져진다.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실패를 지운 뒤의 새 출발이 아니라, 실패를 품은 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이 시에서 희망은 고난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보상이 아니다. 희망은 고난 속에서도 다시 처음을 열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고난 바깥에 따로 놓인 밝은 결말이 아니라, 우여곡절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다시 시작의 감각이다. 이 점에서 희망은 단순한 낙관과 다르다. 낙관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만, 희망은 좋지 않은 결과 이후에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한다. 「희망의 합주」가 말하는 희망은 바로 이 다시 움직이는 힘에 가깝다.
만약 이 시의 장면마다 접속부사를 넣는다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공이 움직이기 전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리고 팡파레가 울렸다. 제일구는 비껴났다. 그래서 관중은 한숨을 쉬었다. 절망은 이르다. 다시 초구가 시작된다.” 이렇게 쓰면 사건의 배경과 흐름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무엇이 그다음에 이어졌으며, 어떤 기대가 어긋났고, 어떤 결과가 생겼으며, 어떻게 다시 시작되는지가 분명해진다.
반면에 문장과 문장의 여백에서 철학적 사유는 희미해진다. 그렇게 쓰는 순간 시의 리듬은 산문적 설명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슈웅ㅡ 따악, 와아ㅡ’가 만들어내는 속도와 긴장, ‘끝내 한숨’이 만드는 정서의 낙차, ‘다시 초구’가 여는 반복의 희망은 약해진다. 접속부사는 사건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지만, 그 쉬움은 시의 여러 감각을 하나의 논리로 정리해버릴 위험이 있다. 시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다. 시는 의미가 생겨나는 순간의 소리와 숨과 떨림을 함께 품어야 한다.
동시에 여기서 의성어와 의태어의 역할도 중요하다. 만약 이 소리들을 쓰지 않고 사건만 설명했다면, 독자는 장면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 장면의 속도와 긴장을 몸으로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슈웅ㅡ’은 공이 날아가는 시간을 열고, ‘따악’은 공과 배트가 부딪히는 순간을 세우며, ‘와아ㅡ’는 관중의 기대가 한꺼번에 솟구치는 소리를 만든다. 이 소리들은 접속부사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장면들을 이어준다. 논리로 잇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잇는다.
이처럼 접속부사가 절제되어 다른 단어로 전환되고, 단어들이 재배열되었기에 「희망의 합주」는 하나의 결론으로 성급히 좁혀지지 않는 것 같다. 실패했지만 다시 시작한다는 교훈으로만 빨리 고정되지도 않는다. 비, 정지, 팡파레, 빗나감, 타격음, 환호, 한숨, 다시 시작의 감각이 모두 어우러져 시 안에 동시에 남는다. 이 시가 희망의 ‘합주’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희망은 하나의 목소리로만 울리지 않는다. 희망은 기대와 어긋남, 환호와 한숨, 실패와 재시작이 한 공간에서 함께 울릴 때 생긴다.
결국, 이 시가 말하는 희망은 ‘그러므로’의 결론도 아니고, 고통 끝에 간신히 얻어낸 ‘그럼에도’의 윤리만도 아니다. 물론 그 안에는 ‘그럼에도’의 힘이 있다. 그보다 더 먼저 있는 것은 ‘우여곡절’이다. 희망은 고난을 완전히 통과한 뒤에야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함께 이미 흔들리고 있는 감정이다. 여러 소리와 감정이 한 공간에서 한꺼번에 울리다가, 끝내 실패했으나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의 합주에 가깝다.
접속부사를 대신하여 접속적 기능을 수행하는 단어들이 그 자리에 들어왔기에 이 시의 세계는 하나의 의미로 단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결을 가진 채 열린 노래가 된다. ‘우여곡절’은 시작 이전의 난관을, ‘비껴난’은 기대의 어긋남을, ‘끝내’는 정서적 귀결을,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오는 힘을 품는다. 이 네 단어는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부른다. 그 사이에서 희망은 하나의 명제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으로 발생한다.
이런 절제는 단시에서 세계를 사유하는 틈을 열어주는 한 방식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모두 설명하지 않을 때, 시어는 서로에게 더 오래 기댄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접속어로 급히 묶지 않을 때, 사유는 그 사이에서 발생하여 크레바스 같은 문장의 틈을 조심스럽게 건너간다. ‘건너간다’는 것은 이 글에서 중요한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이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관계를 감지하고, 그 관계를 자신의 사유로 완성해간다는 뜻이다.
