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31.새의 오후 해설] 올곧은 기다림의 기다림

-그 두 가지 요소에 대하여

by푸른킴

새의 오후


1. 배경

나의 캠핑은 허락된 이기적인 시간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첫날은 흩어진 가족들이 모두 저녁 한때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날은 캠핑장 마감 시간에 맞춰 텐트를 철수하는 과정으로 천천히 보낸다. 둘째 날은 비로소 나를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다. 특히 머물던 분들이 떠나는 오전 11시부터 새로운 팀이 들어오는 오후 2시까지가 가장 캠핑장다운 시공간을 누릴 수 있다. 여름이 아니라면, 오후 2시부터 4시까지가 가장 분주하다. 나는 이 시간을 아예 캠핑장을 둘러싼 산길을 걷는 산바카라의 시간으로 보내곤 한다. 이 하루의 시간이 오롯이 나를 위한 안식의 즐거움이라 할 만하다.


지난 5월 캠핑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날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새벽, 어둠이 막 가시기 시작한 시간에 일어났다. 사실 어떤 새는 밤 깊은 시간에도 목청껏 울어준다. 사연이 궁금하지만, 그것마저 귀 기울이다간 선잠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아예 그것을 자장가 삼아 깊은 잠을 청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게 시작된 이른 아침, 주전자에 물을 끓여 차를 내리고, 떠오르는 경전 한 구절을 암송한다. 텐트 밖 산과 숲의 풍경이 어제와는 같으면서도 질감이 다르다. 아침 공기는 그렇게 사물을 유연하게 풀어주고, 더 저마다의 색으로 덧칠해 준다. 햇살이 조금씩 밝아지고, 더워지는 사이 바카라을 읽고, 주변 정돈을 하고, 글을 쓰고, 라디오를 듣고, 또 가만히 있는다. 사람들이 새롭게 들어올 즈음, 산바카라을 나섰다.


캠핑장을 나와 공원으로 들어서면 새로 단장한 호수가 있고, 그 옆으로 산으로 오르는 산바카라길이 있다. 나는 그 길을 좋아한다. 막 길에 접어드는데, 머리 위 가장 높은 전선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호수로 들어설 때 보았는데, 산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그대로 거기 앉아 있다. 고개를 자신의 오른쪽으로 돌려두고 꼼짝 않는다. 평소라면 새 여럿이 함께 앉아 있다가, 후루룩 날아갈 텐데 이상하게 오랜 시간, 그 줄에 머물러 있었다. 새가 전선에 앉을 수 있는 능력이야 선천적이니 그것이 낯설지는 않지만, 금방 날아가지 않는 것은 왠지 새 답지 않아 보인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나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쳐다보았다. 언제쯤 저 새가 날아갈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렀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열었다. 이 낯선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흡을 잠시 멈추고 천천히 카메라 안으로 새를 들였다. 프레임 안에서 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사라졌다. 새와 전선, 파랗게 열린 하늘이 있었고, 그리고 프레임 바로 밖에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는 내가 있었다. 나와 새, 사라진 거리 덕분에 서로 다른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새를 남겨 두고 내가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가볍게 산을 올랐다. 자연스럽게 사진 속 새와 그 풍경을 그 길 위에서 다시 떠올렸다. 기다리는 대상이야 서로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기다림’에 관해 몇 가지 사실을 배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올곧은 기다림의 태도와 기다림의 요소였다.


2. 사진

디카시의 사진은 언제나 의도적이어야 한다. 가급적 내 눈에 포착되고, 내 생각의 표피를 걷어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야 한다. 따라서 나의 디카시에서 사진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투영한 기본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번 사진은 새의 오랜 멈춤이 낯설어서 찍게 되었다. 새는 날아갈 마음이 아예 없어 보였다. 홀로 높은 전선에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아니, 왜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지 묻고 싶었다. 사진 프레임 속 새의 배경은 가느다란 전선 몇 줄 말고는 파랗게 빈 하늘뿐이었다. 새와 전선, 빈 하늘, 그리고 나. 이것이 이 사진을 둘러싼 풍경이다.


