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철학시 4-10 해설 (2-3)
(까페에는 짐 크로스Jim Croce의 Time in a bottle이 잔잔하게 흐른다. 잠시 후 커피와 차를 받아온 레벤슨이 커피와 차를 테이블에 놓아준다. 잠시 가벼운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 카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하며 문이 열린다. 발터 벤야민이 들어선다. 늘 같은, 갈색 자켓을 가볍게 입고, 손에 약간 바랜 가방이 들려 있다. 웃으면서 인사하며 들어선다)
벤야민: 아이쿠, 늦어서 죄송합니다. 알람이 없다 보니 어제 늦게 잔 탓에 오늘 아침 게으름을 폈습니다. 따로 연락드리려고 했지만, 그것도 번거롭게 하는 듯해서 그냥 두었습니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나: 잘 하셨습니다. 오신다고 했으면 꼭 오시는 분이시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죠. 마침 차 한잔하며 숨을 고르던 참이었습니다. 드시고 싶은 차도 주문하시죠.
벤야민: 이야기를 벌써 나누고 계셨을텐데 내용이 궁금합니다. 아, 레벤슨 선생님, 저도 커피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레벤슨: 영광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벤야민: (굵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가볍게 목례하고,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괜한 변명같아 죄송하지만, 평소 저는 자명종(알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저 몸이 반응하는 대로 일어나고, 쉬고, 잠을 자고, 공부합니다. 사람들과 약속도 가급적이면 저의 집에서 하려고 합니다. 아무 때나 오시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바쇼: 아, 그거 참, 저도 공감하는 생활 방식입니다. 제가 사는 시대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특별한 장치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저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중천에 해가 멈추고, 바람이 차가워지고, 따듯해지는 것으로 시간을 감지하는 것이 익숙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것보다 벤야민 선생이 시간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마음 깊이 존경합니다. 바늘이 가리키는 대로 정확히 자르고, 조각을 내어 그 시간에 자기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보다는 제 몸의 흐름과 태양의 기운에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벤야민: ‘까페 그안에’로 불어오는 시간의 바람을 느끼며 제 걸음에 발을 맞춰 걸어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웃음)
헤셀: 오, 자명종을 쓰지 않는 삶이라니! 그것이야말로 공간의 규칙에 지배당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살아내는 안식의 첫걸음이군요.
벤야민: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헤셀 선생님.
나: 이제 벤야민 선생님이 오셨으니 대화가 더욱 풍성해 질 것 같습니다. 벤야민 선생님, 앞서 나눈 이야기들을 제가 적어 두었습니다. 그 메모를 보시고 먼저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살펴보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한번 보시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정리된 메모를 나누자, 벤야민은 다른 사람과 달리 조금 오래 내용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제 벤야민 선생님의 이야기로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세션은 안식의 기능입니다. 그밖에도 나누고 싶은 자유로운 주제로 말씀을 시작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벤야민: 그럼 제가 먼저 시작해야겠군요. 사실 저는 ‘안식’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시간’과 ‘역사’의 관점에서 ‘안식’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선생님들이 나누신 이야기 속에 ‘무위와 안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단어에 대해 제 말을 덧붙이기 전에 우선 이 시의 두 번째, 세 번째 행에 대한 간단한 감상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슬롯자님 이 두 행을 한 번 더 읽어주시겠습니까? (슬롯자가 다시 글을 읽어준다)
벤야민: 저는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라는 구절을 들으면서 ‘빠르게’라는 말에서 멈췄습니다. 다른 시어들과 달리 아주 도드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대체로 그 정서가 ‘느리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단어는 아주 속도가 빠르다고 말하는 것 같아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왜 속도를 언급했을까? 한참 생각했습니다. 이 ‘빠르게’라는 말을 계속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저는 결국, 이 말을 ‘찰나’라고 해석했습니다. 속도가 아니라 ‘사건의 발생’인 것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한 사람의 마음을 밀어주며 찰나의 사건을 일으키고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어가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과거가 현재를 찌르는 찰나’의 사건과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만약 나의 그 ‘찰나의 사건’이 안식과 연관될 수 있다면, 안식은 여러분들의 나누신 말씀처럼 단순한 ‘멈춤’이나 ‘쉼’이 아니라 역동성에 가까울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안식을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한 점에서 폭발하듯 일어나는 시공간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에게 ‘안식’이라는 개념은 저의 시간, 역사 개념을 새롭게 조명하는데 신선한 빛을 비추는 것 같습니다.
