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식의 프락시스(실현)

작은 철학시 4-10 해설 (3-3. 끝)

by푸른킴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까페로 되돌아왔다. 오는 길에 까페 옆으로 이어진 산바카라길을 일부러 빙 둘러왔다. 재밌는 것은 산바카라의 방식이 서로 조금씩 달랐다는 것인데, 바쇼는 걷다가 꽃이나 곤충이 나타나면 바로 멈춘다. 벤야민은 시종일관 길에 세워진 간판과 글들을 빠짐없이 읽는다. 그리곤 어느 한 단어에 감탄한다. 코헬렛은 하늘을 한번 보고, 땅을 본 뒤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뭔가를 수첩에 적는다. 김교신은 산바카라에서 만나는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멈춰서서 몇 마디 말도 나누고 꼭 악수하고 헤어진다. 아브라함 헤셀은 걷다가 잠시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린 후 심호흡을 한다. 가볍게 눈웃음을 혼자 짓고, 묵묵히 길을 걷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걷는 이와 말을 나누지 않은 채 말없이 걷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바로 걸으면 10분 정도 길을, 1시간 정도의 산바카라으로 마무리했다. 까페 안에 “시간에 기대어”, “바람이 불어오는 곳” 노래가 흐른다.)




나: 식사 잘 하셨나요? 맛있는 메뉴를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산바카라하는 길도 걷기에 딱 좋았던 것 같았는데, 어떠셨나요? 다음에는 ‘산바카라, 걷기’라는 주제로도 이야기를 한번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동: (고개를 끄덕이며)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나: 마실 차가 더 필요하신 분은 새롭게 주문하셔도 좋습니다. 이제 세 번째 세션에서 나눌 이야기는 이 철학시의 셋째 행,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 박초바람―”입니다. 이 시어를 중심으로 ‘안식의 실현’이라는 주제를 주로 다루겠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 자유로운 주제를 말씀하셔도 좋겠습니다. 특히 이번 주제는 ‘안식이 오늘날 실현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당위성에 좀 더 근거해서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안식’의 구체적인 프락시스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벤야민: 그렇군요. 세 번째 토론이 오늘 모임의 실제적인 필요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안식의 실현’을 당위성에 두고 말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해야 하나’가 아니라 ‘어떻게 해내야만하는가’라는 바카라임 윤리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코헬렛: 저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안식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특징을 배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배타적 특수성입니다. 종교적 언어 안에 갇힌 상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실현 불가능성입니다. 안식이라는 용어는 죽음과 직결된 특수한 용어로만 쓰이는 듯하고, 실제 생활에서는 휴식, 여가 등의 말로 더 편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교인들의 주일 인식도 안식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일요일에 더 바쁜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용어는 창조 질서의 핵심이며 전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는 슬롯적 의미조차도 확보하지 못한 가벼운 의미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헤셀: 슬롯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이번 주제를 ‘안식의 절대적 실현’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안식은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즐기지만, 안식은 하지 못하거나, 안식이라는 이름을 걸고 오랜 기간 휴가를 누리는 종교인이나 교수, 기업인들이 많지만, 그 안식의 기간 동안 안식의 효능을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바카라을 쓰며 시간을 보내거나, 기업체 탐방으로 자기 수익을 위한 기회로 삼는 것 같습니다, 결국, 안식은 ‘그림의 떡’인 셈입니다. 이 세계를 나와 너라는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또 다른 사물로 인식하는 삶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는 ‘안식의 실현’이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세션의 토의가 기대됩니다.


나: 맞습니다. 이번 주제는 ‘안식의 절대적 실현’을 위한 지혜를 나누려는 것입니다. 실현 가능성 여부가 다시 남아 있지만, 그 가능성마저도 논의의 항목에 두고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라 기대됩니다. 그러면 이번 이야기는 김교신 선생님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셋째 행에 대한 개인적 감상부터 가볍게 나눠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김교신: 그렇군요. 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하자면, 저는 사실 몸의 감각을 통해 신적 일치감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그 방법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늘 있었습니다. 경전을 소리내어 읽는 것도, 시를 낭송하는 것도 그런 ’신비한 일체감(mystica union)’을 경험하는 데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식사 후 산바카라할 때, 이 셋째 행을 천천히 암송해 봤습니다.


나: 아, 미리 준비하셨군요. 제가 제대로 이야기를 부탁드린 셈이네요. 기대됩니다.


김교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나를 관찰하신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암송하면서 떠올린 몇 가지 해석을 덧붙여 셋째 행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빠르게 지 나 가 는 내 안의~~ 너, 박.초.바.람―”


나: 아, ‘빠르게’는 실제로 글자 간격 없이 한 호흡으로 빠르게 읽으셨고, ‘지나가는’은 리듬을 느리게 해서 한 걸음씩 띄어서 읽어주셨습니다. 마치 뭔가 나를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내 안의 너’는 갈수록 느려지다가 ‘너’에서, 잠깐 쉬었습니다. 앞서 지나가던 것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너’라는 단어에서 끊어주셔서 이것이 ‘살아있는, 움직이는 어떤 것’처럼 들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초바람’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끊어주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박초바람은 뱃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바람인데, 요즘 같은 음력 5월경에 가볍게 불어서 돛을 밀어주고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따뜻한 信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배가 항구로 돌아갈 때 이 바람이 불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읽으신 이유를 직접 구체적으로 더 들어보겠습니다.


김교신: 아 잘 들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셋째 행을 떠올리면서 앞선 두 행과 제목을 다시 연상했습니다. ‘아무 일 하지 않아도, 내 등을 밀어주는’ 그것이 결국은 ‘박초바람’이었다고 자연스럽게 이해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덧붙여 이 시행의 리듬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리듬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곧, 의인화된 ‘박초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은 빠르게 들어왔다가 느릿하게 지나갑니다. 이를 상상하면, 바로 ‘휘돌다, 휘감다’라는 동작이 연상됩니다. 경전의 어구를 빌리면, ‘수면 위에 운행했다(창1:2)’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시행은 ‘바람’을 살아있는 것으로 묘사했고, 그 살아있는 바람이 인간의 밖에서 안으로, 다시 밖으로 나오는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 바람은 저에게 살아있는 인격체처럼 보여서 부제에 있는 것처럼 ‘거룩한 바람’과 깊이 연동하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바람처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헤셀: 맞습니다. 저도 아주 동감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암송을 들으면서 ‘내 안의 너’라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잠깐 계셨다가 먼저 가신 부버 선생님의 ‘나와 너’라는 관점과 잘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른 것은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명확한 실체가 아니라 뭔가 경계 없이 이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보통 ‘너’는 내 바깥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너’를 내 안에 머물게 합니다. 그것이 바람이라는 것을 김교신 선생님이 정확히 포착했지만, 사실, 사랑의 기억일 수도 있고, 양심의 목소리일 수도 있으며, 신성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온전히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시가 다시 일깨워주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내 안에는 이미 수 많은 타자가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 떠난 사람의 손길, 오래전의 상처, 아직 오지 않은 희망 말입니다. 이 시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바람으로 압축합니다.