나는 아래에서 위로, 피사체인 새를 조금 끌어당겨 찍었다. 올려다보는 사진은 사물과 함께 그 배경인 하늘을 담을 수 있다. 텐트로 돌아와 다시 사진을 보니 푸른 하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한 마리 새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또한 그것은 나와 새 사이에 놓인 여백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전깃줄, 그 위에 앉아 있는 작게 보이는 새 한 마리,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는 넓고 푸른 공백이 이 디카시의 실질적 구성 요소다.


짐작하겠지만, 이 사진 속 사물을 보면 나의 시선에서 새는 작고, 줄은 가늘며, 하늘은 넓다. 공중에 높이 올라 있는 새와 땅에 발을 디고 있는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 때문이다. 새의 시선에서도 나는 땅 위의 작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장면 속에서 풍경의 주인공은 새일 수밖에 없다. 이 프레임 속에서 내가 대면하는 것은 오롯이 ‘새 한 마리’다.


나의 디카시는 언제나 “프레임 안 사물만 시어의 대상이 된다”라는 원칙을 따른다. 가능한 한 프레임 밖의 사물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사진에서는 프레임 밖의 내가 사진 속에서 함께 포착되는 것 같다. 마치 프레임의 안과 밖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듯하다.

결국 이 사진은 눈에 보이는 요소들, 곧 하늘, 전깃줄, 새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프레임의 경계에 서 있는 나의 시선이 함께 구성한 장면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사진 속에서 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꽤 줄어들었다.


한편, 사진 속 전깃줄은 단순한 선이 아니다. 그것은 새에게 머묾과 기다림의 선이라 할 수 있다. 이동을 위한 멈춤이며, 새로운 곳으로 날아가기 직전 정지의 발판이다. 오던 길을 돌아가기 위한 회귀의 선이면서, 여럿이 있다 홀로 남는 고독의 선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자발적 고독의 터일 수도 있다. 이 사진 속 새가 언제부터 혼자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날아야 할 존재가 잠시 머물러 있고, 어느 순간 다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새는 한참 동안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이 사진은 앉아 있는 새를 발견한 순간 바로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새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언제쯤 날아갈지를 기다리다 끝내 날아가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순간을 붙잡아 둔 것이다.


쉽게 알 수 있듯, 디카시의 사진은 모든 것이 ‘찰나’의 포착이다. 그 직전과 직후, 아니 그보다 오래전, 또 오랜 뒤의 상황을 사진에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히 이 사진 속에는 프레임의 시간 앞과 뒤의 사건이 현재의 고정된 틀 안에서 예견될 수 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존재가 줄 위에 내려앉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어느 시간 다시 하늘로 날아들 것이다. 평소라면 그 사이가 길지 않겠지만, 오늘 그 간격은 생각보다 길다. ‘사이’는 짧은 순간이 아니라 오랜 사유를 촉발할 만큼 긴 순간이기도 하다. 결국 이 사진 속에는 새와 전깃줄, 날 수 있는 존재와 머물러 있는 존재, 이 둘을 바라보는 나, 우리 모두를 감싸 안는 하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목격하는 새의 오후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게 사진은 스스로 말한다.


덧붙이자면, 푸른 하늘의 색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날 하늘은 무척 맑았다. 그 푸른 맑음은 때로 연륜의 색이라 할 만하다. 시간이 지난 뒤, 쓰이고 남은 여백이 모이면 만들어지는 색이다. 젊은 날개로 하늘을 휘젓는 새가 언제든 앉아 쉬고 갈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아낌없이 주는 하늘’의 색이다. 다행히 사진은 그 색을 잃지 않고 붙들어 두었다. 그리하여 사진 속 하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새와 나를 이어주는 전선이 놓인 존재론적 관계의 시공간으로 전환된다.