김교신: 아, 안식을 역사 이해와 관련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안식이 개인의 쉼이 아니라 슬롯 속 역사 이해에 대한 연결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코헬렛: 맞아요, 벤야민 선생님은 안식을 공간적 감각으로 이해하시는거죠? 안식이 ‘날(Day)’이나 ‘시간’의 개념만 아니라는 것은 저도 공감합니다. 제가 고민하던 ‘올람(Olam)’이라는 말도 그런 시공간을 동시에 아우르는 말이었는데, 역사라는 말이 안식에 들어오니 덩달아 제 개념도 확장되는 것 같습니다.
벤야민: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코헬렛 선생님이 말씀하신 ‘올람’도 흥미롭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역사라는 공간에서 촉발하는 ‘찰나’의 시간은 공간적 개념보다는 짧은 ‘순간(Augenblick)’에 더 초점이 맞춰진 개념입니다. 제가 알기로, ‘올람’이 크고 긴 시공간인 듯한 인상이 짙지만, 저는 그보다는 촉발되는 정점 같은 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진의 푼크툼같은 것입니다. 특정한 장면에서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희망이 현재에 초점화되어 찰나의 공간에 압축되어 멈추는 순간이지요. 그 순간을 ‘안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빠르게’라는 말과 이어지는 시어가 ‘박초바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 단어를 주목했습니다. 박초바람이 불어오는 순간이 어쩌면 ‘역사의 문을 열어젖히는 메시아적 멈춤’으로 읽을 수 있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나: 감사합니다. 우리 이야기에 탄력을 더해 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말씀을 정리하면, 벤야민 선생님은 ‘안식’에 대해 ‘찰나’를 일깨우는 기능에 주목하신 것 같습니다. 그 기능은 쉼이나 멈춤이 아니라, 역사적 순간을 일깨우는 역동성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주제, 즉 ‘안식이 역사의 순간을 일깨우는 기능’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어느 분이 먼저...아, 네 김교신 선생님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김교신:(헛기침 한 두 번) 네, 좋습니다. 우선, 벤야민 선생님의 말씀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특히 안식을 역사의 문을 여는 순간의 멈춤과 연결시키신 것이 꽤 인상적입니다. 제게는 아주 진중하면서도 막혀 있던 뭔가를 해방시켜 주는 듯한 말씀이셨습니다. 아예 마음 한편에서 덜커덕 소리와 함께 사유를 잠시 멈추게 하는 제어장치처럼 들렸습니다. (사이 벤야민) 맞습니다, 김 선생님. 거대한 기차 같은 역사가 파멸을 향해 가속도를 내며 달려갈 때, 안식은 그 기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는 행위처럼 보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한 그 고요한 순간,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상처를 위로하고 미래의 구원을 현재로 끌어당깁니다. 즉, 멈춰 선 그 작은 ‘순간’이 거대한 역사의 바퀴를 올바른 방향으로 견인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마음을 밀어주는 박초바람처럼 말입니다.
김교신(계속):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이 시의 두 번째 행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에서 ‘밀어준다’라는 표현에서 먼저 한번 멈칫했습니다. 제가 듣기에 이 시에서 몸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촉각적이고 생생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부스럭부스럭’이라는 의성어 덕분에 그 체감이 더욱 실감 났습니다. 이 소리는 바람이 마른 잎을 흔드는 소리 같기도 하고, 오래 접혀 있던 마음의 종이가 펴지는 작은 소음입니다. 이런 표현을 생각하면, 시인은 마음이 거창하게 각성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번개처럼, 돈오의 경험처럼, 깨닫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그저 부스럭거리며 조금씩 움직이는 수행과 같다고 표현한 듯합니다.
