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釋.
글자를 이미지로 번역한다는 것

-산시성의 국수, 뱡뱡면의 ‘뱡’字 읽기에 대하여-

by푸른킴

1. 글자의 탄생

우연히 이 글자를 만났다. 얼핏 보았을 때, 부적인가 싶었다. 글자로 보이지 않고, 그림으로도 보였다. 합자를 활용하여 부와 안전을 기원하는 부적도 있지만, 이런 이미지는 꽤 낯설었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대체로 처음 보는 것이라 했다. 마침, 한 분이 국수를 뜻하는 단어라고 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했다.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뱡’이었고, 실제로 ‘뱡뱡면’이라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친김에 더 알아보았더니 이 글자의 전설, 잘 기억하기 위한 노래,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국수를 팔았다가 지금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글자의 전설 중 하나는 이렇다. 옛날 한 가난한 서생이 산시성 함양 땅을 지나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뱡! 뱡!" 하는 힘찬 소리에 이끌려 국수 가게에 들어섰다. 그 소리는 주방장이 반죽을 조리대에 내리치며 면을 뽑는 소리였는데, 서생은 그 소리에 홀린 듯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순식간에 비워냈다. 식사를 마친 서생은 그제야 자신에게 국숫값을 낼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인장이 값을 치르라고 독촉하자, 서생은 기지를 발휘해 이 글자를 만들어 주었다. 자신이 본 국수의 모습과 산시성의 풍경을 하나하나 읊으며 글자를 조합했다.

뱡 Biáng


이 전설은 이 글자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꽤 적절해 보인다. 실제로 이 글자를 잘 기억하기 위한 노래도 만들어져 불린다고 한다.


일점비상천(一点飛上天) 한 점은 하늘로 치솟고
황하양변만(黃河兩邊彎) 황하는 두 갈래로 굽이치네 ('宀' 부분)
팔자대개구(八字大張口) 여덟 팔(八) 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언자왕리주(言字往里走) 말씀 언(言) 자는 그 안으로 들어가네
좌일요, 우일요(左一幺, 右一幺) 네가 한번 꼬고, 내가 한번 꼬고
동일장, 서일장(東一長, 西一長) 네가 한번 길게, 내가 한번 길게
중간가개마대왕(中間加個馬大王) 가운데에는 말 마(馬) 대왕이 끼어 있고
심자저, 월자방(心字底, 月字旁) 마음 심(心) 자를 밑에, 달 월(月) 자를 옆에 두고
유개금구걸고리(留個金鉤掛麻糖) 갈고리를 남겨 엿을 걸어두네
추착차차추태양(推着車車逛咸陽) 수레를 밀며 함양을 구경하네


노래를 직접 듣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정도만 읽어도 이 글자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지금도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암송과 반복되는 이야기가 그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작 나의 관심은 이 글자에 대한 또 다른 설명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 글자 자체가 하나의 ‘도상(Icon)’이자 ‘서사(Narrative)’를 담고 있는 셈입니다. 한 그릇의 국수를 만드는 온 우주와 노동의 과정이 이 한 글자에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나는 이 설명 가운데 ‘도상’과 ‘서사’가 어우러진다는 말에서, 이 글자를 다시 읽을 가능성을 보았다. 나는 사실, 이 글자를 처음 보고, 이후 여러 설명을 들었을 때, 마치 주방에서 국수가 삶아지고 있는 그릇을 단면으로 잘라 그려낸 이미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단어에서 어떤 새로운 상상이 이어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 글자를 처음 본 날부터 나는 꽤 오랫동안 그것을 이리저리 상상하고 풀어보았다. 내가 말하는 도석(道釋)이란, 길을 걸으며 내가 읽었던 경전과 지혜의 문구와 노래들을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그 속에서 감지되는 글의 내면을 읊조리다 글로 옮기는 몸의 번역이다. 도석은 단순한 풀이가 아니라, 글자가 내 안에서 다시 이미지가 되고 소리가 되고 길이 되어 뻗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한 도석 끝에 나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글자를 그림처럼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이 도상학에는, 시각과 청각을 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글자를 단순히 기억하게 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의미를 생활 속에 깊이 새겨두려는 교육적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제 그 오랜 상상의 해석을 글로 남겨 보려 한다.