바쇼: 저는 그 점에서 마지막의 “박초바람―”을 끊어서 읽어주신 것이 아주 기억에 남습니다. 보통 바람은, 끊이지 않고, 형체도 없으며, 구별되지 않고 다만 감각으로만 인식될 뿐입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그 바람을 분절해서 마치 바람이 한 걸음씩 인간 안으로 들어왔다가 휘감고 다시 돌아나가는 것 같은 이미지를 살려냈습니다. 암송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하여 그 암송을 들으면서 저도 이 시가 다시 해석되었습니다. 제가 쓴 하이쿠 중에 “첩첩 바위산의 바위보다 하얗도다, 가을의 바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산길을 넘어가다 만난 바위산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위산보다 더 제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바람’이었습니다. 바위산보다 하얗게 보인 가을의 바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바람도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체이고, 눈에 보이며,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 ‘박초바람’을 끌어들인 것은 참 묘수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니 바람은 하나의 인격체가 된 것이지 않습니까?


김교신: 아 그렇게 들어주시니 참 좋습니다. 제가 암송하고 마구 쏟아낸 해석이 어느 정도 공감될 수 있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사실, 얼핏 듣기에 이 이름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익숙한 말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시인이 직접 만든 낱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며 암송했을 때, ‘박초’라는 단어를 반복 하다보니 그 음감에는 맑고, 얇고, 푸르고, 갓 돋아난 것 같은 기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살던 조선 땅, 어느 한적 시골 숲에 이제 막 돋아난 초목의 새순 같고, 논밭의 이른 아침에 이슬 먹은 풀잎 같고, 아직 이름 붙기 전의 바람 같았습니다. 실제로 이 ‘박초’라는 이름에 ‘바람’이 붙으면서, 그 존재는 더욱 가볍고 빠르고 투명해졌습니다. 한 걸음씩 걷는 것 같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바다에서 배를 타며 생존하는 이들에게 이런 부드러운 바람은 참 신의 은총일 것 같았습니다. 저같은 사람에게도 박초바람은 세찬 폭풍이 아니라, 마음의 가장 연한 자리만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이었습니다.


코헬렛: 아, 슬롯자님이 이 박초바람을 풀이해 주셨을 때, 바로 그 뜻과 일치한 것이군요. 삶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바람의 숨결...그래요, 이 바람은 역시 그런 촉감이 살아있죠. 그런데 아시는 것처럼 저는 오랫동안 제 삶을 관찰하면서 ‘헤벨’이라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 헤벨에 대한 촉감을 떠올리면서 선택한 연관 단어가 바로 ‘바람’이었습니다. 방향도 없고, 기원도 모르며, 실체는 더욱 없는 바람, 그것이 헤벨을 설명할 때 가장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셋째 행을 읽고, 또 김 선생님의 암송을 들으면서 한가지 새롭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바람’은 위로이고 동력인 것 같은 감성이라는 점입니다. ‘휘감다’라는 표현이 그래서 적절한 것 같습니다. 우리 전승 중에 ‘거룩한 바람’이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신이 주도하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바람이 가끔 저에게 따뜻하고, 감싸안는 느낌을 줄 때가 있습니다. 경험하기는 어려웠지만, 박초바람 역시 왠지 꼭 그런 느낌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교신: 맞습니다. 제가 산바카라길에서 이 시구를 암송할 때, 마침 가볍게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 제 몸을 앞으로 조금 밀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박초바람’이 이런 것인가 싶었습니다.


벤야민: 말씀을 듣고 있으니 딱딱한 심성에 길들여진 저에게도 어떤 고결한 바람이 훅 스쳐 지나가는 듯합니다. 저에게 부족한 것 하나가 바로 사물과 세계를 감성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여러분의 말씀 속에는 정서를 도구로 한 해석의 결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사실, 저는 김 선생님의 암송을 다시 들으며, 제가 앞서 읽고 들었던 이 시를 다시 살펴봤습니다.


문득, 이 시를 쓴 시인, 슬롯자시죠? 이 시를 어떤 상황에서 썼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아마도 미래를 내다보고 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맞다면, 이 시는 과거의 바람이 현재로 불어와 시인의 몸의 감각을 총체적으로 건드렸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김 선생님이 ‘박. 초. 바. 람’이라고 끊어 읽을 때, 저는 과거의 바람이 현재 시인의 몸결을 글자 하나하나로 찌르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슬롯자님, 시인으로서 이 시는 어떤 상태에서 이 각성의 느낌을 시로 썼는지 궁금합니다.

나: 아, 이런 식으로 저를 대화에 참여시키시는 군요.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제 말을 잠깐 드리면, 저는 이 시를 기독교 전통인 ‘성령강림주일, 일요일 아침’에 바카라상에서 적었습니다. 저는 글을 마무리할 때, 산바카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날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은 저에게 분주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성령강림주일은 거룩한 바람이 1세기 초반,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 사이를 휘돌아 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저도 역시 그 흐름을 이어받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관점에서 이날의 바람을 생각했습니다. 그 바람은 인간의 삶에 가벼운 변침을 일으키는 신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력은 매일 매순간 나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일요일은 그 바람의 주기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함께 경험하는 공동체성의 동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주기가 오늘날 일주일 단위의 시간 흐름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 바람은 함께 모인 사람을 지지하고, 지탱하게 하며, 전진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도 저의 기저에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날 아침, 감정이 고양되기보다 가라앉는 나 자신을 경험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우리 나라 역사에서 저에게 슬픈 일 중에 하나인 전직 대통령의 서거 사건이 있던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과 나의 삶이 전혀 연관되지 않지만, 돌아보면, 그 지도자의 통치가 지금 나의 삶에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기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가 생을 마감한 바위에 불었던 바람이 지금 나를 지지하는 바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는 1세기 공동체에 불었던 그 과거의 바람이 오늘 내 삶을 찌른다는 벤야민 선생님의 역사관이 스며있고, 나와 너의 슬롯적 관계라는 점에서 김교신 선생님의 슬롯적 영성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벤야민: 아, 그렇군요. 그것 참 묘한 공감입니다. 저는 역사의 관점을 거시적인 것으로만 이해해 왔는데, 지금 슬롯자님의 이야기는 아주 미시적인 개인 경험이 거대한 세계관과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바람이 오늘이 나를 찔러준다는 저의 거대 담론이 제 머리에만 맴돌다 제 몸에 내려 닿는 살가운 느낌을 줍니다. 생각해 보니 이 시에 담긴 철학은 결국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대한 신뢰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사건과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삶을 실제로 바꾸는 것은 때로 아주 미세한 내면의 흔들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를 ‘흔한 일요일’이라는 제목에 담았다는 것도 역사 논쟁의 보편성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칠일 마다 돌아 오는 일요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누구도 일을 쉬지 않으려는 일요일, 누군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 마음은 부스럭거리며 다시 자리를 고쳐 앉게 하는 일요일입니다.