그래서 ‘밀어주고’라는 표현이 참 다정하게 들립니다. 마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심스럽게 받쳐 주는 힘입니다. 삶은 때때로 우리를 몰아세우지만, 이 시의 바람은 몰아치지 않습니다. 살며시 밀어줍니다. 쓰러지지 말라고, 조금 더 가 보라고, 아직 안쪽에 남은 숨이 있다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하여, 벤야민 선생님의 말씀하신, ‘빠르게’에 담겨있을 ‘순간, 찰나’의 각성이 역사를 제어하는 안식의 의미를 드러내 주었다면, 저는 그 제어장치가 인간의 마음, 나아가 이 마음들이 일궈내는 현재 슬롯를 진리의 삶으로 견인하는 각성의 도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의 기능은 곧 우리 슬롯를 보이지 않는 규범과 윤리를 재검검하게 만드는 회심을 일깨운다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나: 방금 말씀은 안식의 기능이 ‘종교적 심성을 제도나 틀에 의해서 유지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곧 슬롯적 관계’를 직시하게 돕는 슬롯적 영성의 차원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아 네, 벤야민 선생님이 바로 받아서 덧붙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벤야민: 아, 김교신 선생님의 관점은 참 중요한 인식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라는 시행에서 저는 이 시가 갑자기 깊은 철학적 질문을 품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치 ‘화재 경보’가 울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 시간을 말하는데, 그 이면에는 ‘너’는 누구인가, 타자인가, 기억인가, 신인가, 사랑인가, 혹은 내가 끝내 붙잡지 못한 나 자신인가를 마구 물어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에서 ‘너’는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누구나 해당될 수 있는 불특정인 같습니다. 고정되지 않아서 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모호함 때문에 이 시가 해석의 여지가 넓어지고 의미가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해석이 다양해 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너’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내 안에 있으나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 분명히 스쳐 지나갔으나 이름을 부르면 사라지는 것, 나를 흔들고 밀어 주지만 붙잡히지 않는 존재말입니다.
나: 흥미로운 설명이십니다. 다시 여기서 두 분 말씀을 종합해드리겠습니다. 안식은 역사성과 슬롯성을 모두 반영하는데, 두 관점은 모두 인간의 삶 안과 밖을 조용히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어떤 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아우르게 하는 슬롯적 영성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를 이어 다른 분들의 의견도 한번 듣겠습니다.
헤셀: 아 두 분 이야기가 가볍게 시작한 듯했는데, 곧바로 이야기의 ‘본질’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역시 두 분은 대가라 불릴만하십니다. 지금 나누는 이야기의 큰 틀이 ‘안식의 기능’이라고 슬롯자께서 제안하셨는데요. 저는 특히 ‘기능’이라는 말에 약간 덜커덕 걸렸습니다. 따지고보면, 우리 시대에 일요일이라는 시간을 ‘안식’이라는 주제로 다루는 것은 꽤나 진부하게 들립니다. 특히 ‘쉼’이나 ‘휴일’과 관련지어 볼 때, 일요일만 안식의 날로 다룰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문화가 다양해지면서 휴일은 다양해졌고, 비정기적인 휴일도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일요일과 안식’이라는 기계적 틀이 아니라, ‘안식의 일요일’이라고 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일요일로 대표되는 휴일이 진정 ‘안식의 날’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저희가 이미 ‘안식’을 ‘단순히 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역동의 날’이라고 정의한 것에 비춰보면, 그 안식의 기능이라는 것도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헬렛: 그렇죠, 요즘은 일요일만 휴일이 아니잖습니까? 사람마다, 온라인 게임마다, 상황에 따라서 휴일이 다르게 결정되는 슬롯라는 것도 감안해야겠습니다. 기준도 다르고, 생활 방식도 다른데 전통에 매여 동일한 관점을 고집하는 것도 뭔가 아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적 영성을 슬롯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허무한 주제’라고 빨리 비관하는 것 같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윤리의 기준도 조정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나: 헤셀 선생님이 앞선 두 분의 이야기를 토대로 저희의 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짚어 주셨습니다. 코헬렛 선생님도 이 주제의 시의적절성에 대해 재고하도록 일깨워주셨습니다. 간단히 정리하고 다른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대로, ‘안식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식의 역동성’이라는 말을 좀 더 심화해서 정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안식의 정의’였다면, 이제 ‘안식의 기능’을 다루기 위해서는 ‘안식의 역동성’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헤셀: 네, 그 정도 정리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면서 제 말을 조금씩 조정해 보겠습니다. 한가지, 그 전에 먼저 덧붙여 둘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안식’을 다룬 제 바카라에서, 사실, 안식을 의인화했습니다. 안식이 사람처럼 감각을 가지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바람은 그런 안식의 의인화에 가장 기여하는 비유인 것 같습니다. 슬그머니 찾아와 삶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고 되돌아나가는 온유하면서도 거룩한 바람이 바로 안식의 의인화를 대표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누구든 가장 평안하게 자기 삶을 들여다보고, 보이게 해 줄 마음이 어루만져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을 해도 안식하지 못하는 일도 있을테지만 말입니다.