2. 글자의 분석: 조리도(調理圖)로서의 ‘뱡’

우선 나는 이 글자를 주방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장면을 관찰한 것으로 해석했다. 길을 걸으면서 이 글자를 떠올리고 팔팔 끓는 솥 안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국수 요리의 단면을 반복적으로 상상했다. 이를 AI의 도움을 얻어 그려낸 결과는 이렇다.

글

나의 상상으로 ‘뱡’ 자를 그린 솥의 단면. 그림: Gemini

솥을 위에서 아래로 자르면, 거대한 무쇠솥 안에서 뱡뱡면이 끓고 있는 듯하다. ‘뱡’ 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근거하면, 각 부분은 주방의 여러 요소가 조화된 그림으로 다시 상상할 수 있다. 이 글자들은 하나의 생활 장면이 스며있는 조리의 움직임을 품은 슬롯적 도상으로 읽힌다.


첫째, 솥의 전체 모습은 辶, 宀, 八 등이 구성한다. 글자의 바닥과 왼쪽을 감싸는 바카라받침 辶은 길게 늘어진 면발이자 동시에 거대한 무쇠솥의 바닥과 한쪽 벽면처럼 보인다. 맨 위의 갓머리 宀과 八은 솥 위로 피어오르는 뜨거운 증기와 열기를 형상화한다. 글자의 바깥 윤곽은 단순한 테두리가 아니라, 요리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경계가 된다. 그 안에서 국수는 익고, 냄새는 피어나며, 소리는 울린다.


둘째, 솥 안에는 끓는 육수와 면발이 있다. 言, 幺, 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중심에 있는 말씀 언 言은 솥 한가운데서 팔팔 끓어오르는 육수의 거품과 파동이다. 동시에 그것은 뱡뱡면을 만들 때 들려오는 소리, 곧 반죽이 조리대에 부딪히며 나는 “뱡, 뱡”의 울림이면서 조리하는 사람,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이기도 하다. 양옆의 작을 요 幺는 육수 속에서 춤추듯 엉켜 있는 가느다란 면발들이다. 가운데의 말 마 馬는 면이 끓으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소용돌이, 곧 육수와 면이 뒤섞이며 일어나는 힘찬 움직임을 상징한다.


셋째, 고명과 조리 도구도 글자 안에 들어 있다. 長, 心, 月, 刂 등이 그러하다. 양옆의 긴 장 長은 솥 가장자리에서 함께 익어가거나 고명으로 얹힐 길쭉한 채소와 고깃덩어리처럼 보인다. 아래의 마음 심 心은 솥 바닥에 가라앉아 진한 맛을 내는 양념과 고추기름의 붉은빛을 떠올리게 한다. 오른쪽의 칼 도 刂와 왼쪽의 달 월 月은 솥 옆에 놓인 조리 도구를 연상하게 한다. 면을 자르거나 다루는 칼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이 면이 넓고 길게 다루어지는 장면까지 떠오른다.


이처럼 나는 이 ‘뱡’ 자를 글자와 글자가 어우러져 새로운 글자가 된 형상으로 본다. 그것은 단순한 합체자가 아니라, 그릇 안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글자 안에 담아낸 그림이다. 글자 안에서 조리의 과정이 일어나고, 조리의 과정 안에서 생활의 이치가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글자를 ‘조리도(調理圖)’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여기서 조리도라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그림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調는 서로 다른 재료와 맛과 힘을 맞추는 일이고, 理는 그 안에서 드러나는 질서와 결이다. 조리란 재료를 익히는 일이면서 동시에 흩어진 것들을 하나의 맛으로 모으는 일이다. 그렇다면 ‘뱡’ 자는 글자들의 조리이기도 하다. 言, 馬, 長, 心, 辶 같은 서로 다른 글자들이 한데 들어와, 하나의 새로운 맛과 형상을 이룬다. 이 글자 안에서는 문자가 요리되고, 요리는 문자화된다. 길을 걸으며 상상할수록 이런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졌다.


실제로 뱡뱡면은 허리띠처럼 넓고 긴 면발, 투박하고 쫄깃한 식감, 강렬한 양념, 그리고 면 위에 뜨거운 기름을 끼얹는 조리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조리하는 방식 자체가 역동적이며, 이 글자는 바로 그 역동성을 획의 밀도와 구성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뱡’ 자는 음식을 지시하는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음식이 만들어지는 소리와 움직임, 그리고 한 그릇이 완성되는 과정을 시각적, 문화적, 슬롯적 현상으로 압축한 장치다.