헤셀: 나아가 어떤 ‘너’가 내 안을 지나가고, 그 지나감 때문에 나는 조금 다르게 숨 쉬는 안식의 일요일인 셈입니다.


벤야민: 맞습니다.


헤셀: 제 생각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안식의 실현이라는 우리 주제에 부합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도출된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성스러움이 특별한 장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거룩함은 성전의 높은 천장 아래에도 있지만, 흔한 일요일의 조용한 방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후, 커튼을 흔드는 바람, 마음속에서 이름 없이 지나가는 누군가. 그 모든 것이 삶의 은밀한 예식이 됩니다. 시인은 거창한 선언 없이, 아주 짧은 몇 행으로 일상의 신성을 붙잡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의 실현은 말 그대로 ‘안식하라’는 권면을 받아들이는 일일 것입니다. 일요일에 쉬라는 계명이 아니라,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말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살아가는 본연의 계명에 담긴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의 실현은 안식을 지키는 그 자체입니다.


바쇼: 저 역시, 그 말에 동의합니다. 여행을 실현하는 것은 여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의 성취가 일요일의 삶을 억지로 실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이 시는 그저 ‘바람’을 그려냅니다. 바람을 설명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고, 바람이 일으키는 운동을 이름에 붙여 살려냅니다. 바람에 실려가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시인이 남겨 준 바람의 형체를 상상하며, 그 빈 시공간으로 걸어가 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머물다 간 나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도 그런 ‘너’가 있었는지, 나를 조용히 밀어 주던 바람이 있었는지, 아무 일 없는 날에도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일이 영혼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걸었던 수많은 길을 그 바람도 함께 걸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니 마음이 뭉클합니다.


코헬렛: 바쇼 선생님의 감성이 제 마음을 다독여줍니다. 저 역시도 이 시 「흔한 일요일」은 쉬는 날에 관한 시가 아니라, 존재가 다시 숨을 고르는 날에 관한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순간에도 마음은 살아 있고, 보이지 않는 바람은 우리를 밀어주며, 빠르게 지나가는 ‘너’는 내 안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면서도 어떤 흔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의 실현’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연의 정신대로 ‘자기 유익을 위한 일을 멈추고, 타인의 유익을 위한 일에 참여한다’가 될 것입니다. 안식은 타인의 즐거움에 스스로 참여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가장 흔한 일요일, 우리 안에는 가장 거룩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타인의 유익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도록 후원하고 지지해줍니다. 결국, 우리는 바람을 따라 바람의 길로 가야 하는 피조물입니다. 더욱 더.


헤셀: 여러분, 이 시가 ‘일요일’을 ‘흔한’이라고 표현한 것이 참 좋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천착한 카발라 신학의 어두움의 신비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 어두움 아래 안식하는 신의 여유를 상상해 봅니다. 안식은 본래 빛나고 화려한 축제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분주함과 유용성의 가치가 죽음을 맞이하는 날, 즉 일종의 ‘거룩한 정지’이지요. 이 시에서 어떤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적 속에서 “부스럭부스럭” 미세한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바닥, 세상이 보기엔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그 ‘검은 침묵’ 속에서 비로소 안식의 참된 창조가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나: 사실, 이 시는 바로 그 점을 포착한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을 너무 밝은 세계로 끌어내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안식이 오히려, 어둠에서 더 빛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은 ‘검은 안식’이라 이름 붙이고, 계속해서 사유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헤셀 선생님이 그 점을 바로 짚어 주시니 영광입니다. 검은 안식이라는 철학은 저 개인적으로 안식의 실현에 부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어두운 밤 같은 길에 자기 발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코헬렛: 헤셀 랍비님, 그리고 슬롯자님의 말을 들으니, 그 ‘검은 안식’이라는 표현이 내 가슴을 쿵쾅거리게 합니다. 내가 평생 해 아래서 수고하는 인간들을 보며 외친 것이 바로 그것이니 말입니다. "헤벨, 헤벨, 핫콜 헤벨”이라는 슬로건입니다. 실상, 이 땅의 사람들은 어둠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려고 소란을 피웁니다. 하지만, 달력이 생기기 전부터 일요일, 안식의 시간은 모든 자기 수고를 멈추는 무(無)의 시간, 즉 검은 심연의 시간으로 주어졌습니다. 창조주도 이 마지막 날에서 만큼은 ‘좋다(토브)’라는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어둠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해도”라고 쓴 첫 행은 그런 모든 성취의 빛이 꺼진 상태를 받아들이는 어둠의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캄캄한 멈춤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진짜 바닥을 마주하고, 존재의 방향을 천천히 바꾸게 되지요.


김교신: 코헬렛 선생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조선의 거친 땅에서 성서의 진리를 외치며 붙들었던 것도 바로 그 ‘아무것도 없음’의 영성이었습니다. 제가 주창한 조선산 기독교는 바로 이 무위의 전통에 서 있기도 합니다. 일요일은 그저 예배당의 화려한 제단 아래서 위로받는 날이 아닙니다. 식민지의 암담한 현실처럼, 신이 침묵하는 듯한 ‘검은 안식’의 자리에서 홀로 무릎을 꿇는 날입니다. 제가 시 속의 ‘박초바람’을 거창한 구원의 폭풍이 아니라, 차갑고 어두운 방 한구석으로 스며드는 미세한 숨결, 호흡처럼 읽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걸음을 걷는 ‘억압의 땅’으로 들어온 하늘의 숨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에 밀려 쓰러진 조선의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은 몰아치는 다그침이 아니라, “부스럭거리며 뒤에서 살며시 밀어주는” 그 나직한 바람이라는 것도 저는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안식의 실현’은 역사적이고 슬롯적인 실천이면서 그 슬롯 속에 머무는 개인의 내면을 다독이는 것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주체적인 자기 역사 인식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벤야민: 김교신 선생의 ‘식민지적 현실’과 ‘신의 침묵’이라는 화두는 제 사유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역사적 안식, 그것은 묵시록적 멈춤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검은 안식’의 형태를 띱니다. 자본주의라는 폭주 기관차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빛을 향해 달리라고 강요하지만, 안식은 그 연속성을 과감히 부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브레이크입니다. 이 셋째 행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를 다시 생각하면, 그것은 곧 삶을 제동과 질주로 조율하는 내 밖의 주체입니다. 나는 그것을 과거, 역사라고 이해합니다. 특히 ‘너’는 승리자의 기억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잊히고 짓밟힌 자들의 슬픈 실루엣이자, 파편화된 기억입니다. 그 어둡고 아픈 지난 날의 ‘너'’ 일요일의 멈춤 속에서 바람처럼 스쳐 가며 되살아날 때, 나는 비로소 진정한 우리의 구원이 사유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나에게 ‘안식의 실현’은 과거의 되살림 입니다. 역사의 인식을 넘어 역사를 현재 삶을 조율하는 실천적 항목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 와 논의가 아주 깊어졌습니다. 특히 안식의 실현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소개되어 제가 조금 흥분됩니다. ‘검은 안식’이라는 용어를 직접 다뤄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일단, 여기까지 나눈 이야기들을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헤셀 선생님은 모든 유용성이 죽고 시작되는 “거룩한 침묵의 성소”에 들어가는 실현, 코헬렛 님은 모든 성취의 빛이 꺼진 “무(無)와 허무의 직면”이라는 삶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김교신 선생님은 신이 침묵하는 고난 속에서 홀로 맞는 “조선산(産) 슬롯 역사적 영성”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벤야민 님은 파멸의 폭주를 멈추고 파편을 마주하는 “구원의 브레이크로서 역사의 현재 소환”을 통한 안식의 실현을, 바쇼 선생님은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다 스러지는 여행자처럼 “찰나의 여백”을 붙잡는 문학적 감각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때 마틴 부버가 다시 까페로 들어선다. 다시 반갑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물을 한 컵 들이킨다.)


