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생각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것은...
5월 31일, 일요일이다. 날은 맑고, 햇살은 따갑다. 평소 주일(主日)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오늘은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가족들이 모두 나간 아침, 한적한 마음으로 빨래를 한다. 빨래 말고는 할 일을 만들지 않는 날, 이 시간이 내 삶을 휘돌고 있다.
일주일 전, 바카라 읽기 나눔 모임에서 수필가 최민자 님의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연암서가, 2023)를 다뤘다. 그 모임의 끝에, 그렇다면 ‘흐르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공감되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이야기도 겹쳐져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 로벨리의 말은 『시간의 질서(Order of Time)』를 옮긴 것이어서, 시간에 어떤 질서가 있길래 그의 핵심 주장을 이런 제목으로 표현했는지 궁금해졌다.
빨래를 마치고 나서, 지난번 부산에 갔을 때 사 왔던 ‘모모스 원두’를 털어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잔잔히 번지는 사이, 방금 널어둔 빨래들이 햇살과 바람 아래 빠르게 마르는 것 같았다. 물기를 머금었던 옷들이 바람과 빛 속에서 제 모습을 되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다. 나는 그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변화를 상상하며 조금 식은 커피와 함께 다시 그 질문을 만지했다. ‘흐르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면, 흐르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면, 시간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이런 질문과 함께 어쩌면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조금씩 마르고 식고 변해가는 사물의 사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 변화를 바라보며 의미를 덧입히는 나 자신일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시간이란 이 우주 안에 뒤엉켜 있는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새로운 이해가 나를 자극했다. 아무 일 없는 듯, 여러 생각과 새로운 마음으로 나는 비로소 안식을 누린다. 그렇다면, 최민자와 로벨리가 문학과 과학에서 던진 시간의 실존에 관해, 나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최민자는 자신의 수필에서 로벨리의 말을 다시 풀어 “시간이란 우리를 둘러싼 사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헤아리는 인식 체계로, 인간의 관점에서 덧씌워진 추상일 뿐 실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물의 속성이 변(變)이고 화(化)라면 존재의 본질은 being(있음)이 아니라 becoming(되어감)이려나, 그럴지도 모르겠다.”(192~193쪽)라고 썼다. 그의 말속에는 인간의 삶에서 ‘존재의 의의’가 ‘변화의 의미’로 드러난다는 ‘되어가기’의 철학이 묻어난다. ‘있기’가 아니라 ‘되어간다’라는 말은 세계가 움직임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시간이란 존재의 가치라기보다, ‘변화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라는 슬로건일 수 있다.
어쨌든 흐르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흐르는 것은 무엇인가? 물리학의 논증이 어떠하든 나의 하루는 흘러가는 것 같고, 속절없이 ‘빨리’ 달려가다 다시 ‘느릿느릿’ 걷는 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간 자체가 달리고 걷는 것이 아니라 빨래가 마르고, 커피가 식고, 마음이 고요해졌다가 다시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간은 그 변화들이 지나간 자리에 붙여진 이름일 뿐인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햇살과 함께 바람이 가볍게 불어온다. 그 순간, 시간은, 흐르다 기억할 만한 사건의 여울목을 만들어내기에 흐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지 않고, 흐르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면, 시간 안에서 흐르는 것은 인간 자신일 뿐이리라. 다만,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맴돌면서 말이다. 매일 삶의 이정표를 올곧이 세우는 작은 사건들로 말이다.
느린 과거, 빠른 현재 사이에...
오월 삼십일일이다. 시간이 빠르다는 말이 마음을 앞서지만, 그저 가볍게 서른한 살 같은 기분이 드는 오월의 서른한 번째 날이다. 오늘 아침 나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 햇살에 몸을 일으켜 습관처럼 창밖을 한 번 내다본다. 한쪽에 널어둔 빨래는 밤사이 조금 더 가벼워져 있고, 방 안의 공기는 어제보다 조금 엷어져 있다. 그러다 우연히 한쪽 벽에 걸린 달력에 눈길이 간다. ‘31일’이라는 붉은 숫자가 유난히 밝게 들어온다. 선명히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붉게 타오르다 이내 흐릿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날짜 하나가 하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처럼 지나온 나의 나이테를 가만히 불러 세우는 듯하다.