요컨대, 이번 나의 사진은 사물이 최소한으로 배치되어 오히려 의미를 넓게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생각하지만, 디카시에서 사진은 시어가 발생할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 침묵할 때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 같다. 나의 사진은 바로 그 침묵을 잘 확보했다. 그리하여 넓은 여백으로 독자마저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3. 시어

디카시의 시어는 사진과 여백을 두고 조응할 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시어를 쓸 때 몇 가지 유의하는 것이 있다. 그중 하나는 디카시에 담을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롭다”, “쓸쓸하다”, “불안하다”라고 말하기보다, 그 감정이 사물의 자세와 빛, 거리와 바람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게 해야 한다.


또 하나는 시어 안에 사진이 품고 있는 생각의 결을 은근히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진은 한순간을 붙잡지만, 그 순간 안에는 말로 다 정리되지 않은 사유들이 흩어져 있다. 시어는 그 흩어진 것들을 억지로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조용히 한 방향으로 놓아주는 말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사진 속 새와 하늘과 바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을 하나 놓는 일이다.

그렇게 보면 디카시의 시어는 작은 질서를 세우는 일과 닮아 있다. 세계의 파편을 하나하나 주워 다시 자리에 놓는 일이다. 사진 속에 잠시 머물던 장면이 시어를 만나면서 조금 더 넓은 의미의 자리로 옮겨 가는 것이다. 나는 이번 디카시 「새의 오후」에서도 그런 시어의 원칙을 반영하려 했다.


새의 오후

가는 줄에 몸 굳게
꼼짝 않는 너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

바람 훅
파랗게 번진

늙은 하늘


제목을 뒤로하고, 시어의 배열만 보면 형식적으로 한 가지 특징을 살리려 했다. 시어를 두 행, 한 행으로 끊어서 구성한 것이다. 읽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징검다리식 형식에서 나는 이 시의 내용에 앞서 구조적으로 이 시가 새들의 배열을 연상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다. 대체로 새들은 두 마리, 한 마리, 또는 그 이상의 무리가 한 줄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 전제하고, 나는 이 시의 중심에 ‘순간’이라는 시어를 배치했다. 디카시 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순간’이라는 시어를 앉아 있는 새의 바로 옆에 바짝 붙여 적었다. 따라서 이 ‘순간’은 새와 직결된 태도이며, 이 새를 관찰하는 사람의 각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어의 핵심은 절제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새가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존재에게 함부로 감정을 붙이는 일은 조심스러웠다. 다만 그 거리 때문에 오히려 시어는 더 절제되어야 했다. 새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새의 감정을 말하기보다 새가 놓인 자리와 자세를 바라보려 했다.


보통 카메라로 꽃을 찍거나 사물을 담을 때는 접사나 근접 촬영이 가능하다. 이것은 사물의 표정과 면면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사진 속 새와 나 사이에는 그런 ‘가까움’보다 ‘멀리 있음’이 있다. 나는 새를 자세히 볼 수 없고, 새의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새는 나를 가까이 보는 듯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새를 실루엣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하여 새의 감성과 상황, 느낌을 직설적으로 쓸 수 없었다. “외롭다”, “쓸쓸하다”, “불안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나는 시어를 통해 추정된 정서를 들려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가 나와 새 사이에 흐르는 어떤 정서적 교감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새의 감정을 직접 알 수 없다 해도, 이 시어에 담긴 정서를 새의 몸, 가는 전선, 꼼짝 않는 자세, 바람, 파랗게 번진 하늘을 통해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감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조작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는 그대로 감지하도록 창작한 것이다.


이제 제목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새의 오후”는 말 그대로 내가 새를 발견한 시간이다. 캠핑장이 어수선해지는 시간, 나는 한적한 곳으로 나왔다. 산바카라은 여백을 찾아 떠나는 일일 텐데, 나는 우연히 그 길에서 호젓한 망중한을 보내는 새를 만났다. 곧바로 날아가지 않고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나를 더 붙잡았다.