바쇼: 사실, 앞서 대화를 들으면서 모두가 안식의 무겁고 깊은 심연을 적확하게 말씀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다녔던 길의 풍경과 내가 보았던 사물들을 떠올려보니 그 검은 안식이 지닌 가벼움과 투명함에 주목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박초바람―”이라는 표현에 붙어 있는 말 줄임표가 그 근거입니다. 저 말 뒤에 숨은 여백이 있습니다. 만약 안식이 검은빛을 띤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붙잡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내 눈앞에 둘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스스로 자기를 가꾸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그 세계도 나를 함부로 어떤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분명 존재하지만 이름을 부르면 빠르게 사라지는 “너”라는 표현은 그래서 저를 압도합니다. 만약 그것이 안식이라면, 그것은 제가 경험했던 길가의 바람, 꽃잎, 벌레 한 마리의 움직임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담고 있지만, 함부로 그것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 오래 머물러 그 권위를 드러내지 않고, 잠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흔적만을 남깁니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나를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순전히 제가 그 사물에 감탄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물과 만나는 순간, 그 잠깐의 시간에도 저는 내 내면의 방을 온전히 비워두게 됩니다. 그리고 검은 여백 속으로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 깃들어갑니다.


결국, 안식의 실현이란, 거대한 자연을 자기 미미한 몸으로 마주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모든 사유의 출발일 것입니다.


헤셀: 바쇼 선생님의 말씀이 저를 바람처럼 살포시 다독여 줍니다. 저는 어둠과 안식을 결부할 때마다 신이 부재(不在)하는 듯한 고통의 시간을 상상합니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신의 가장 은밀한 현재(現在)를 증명하는 것이라 여기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신은 요란한 빛 속에만 계시지 않고,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마음의 가장 연한 먼지 속에 숨어 계십니다.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그저 쓰러지지 말라고 등 뒤를 가볍게 받쳐 주는 따뜻한 신풍(信風)으로 말입니다. 그것을 바쇼 선생님은 풀 한 포기, 바람 한숨, 벌레 한 마리의 앞에 멈춘 인간의 자기 겸손으로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김교신: 그렇습니다. 겉보기에는 무의미하고 어두운, 흔하디 흔한 일요일 오후의 정적 같지만, 그 빈틈을 통해 영혼은 겨우 숨을 고르고 다시 자리를 고쳐 앉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유가 빼앗기고, 삶이 통제 속에 있는 이들의 ‘일요일’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실까요? 지금처럼 자유로운 세상이 아니라면, 그 일요일은 오히려 재앙 같은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평안함’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게으름마저 허용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즉 ‘암흑’ 같아도 그래도 성전으로 향할 수 있는 미미한 자유라도 있어서 신과 단독자로 마주할 수 있는 경건의 날을 행복하게 맞이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선의 역사에서 어느 일요일은 검은 동굴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안식을 빙자한 죽음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 일요일은 흔한 일요일이면서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갈지 아닐지를 불안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월요일의 거대한 노동과 고난이 오히려 행복한 때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그 시절 일요일은 코헬렛 선생님이 말씀하신 ‘헤벨 중의 헤벨’이었을 것입니다.


코헬렛: 아, 그것 참 슬프면서도 쉽게 망각하는 인간의 습성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시가 품은 조용한 역설이 '검은 안식'의 필연성을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흔하고 어두운 날, 우리가 타인을 향한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멈추어 설 때, 비로소 존재 안쪽의 은밀한 밀림이 시작될 것입니다.


벤야민: 이 ‘흔한 일요일’의 어둠 속에서 불어오는 거룩한 바람이, 역사와 일상의 폭풍에 마모된 우리 모두에게 묵직한 구원의 여운을 남겨 줍니다. 우리는 이 어둠을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다르게 숨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잠시 노래가 흐르고 침묵도 따라 흐른다. 참여자들은 더 말을 얹지 않고, 서늘해진 공기 속에서 각자의 검은 안식을 사유한다. 창문 틈새로 부스럭거리며 불어오는 ‘박초바람’만이, 그들의 묵직한 침묵 위를 다정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나: 말씀들이 주옥같아서, 제가 다른 말을 거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만 간단히 요약하면, 안식의 실현은 ‘안식을 실제로 실현해야 한다’라는 것으로 집약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유나, 바카라상 위 이성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길에서 거리에서 삶에서 실현해야 할 자기 단절이자, 자기 호흡이라는 말도 핵심적인 내용 같습니다. 특히 안식은 자기 이익을 멈추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기 삶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실천 방안을 귀담아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셀: 여러분, 오늘은 레벤슨 선생님이 와 주셔서 이 대화가 한층 더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화에 대해서는 조금 긴 침묵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안식의 실현이라는 실천적 주제에 레벤슨 선생님의 혜안이 어떻게 발휘될지 말입니다.


레벤슨: 저를 지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시의 암송과 논의를 들으며 생각이 복잡해지고, 여러 주제가 질서 없이 제 사유를 흔들었습니다. 방안의 정적이 깊어지는 동안, 선생님들이 논의도 더 묵직해져서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앞선 나눠주신 이야기에서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한” 일요일을 ‘검은 안식’의 관점으로 읽어가는 것에 놀랐습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 이 주제를 고민해 왔는데 여러 선생님은 그 주제를 그저 사유가 아니라 자기 삶으로 직접 체험해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안식은 그저 빛나는 축제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든 유용성과 생산성의 불이 꺼진 상태, 즉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과 마주하는 거룩한 침묵의 성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두꺼운 바카라을 내려놓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제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자면, 헤셀 선생님의 성소(Sanctuary) 개념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흔히 창세기의 안식을 ‘완전한 평화’로만 보려는 것은 기울어진 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히브리 텍스트가 신의 창조에는 혼돈(Chaos)이 허용되어 있다고 기록한다는 점입니다. 신은 그 혼돈을 완전히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통제’하고 있을 뿐입니다. 앞서 제가 욥이라는 인물을 잠시 언급했는데, 바로 이 욥이 그 점을 포착했습니다(참고. 욥기 38장)


이런 혼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요일이라는 안식은 그 자체로 완전한 쉼의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빛 뒤에 도사린 검은 혼돈의 세력이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음을 직시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저는 왜 번개처럼 각성하지 못하고 부스럭거린다고 표현했을까?를 공감하면서 다시 해석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혼돈과 어둠이 그만큼 무겁기 때문입니다. 검은 안식은 그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 겨우 숨을 고르는 치열하면서도 느릿한 질서 회복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안식의 실현이란 다름 아닌 세계의 혼돈을 신이 허용한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부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신은 ‘혼돈’을 내 삶에 허용했는가?


