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시 4-10 해설 (3-1)
시간: 어느 일요일 오후
장소: 카페 그안에
참여자: 김교신, A. 헤셀, 발터 벤야민, 바쇼, 코헬렛, 존 D. 레벤슨, (마틴 부버, 이사야, 예수)
나: 지난번 시 해설 모임 이후에 세 번째 모임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느새 계절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즈음이 되었습니다. 오늘 선생님들과 해설을 나누고 싶은 저의 철학시를 한 번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저의 단시는 기본 세 행으로 40글자 내외, 그리고 부사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여 구성된 시입니다. 오늘은 낭독하는 버전으로 행을 조정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흔한, 일요일
-거룩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아무
일하지 않는 듯해도
부스럭부스럭
마음
밀어주고
빠르게 지나가는
내 안의
너,
박. 초. 바. 람―
아시다시피 박초바람(舶趠바람)은 음력 5월경에 부는 바람으로 돛을 밀어주어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따뜻한 바람입니다. 뱃사람들에게는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신풍(信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울러 이 시의 저작 배경은 기독교의 ‘성령강림주일’ 즈음에 바람과 관련하여 일요일의 의미를 되새겨보려는 의도에서 창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 안식의 의미를 ‘바람’의 이미지와 관련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쓴 단시입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 선생님의 고견이 기대됩니다.
아직 벤야민 선생님이 도착하시기 전이지만, 불가피한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시간이 되었으니,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세션 # 1은 '안식의 정의'에 관해서입니다. 안식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바라기는 이 이야기가 오늘날 피곤하고 분주한 시대를 떠밀려가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지혜로 따뜻한 위로로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그럼, 안식론에 관해 바카라을 직접 출간하신 아브라함 J. 헤셀 님께서 이야기를 시작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1. 안식에 대한 현대적 정의
헤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모임에 처음입니다. 이전에 다른 분들을 직접 만난 일도 없어서 이 대화가 무척 기대됩니다. 늦봄이 여름의 뜨거움으로 조금씩 옷을 갈아입는 이 계절에 이 시를 듣다 보니 창밖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볍게 몸에 닿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문득 이 촉감이 제 몸에서 일어나는 순간, 저는 ‘시간의 성소’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안식은 곧 시간의 성소라는 제 생각을 실제로 느낀 것입니다. 사실, 듣자 하니 현대인들의 삶은 공간을 소유하고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 숨돌릴 틈 없이 살아간다고 하더군요.
나(슬롯자): 아, 참 정갈하게 들리는 첫 말씀이었습니다. 헤셀 님은 유대 신비주의 철학에 바탕을 두신 분이라 말씀이 꽤 신비로운 듯하면서도, 아주 현실적인 단어들이 질서 있게 배열된 것 같습니다.
코헬렛: 저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헤셀 님은 현대인들에게 일요일은 ‘공간의 일’을 멈추고 ‘시간의 존재’를 대면하는 날로 인식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이 참 좋습니다. 날마다 같은 날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울 텐데, 이렇게 주기적으로 안식하는 날이 있다는 것은 그 허무한 시간을 재정돈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저 역시도 방금 들은 시에서 박초바람이라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설명해 주신 뜻에도 돛배에 부는 바람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람을 믿고 돛을 올린다는 것은, 내 힘으로 노를 젓는 고역을 잠시 멈추고, 바람이라는 거대한 타자의 호의를 신뢰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셀: 코헬렛 선생님,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를 듣는 동안 저는 가벼운 바람이 부는 것 같았고, 그 바람을 따라 제 몸이 뭔가에 밀려 가볍게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랄까. 안식은 바로 내 영혼의 돛을 올리게 할만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교신: 안녕하세요, 저도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유익한 대화를 기대합니다. 사실, 저는 이 시가 제목부터 아주 낮고 조용한 역설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한 일요일」이라 말하지만, 그 흔함은 결코 평범함을 살짝 바꾼 이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너무 자주 찾아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성스러운 바람, 너무 가까이 있어 이름 붙이지 못하는 내면의 바람을 가리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요일이 형식과 의례에 갇힌 채 사람을 더욱 곤고하게 만든다면, 그 또한 창조주의 의지와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살았던 시대는 자유와 안식이 무력과 법과 정치에 의해 거세된 시기였습니다. 쉬는 날이라 해도 쉴 수 없는 불안과 억압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들으면서 나의 일요일이 단순한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위해 마음이 보이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 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앙 체제 안에서도 자유롭게 자기를 해방하는 빛으로 존재의 안쪽에서 작고 은밀한 떠밀림이 일어나는 날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우리의 안식일은 정치•슬롯적으로 힘겨운 날이었으니 말입니다.
바쇼: 그간 안녕하셨나요? 이제 이 모임도 꽤나 익숙해졌습니다. 저 같은 방랑자도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아, 아니 몸을 멈춰 세우고 뭔가를 사유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몸도 마음도 심지어 생각마저도 잠시 쉬는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도 시를 듣다 보니 다른 것보다 부제에 마음이 좀 기울어집니다. “거룩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저는 이 시가 가리키는 영적 나침반을 듣고 보게 되었습니다. 길을 걷는 이라면 이 작은 제목이 그가 걷는 길의 방향을 열어주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느낌도 듭니다. 아, 거룩함은 종교적 장엄함이나 높은 제단 위의 신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했습니다.