오늘따라 커피는 느릿하게 떨어졌다. 물이 원두를 지나며 향을 풀어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를 생각하게 만든다. 내려진 커피를 컵에 담아 바카라상에 앉았다. 한 모금 커피에 기억 하나가 겹쳐졌다. 늘 그렇듯 커피는 식어가고, 빨래는 말라가고, 달력의 숫자는 하루의 끝을 향해 조금씩 옅어지다 때가 되면 덜컥하며 새로운 숫자로 바뀔 것이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흔적을 남긴다. 사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변해가며 시간의 자리를 대신 증언해 주고 있다.
돌아보면, 내 생애에서 서른한 살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더디게 흘렀던 것 같다. 그날로부터 다시 서른한 해가 지난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시간이 쏜살같이 쓸려간 듯하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리 없지만, 되짚어보면 사람들이 말해주던 ‘경험이 주는 익숙함’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듯하다. 삶이 누적될수록 지난 경험은 다가올 사건을 두려움 없이 예측하도록 돕고, 그 익숙한 행동 사이에 머물러 있는 나의 경험은 다가올 시간에 겁내지 않고 지체 없이 내 안으로 끌어당긴다. 어쩌면 ‘경험이 쌓여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삶에서 무서운 것이 줄어든다’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연륜이 삶을 주도한다는 일반적 공감대가 여기서 생겼을 것 같다.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일 수야 없겠지만,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 많았던 시절에 나의 시간은 더디게 걸어갔다. 하루하루가 낯설었고 새로웠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일 것이고, 내일은 오늘보다 신비로울 것이라는 기대가 삶의 속도를 느릿하게 붙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서도 시간은 여전히 충분히 채워진 물통처럼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어느 날은 지루할 정도로 느릿하게 흘러, 강제로 하루를 끝내야만 할 때도 있었다.
그때 나에게 시간은 흐르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다시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강물처럼 보였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건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겪는 일들, 낯선 만남들, 오래 망설이던 선택들,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내 앞에서 하나씩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시간은 그 사건들 사이에 고여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나를 다음 자리로 밀어냈다.
어쨌든 젊은 날의 시간은 길었다. 경험도 적고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자주 마음을 멈춰 세웠고, 낯선 것은 하루를 오래 머물게 했다. 세월이 쌓이면서 낯섦은 익숙함으로 바뀌고, 처음의 떨림은 예측 가능한 일상의 표정으로 옅어졌다.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짧아진 것이 아니라 시간을 붙들어 세우던 사건의 밀도가 옅어진 것이리라.
이제 시간은 점차 그 자체로 무의미해지고, 겪었던 사건과 기억만 오롯이 남고 있다. 흐르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면, 내 안에서 흐른 것은 지나온 날들의 사건이고, 그 사건을 통과하며 조금씩 달라져 온 나 자신일 것이다. 오월의 서른한 번째 날, 달력의 붉은 숫자 앞에서 나는 문득 생각한다. 나의 서른한 살은 이미 지나갔고 새로운 서른한 살도 지나고 있으나 그때의 느린 시간은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서 천천히 마르고, 식고, 다시 빛나고 있다.
흐르는 것은 사건이기에...
흐르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생각은 요즘 들어 새롭게 갖게 된 것이다. 한 예로 가까운 과거에 지나갔던 또 하나의 ‘오늘’이 떠오른다. 2024년 나의 5월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해내야 할 일도 많았고, 겪어야 할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들도 빈번했다. 다행히 그 5월은 잘 지나갔다. 단지 지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5월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낯설었기에 오래 남았다. 결국 나의 시간을 붙들어 세운 것은 날짜가 아니라 사건이었다.
그해 5월, 나는 서른한 날 동안 하루에 한 단어씩 모두 서른한 개의 글을 모았다. 그림바카라 프레드릭의 주인공이 여름 한철 빛과 이야기를 모아 겨울에 친구들에게 내어주듯, 나도 나의 삶의 조각들을 모아두었다. 흘러가 버릴 날들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내 삶 안에 잠시 맴돌게 해 두었다. 그 단어에 담긴 기억들은 어느 날은 격려 같았고, 어느 날은 위로였으며, 또 어느 날은 은근한 질바카라 같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한 날, 서른한 개의 단편은 나의 서른한 개의 조각 삶이자 기억의 보자기가 되었다.