바쇼:(한참 창밖을 보며 자스민 차를 음미하다가) 하하, 저는 잠시 이 대화로부터 벗어나 있었습니다. 차를 음미하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바로 ‘말, 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대화에 빗대어 말하자면, 저는 가장 ‘안식다운 안식’은 많은 소리로부터 자신을 조금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역설적으로 그 안식의 시공간에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새로운 소리’를 듣는 일일 것입니다.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차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면서-마침 비가 가볍게 내리니- 적막한 순간을 찾아가는 그 잠깐 동안, 저는 새로운 안식을 누렸고, 새로운 소리를 조금 들었습니다. 그것은 ‘쉼’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마구 뛰도는 수 많은 언어가 어디론가 사라지듯 침잠하다 되돌아오는 소리였습니다. 잠시 후 다시 새로운 말들의 조합으로 맞춰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 느꼈습니다. 문득 내가 남긴 하이쿠들은 나의 소리를 버리고 나서야 나에게 부드럽게 들어온 ‘나의 밖 소리’였다는 것을 지금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안식의 기능은 역사나 슬롯의 질서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깥 세계와 연결하도록 이끌어 낯선 소리를 듣게 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헬렛: 바쇼 선생님은 정중동의 태도가 아주 몸에 배여있는 것 같습니다. 해 주시는 말씀이 흔들리지 않고, 물 흐르듯 우리 사이를 흐르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하이쿠 같은 시를 즐기는 사람인지라 꽤 흥미를 가지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앞서 말씀해 주신 벤야민, 김교신 두 분 말씀도 참 유익했습니다. 다만, 저는 앞선 분들의 이야기 속에서 안식의 기능으로서 역동성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자칫 놓친 것 같은 주제를 하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 다른 견해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안식의 역동성이 인간에게 남기는 피곤함’입니다.
아무리 안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한다해도, 지금 우리의 논의에서는 ‘안식’ 역시 하나의 인간의 관계 행동이라는 데 대체로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나와 안식, 나와 너와 안식의 관계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경험하든 결국, ‘피곤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육체의 피곤함은 좀 쉬면 회복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생각의 피곤함입니다. 이것은 회복이 아니라 피로의 누적일 때가 많습니다. 안식이 인간에게 남기는 가장 큰 영향력은 안식의 결말에 ‘헤벨’이라는 고유한 특질만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안식마저도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 도달하기 어려운 속성이 끝내 남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의 역동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일깨우는 채찍 같은 지혜의 기능에 잇대어 있을 때 더 실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안식을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행복한 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불행을 스스로 자초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에 다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과의 유익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스스로 유한하다는 속성을 다시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안식의 역동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일깨우고, 그 깨달음으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려는 지혜를 다시 습득하는 행위와 관련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헤벨이라는 관점에서 안식의 역동성과 관련하여 찾아낸 지혜입니다.
나: 아주 좋습니다. 이제 논의가 안식의 기능 중에서 좀 더 종교적 영성, 인간론의 관심 쪽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안식과 관련된 인간 이해를 좀 더 다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김교신:아, 그렇군요. 인간의 완전함, 위대함 이런 주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야기를 전개했던 것을 코헬렛 선생님이 그 이면도 짚어 주신 거군요? 그러면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에게 신의 성품이 부여되었다는 것은 안식의 역동성이 일깨우는 인간의 유한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신의 성품이 인간의 유한성 극복에는 별 효과가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신의 성품 안에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마틴 부버: (불쑥 끼어들며) 제가 오는 것도 모르시고, 다들 논의에 몰두해 계셔서 조용히 있었는데요. 다른 모임이 먼저 정해져서 가는 길이었는데, 오늘 주제가 궁금해서 잠깐 들렀습니다.
일동:(놀라며 소리 나는 곳으로 쳐다본다) 아니 언제 오셨습니까?(코헬렛) 바람처럼 들어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부버: 무례한 줄 알지만, 방금 말씀하신 주제에 대해 조금 거들고 좀 더 말씀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인간의 유한성이 신의 성품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인간은 ‘결함’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결함이 인간 생존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딱 한번 있습니다. 바로 인간 생존의 결론에 이르는 순간입니다. 예상하신대로, 바로 ‘죽음’이겠죠. ‘필사성(必死性)’은 인간 유한성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인식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인식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평소에 과도한 자기 욕구를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유한성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자신을 추동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치명적인 욕망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비추는 빛을 자기 몸으로 가리려는 것입니다.
나: 아 그것이 ‘신의 일식’이라는 주장이신거죠?