코헬렛: 레벤슨 선생님의 ‘혼돈’이라는 말이 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가 평생 해 아래서 본 것이 바로 그 혼돈이자 공허(虛無)였으니 말입니다. 저와 비슷한 시대에 중국의 장자라는 인물도 이 주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들이 아무리 바벨탑 같은 성취를 쌓아 올려도 일요일이 오면 모든 것은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율령이었지 않습니까? 그것을 지키면 해당하는 보상을 신이 주신다는 말로 다독이면서 말이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보상도 모든 사람에게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특정한 몇몇 사람만이 그 혜택을 누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나누는 검은 안식이라는 말은 신조어가 아니라 저보다 더 오래전부터 생겨난 생활의 지혜였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 올린 가짜 빛들을 다 끄고, 삶의 근원적인 허무와 독대하는 시간은 언제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캄캄한 정적 속에서 “박초바람” 같은 미세한 숨결을 느끼는 것만이, 이 허무한 세상에서 존재가 미치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한 길 아니겠습니까? 레벤슨 선생님이 질문하신 것처럼 신이 혼돈을 통제하면서 허락한 이유는 어쩌면, 그 혼돈이야말로, 저의 언어로는 ‘헤벨’이야말로 인간의 삶속에 들어가 ‘헤벨 담론’을 만들어내는 순간, 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타인의 가치를 받아들이게 하며, 삶의 감춰진 부분 속에 신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혼돈은 인간이 끝내 해결할 수 없는 상태로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다행히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 혼돈의 잔존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 삶을 제어하고, 선과악의 불투명한 경계에서 ‘악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끝내 모든 삶의 혼돈을 마지막 날 창조주가 ‘심판(미쉬파트)’할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혼돈이 남아있는 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김교신: (창밖의 어두워지는 하늘을 잠시 내다보다가) 조선의 겨울을 지낼 때, 저는 신이 이 민족을 버리신 것 같은 절대적인 암흑을 경험했습니다. 그 시절 제가 맞이한 일요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습니다. ‘검은 안식’ 참 적확한 이름입니다. 그 시절도 지금처럼 예배당의 화려한 오르간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게 들려도 그곳은 언제나 아무 소리도 없는 텅 빈 방, 신의 침묵만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간에서 그 어둠을 짊어지고 홀로 무릎을 꿇었던 이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라는 바람에 휘감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 그 암흑 속에서 우리가 미처 몰랐지만, 우리가 끝내 붙잡을 수 없었던 존재가 바로 우리 옆에 분명히 있었습니다. 바로 ‘바람 같은 너’였습니다. 그는 고난받는 이웃의 얼굴이자, 우리를 다그치지 않고 “쓰러지지 말라고 뒤에서 살며시 밀어주는” 다정한 신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날 그 바람이 저에게는 곧 검은 안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부재(不在) 속에서 오히려 신의 가장 깊은 현존을 길어 올리는 고독한 기도를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신의 현존이었습니다. 솔직히, 독립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무모한 해방 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었던 힘은 수시로 그 바람의 어루만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확신합니다.


나: 아, 참 감동입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멈출 수 없는 진솔한 고백 같습니다. 대화의 밀도가 높아 여기서 한번 앞서 말씀하신 “검은 안식”에 대해 그 사유의 층위를 제가 잠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레벤슨 선생님은 검은 안식을 혼돈(Chaos)의 세력을 직시하며 세우는 “역설적 질서”로, 헤셀 선생님은 생산성이 죽은 자리에서 마주하는 “거룩한 어둠의 성소에서 만나는 침묵”으로, 코헬렛 선생님은 모든 가짜 빛이 꺼진 뒤 독대하는 “근원적이며 희망적인 허무”로, 김교신 선생님은 역사적 암흑기와 신의 침묵 속에서 깨어나는 “참된 슬롯적 영성”으로, 벤야민 선생님은 파멸로 향하는 시간의 영속성을 부수는 “구원의 역사적 멈춤”으로, 끝으로 바쇼 선생님은 붙잡을 수 없는 ‘너’를 향해 열어두는 “비움과 숨겨짐의 여백”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밤이 깊어서 이야기를 차츰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분씩 마지막 말씀하실 시간 드리겠습니다. 덧붙여 다른,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충분히 말씀 나눠주셔도 좋겠습니다.


벤야민: 김교신 선생이 경험한 식민지의 암흑이야말로 제가 말한 ‘비상사태’의 연속선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란 언제나 승리자들의 화려한 빛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이면은 늘 패배자들의 피로 얼룩진 검은 밤입니다. 안식은 그 폭주하는 역사의 기차를 멈춰 세우는 행위입니다. 앞서 읽어주신 시,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에서 빠르다가 느려지고, 느려지다 스타카토로 남긴 암송은 바로 역사 속에서 잊힌 자들의 부서진 파편들처럼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하여 검은 안식은 우리가 그 어두운 파편들을 외면하지 않고, 일요일의 정적 속에서 마주하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 멈춤의 틈새로 ‘박초바람’이 불어올 때, 비로소 거짓된 진보가 아닌 참된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확신도 새롭게 해봅니다.


바쇼: (어둠 속에서 가만히 부채를 접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게 검은 안식은 지극히 가볍고 투명한 여백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여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하이쿠야말로 제가 경험한 검은 안식의 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하이쿠 중 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진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제가 ‘밤의 정적 속에서 들리는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를 들었던 작품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아차 싶었습니다. 저는 그날 개구리가 호수로 첨벙 뛰어드는 소리를 우주의 파열음으로 들었지만, 사실은 검은 밤에 일어나는 균열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저의 밤을 소유하고, 그 밤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도구로 개구리 소리를 이용한 셈입니다. 하지만, 정작 제가 그려내야 했던 것은 그 개구리 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스며든 빛의 한 편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언급한 “박초바람―”같은 것이었습니다. 안식은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소리처럼 스쳐 지나가며 사라지는 것임을 지금 알았습니다. 그 우주적 바람과 소리는 내 안의 어둠과 허무를 억지로 몰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나의 방을 스스로 가만히 비워둘 때, 그 검은 여백 속으로 깃들어 나의 마음을 정갈하게 치워주는 것입니다.