나는 궁금했다. 날아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지금, 새에게 이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나처럼 분주한 시간을 피해 저 높이 오른 것일까. 그에게 하루의 중간은 어떤 의미일까.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간일지,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 하는 시간일지 궁금해졌다. 지난 어두운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울어대던 새였을까. 왜 지금은 울지 않는 것일까. 높이 올라 어딘가로 고개를 돌리고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 한 마리 새는 왜 무리로부터 떨어져 있을까. 아니, 무리는 언제 이 새를 떠났을까.


무엇보다 나에게 이 새의 오후가 생의 한순간을 버티는 것으로 읽힌다. 그 버팀이 힘겨워, 한낮 조금씩 뜨거워지는 계절에 아래보다 시원할지 모를 저 높은 곳으로 올랐을 것이다. 결국 새의 오후는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오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한 마리의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자기 생의 어느 지점에 멈추어 있는 장면과 겹쳐진다.


“가는 줄에 몸 굳게 / 꼼짝 않는 너”: 나는 사진 속 새를 확대해 보고서야 새의 자세와 상태가 어떤지 좀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었다. 한 마리 새는 가는 줄에 두 발을 붙여 자기 몸을 굳게, 올곧게 세우며 지탱하고 있다. 바람이 불 수도 있고, 햇살이 뜨거울 수도 있는데, 새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생각해 보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머물러야 할 이유가 꼭 있어서만은 아니다. 나도 그런 순간을 캠핑을 하며 자주 경험한다. 바로 ‘무상과 무념’이라는 ‘멍’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비워지는 생각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가는 줄’은 전선이다. 동시에 그 선은 삶의 위태로운 상태를 은유하기도 한다. 그 위에 한 마리 새는 “몸 굳게” 하며 흔들리지 않고 머물러 있다. 내 눈에는 물리적 정지를 넘어 내면적 긴장마저 불러낸다.


새는 앉아 있지만 분명 편히 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점에서 그것은 그의 안식일 수도 있다. 하여 나는 이 “꼼짝 않는” 새를 “너”라는 2인칭으로 불렀다. 이는 놀라움이면서도 경이로움이다. 나의 호명은 사진 속 새를 단순한 피사체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새는 멀리서도 나의 온갖 궁금증에 응답 가능한 존재다. 이 시에서 ‘너’는 사물을 인격화하여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를 다시 묻는 장치어가 된다. 새는 더 이상 찍힌 대상만이 아니라, 나와 마주 선 존재가 된다.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나는 여러 질문 중에서 하나를 결정한다. 가장 궁금한 것이다. 새는 지금 기다리고 있다는 나의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새의 고개 돌림, 견고한 몸,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은 모두 기다림을 담지한 행동일 수 있다.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이란 올 것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가 향하는 일이다. 그것이 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머물러 있는 자리를 쉽게 벗어나지 않는 일이다.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기다림이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몸짓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하지만 고도가 올 것이기에 주인공들은 나무 아래에서 고도가 올 것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한없이 머물러 있다. 그런 점에서 새에게 묻는 이 질문은 결국 나에게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하나의 수사적 장치가 들어있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라고 묻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이는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중적인 질문이다. 새가 기다리는 것은 먹이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고, 날아오를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새는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답한들 내가 알아들을 수도 없다. 다만 그 무응답이 곧 응답이라는 것을 나는 알 뿐이다. 하여 나는 ‘새의 기다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순간”: 이제 시와 사진에서 동시에 전환이 일어난다. 시의 중간에 자리한 이 시어는 홀로 떨어진 새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다른 면에서 이 단어는 디카시의 절단면처럼 접히는 지점에 놓인다. 새가 앉아 있는 현재, 바람이 오기 전의 정지, 날아오르기 직전인지 영영 머물기 직전인지 알 수 없는 찰나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질문하는 그 말의 시작을 가리킨다.