이 지점에서 글자는 더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냄새를 품고, 소리를 품고, 손의 노동을 품는다. 글자 하나가 한 그릇의 음식이 되고, 한 그릇의 음식이 다시 한 지역의 기억으로 번져간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글자를 상상하고 계속해서 번역한 것에 근거하면, 이 글자는 그 복잡한 구조나 전승되는 노래 속에 그 글자를 만들어내고 외우고, 웃으면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함께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 생활의 글자: 민중적 기억과 슬롯적 의미

처음 이 글자를 부적처럼 느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슬롯에는 예로부터 ‘글자의 힘’에 대한 민속적 믿음이 있었고, 여러 글자를 한데 모아 만든 합체자는 복을 부르고 나쁜 기운을 막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초재진보(招財進寶)’ 같은 합체자가 대표적이다. 글자는 단지 읽히는 것이 아니라 걸리고, 붙여지고, 지니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글자는 생활 속에서 작은 힘을 가진 물건처럼 존재했다.

그러나 ‘뱡’ 자는 그런 부적의 합체자와는 분명 다른 결을 보여준다. 어떤 주술적 기원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자는 복과 길상을 추상적으로 기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의 일상 자체를 글자 안에 담아낸 슬롯적 해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음식에 대한 해학, 조리 장면의 생동감, 장터의 소란, 길거리 음식의 대중성이 한 글자 안에서 서로 얽힌다. 이 글자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이하게 복잡해서만이 아니다. 그 복잡함 속에 생활의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보면, ‘뱡’ 자에는 음식에 대한 민중적 유머가 깃들어 있다. 너무 복잡해서 오히려 놀이가 가능한 글자, 외우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글자, 그러나 글자를 외워서 쓰게 되었을 때 그 복잡함을 이겨낸 자신감으로 더 오래 기억되는 글자다. 사람들은 처음 이 글자를 보며 놀랐을 것이고, 외우려 했을 것이고,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이런 글자를 만들었는지, 나아가 그 글자를 외우는 일을 하나의 놀이로 바꾸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문자는 권위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웃음과 암송과 장난의 대상이 된다. 글자가 권력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시대에도 그 글자를 엄숙한 바카라상에서 끌어내려 장터와 주방과 식탁 가까이에 한 끼 음식 옆에 놓은 것이다.


교육적으로 보면, 앞서 말한 대로 이 글자는 암송을 자극한다. 구전 노래가 전해진다는 사실은 이 글자의 도상이 소리와 리듬을 통해 기억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뱡’ 자는 니모닉의 오래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도 길을 걸으며 이 글자를 떠올릴 때, 그 노래의 가사를 떠올리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이 글자는 눈으로 보고, 입으로 외우고, 몸으로 기억하는 하이브리드 글자인 셈이다. 문자의 교육이 언제나 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소리와 리듬, 반복과 몸짓, 노래와 놀이가 함께 할 때 문자 이해는 더 깊어지고, 그 의미가 몸에 남을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글자를 토대로 새로운 인식의 문이 열릴 수 있다. ‘뱡’ 자는 바로 그 오래된 교육 방식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롯적으로도 이 글자는 산시성이라는 지역적 생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중심부의 馬와 言은 단지 말과 말소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길 위의 이동성, 시장의 소란, 상인들의 활력, 그리고 산시성이라는 지역이 지녔던 교통과 교역의 기억까지 불러낸다. 長은 길고 넓은 면발의 형상을 강조하고, 辶은 길을 떠나는 나그네나 상인의 움직임을 암시한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기 어렵다고 해도 이 글자가 불러내는 생활사의 상상에는 충분히 가능하다. 더군다나 뱡뱡면이 빈민들의 음식이었다는 것도 이 글자의 의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글자의 매력은 바로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 상상 속에서 ‘뱡’ 자는 길거리 음식이면서도 슬롯적 문화를 함의하며 대중과 함께 다성적으로 호흡해 온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상’이 사실과 반대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자는 인간이 사실을 상상 속에서 기억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어떤 음식은 맛으로만 남지 않고, 냄새와 소리와 장소와 얼굴, 이야기와 함께 남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글자는 뜻으로만 기억되지 않고, 그것을 보았던 순간의 놀라움과 그것을 외우던 목소리와 함께 남는다. 암송은 대표적인 예이다. ‘뱡’ 자는 그러한 기억의 방식, 곧 생활이 문자를 통과해 남는 문자의 생존 방식을 보여준다. 사용되지 않는 글자는 소멸하기 쉽고, 암송되지 않는 글은 사라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용되고, 기억되고 그려지는 글자는 생존한다.