그즈음 하루 하나씩 모은 단어들은 이렇다. 리액션, 운동, 상상, 연휴, 여린 시절, 잠, 바다보다, 수요 걷기, 맑은 날의 즐거움, 아카시아 향기, 결혼과 부고, 방문(訪問), 기다린다는 것, 로스팅, 배운다는 것, 삶의 경험을 함께한다는 것, 과도하지 않은 삶, 안식이라는 선물, 초록 세상 아래 머문다는 것, 토마토 맛있게 먹은 아침, 벌써 일주일, 노래와 커피, 추억 한 뜸, 사진 전시 준비, 꿈이 생생한 아침, 나누는 음식 ‘가지’ 전, 모닝 글로리, 오독회, 풍경소리 바람에 실려, 매일 문안하는 삶, 나의 소박한 5월에 ‘새로운’ 기억들 등이다.
그 글 중 마지막 날에 남긴 기록은 이렇다. 가장 먼저 날씨가 있다. “5월 31일, 아직은 맑고 화창한 날, 저녁에 흐려진다는 날.”그리고 이어서 제목이 있다. “나의 소박한 5월에 ‘새로운’ 기억들.”
그날 내가 적어 둔 내용은 이렇다.
“오월 삼십 일일. 화사하고 새로운 일들이 켭켭이 쌓인 날들이 지나간다. 매일 즐겁고, ‘처음’인 듯한 상쾌함으로 가득했다. 홀로, 함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같이’ 보낸 기억들이 기분 좋게 남아 있다. 화려한 일들은 아니었을지라도 스스로 빛났으며, 높고 거창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스스로 아름다운 영원의 날들이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잘 어우러져 하루하루를 수놓았다. 반응하고, 움직이고, 차가웠다 더워졌다. 뜨거웠다. 다시 상쾌해졌다. 맛있는 커피와 시원한 국수, 함께 바라본 도시의 풍경, 걸어 본 숲길, 더불어 읽어 본 바카라, 나눈 이야기, 한 공간에서 주고받은 몸 안팎의 이야기, 모든 것이 항상 거기, 여기 있었으며, 가끔 새롭게 태어났다. 돌아보면, 나의 오월은 소박하다. 그러나 가끔 신생(新生)한 기억들이 별처럼 박힌 날들로, 세상 여느 것 못지않게 평화로웠고, 덕분에 ‘안식’.”
마지막 날의 마지막 단어가 ‘안식’이었다는 것이 꽤 만족스럽다. 이 안식은 단지 잘 쉬었다는 뜻이 아니라, 잘 살았다는 말에 가깝다. 또한 이 서른한 개의 파편들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 사건으로 잘 남았다는 안도의 흔적이다. 분명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세계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주목하게 하는 사건이라는 힘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록들은 나의 마음 근력이 어느 정도로 단련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파편으로 붙잡아 둔 나의 사건들은 어쩌면 이 세계의 뒷골목, 가려진 휘장 뒤를 투시해 보려는 열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높고 거대한 세계 아래 짓눌려 있는 미세한 세계를 현미해 보려는 소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분된 세계는 언젠가 다시...
세계는 여전히 여린 자들에게 위협적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여린 시절을 지나고 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흔들리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 같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길을 건너는 중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여린 시절은 행복한 계절이기도 하다. 함께 걸어줄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언제든 내 삶을 보살펴 줄 마음을 가진 이가 바로 곁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는 언제나 ‘여린 시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스스로 두 발로 강건하게 걷고, 누군가를 등에 업어 물길을 건너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받은 것을 잊지 않고, 또 누군가에게 기꺼이 나누어줄 것이다. 하루를 살면서 영원을 상상하는 즐거움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친절한 안내와 견고한 손에 이끌려, 이 광야 같은 세계를 용기 있게 지나갈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빚어지는 나의 사건을 누리면서 말이다.
다시 2026년 5월 31일이다. 두 해 전의 나의 5월과 올해 나의 5월 사이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나의 삶을 미분했고, 지금 나는 그 미분된 삶의 사건들을 적분하는 것 같다. 그날 무엇이 미분되고, 지금 무엇이 적분 되었을까? 이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마침 며칠 전 모임에서 읽은 최민자의 수필집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가 그 하나의 답을 일러주었다. 지난 5월과 지금 5월을 이어준 것이다.