순간은 앞선 행동과 뒤에 이어질 행동이 극적으로 만나는 지점에 놓이는 시간이다. 나는 디카시를 자주 “순간을 영원 속에 보관하는” 문학 형식이라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디카시에서 “순간”은 어떤 지점이 아니라 ‘문’이다. 영원, 끝없는 시공간으로 들어서는 문고리인 셈이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 밖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지 기대하게 하는 언어다. 나는 이 말을 새의 바로 옆에 둠으로써, 이 말의 주체를 내가 아니라 ‘새’로 두려 했다. 지금 궁금한 것은 나이면서, 동시에 새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람 훅 / 파랗게 번진”: 이 시어는 ‘순간’에 일어난 현상이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새는 직접 자기 몸으로 가장 가까이에서 겪는 현상이다. 바람이 ‘훅’ 하고 새에게 닿는다. 느닷없는 바람의 접촉은 새를 놀라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는 그런 급작스러운 바람의 손길에 익숙할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나는 바람과 새의 언어를 들을 수 없고, 듣는다 해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살가운지, 얼마나 짙은 접촉인지를 눈으로 볼 수는 있다. 바로 ‘파랗게 물들어 있다가 더 짙어지는 하늘’ 덕분이다. 새와 전선 뒤로 감싸듯 펼쳐진 하늘에는 지금 바람이 불고 있다. 사진이 영상이 아닌 한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색이 수채화처럼 번지는 움직임이 사진 속에서 감지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프레임과 프레임 밖을 동시에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사진 속 정지된 풍경과 사진 밖 움직이는 하늘을 함께 보는 관찰자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지금 이 프레임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정지되고 평면처럼 보이는 사진이 이 시어를 통해 입체적이며 운동감 있는 아름다운 흔들림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훅”은 바람의 소리다. 스며드는 촉감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이 시어를 통해 그 존재가 드러난다. 새는 그 바람을 기다린 것일까. 아니면 바람이 가져오는 그 파란 물들임을 기다리는 것일까. 나는 “파랗게 번진”이라는 표현에서 사진의 색채를 감각적으로 끌어오되, 단순 묘사에 머물지 않게 하려 했다. 파랑은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색이며, 보호와 돌봄의 색이다. 무엇보다 하늘의 색이면서, 어쩌면 천국의 색이다. 고요한 물의 색이다. 오래 숙성된 시간의 색일지도 모른다.


“늙은 하늘”: 이 마지막 시어는 새를 감싸며 번지는 파랑의 존재 자체를 상징한다. 늙음을 파란색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이 사진이 시어에 건네는 덕담이다. 청춘의 상징인 파란 하늘이 늙음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의 중요한 전환이다. 하늘은 보통 넓음, 젊음, 자유, 상승의 이미지로 소비된다. 그러나 나는 이 시에서 하늘을 “늙은 것”의 상징으로 이해했다.


아마도 저 새가 나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늙음’은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파란색이 바래지고 깊어지는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다. ‘젊음’ 역시 마찬가지다. 파란색이 소멸될 때 늙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파란색이 오래 머물며 다른 농도를 얻을 때 늙음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는 지금 훅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늙어가는 하늘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니, 그렇게 오래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늙은 하늘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나의 시어는 새의 자리에서 하늘로 시선을 옮긴다. 한 마리 새는 고독해 보이지만, 실제로 이 디카시에서 고독한 존재는 바로 하늘이다.


만약 새 한 마리가 하늘에 점 찍히지 않았다면, 나는 하늘을 그렇게 오래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새가 훌쩍 날아가 버렸다면 나의 시선도 이내 하늘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새의 멈춤, 그 정지는 내가 하늘을 보게 하는 힘이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저 새는, 땅 위를 걸으며 땅만 내려다볼 내가 눈을 들어 함께 늙어가는 하늘을 바라보기를 기다렸을지 모른다.