레벤슨: 바쇼 선생님의 ‘비움’과 ‘여백’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입니다. 이 사유는 경계가 있되 경계 없음의 자유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히브리 성서의 창조 서사에서도 신은 혼돈을 멸절시키지 않으면서 그것들이 머물 ‘경계’를 정해주셨습니다. 삶이란 대체로 이 경계 안에 있을 때 안정됩니다. 질서유지와 규율 준수가 바로 좋은 예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요일은 그런 마음의 경계를 지키라는 슬롯적, 종교적 규율 같습니다. 그것은 내 안의 어둠과 혼돈을 억지로 없애라는 법의 압박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논의에서 이날이 혼돈을 그대로 허용하는 날이라는 것을 다시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것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가만히 바라보며 공존하는 날입니다. 결국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해도” 내 안에서는 우주적인 경계선이 다시 보이지 않게 그어지고, 나는 그 경계선 너머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셈이지요. 쓰러지지 않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그 박초바람 덕분입니다. 혼돈의 바다 위를 운행하던 신의 거룩한 숨결(루아흐 Ruah)과 다름없는 그 바람 덕분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바쇼 선생님의 비움과 여백의 사유와 맞닿을 것입니다.


헤셀: 결국 우리는 이 ‘흔한 일요일’의 어둠 속에서 역설적인 구원을 얻는군요. 세상이 주는 화려한 위로가 다 사라진 듯해도 ‘검은 안식’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존재가 다시 숨을 고르는 법을 배웁니다.


코헬렛: 그렇고말고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를 멈춘 이 검은 일요일 오후야말로, 영혼 속에서 가장 깊은 일이 일어나는 거룩한 예배의 시간이 틀림없습니다.


벤야민: 아 잠깐, 지금 막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이왕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 왔으니 우리의 사유를 오늘날 현대인들이 처한 실존적 파국으로 가져와 생각을 좀 모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최근 철학자 한병철 선생님이 우리 슬롯를 ‘피로슬롯(Burnout Society)’로 규정했습니다. 성과주의라는 가짜 빛에 눈이 먼 현대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며 내달린다는 비평도 곁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맥락에서 ‘흔한 일요일’의 무위(無爲)는 단순한 휴식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논의가 더욱 현실적 프락시스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헤셀: 제 생각에는 무위라는 사유가 자본이 부과한 모든 생산적 주체성을 거부하는 ‘신성한 무력함(Divine Impotence)’의 상태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시의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해도”라는 구절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할 수 있음(Can)’의 명령을 멈추고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wer Not To Do)’을 회복하는 강력한 정치적·철학적 저항입니다.


나: 아, 무위는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군요. 그것이 슬롯적 저항이라는 말씀도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레벤슨: 벤야민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그것에 마르틴 하이데거 선생님의 개념을 더해보고 싶군요.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 슬롯가 모든 존재를 몰아세우며, 그저 계산 가능한 ‘부품(Ge-stell)’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죠. 하지만 안식의 일요일은 인간을 ‘유용성의 도구’에서 해방시켜, 존재 자체로 머물게 하는 ‘존재론적 차이(Ontological Difference)’를 드러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슬롯자이신 시인은 바람이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살며시 밀어준다”라고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인간을 부품으로 ‘몰아세우는’ 현대 기술 문명의 폭력성에 대항하여, 존재가 스스로 숨 쉴 수 있도록 경계를 지켜주는 우주적 보살핌(Sorge)의 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말씀은 안식의 일요일은 기계론적 인간 이해를 해방시킨다는 말씀이십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은 우주적 보살핌을 받는 존재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헤셀: 하이데거의 우주적 보살핌이라... 그렇다면 저는 (가짜 이미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SN우리는 안식을 너무 밝은 세계로 끌어내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안식이 오히려, 어둠에서 더 빛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S의 화려한 이미지, 소비가 주는 가짜 만족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앞서 나눈 대로, ‘검은 안식’이 깊은 심연으로 다가올 수 있는 힘은 일요일이 오면 그 모든 화려한 가짜 빛(시뮬라크르)을 꺼버릴 때 일어납니다. 물론, 그 불이 꺼진 캄캄한 방에서 마주하는 고독은 고통스럽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불꺼짐에서 참된 실존을 보게 합니다. 시 속의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라는 촉각적 음성이야말로, 가짜 영상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가공되지 않은 ‘존재의 날것 그대로의 소리’ 아닐까요?


김교신: 제 짧은 지식이지만,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권력에 의해 법적·슬롯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벌거벗겨진 생명,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말했습니다. 제가 살았던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바로 그 벌거벗은 생명들이었지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주권을 빼앗긴 이들에게 일요일의 안식은 ‘검은 암흑’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서는 저는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 박초바람.”이라는 말을 다시 듣습니다. 모든 권리와 빛을 박탈당한 그 검은 안식의 자리에서, 인간은 도리어 권력이 침해할 수 없는 ‘형태-삶(Form-of-Life)’, 즉 가치나 유용성으로 재단할 수 없는 고유한 생명의 거룩함을 발견한다는 말로 이해하니 마음이 다독여집니다. 안식은 권력이 규정한 쓸모의 세계로부터 탈주하는 날이니 말입니다.


나: 두 분의 말씀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검은 안식의 관점에서 안식의 일요일은 ‘가짜, 거짓의 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슬롯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을 일개워주셨습니다.


코헬렛: 저는 철학의 관점을 하나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세상이 미친 듯이 빨라지는 ‘가속주의(Accelerationism)’를 말하더군요. 속도가 곧 종교가 된 세상이지요. 시의 마지막 단어인 “박초바람”은 돛을 밀어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바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엄청난 철학적 역설이 발생합니다.


세상의 가속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파멸로 몰고 가지만, 안식의 ‘박초바람’이 주는 가속은 영혼을 본연의 고향으로 빠르게 돌려보내는 ‘역설적 가속’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하지 않는 듯” 멈춰 서 있는 일요일의 방 안에서, 우리의 내면은 세상의 속도를 초월하여 영원의 궤도로 가장 빠르게 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코헬렛 선생님은 안식의 일요일이 속도의 문제를 조절한다고 보시는군요. 멈춘 듯 느릿하게 흘러가도 삶은 제 길로 갈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제 제가, 말씀해주신 현대 철학 개념과 안식의 일요일이 연동하는 개념을 한번 더 정리하겠습니다. 벤야민 선생님은 피로슬롯에 저항하는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으로, 레벤슨 선생님은 계산 가능한 부품에서 벗어난 “존재의 머묾”으로, 헤셀 선생님은 가짜 이미지(시뮬라크르)가 꺼진 뒤의 “실존적 대면”으로, 김교신 선생님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밀려난 자들의 자리에서 찾는 “대안적 생명”으로, 코헬렛 선생님은 가속주의(Accelerationism)의 기차를 멈추는 “회복”으로, 바쇼 선생님은 해체(Deconstruction) 이후에 찾아오는 “순수한 여백”과 연관지어 주셨습니다. 자 조금 더 이야기하실 분 계실까요?