이 바카라에 기댄다면, 두 해 전에는 하루하루의 사건을 단어로 붙잡아 두었다면, 올해는 그 단어들이 왜 내 안에 머물렀는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사건을 모으고 있었고, 지금의 나는 그 사건들이 내 삶 안에서 어떤 무늬로 남았는지를 읽고 있다.
다시 말해, 두 해 전의 5월이 서른한 개의 단어로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모으는 시간이었다면, 올해의 5월은 그 조각들이 내 안에서 어떤 의미로 이어지는지를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날마다 하나의 단어를 고르며 세계를 잘게 나누어 보았다. 그것은 하루를 미분하는 일이었다. 리액션, 운동, 상상, 연휴, 여린 시절, 잠, 바다, 걷기, 아카시아 향기, 결혼과 부고, 안식 같은 말들은 그날그날의 삶을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어 붙잡은 흔적이었다. 그러나 올해 나는 그 단어들을 다시 이어보며, 그 모든 조각들이 결국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흩어진 날들을 적분해 하나의 삶의 곡선으로 이해하는 일이었다.
올해 5월도 여러 이야기가 흐르는 듯 멈추는 듯 지나갔다. 매일 단어를 모아두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 5월에는 최민자의 수필을 통해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가 지나칠 수 없는 철학의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철학적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보이는 빛인가, 보이지 않는 그늘인가. 흐르는 것은 시간인가, 아니면 우리가 붙잡지 못한 삶의 의미인가.’
시간의 미분과 적분을 잇는 매개는...
나는 그의 글 가운데 네 편의 단편을 좀 더 자세히 읽었다. 「함흥냉면 평양냉면」, 「그늘」, 「나는 글을 어떻게 쓰는가」,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이다. 그의 모든 글이 그러하지만, 특히 이 네 편에서 나는 최민자 수필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일상적인 소재, 간단한 관찰, 하나의 단어에서 시작해 점점 글을 깊게 밀고 나가며, 사유의 과정을 그대로 문장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개념이나 현상을 넓게 확장하기보다, 자신이 관찰한 삶을 담아내는 단어와 문장을 더 잘게 쪼개고, 그 틈 사이에 수식어와 생각의 결을 밀어 넣는다. 이 점에서 나는 그의 수필을 철학적 글쓰기라 부르고 싶다.
이 수필집은 전체를 다 읽어야만 하나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 의도적 에세이는 아니다. 한 편을 읽어도 그의 철학적 주제를 감지할 수 있는 일상의 수필에 가깝다. 네 편의 글은 각각 다른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는가를 묻는 네 개의 문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 네 개의 문은 다시 나의 5월로 열렸다. 말과 그늘과 글쓰기와 시간은 최민자의 문장 안에만 머물지 않고, 내가 붙잡아 두었던 서른한 개의 단어와 기억들을 다시 비추었다.
먼저 「함흥냉면 평양냉면」은 음식을 매개로, ‘말’이 한 사람의 삶과 관계 안에서 갖는 미세한 의미를 포착한다. 사람의 성장과 변화 과정에서 말 역시 다양하게 변모한다는 것을 인간관계의 풍경 속에서 관찰한다. 더불어 말을 살갑게 주고받는 데 있어 ‘밥’이라는 먹거리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짚는다. 아이들이 떠난 뒤 늙어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말이 사라지는 풍경은, 오히려 말의 궁극이 침묵일지도 모른다는 사유로 이어진다. 말은 사람에게 무엇인가. 이 질문은 결국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드러나고, 어떻게 감추어지는가를 묻는 질문이 된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2024년 5월에 내가 붙잡아 두었던 단어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 단어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리액션, 방문, 기다린다는 것, 매일 문안하는 삶 같은 말들은 그때 내가 세계와 관계 맺고 있었던 방식의 흔적이었다. 나는 하루를 살며 누군가에게 반응했고, 찾아갔고, 기다렸고,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보면 시간은 숫자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 말의 표정으로 남았다. 내 5월의 단어들은 내가 그달에 어떤 관계 속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작고 선명한 언어의 지문이었다.