새는 알고 있었을까. 나도 하늘도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새는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날아가지 않고, 그 가는 줄 위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땅만 보고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도록, 저 파란 하늘이 단지 젊고 눈부신 하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말이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지만, 그 파랑 안에는 오래된 시간의 기미가 있다. 새는 그 하늘 아래에서, 아니 그 하늘 앞에서 자기 몸을 굳게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늙음이 반드시 어둡거나 쓸쓸한 색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늙음도 파랄 수 있다. 오래된 것들도 여전히 번질 수 있다. 사라져 가는 시간조차 바람을 만나면 잠시 더 깊은 색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새의 기다림은 내가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나에게 하늘을 보게 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가 없었다면 나는 하늘을 그렇게 오래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새가 훌쩍 날아가 버렸다면 나의 시선도 금세 다른 곳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새는 멈추어 있었고, 그 멈춤 덕분에 나는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그 하늘을 보는 동안, 새와 나와 하늘이 서로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도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디카시에서 새는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다. 새는 나의 시선을 들어 올리는 존재다. 땅 위를 걷던 나를 하늘 쪽으로 부르는 존재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에서 우리가 모두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늙음마저 파랗게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존재다.


결국 나의 시어들은 프레임 안에 있는 새와 하늘, 그리고 프레임의 경계에 서 있는 나를 바람의 줄로 이어주는 언어의 배열이다. 새의 올곧은 기다림이 없었다면 이런 관계는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새를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새가 나로 하여금 하늘을 찍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하늘 속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나의 오후도 함께 찍혀 있었던 것이다.



4. 의도 — 올곧은 기다림을 기다리는 태도와 기본 요소

나는 이 디카시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를 생각하려 했다. 나를 공감해 주고, 세계를 끌어와 다시 이어주는 매개체의 존재 의의를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어떤 보이지 않는 줄로 이어지는 일이다. 나는 그 줄 위에서 새와 나, 하늘과 바람, 기다림과 삶이 서로 연결되는 장면을 보았다.


하여 나는 이 디카시의 주제를 ‘올곧은 기다림의 기다림’이라 정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기다림 그 자체만은 아니다.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을 넘어, 실제로 그 기다림이 어떤 자세로 수행되는가를 살피려는 것이었다. 모든 기다림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모든 기다림이 바른 것도 아니다. 어떤 기다림은 조바심으로 흔들리고, 어떤 기다림은 체념으로 주저앉으며, 어떤 기다림은 욕망의 방향으로 비뚤어진다. 또 어떤 기다림은 이미 자기 안에서 무너진 채,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는 형식으로만 남아 있기도 하다.


내가 이 작품에서 말하려 한 기다림은 그런 흐트러진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함부로 버리지 않으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향해 몸과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세우는 기다림이다. 또한 나를 매개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해 주기 위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단순히 시간이 지나가기를 견디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는 방향을 향해 자기 존재를 조율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올곧은 기다림은 기다리는 대상보다 먼저, 기다리는 자의 자세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런 자세를 그날 우연히 새에게서 보았다. 사진을 찍기 전까지 새는 오랫동안 날아가지 않았다.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멈춰 있었지만, 그 멈춤은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올곧음 같았다. 어떤 방향을 향해 자기 몸을 가다듬는 태도처럼 보였다. 나는 이 장면에서 기다림의 중요한 의미 하나를 배웠다. 올곧은 기다림은 편안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기다림이 아니라, 불안정한 자리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기다림이라는 것이다. 기다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동일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은 행동이 된다.


기다림은 자주 불안정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아직 응답하지 않은 것, 아직 해명되지 않은 것 앞에서 우리는 확신이 넓지 않고 발밑이 단단하지 않은 자리에 선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자기 몸을 무너뜨리지 않는 분투가 기다림이다. 나는 그것이 올곧은 기다림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기다림 자체를 자신의 숭고한 행동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이 디카시에서 기다림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온몸으로 맞이하기 위해 그 방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기울이는 집중이다. 기다림에는 움직임보다 더 강한 집중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는 일보다, 그 무엇이 오기 전까지 자신을 흩뜨리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조바심은 쉽게 몸을 흔들고, 체념은 쉽게 마음을 주저앉힌다. 그러나 올곧은 기다림은 흔들리는 조건 속에서도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것은 다가올 순간을 향해 자신을 곧게 세우는 살아 있는 멈춤이다.