결국 ‘뱡’은 개별 글자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글자가 만들어진 창의성의 예이다. 특히 당시 생활상을 직접적으로 표상한다는 점에서 생활 밀착형 조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자는 정제된 문자 규칙만을 따르려는 태도와 달리, 글자를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인 민중적 감각을 보여준다. 쓰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외우는 즐거움이 한 글자 안에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뱡뱡면의 ‘뱡’은 단순한 합체 문자를 넘어, 산시성이라는 지역적 정체성과 민중의 삶을 획의 밀도로 증명해 보이는 입체적인 도상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만 이해되는 글자가 아니라, 다시 만들어지고 다시 보이며 다시 암송되는 글자다. 곧 놀이의 글자이자 생활의 글자다.


그런데 글자를 이미지로 만들고, 그 이미지 안에 생활의 기억과 보이지 않는 질서를 담으려는 태도는 ‘뱡’ 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문자를 단순한 표기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글자 안에서 우주를 보고, 이름 안에서 운명을 읽고, 배열 속에서 신성한 질서를 찾으려 했다. 그렇다면 글자를 그림처럼 읽고, 글자의 결합 속에서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으려는 태도는 ‘뱡’ 자에만 국한된 것일까. 나는 이 점에서 ‘뱡’ 자를 지속해서 분석하고 상상하는 동안 내가 공부한 히브리 문자 문화와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문을 열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놀이의 글자: 문자 도상학의 비교

글자를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이미지와 서사의 그릇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문자는 언제나 소리를 적는 도구에만 머물지 않았다. 때로 문자는 형상이 되었고, 배열이 되었고, 숫자가 되었으며,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붙잡으려는 오래된 방식이 되었다. 사람은 글자를 통해 뜻을 전달했을 뿐 아니라, 글자 안에서 보이지 않는 질서와 삶의 흔적을 읽으려 했다.


이 점에서 나는 ‘뱡’ 자를 바라보며 히브리 문자 전통을 함께 떠올렸다. 히브리어 글자는 고대 서북셈어 문자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고, 이후 유대교 사유 안에서 단순한 표음 문자를 넘어 깊은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 문자에는 각각의 음가와 이름이 있고, 동시에 숫자값이 부여된다. 그래서 어떤 단어는 읽히는 말이면서 동시에 계산될 수 있는 수가 된다. 이처럼 글자를 수치로 환원하여 단어와 단어 사이의 숨은 관계를 읽어내는 방식이 게마트리아다. 게마트리아는 문자가 눈에 보이는 표면 너머에 또 다른 의미의 층위를 품고 있다고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또 다른 예는 테트라그라마톤, 곧 신성한 네 글자 YHWH를 시각적으로 변주하는 전통이다. 이 네 글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면 인간의 형상을 이루는 도상이 나타난다. 이 도상은 카발라 신학에 의하면, 아담 카드몬과 연결되어 이해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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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의 요드는 머리처럼 보이고, 이어지는 헤는 어깨와 팔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며, 와우는 몸의 중심축처럼 세워지고, 마지막 헤는 하체의 형상으로 읽힌다. 이때 문자의 배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카발라 전통에서 이러한 문자 이해는 더 넓게 확장된다. 히브리어의 스물두 글자는 우주 창조와 신성한 질서를 사유하는 재료로 여겨졌다. 특정한 이름을 세로로 쌓거나, 글자들을 원형으로 배열하거나, 단어의 수치를 비교하는 행위는 단순한 언어 놀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조를 눈앞에 세워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때 글자는 읽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보는 기도이고, 의미가 머무는 작은 건축물이 된다.