부버: 맞습니다. 신의 일식은 신이 인간에 의해 가려지는 현상입니다. 신이 스스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 앞에 나란히 서는 바람에 빛이 가려진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제 생각에, 자연스럽게 신이 인간을 창조한 후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인간도 신을 따라 ‘안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안식이란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장치’이고, 나아가 ‘자신이 신과 나란히 서 있어서 신의 빛을 가리우는 자리에서 잠시 비껴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안식은 신과 세계 사이를 가리고 있는 인간 자신을 조금 옆으로 비껴서게 하는 신의 의도적 장치인 셈입니다. 그것으로 신고 인간은 같은 듯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 다르다는 것을 수용함으로써 인간과 신은 함께 이 세계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비균형적 동반자가 됩니다. 신과 인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안식의 기능은 바로 인간의 유한성 자각이라는 철학적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둔 장치인 셈입니다. 저는 이제 조용히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다 다른 일정에 가야겠습니다.
레벤슨: 와 부버 선생님까지 오시니 제가 이 모임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일동 웃음) 참 깊은 사유가 담긴 말씀들입니다. ‘신의 일식’이라는 말도 저에게 아주 인상적인 주제입니다. 저는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천착해 온 창조의 주제 중에서 ‘혼돈 잔존’이라는 개념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세계는 신의 정의로운 질서로만 유지되지 않고, 악과 부정의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는 터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여 안식은 정의로운 기능인지, 아니면 그 정의에 부족함을 일깨우는 것인지 늘 고민스럽습니다. 저는 이 점을 탐구하다가 결국, 혼돈 역시 신의 의도라는 결론에 잠정적으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의 창조는 혼돈 상태를 유지하는 일과 관련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은 신화적 차원에서 ‘물의 세력’이 정의로운 땅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압박하고 제어합니다. 욥이라는 인물은 이 점을 아주 현실적으로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생각하기에 ‘안식의 기능으로서 역동성’은 다름 아닌 악의 힘이 존재한다는 자각을 일깨우고, 그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선과악’의 판단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장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안식의 역동성’은 악의 실존과 악의 실체가 선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관찰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헤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부버는 손에 든 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표정 위로 같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악, 무사유의 문제.)
바쇼: 말씀을 듣다 보니 제 이야기를 하나 덧붙여야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방랑하는 시인이 된 것도 바로 이 ‘악의 실존’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던 에도시대는 격랑기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개방되는 시대였지만, 특히 저 같은 하급 무사는 주군을 잃으면 더는 설 곳이 없던 신분적 폐쇄슬롯였습니다. 하여 저는 그 신분을 벗어버리고, 저만의 삶의 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랑’이었고, ‘시’였습니다. 그런데 삶의 규격을 벗어버리려고 떠난 시의 길에서 저는 다시 ‘하이쿠’라는 율격이 정해진 시를 구사했습니다. 어찌보면 또 다른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형적인 시를 선택한 것은 나름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결을 유지하는 데 적절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는 그 규율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어보니 그날 이후 방랑하며 살았던 제 삶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바로 ‘안식의 역동성에 의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안식이라는 삶의 규정이 제 삶을 더욱 명확하게, 살아가는 의미를 일깨워주는 철학적 장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길을 걷고, 시를 남겨도 여전히 세계는 악이 가득했고, 무법과 권력이 지배하는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그 악의 실체를 규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 자신도 바로 그 악의 결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 내가 악에 빠진 사람인지, 악의 그물에 걸린 사람인지는 선명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었습니다. 달리 보면, 방랑하며 시를 쓰는 일은 ‘악’에 내던져질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것이 비겁한 도피는 더욱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끝내 내가 살았던 슬롯의 선과악은 당대에 판명나지 못한 채, 내 안에 질문만 남긴 채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언제 판단될지 무척 궁금합니다.
나: 아 논의가 아주 깊어지고 확장되었습니다.
안식의 기능이 역사, 슬롯, 인간의 마음, 인식 한계, 신을 가로막는
인간의 자기 인식, 선과 악의 판단 유보까지 일깨우는 것에 있다는 점을
함께 생각해 봤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바람직한 답, 우리 슬롯에 기여할 수 있는 학문적 논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버 선생님이 잠깐이라도 들러주셔서 견해를 밝혀주신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더 깊은 논의가 이어지리라 기대되는데, 그래도 이 정도에서 “안식의 실질적 기능”이라는 주제를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하나의 주제가 더 남아 있는데 이는 잠시 쉬었다가 식사까지 하시고 다시 모여 마지막 세션을 진행하겠습니다. 식사 메뉴는 여행의 대가이신 바쇼 선생님이 맛집을 소개해 주실텐데,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로 두 번째 세션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아쉽지만, 부버 선생님은 여기서 인사를 나누시겠답니다. (서로 악수 후 헤어진다)(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