나는 이 기다림을 단순히 개인의 태도로만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기다리는 자가 있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침묵과 거리와 시간이 놓여 있다. 기다림은 그 사이를 견디는 일이며, 누군가가 그 인내를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견디는 데서 끝나는 것만도 아니다.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 관계를 계속 붙들게 하는 일이다. 아직 응답이 오지 않았어도, 아직 대상이 드러나지 않았어도,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며 포기하지 않게 돕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부재를 향한 태도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동력이다.


이 점에서 나는 기다림의 고대적 의미를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의 관점에서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가기를 견디는 수동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몸을 기울여, 아직 보이지 않게 오고 있는 것을 마치 보는 것처럼 경청하고 관조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비어 있음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도래를 향해 자기 존재를 조율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의 기본 요소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저 먼 세계로부터 오고 있는 것의 기척을 들으려는 경청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깊이, 그러나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조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무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깊은 방식으로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상태다.


경청은 귀로만 듣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온몸을 어떤 방향으로 기울이는 태도다.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아도, 기다리는 자는 이미 그쪽을 향해 자기 존재를 열고 있다. 올곧은 기다림은 이처럼 오지 않은 것의 기척을 듣는 일이다. 기다림은 소란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다가오는 것의 미세한 울림을 놓치지 않으려는 침묵의 집중이다.


관조는 조급히 판단하거나 붙잡으려 하지 않고, 사물과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다. 기다림은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이 올 때까지 세계를 깊이 바라보는 능력이다. 오지 않은 것을 재촉하지 않고, 늦어지는 시간을 저주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 펼쳐지는 세계의 결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깊은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러므로 올곧은 기다림은 경청과 관조 사이에서 완성된다. 듣되 소유하지 않고, 바라보되 재촉하지 않는 태도다.


나는 새를 통해 그 기다림의 자세를 배웠다. 오지 않은 것이 늦어져도, 그 늦어짐 때문에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 태도다. 바람이 좋은 방향으로만 불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낙관이 아니라, 어떤 바람이 오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의 정위다. 기다림은 언제나 구원과 시련의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다. 기다리는 것이 올 때, 그것은 우리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흔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올곧은 기다림은 좋은 결과만을 기대하는 마음이 아니라, 어떤 결과 앞에서도 자신을 흩뜨리지 않으려는 태도다.


이러한 기다림의 태도는 고대 주전 7세기 유다의 예언자 하박국에게서도 발견된다. 하박국은 열국의 무분별한 폭력과 다르지 않게 타락해 가는 유다 슬롯를 비판하다가, 야훼가 그보다 더 큰 폭력으로 보이는 바빌론을 끌어들이는 것을 보고 극도의 탄식에 빠진다. 그러나 그때 그에게 주어진 대응은 어떤 결과가 늦게 나타나더라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은 막연히 시간을 견디는 기다림이 아니었다. 그는 서판에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달려가면서도 사람들이 그것을 읽을 수 있도록 기록하라는 요청을 듣는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그 말을 기록하는 것이고, 그 기록이 어디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관찰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하박국의 기다림은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들은 말을 붙들어 현실 전개를 주시하는 경청과 관조의 기다림이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자는 자기 자리를 가볍게 떠나지 않는다. 그는 들은 것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현실의 전개를 깊이 바라본다. 기다림은 체념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세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새의 오후」에서 새 한 마리의 정지된 장면을 통해, 기다림의 가장 곧은 형식을 보여주려 했다. 그것은 무언가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전에, 오기 전까지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세다. 오고 있는 것을 향해 온몸으로 듣고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새의 기다림은 곧 나를 기다리는 일이 되며, 다시 나의 기다림이 된다. 새가 하늘을 향해 멈추어 있는 동안, 나는 그 새를 바라보며 내 안의 기다림을 다시 바라본다. 새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알 수 없음이 오히려 나를 더 오래 머물게 한다. 기다림은 답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답이 오기 전까지 무너지지 않고 그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 시는 바로 그 자세를, 푸른 하늘 한가운데 멈춘 작은 새의 침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5. 정리 — 검은 안식 속에서 올곧은 기다림을 세우는 디카시