여기서 ‘뱡’ 자와 히브리 문자 도상은 서로 닮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둘 다 글자를 이미지로 번역하고, 글자의 결합과 배열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그러나 그 응축의 방식은 다르다. ‘뱡’은 일정한 사각형의 틀 안에 여러 글자를 빽빽하게 끌어들여 하나의 민중적 도상을 만든다. 글자들이 서로 겹치고 기대며, 마치 솥 안에서 재료들이 함께 익어가듯 하나의 새로운 형상을 이룬다. 반면 히브리 문자 도상은 글자를 공간 속에 배치하고 세우며, 그 배열을 통해 신성한 형상을 드러낸다. ‘뱡’이 밀도와 겹침의 문자라면, 히브리 문자 도상은 배치와 방향의 문자라 할 수 있다.


또한 ‘뱡’이 음식과 장터와 민중의 해학에서 비롯된 생활의 글자라면, 히브리 문자 도상은 문자가 신성한 질서를 품고 있다는 종교적 믿음에서 비롯된 기도의 글자다. ‘뱡’은 먹고, 외우고, 웃으며 기억되는 글자다. 그것은 국수 가게의 소리, 조리대에 부딪히는 반죽의 울림, 긴 면발의 움직임, 시장의 활기를 품고 있다. 반면 히브리 문자 도상은 보고, 묵상하고, 경외하며 다가가는 글자다. 그것은 신의 이름, 인간의 형상, 우주의 질서를 하나의 배열 속에 붙잡으려 한다.


그럼에도 두 전통은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준다. 문자는 때로 사전적 의미를 넘어, 인간의 상상력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놀이는 단순한 장난이나 희화화가 아니다. 그것은 글자를 다시 보고, 다시 놓고, 다시 외우며, 그 안에서 생활이나 신앙이나 기억의 결을 발견하는 일이다. 중국의 ‘뱡’이 획을 겹쳐 밀도를 높인 조리도라면, 히브리 문자 도상은 공간 속에 글자를 배치하여 신성함을 드러내는 텍스트의 건축화라 할 수 있다.


이 비교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문자가 언제나 뜻만을 운반해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자는 때로 몸을 가지고, 방향을 가지고, 온도를 가지고, 냄새와 침묵을 품는다. 어떤 문자는 장터의 국수 냄새를 품고, 어떤 문자는 기도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어떤 문자는 웃음 속에서 외워지고, 어떤 문자는 경외 속에서 바라보인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문자는 인간이 세계를 손에 쥐어보려는 방식이다. 사람은 글자를 통해 먹고, 믿고, 기억하고, 묵상한다.


‘뱡’ 자를 통해 내가 보게 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이 글자는 하나의 음식 이름이지만, 그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글자가 어떻게 그림이 되고, 그림이 어떻게 기억으로 남으며, 기억이 어떻게 한 지역의 생활과 정체성을 품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히브리 문자 전통과의 비교는 이 특징을 더 넓은 자리로 옮겨 놓는다. 글자는 읽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외워지고, 믿어지고, 살아진다.


이제 문제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만약 글자가 이렇게 이미지가 되고, 생활이 되고, 기억이 되고, 기도가 될 수 있다면, 글을 쓴다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글자를 단순히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도구로만 쓰고 있는가. 아니면 글자를 통해 세계를 다시 보고, 다시 배열하고, 다시 살아낼 수 있는가. 길 위에서 오래 품었던 ‘뱡’ 자는 이 질문을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내 앞에 놓아두었다.


5. 도상학의 가치

글은 또 다른 그림이다. 사람은 오래전부터 글자를 단순히 소리를 적는 부호로만 여기지 않았다. 글자를 세우고, 포개고, 늘이고, 감추고, 다시 드러내면서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담으려 했다. 어떤 글자는 뜻을 전달하기 전에 먼저 눈을 붙든다. 어떤 글자는 읽히기 전에 하나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볼 때 글을 쓴다는 것은 문장을 차례로 이어 붙이는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글자를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듯 사유를 배열하고, 그 배열을 통해 누군가가 다시 상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뱡’ 자에 얽힌 이야기는 글자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상상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운다. 물론 글자는 이미 주어진 약속이다. 아무 선이나 긋는다고 곧바로 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글자는 완전히 닫힌 체계도 아니다. 이미 주어진 획과 소리와 뜻을 토대로, 사람은 새로운 의미의 길을 낼 수 있다. ‘뱡’ 자는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러 글자를 다시 모으고, 서로 겹치고, 하나의 틀 안에 배치함으로써 전혀 다른 글자가 태어난 것이다.