헤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Deconstruction)’가 떠오르는군요. 데리다는 중심과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고 여백과 차연(Différance)을 중시했습니다. 안식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언어와 중심의 세계’를 해체하는 날입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박초바람―” 뒤에 붙은 긴 문장부호처럼, 모든 의미의 강박이 해체된 그 검은 안식의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고정되지 않은 "내 안의 너"를 환대(Hospitality)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규정할 수 없는 타자가 내 안을 자유롭게 스쳐 지나가도록 나를 비워두는 것, 그것이 현대의 사막화된 삶을 구원하는 안식의 진면목일 것입니다.


나: 아 차연은 중요한 관점이죠. 안식은 모든 것이 획일되는 결정적 날이 아니라, 작은 차이들이 이어져 새로운 다름으로 전이되는 날이니 말입니다.


레벤슨: 지금 우리가 현대 철학의 언어로 읽어낸 ‘검은 안식’은, 결국, 단순한 ‘쉼’이 아니라 이 세계의 지배적인 질서(생산성, 가속, 기술, 도구화)에 균열을 내는 가장 급진적인 실존적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쇼: 그렇습니다. 흔하디흔한 일요일, 그 조용한 방 안에서 우리는 매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거룩한 반역을 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어둠 속에서 불어오는 박초바람을 맞으며 말입니다.


벤야민: 시간의 연속성을 끊는 안식을 말하다 보니, 마침내 이 사유의 뿌리에 계신 두 분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로 주전 8세기의 유다의 혼란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이사야와 주후 1세기의 로마 식민지였던 유다 출신 예수의 말입니다. 이분들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현대인들이 겪는 ‘피로슬롯’의 절망이 사실 인류의 오랜 고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스템에 의해 삶이 도구화되고 마모되는 현실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말이 나온 김에, 제가 이사야와 예수의 목소리를 가상으로 재현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을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요? 잠깐 준비를 좀 하겠습니다.


현대 철학의 첨단 사유로 채워졌던 늦은 밤의 방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와 1세기 나사렛 예수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이들의 이름은 ‘구원’이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 이들의 등장은 ‘검은 안식’의 개념이 구원과 관련된 용어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를 통해 현대적 병리(피로슬롯, 도구화)에 대한 저항을 넘어, 우주적 해방(Jubilee), 억압당한 자들의 회복, 그리고 율법의 문자를 넘어선 생명의 도약이라는 신학적·실존적 절정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나: 네, 그럼 그 사이에 제가 간단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선생님들의 대화가 깊어지자 이 까페마저도 그 어둠이 더는 두려움이나 공허의 색이 아닌, 모든 가능성을 품은 비어있음의 색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말씀 속에서 현대 슬롯의 거대한 소음과 섬처럼 존재하는 일요일의 밤이 오히려 축복의 날로 회복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폭주하는 세계의 한복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흔한 날에, 그들의 영혼은 거룩한 바람을 타고 가장 깊은 안식의 중심으로 항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벤야민: 자 준비됐습니다.


가상 목소리 이사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외쳤던 날들을 기억하오. 당시 권력자들은 안식일에도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혔다”(이사야 58장)라고 신의 분노를 전했오. 그들이 말하는 안식은 겉만 번지르르한 종교적 외식이었소.


벤야민: 이 말을 들어보면 우리가 논의하는 안식의 일요일,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검은 안식’은 내 눈앞의 어둠—즉, ‘결박을 풀어주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이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라는 것과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억압받는 자들의 마른 뼈가 움직이는 소리이자, 짓밟힌 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신의 해방의 숨결(Ruah)이니 말입니다.


가상의 목소리 예수: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것은 올바른 말입니다. 내가 지금 1세기 유대 땅에서 마주했던 이들도 종교라는 무거운 멍에와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벌거벗은 생명들’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수많은 문자에 갇혀, 정작 안식의 중심에 있는 '인간'을 보지 못했지요.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선언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라고 말입니다.


벤야민: 이 말은 우리 논의에서도 중요한 관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 속에는 현대 철학이 말하는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나 ‘도구화에서의 탈주’라는 사상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은 인간을 체제와 율법 아래 종속시키는 날이 아니라, 시스템의 모든 명령을 정지시키고 생명 그 자체의 존엄을 선포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나: 아, 아주 중요한 점을 한번 더 짚어 주셨습니다. 이사야와 예수는 시대는 다르지만, 사상적으로 연동되며 거의 같은 주제를 선포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안식의 완성이 무엇인가?하는 주제입니다. 요약하면, 이사야는 슬롯적 결박을 풀고 억압을 꺾는 “우주적 해방”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예수는 율법과 체제를 넘어 생명을 최우선하는 “존재 자체의 인간성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벤슨: 예수 선생의 말씀은 창조 전의 ‘혼돈’을 다스리시는 신의 우주적 통치를 연상시킵니다. 율법의 문자에 갇힌 안식은 또 다른 혼돈일 뿐이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멍에를 꺾는 안식'이야말로, 세상의 무질서와 억압 속에서 신의 태초의 질서를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시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를 박초바람, 즉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따뜻한 신풍(信風)’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신앙(에무나)’은 곧 ‘신뢰’입니다. 검은 안식의 암흑 속에서도 우리를 쓰러지지 않게 밀어주는 그 바람은, 신이 여전히 이 혼돈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무언의 약속(信)입니다.


김교신: 예수께서 1세기에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시고 손가락질받으셨던 행적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눈에는 그것이 규칙을 깨는 ‘검은 반역’으로 보였겠지만, 조선의 산천에서 고통받던 제게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안식이었습니다. 안식은 멈추어 서서 아무것도 안 하는 맹목적 허무가 아니라, 세상의 거짓된 평화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약동케 하는 날입니다. 시인이 말한 “존재의 안쪽에서 일어나는 작고 은밀한 밀림”은 바로 그 치료와 회복의 역사입니다.


나: 두 분 말씀 감사합니다. 레벤슨 선생님은 혼돈의 한복판에서 신의 통치(질서)를 신뢰하는 “믿으려는 용기”를, 김교신 선생님은 고난과 침묵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며 인간을 안식의 주인으로 자리잡게 하는 “생명의 소리”로서 예수의 말을 떠올리게 해 주셨습니다.


헤셀: 이사야와 예수의 말씀이 더해져서 안식의 실현과 현대철학적 의의가 완성되는 느낌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안식은 시간 속에 감추어진 ‘메시아적 자유’의 현현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무엇이 되어라(To be something)’, ‘무엇을 해내라’라고 다그치지만, 예수의 안식은 ‘내 안의 너’, 즉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며 우리 등을 “살며시 밀어주는” 다정함인 듯합니다.


코헬렛: 맞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모든 것을 헛되다고 했으나, 오늘 밤 이사야와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니 삶이 이해할 수 없어도 허무하지 않고, 인식할 수 없어도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 눈이 열릴 수 있다는 확신을 다시 갖게 됩니다. 모든 성취의 빛이 꺼진 ‘검은 안식’의 밤이야말로, 인간의 헛된 탐욕이 죽고 신의 구원과 사랑이 시작되는 가장 거룩한 여백이라는 것을 다시 배웁니다.