물론, 사소한 생활의 틈으로 가볍게 스며드는 바람은 인간에게 종교적 신비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을 때 들어오는 빛처럼,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사이 마음의 먼지를 건드리는 기운입니다. 습관처럼, 저는 그런 순간에 하이쿠가 떠오릅니다. 이 시의 ‘거룩한 바람’ 역시 하이쿠의 계절어나 키레지(切れ字) 같습니다. 문장의 흐름을 조율하듯 바깥에서 내 안으로, 그리고 다시 내 안에서 나의 옆 사람 사이를 휘감아 돕니다. 내 몸밖에서 불어와 나를 정돈하는 자연의 바람이면서 동시에 몸 안쪽으로 스며들어 내면의 질서를 정돈하는 인간의 숨결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레벤슨: 말씀을 듣다 보니 대화가 참 흥미롭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히브리 유대 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레벤슨입니다. 유대 창조 사상을 연구하면서 ‘안식’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헤셀 선생님과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제가 하는 공부 주제와 같은 부분이 있어서 글로는 자주 만났습니다.
사실, 저는 이 시에서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해도”라는 첫 행을 듣자마자 생각이 멈췄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안식이 가진 고요한 힘을 들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안식은 아무 사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조용한 날이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지 않습니까?
코헬렛: 노동도 없고, 소란도 없고, 성취도 없어야 한다는 규정이 알게 모르게 지배했었죠.
레벤슨: 그렇죠.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무위의 표면 아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사실, 삶의 표면 아래, (아니 삶의 자체)는 표면이 매끄러운 것과는 달리 심한 요철과 뒤죽박죽된 상황이 끊이지 않습니다. 시인은 바로 거기에 시선을 둔 것 같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한 시간 속에서 오히려 가장 깊은 혼돈이 일어난다는 날카롭게 포착한 것입니다.
바쇼: 좋은 관찰이십니다. 평온과 혼돈의 공존! 나그네가 되어 가벼운 채비만 갖추고 낯설고 먼 길을 걷다 보면 인간의 내면은 늘 큰 사건으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멈춤과 고요와 빈틈 속에서 천천히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첫 행을 들으며 안식은 일하지 않는 멈춤, 게으름의 시간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스스로 회복하는 무위의 행동 철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말씀 감사합니다. ‘안식’이라는 다소 낯선 주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선생님들의 심도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 참 좋습니다. 우선 말씀들을 정리하면, 안식은 쉰다는 뜻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시간으로 잠정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헤셀 선생님은 안식을 공간의 정복에 지친 현대인들이 회복해야 할 ‘시간의 성소’로 바라보며 유대 신비주의적 깊이를 더해주셨습니다. 히브리 문헌인 전도서의 저자이신 코헬렛 선생님은 선생님의 고유한 개념인 헤벨의 관점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안식일이라는 주기적 장치가 어떻게 삶을 재정돈하는 기회가 되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쇼: 슬롯자 님의 정리가 아주 깔끔한데, 잠시 숨 한번 고르며 창문 너머도 한번 보시고, 바람 한번 들이마신 뒤에 말씀하셔도 좋겠어요. ㅎㅎ(일동, 함께 웃음)
나: 아, 제가 좀 서둘렀군요. 그러면 리듬을 따라서 계속 정리해 보겠습니다. 김교신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라는 특별한 억압의 시대를 살아내신 사상가답게, 안식을 단순한 휴식이 아닌 체제와 억압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자유와 해방의 은밀한 떠밀림’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 덕분에 우리 대화가 역사적, 슬롯적 역동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쇼 시인님은 하이쿠의 거장답게 거룩함을 거창한 종교적 제단이 아닌, ‘사소한 생활의 틈으로 스며들어 마음의 먼지를 건드리는 기운’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안식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내면의 숨결로 끌어내려 땅의 언어로 들려주셨습니다.
우리 모임에 처음 오신 레벤슨 선생님은 창조 사상가로서 “아무 일 하지 않는 듯해도”라는 시구에서 겉보기의 정적(무위)과 그 아래 꿈틀거리는 깊은 혼돈(새로운 창조의 전 단계)의 공존을 짚어주셨습니다. 하여 우리 대화에 유대 철학적 무게를 더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첫 번째 대화에서 안식의 정의를 다룬 것을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안식’에 대해 ‘쉰다’라는 정적인 개념에 주력하는 것을
‘쉬는 것, 안식의 역동성’이라는 동적 의미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주제로 이 시의 두 번째 시행을 중심으로 ‘안식’의 실질적인 기능에 관해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 외에도 생각하시는 바를 폭 넓게 다뤄주셔도 좋습니다.
레벤슨: 아, 정리가 깔끔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쯤에서 혹시 커피나 차를 좀 나누면 어떨까요? (주위를 둘러보며) 제가 주문받겠습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차가운 것 두 분, 라떼 한잔, 자스민 차 한잔, 슬롯자님은? 아 드립 커피, 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나: 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조금 쉬었다 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