이때 도상학의 가치는 글자로 글자 너머를 보게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글자를 뜻의 운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글자를 보면 곧바로 뜻을 찾고, 뜻을 찾으면 더 이상 글자의 몸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글자는 그렇게 빨리 지나갈 수 없다. 낯설게 그어진 획, 한눈에 붙잡히지 않는 구조, 여러 요소가 밀집된 형상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생겼는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자를 만들었는가.


도상학은 바로 이 질문들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글자를 사전 속으로 곧장 돌려보내지 않고, 잠시 눈앞에 세워두는 일이다. 뜻을 알기 전에 모양을 보고, 모양을 보면서 소리를 듣고, 소리를 듣다가 그 글자가 놓였던 생활의 자리를 상상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도상학은 단지 이미지를 해석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둘러 이해하려는 마음을 늦추고, 글자의 표면에 머무를 줄 아는 태도에 가깝다.


‘뱡’ 자는 바로 그런 머무름을 요구하는 글자다. 너무 복잡해서 곧바로 읽히지 않는다. 너무 낯설어서 뜻보다 먼저 형상이 다가온다. 너무 빽빽해서 하나하나의 구성 요소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낯섦이 오히려 사유를 연다. 익숙한 글자를 낯설게 배열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견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뱡’ 자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다. 평범한 음식 이름이 한순간에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이야기와 기억과 생활의 장면을 불러온다.

이 글자 놀이는 나에게 창의성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창의성이란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갑자기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창의성은 이미 있는 것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놓고, 다른 것과 이어 붙이며 새로운 하나로 나아가는 사유의 전진에 가깝다. 앞선 기억, 익숙한 형식, 이미 배운 말, 오래된 이미지, 남겨진 이야기들이 있어야 우리는 그 위에 다음 발을 놓을 수 있다. 창의성은 무에서 솟는 번개라기보다, 이미 있는 것들 사이에 놓이는 새로운 길이다.


‘뱡’ 자 안에서 言은 소리가 되고, 馬는 힘찬 움직임이 되고, 長은 길게 뽑힌 면발이 되며, 心은 맛의 깊이가 되고, 辶은 길과 이동의 감각이 된다. 각각의 글자는 본래의 뜻을 완전히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자리 안에서 다른 기능을 얻는다. 글자와 글자가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은 다시 새로운 의미를 불러낸다. 이처럼 창의성은 이미 있는 것을 다르게 배치하는 힘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흩어진 것을 다시 모으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그러므로 창의성을 기계와 과학, 물질의 발견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고, 이전에 없던 장치를 고안하는 일만이 창의성은 아니다. 한 글자를 다르게 보는 일, 하나의 문장을 새롭게 배열하는 일, 이미 알고 있던 말을 낯선 빛 아래 다시 놓는 일에도 창의성은 발생한다. 글자와 글자만으로도 충분히 창의성은 태어날 수 있다. 글자를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를 묻는 사유 자체가 창의성의 발판이자 결실이다.