바쇼: “박초바람―”이 짧은 시의 말줄임표 속에 담긴 여운이, 제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사야의 예언적 외침과 예수의 생명 선언으로 풍성하게, 가득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안식은 침묵하는 어둠 같으나, 그 안에서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의 숨결이 부스럭거리며 번져나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 그럼 이제까지 이야기를 제가 요약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검은 안식의 심연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숨결, 「흔한 일요일」

1. 서론: ‘흔함’이라는 낮고 조용한 역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가장 일상적인 단어를 통해 가장 비일상적인 신성을 길어 올리는 낮고 조용한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흔함’은 결코 평범함이나 무가치함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자주 찾아와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성스러움, 너무 가까이 있어 이름 붙이지 못했던 내면의 바람을 가리킵니다.

일요일은 세상의 언어로 ‘쉬는 날’에 불과하지만, 시 속의 일요일은 단순한 휴식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안쪽에서 작고 은밀한 밀림이 일어나는 날, 즉 시간 속에 세운 성스러운 성전입니다.

2. 안식의 세 가지 층위와 철학적 해제

2.1.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해도: '검은 안식'과 피로슬롯에 대한 저항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해도”


첫 행은 일요일의 정적을 보여줍니다.

(레벤슨: ‘일요일의 정적’보다는 ‘안식의 깊은 정적’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헤셀: 아 그게 좋겠습니다. 안식은 곧 소리없음의 성소, 침묵의 성소이기도 하니까요.)
나: 아 그러면, ‘안식의 정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수정) 첫 행은 안식의 깊은 정적을 보여줍니다.

노동도, 성취도, 소란도 없는 무위(無爲)의 상태입니다. 이는 현대 철학이 직면한 가장 뜨거운 화두인 ‘피로슬롯’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도구화하고 성과를 내라고 몰아 세우지만, 일요일의 안식은 '할 수 있음'의 강박을 끊어내고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모든 세상의 가짜 빛과 이미지가 꺼진 상태, 즉 ‘검은 안식’의 심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근원적 허무와 독대합니다. 그러나 이 멈춤과 고요의 빈틈 속에서 인간의 내면은 천천히 존재론적 방향을 바꿉니다. 게으름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스스로 회복하는 무위의 철학입니다.


2.2.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 태초의 숨결(Ruah)과 다정한 해방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


‘부스럭부스럭’이라는 의성어는 마른 잎이 흔들리는 소리이자, 오래 접혀 있던 마음의 종이가 펴지는 소리입니다. 영혼의 각성은 번개처럼 거창하게 오지 않고, 삶의 아주 사소한 틈새로 스며듭니다. 이때 ‘밀어주고’라는 촉각적 표현은 신성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유대 철학자 레벤슨과 예언자 이사야의 주석처럼, 이 바람은 태초의 혼돈(Chaos) 위를 운행하던 신의 거룩한 숨결(Ruah)입니다. 신은 우리를 다그치거나 억지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압제와 슬롯적 결박에 지쳐 벌거벗겨진 생명들의 등 뒤를 조심스럽게 받쳐주며 “쓰러지지 말라고, 조금 더 가 보라고, 네 안에는 여전히 생명이 살아있다”고 말하듯 살며시 밀어줄 뿐입니다. 안식은 이 다정한 밀어짐에 온전히 나를 맡기는 날입니다.

2.3.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 박초바람―: 타자의 환대와 역설적 가속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 박초바람―”


여기서 시는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흐리는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집니다. 내 안에 있으나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너’는 누구인가. 그것은 잊힌 기억일 수도, 고난받는 이웃의 얼굴일 수도, 내 안의 신성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안식은 내 중심적인 세계를 해체하고, 내 안의 낯선 타자들을 온전히 환대하는 시간입니다.


마지막 시어인 ‘박초바람’은 음력 5월경 돛을 밀어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따뜻한 신풍(信風)입니다. 여기서 엄청난 철학적 역설이 완성됩니다. 세상의 ‘가속주의’는 인간을 마모시키지만, 안식의 박초바람이 주는 속도는 우리를 본연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역설적 가속’입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멈춰 서 있는 일요일의 방 한구석에서, 우리의 영혼은 세상의 속도를 초월하여 영원의 궤도를 향해 가장 빠르게 항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결론: 일상의 신성, 율법을 넘어선 생명의 도약

1세기의 예수가 외쳤듯,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의 위대함은 거창한 종교적 선언이나 설명 없이, 셋째 행의 여백(말줄임표)만으로도 일상의 신성을 붙잡았다는 데 있습니다. 거룩함은 성전의 높은 천장 아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흔한 일요일의 조용한 방 안, 커튼을 흔드는 바람, 마음속을 이름 없이 지나가는 누군가의 흔적 속에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나눈 안식의 일요일에서 안식은


첫째, 멈춤 속의 움직임입니다.

둘째, 역사와 슬롯를 다시 보게 하는 각성입니다.

셋째, 유한한 인간이 자기 과잉에서 비켜서는 겸손입니다.

넷째, 어둠과 혼돈을 회피하지 않고 통과하는 검은 지혜입니다.

다섯째,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실현하는 프락시스입니다.


결국, 안식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마음을 부스럭거리게 하는 바람 하나를 알아차리게 돕는 일입니다. 철학시 4-10「흔한 일요일」은 단순히 쉬는 날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존재가 다시 숨을 고르고 세상의 지배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가장 거룩한 반역의 날’에 관한 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그 어두운 고독의 순간에도 우리 안의 마음은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거룩한 바람은 우리를 밀어주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가장 흔하고 캄캄한 날에도, 우리 안에는 언제나 거룩한 박초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결국 안식의 실현은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그대로 살아가도록, 어떤 힘으로도 훼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질서대로 존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대화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검은 안식’의 철학으로 주어진 길을 잘 달려가길 기대합니다 .


일동: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에필로그]

늦은 밤, 깊어지는 밤, 방 안의 어둠이 가장 짙어진 순간. 여덟 명의 사상가와 선지자들은 창밖의 고요한 세상을 향해 함께 시선을 모은다. 1세기의 예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축복하자, 이사야가 말했던 거룩한 바람, 루아흐가 박초바람이 되어 방 안을 아늑하게 감싸안는다.


세상의 모든 노동과 억압, 피로와 가짜 이미지가 멈춘 그 ‘흔한 일요일’ 저녁
이 안식의 한복판에서, 인류의 든든한 등 뒤를 밀어주는 영원한 안식의 대항해가 지금 막 다시 시작되고 있다.


방 안에는 이제 완연한 밤의 정적이 찾아왔다. 창문 틈새로 밀려드는 서늘하고 거룩한 바람이 그들의 깊은 사유를 다정하게 밀어주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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