둘째, 「그늘」은 나무를 바라보는 글이다. 저자는 나무들이 저마다 하나씩 보자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상상한다. 이름하여 ‘먹보자기’이다. 이 글에서 그늘은 단순한 어둠이나 빛의 부재가 아니다. 한 그루 나무가 자기 생을 먹이고 지탱하는 힘이며, 잎과 열매를 길러 올리는 보이지 않는 저장소이다. 보자기는 나무의 보이지 않는 크기다. 나무가 그늘을 통해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듯, 사람 역시 드러난 성취보다 보이지 않는 침묵과 어둠 속에서 자기 삶의 우듬지까지 양분을 올려 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늘은 결핍이 아니라 정체성이 뿌리내리는 내면의 토양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여린 시절’도 다시 보였다. 나는 여전히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흔들리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그 여림은 단지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에 그늘이 있다는 뜻이었다. 상처받기 쉬운 마음, 조심스럽게 물길을 건너는 태도,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귀하게 여기는 감각은 모두 나를 먹여 살린 보이지 않는 저장소였다. 나는 그동안 밝은 성취만이 삶을 앞으로 밀고 간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그늘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그런 그늘을 조금씩 자라게 하고, 사람은 그 그늘 속에서 자기만의 깊이를 얻는다.
셋째, 「나는 글을 어떻게 쓰는가」는 저자의 글쓰기 철학을 보여준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고단한 수작업이며, 지극히 개별적이고 원시적인 노동이다. 글쓰기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는 지난 시간의 문양들, 몸 안에 갇혀 있다가 나라는 개체와 함께 사라질 기억과 몽상을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로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어떻게 쓰는가’에서 출발하지만, 끝내 ‘왜 쓰는가’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읽는 일이 세계로부터 불시에 얻어맞는 경험이라면, 쓰는 일은 그 충격을 자기만의 문장으로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이 글은 내가 왜 서른한 날 동안 서른한 개의 단어를 모았는지를 뒤늦게 설명해 주었다. 그때 나는 거창한 문장을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하루가 내 안에서 그냥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라도 붙잡아 두었다. 그것은 흩어진 자신을 다시 불러 모으는 일이었고, 지나간 하루의 무늬를 어설프게나마 복원하는 일이었다. 기록은 시간을 저장하는 행위라기보다, 시간 속에서 흩어진 나를 다시 불러 세우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2024년의 단어들은 나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삶을 잘게 나누어 본 작은 글쓰기였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는 이 모든 사유를 하나로 묶는 가장 깊은 축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시간이 외계의 물리적 실재인지, 아니면 장소와 환경과 심리 상태에 따라 다르게 체감되는 감각의 형식인지 묻는다. 나이 들어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시간이라면, 그 시간은 늘 같은 것인가, 아니면 삶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여기서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이 호출되는 이유도 조금은 알 수 있다. 저자는 시간이 지닌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성격을 일상의 언어로 끌어온다. 결국 시간은 따로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사물과 몸과 마음이 변해가는 방식 안에서 드러나는 무엇이다.
다시 두 해가 지나,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나의 2024년 5월은 사라진 날짜가 아니라 사건으로 남은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를 미분하듯 잘게 나누어 단어로 붙잡았다. 그리고 2026년 5월의 나는 그 단어들을 다시 적분하듯 이어 보며, 그 조각들이 어떤 삶의 곡선을 이루고 있었는지 묻고 있다. 시간은 내 밖에서만 흘러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이 되고, 그늘이 되고, 문장이 되고, 마침내 안식의 감각으로 남았다.
네 편의 글을 이렇게 이어놓고 보면, 「함흥냉면 평양냉면」의 말, 「그늘」의 어둠, 「나는 글을 어떻게 쓰는가」의 문장,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의 시간은 서로 멀리 떨어진 주제가 아니다. 말은 관계 속에서 나를 드러내고, 그늘은 드러나지 않은 나를 먹여 살리며, 글쓰기는 흩어진 나를 다시 불러 모은다. 시간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자리다. 최민자의 수필은 이 네 개의 문을 통해, 결국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 앞에서 나의 5월을 다시 읽는다. 내가 모아둔 단어들, 내가 지나온 여린 시절, 내가 붙잡아 둔 작은 사건들은 모두 흘러간 날짜가 아니라, 내 안에 남아 나를 이루는 흔적이었다.