「새의 오후」는 아주 작은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이 있었고, 줄이 있었고, 그 위에 새 한 마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장면은 내게 단순한 풍경으로만 남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기다림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안식을 다시 묻는 방식으로 번져갔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마리 새의 정지된 몸이 어떻게 기다림의 형식이 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 기다림은 수동적 인내가 아니다. 그것은 들으며 바라보는 능동적 정지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를 조급하게 재촉하지 않고 바라보는 태도다. 따라서 기다림은 단순히 미래에 속한 시간이 아니다. 기다림은 오히려 현재를 가장 깊게 감당하는 방식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향해 있으면서도, 지금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태도다.


이 지점에서 「새의 오후」는 나의 검은 안식의 시학과 깊이 연결된다. 검은 안식은 단순한 평온이나 밝은 위안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을 지워버린 뒤 얻는 안식이 아니라, 어둠을 통과하고도 무너지지 않는 안식이다. 곧 불안, 지연, 침묵, 응답 없음, 늦게 도착하는 결과 속에서도 존재가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상태다. 검은 안식은 밝음의 반대편에 있는 절망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밝음을 기다릴 수 있는 내적 질서다.


나는 디카시를 통해 이 검은 안식의 시학을 지속해서 적용한다. 「새의 오후」도 그런 예이다. 사진 속 하늘은 푸르지만, 이 작품의 푸름은 단순히 환한 희망의 색만은 아니다. 그 푸름 안에는 오래된 시간, 고독, 침묵, 그리고 기다림이 스며 있다. 나는 그 푸름을 통해 밝음과 어둠이 서로 배척되지 않는 상태를 보고 싶었다. 밝지만 가볍지 않고, 고요하지만 비어 있지 않으며, 멈추어 있지만 죽어 있지 않은 상태다.


검은 안식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 발생한다. 모든 것이 해결된 뒤에 찾아오는 평온이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시작되는 내적 정위다. 응답이 오기 전, 결과가 드러나기 전,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올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는 질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안식은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기다림의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태도다.


이 작품의 기다림은 또한 윤리적이다. 기다리는 자는 세계를 재촉하지 않는다. 대상을 소유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자리를 남겨둔다. 이것은 기다림의 겸손이다. 기다림은 내가 원하는 때와 방식으로 세계를 끌어당기는 일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열릴 때까지 내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기다림은 믿음과 닮아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가진 것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향하는 태도다.


나는 이 작품이 그런 기다림의 윤리를 보여주기를 바랐다. 기다림은 약한 자의 체념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의 깊은 힘이다. 무엇인가를 할 수 없어서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멈추어 있는 힘이다. 성급히 날아오르지 않고,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고, 성급히 세계를 판단하지 않는 힘이다. 이것이 내가 이 작품에서 발견한 올곧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그러므로 「새의 오후」는 서정적 장면에서 출발하지만, 그 끝은 존재의 태도에 닿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기다리는가.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앞에서 조바심으로 흔들리는가, 아니면 그 방향을 향해 조용히 자신을 세우는가. 이 작품은 이런 질문들을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작은 새의 침묵을 통해 보여준다. 보여주되, 다 말하지 않는다.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오래 묻게 한다.


요컨대 「새의 오후」는 검은 안식 속에서 올곧은 기다림을 세우려 한 작품이다. 어둠과 지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고 있는 것을 경청하며,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관조하는 기다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늘처럼 흘러가는 나의 삶을 파랗게 물들이기 위해,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는 속 깊은 인내를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새일 수도 있고, 하늘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내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세계의 오래된 마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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