글쓰기는 그 좋은 사례이다. 글은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보고서처럼 쓰고, 어떤 사람은 기도처럼 쓰며, 어떤 사람은 회한처럼 쓰고, 어떤 사람은 웃음처럼 쓴다. 내용은 같아 보여도 배열과 호흡과 시선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글이 된다. 결국 글쓰기는 이미 있는 세계를 다시 배치하는 일이다. 흩어진 경험을 문장으로 모으고, 지나간 감각을 언어로 붙잡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생각에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끝내 자신 안에 무엇을 창발 하게 하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글을 쓰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생각이 문장을 지나며 모습을 드러낸다. 막연했던 감정이 이름을 얻고, 흩어져 있던 기억이 질서를 얻고, 이해되지 않던 경험이 하나의 의미로 천천히 응고된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대상을 설명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통과해 자기 자신을 다시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글의 창의성이 글쓴이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글은 쓰기 전의 나와 쓴 뒤의 나 사이에 미세한 균열을 남긴다. 나를 낯설게 만든다. 전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생각을 다시 보게 하고, 그냥 지나쳤던 감각을 붙들게 하며, 오래 묻어두었던 질문을 다시 눈앞에 세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몰랐던 생각을 캐내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의 불필요한 껍질을 조금씩 걷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글쓰기는 남을 일깨우기 위한 도구에만 머물 수 없다. 단순히 나의 감상을 표현하는 데서 끝날 수도 없다. 글쓰기의 가치는 문장의 세련됨만으로 판단될 수 없다. 물론 좋은 문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문장이 아무리 유려해도 그 안에 사유의 통과 흔적이 없다면, 글은 아름다운 껍질에 머물 수 있다. 반대로 조금 거칠더라도, 그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삶의 바닥을 더듬고, 자기 안의 침전물을 건드리고, 그것을 지나 새로운 시야에 이르렀다면, 그 글에는 살아 있는 힘이 남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종이 위에 글자를 올려놓는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글을 자기 삶을 통과한 도구로 삼는 일이다. 글쓰기는 내가 얼마나 나를 다시 보게 되었는지, 나와 너와 우리를 얼마나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내 안에 막혀 있던 사유를 얼마나 흐르게 했는지를 가늠하는 생활 방식이다. 글이 내 삶 바깥에 놓인 장식물이 아니라, 내 삶 안으로 스며든 사유의 흔적이 되는 순간, 글쓰기는 하나의 수행에 가까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의 결실은 종이바카라의 출판에만 있지 않다. 글을 세상에 내보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시 세상 앞에 내놓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글쓰기의 더 깊은 출판은 자신이라는 바카라, 살아 있는 바카라으로서 자신을 세계에 펼쳐 보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쓴 문장이 나를 조금이라도 다르게 걷게 만들고, 다르게 듣게 만들고,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면, 그 글은 이미 내 삶 속에서 출판된 것이다.


현대는 더 빠르게 쓰고, 더 멀리 전달하고,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한다. 우리는 손끝 하나로 수많은 문장을 만들고, 지우고, 복제하고, 전송할 수 있다. 그러나 빠르게 전달되는 글이 반드시 깊이 남는 글은 아니다. 많이 쓰이는 글이 반드시 오래 살아남는 글도 아니다. 오히려 ‘뱡’ 자와 같은 문자 놀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오늘의 글에는 인간의 해학과 고뇌, 자기 투영과 성찰이 얼마나 살아 있는가. 우리는 글자를 단지 정보 전달의 도구로만 쓰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은 과거를 높이고 현대를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글쓰기 안에 오래된 생기를 다시 불러오기 위한 질문이다. 우리는 더 많은 도구를 갖게 되었지만, 그 도구를 통해 더 깊이 보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글이 빨라질수록 천천히 보는 눈이 필요하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하나의 글자 앞에 오래 머무르는 태도가 필요하다. ‘뱡’ 자는 바로 그 머무름의 가치를 가르쳐준다.


결국 나에게 도상학은 기이한 글자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 사유의 과정이다. 그것은 내가 글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해 주었다. 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자 안에서 무엇을 상상할 것인가. 그 상상이 어떻게 다시 나의 삶과 사유를 바꾸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이 없다면 글자는 그저 평평한 기호로 남을 뿐이다. 이 질문이 살아 있다면, 글자는 다시 그림이 되고, 그림은 기억이 되며, 기억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뱡’ 자는 그런 의미에서 한 그릇의 국수 이름이면서 동시에 글쓰기에 관한 오래된 비유라 할 만하다. 나는 그 국수를 실제로 맛본 적은 없지만, 오래 바라보고, 걷는 동안 떠올리고, 그 안의 획들을 이리저리 풀어보는 동안 한 덩어리의 글자를 한 젓가락씩 집어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자의 획은 면발이 되었고, 복잡한 구조는 솥 안의 움직임이 되었으며, 낯선 소리는 입안에 남는 맛처럼 오래 맴돌았다.


한 달여 동안 길을 걸으며, 이 복잡한 글자를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즐거움이 컸다. 그 과정에서 이 글자가 나에게 어떻게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는 어떻게 기억으로 축적되며, 기억은 어떻게 생활과 사유를 품게 되는지를 따라가 보는 일 역시 새로웠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문자의 도상학적 가치를 더 깊이 붙잡을 수 있었다. 글을 읽는 눈을 다시 열어, 글자 속에 숨어 있는 그림과 소리와 삶의 움직임을 보게 해 주는 것,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글자 바깥에 있던 나의 삶까지 다시 그려보게 되는 것 말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오래 기다린 뱡뱡면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운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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