정리하면, 최민자의 수필을 읽는 일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고 희미한 순간들을 붙잡아 자기만의 시간 안으로 데려오는 행위다. 이 세계에서 정말로 흘러가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면, 사람은 쉽게 무력해진다. 그러나 말의 흔적을 살피고, 그늘을 견디며, 글로 자신을 복원하고, 시간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면 사람은 흘러가면서도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 삶은 그렇게 문장 곁에서 조금씩 자기 모습을 되찾는다.
흐르는 것은 시간에 대한 무사유...
그런 맥락에서 이 수필집을 관통하는 핵심은 ‘시간을 어떻게 자기 삶의 언어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다. 나는 이 수필집을 읽으며 ‘검은 안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여기서 검음은 절망의 색이 아니라 삶을 깊이 품어주는 그늘의 색이며, 안식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흩어진 자신을 다시 자기 안으로 불러들이는 숨이다. 말과 침묵, 그늘과 문장 속에서 자신을 다시 붙잡는 것. 그것이 밀려오는 시간을 대하는 한 가지 지혜일지 모른다.
때로 최민자의 문장은 말과 말 사이가 길게 늘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무 상세한 말이 끼어들며, 또 어떤 경우에는 단숨에 새로운 생각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이때 독자의 입장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의 사유를 성급히 단정하지 않는 일이다. 글에서 느껴지는 난해함이나 복잡함은 그가 대상을 한 번에 결론짓기보다, 잘게 나누어 오래 들여다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단번에 요약하지 않는다. 개념과 개념,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열어두고, 그 틈으로 독자의 생각이 들어오게 한다.
이는 언뜻 그의 글이 가진 모호함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스스로 사유의 폭을 넓혀갈 기회를 마련해 준다. 결국 그의 수필은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잘게 살피고, 그 조각들을 다시 문장으로 엮어내는 글쓰기다. 다만 그 결과물이 어떤 때는 선명한 실체로 만져지고, 또 어떤 때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여운으로 남는다.
따라서 이 바카라은 모든 글을 다 읽어야 저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편을 읽더라도 사유가 흘러가는 궤적을 천천히 따라가는 태도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때로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침묵을 음미하고, 때로는 글이 드리우는 그늘 아래 잠시 쉬어가도 좋다. 그런 점에서 이 수필집은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보다, 하나의 작품을 오래 곱씹으며 시간이 꽃씨처럼 터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읽기가 어울린다.
결국 나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흐르는 것은 무엇인가.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 묻지 않은 채 지나가 버리는 삶일지도 모른다. 붙잡아 사유하지 않는 삶, 자기 안에 머물지 못하는 삶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하나의 단어를 붙잡고, 하루의 사건을 기록하고, 사물의 그늘을 오래 바라보며, 문장으로 자신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면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에서 사건이 되고, 기억이 되고, 마침내 안식이 된다.
2024년의 5월은 서른한 개의 단어로 내 삶이 잘게 나뉜 달이었다. 2026년의 5월은 그 단어들이 다시 이어져 하나의 의미로 돌아온 달이었다. 최민자의 수필은 그 사이에 놓인 질문을 밝혀주었고, 나는 그 질문 곁에서 나의 답을 조금 얻었다. 두 5월은 서로 다른 해에 놓여 있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시간 안에서 맴돈다. 삶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흘러가더라도 어떤 날은 내 안에 사건으로 남아 다시 피어난다. 그 맥놀이를 알아차리는 눈과 촉감이 있을 때, 시간은 무의미한 흐름이 아니라 꽃씨처럼 품어지는 사건이 된다.
인생은 그런 언어로 축적되는 것이다. 그저 빠르게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느릿하게 쌓여가며 꽃피는 것이다. 단 한 번 지기 위해 오랜 시간 피어나는 꽃이다.
5월은 다시 온다. 6월을 지나고, 계절의 먼 둘레를 돌아, 삶의 작은 흔적들을 쌓아가며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시간의 질서를 따라갈 뿐, 그저 흘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거대한 우주적 약속이 남긴 가장 작은 사건 하나가, 내 발아래 어김없이 피어난 한 송이 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