그 건너감 속에서 창발한 철학적 개념은 희망은 절망과 함께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앞선 「만춘입하」에서는 계절의 문턱과 이어짐의 윤리가 만들어졌다. 봄과 여름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문턱에서 서로의 기척을 들으며 넘어갔다. 이번 「희망의 합주」에서는 빗나감 이후에도 다시 처음이 열린다는 희망과 절망의 원형성이 드러난다. 절망은 순간으로 끝나지 않지만, 그 순간 역시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한숨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초구처럼, 희망은 사라진 듯한 자리에서 다시 자기 몸을 일으킨다.
결국 접속부사의 전략적 활용은 세계가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문장으로 자극하는 방식이다. 접속어를 줄인 자리에서도 문장은 침묵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은 더 집요하게 자기 사유를 밀고 간다. 문장은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이미지는 서로를 비추며, 사유는 그 틈에서 조용히 깨어난다. 나의 단시에서 접속부사의 절제는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세계의 틈을 열어주는 하나의 문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7. 결론: 단시 「희망의 합주」에 담긴 철학
「희망의 합주」에서 철학적 개념은 ‘합주’라는 말에서 도드라진다. 일반적으로 합주는 하나의 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함께 울리는 연주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시에서 합주는 단순히 경기장의 모든 소리가 한데 섞이는 장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희망이 절망과 함께 연주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환호와 한숨, 기대와 어긋남, 시작과 실패,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초구의 순간이 하나의 장면 안에서 함께 울린다.
희망은 절망의 뒷면이다. 이 둘은 언제나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희망이 있는 곳에는 그 희망이 어긋날 가능성이 함께 있고, 절망이 깊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시작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야구 경기에서 한 번의 타석이 끝났다고 해서 경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공이 비껴나도, 한숨이 터져 나와도, 다시 다음 공이 던져진다. 이런 장면을 상상한 시에서 희망은 절망 이후에야 찾아오는 밝은 결말이 아니다. 희망은 절망과 함께 흔들리면서도 다시 처음을 열어가는 힘이다.
또한, 이 희망의 합주는 반복된다. 야구 경기에서 선공과 후공은 계속 바뀌고, 기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공격이 지나가도 다음 이닝이 오고, 하나의 초구가 지나가도 또 다른 초구가 온다. 비가 오더라도 경기가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면,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지된 순간을 견디면 역동하는 찰나가 올 수 있다. 물론 그 찰나는 더 깊은 한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숨 역시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한숨이 깊어질 수도 있고, 환호가 오래 이어질 수도 있다. 삶은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서로 앞서고 뒤따르며 반복되는 변주의 장에 가깝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이 단시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말하지 않는다. 모두 설명하지 않고, 생략하고, 여백으로 남겨둔다. 모든 논리적·감정적 인과관계를 시가 대신 말해줄 필요는 없다. 어떤 연결은 침묵 속에서 더 잘 보이고, 어떤 인과는 설명하지 않을 때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은 “그래서 슬펐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슬픔의 깊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슬픔은 때로 앨범 위의 먼지처럼 가만히 놓여 있어야 한다. 손끝이 한 번 닿고, 툭툭, 그다음에야 오래된 기억의 소리들이 자박자박 걸어오는 법이다.
글쓰기에서 접속사를 줄인다는 것은 문장을 단순하게 만드는 일방적인 가지치기가 아니다. 그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침묵의 힘을 믿는 일이다. 더 깊은 물밑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물 위에 급히 놓은 인위적인 다리를 걷어내고, 물밑에 오래 놓여 있던 자연스러운 징검돌을 믿는 일이다. 접속사가 없다고 해서 문장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문장은 말해지지 않은 자리에서 더 견실하게 이어진다.
요컨대, 접속부사는 문장에서 언제나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더 깊은 접속은 접속부사를 절제할 때 발생한다. 함축된 문장으로 응축된 철학적 개념을 추구한다면, 접속어의 기능을 조율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문장의 사유를 억지로 확정하여 제시하기보다, 문장 스스로 자기 여백을 말하고 그 여백을 자기 것으로 찾아가도록 문장이나 단어와 단어 사이의 틈을 넓혀주어야 한다. 글은 문장과 단어를 통해 사유를 이어가지만, 모든 이어짐이 접속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