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그날 그리고 노래로 참여하는 역사

5.18에 다시 읽고 되새기는 노래

by푸른킴

나의 기억 속에서 그날은 늘 흐릿하다.

그해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5월의 아카시아가 서둘러 떨어지던 날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 우연히 바람에 날려 내 눈에 들어온 호외 한 장이 있었다. 그 무심한 한쪽짜리 신문 안에는 검고 굵은 글씨로 ‘정의가 불의를 물리치고 있다’는 문구가 선명했다. 무슨 말인지, 어떤 사건인지 알 수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깊은 관심도 없었다. 광주는 멀고 생각 밖의 도시였다. 이어지는 글에는 마치 무협 소설 속 전쟁의 한 장면처럼, 선한 힘이 악한 세력을 응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같은 나라인데도 어린 나에게는 거기가 어디인지, 왜 이 소식이 긴급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종이를 들고 있었으나, 사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아이와 같았다. 신문에 박힌 글자는 단호한 문체로 내 눈앞에 있었지만, 그것을 역사로 읽을 수 있는 시선이 내게는 없었다. 문장은 선명하게 읽혔지만, 내 손에 닿을 수 없었고, 내 양심을 자극하지 못한 채 그 허상만 부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스스로 자기를 증명하는 법이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글자와 흑백 사진은 색상보다 더 흐릿흐릿한 기억의 껍질을 뚫고, 훗날 내 삶을 따갑게 찌르며 다시 나타났다. 분명 그때 나는 눈앞에 있었던 종이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갔다. 그런데도 몸에 박힌 이 짧은 순간의 기억은 오래 뒤 단호한 어조로 나를 다시 역사 안으로 불러 세웠다. 여전히 광주는 그저 지명이었고, 신문 속 문장은 아직 역사의 얼굴을 갖지 못한 채 지나가는 뜬소문 같았다. 하지만 기억은 선명한 것만을 보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오히려 역사는 제대로 알지 못한 것, 지나치듯 흘려보낸 것, 그때는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던 장면을 오래 품고 있다가 뒤늦게 내 삶에 되돌려준다. 그날의 호외가 바로 그랬다.

내가 알지 못하던 사건의 전모는 다시 우연한 기회에 나에게 되살아났다. 그다음 해, 개인적인 일로 혼자 광주 근처의 옛 고향을 찾아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오랜만에 광주에서 운전기사 일을 하시던 넷째 이모부를 만났다. 그때만 해도 내 기억 속 이모부는 건강한 분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삶의 고단함을 견디면서도 몸 하나만큼은 단단해 보이던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운전대를 잡고 도시의 구석을 지나온 사람 특유의 무심한 듯한 안정감이 있었다. 길을 알고, 사람을 태우고, 하루하루의 피로를 견디며 살아온 이모부는 별말이 없는 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분이 바로 그 도시의 상처 한가운데를 지나왔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세월,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택시와 자가용을 운전하던 분에게 그 도시의 길들은 그해 그 시간, 더는 생활의 길이 아니라 공포와 침묵과 죽음의 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그 이모부는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궁금증은 여전했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내가 어렴풋하게 알던 사건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분의 죽음 뒤에 쉽게 말해지지 않는 그날의 아픈 이야기가 있었다고 했다. 광주가 겪었던 그 사건 이후, 이모부에게 깊은 후유증이 남았고, 그것이 끝내 그의 삶을 일찍 기울게 했다는 회한 어린 말들이 가족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오갔다. 물론 나는 그 모든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무엇이 어디까지 사실이었고, 무엇이 가족들의 추측과 회한 속에서 굳어진 이야기였는지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시절의 어떤 고통은 병명으로도, 기록으로도, 가족의 언어로도 쉽게 남지 못했다. 사람은 죽었고, 그 삶의 증거는 사라졌고, 이야기는 남지 않았으며, 남은 사람들은 오래 침묵했다. 80년대 초가 우리에게 그런 더 고약한 어둠의 시대였다.

그 이야기는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그러했듯 널리 퍼져 나가지 못했다.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조용히 가라앉았다. 가족의 슬픔 한가운데 조용히 놓인 돌처럼 남아 있었을 테지만, 누구도 그 말을 크게 꺼내지 않았다. 세월은 그렇게 강처럼 흘렀다. 증거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이모네 식구들, 그리고 먼 친척들의 기억에서도 그 일은 시나브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사라진다는 것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과 다르다. 말해지지 못한 것은 때로 더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듯 보이던 이야기는 훗날 어느 날, 어떤 노래의 첫 소절처럼 다시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침묵도 하나의 기억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기억은 상처로만 남는다는 것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한 뒤, 내 삶에서 흐릿해졌던 그 과거의 종이 신문이 다시 살아났다. ‘정의가 물리쳤다’던 그 ‘불의’가 진짜 정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내 안에서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지 이상하다는 느낌뿐이었다. 왜 그토록 급하게 정의와 불의를 나누어 말했는지, 왜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만 말했는지, 왜 어떤 이름들은 오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시대는 그런 의심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금지된 말은 오히려 오래 남았다. 숨겨진 말은 사라지지 않고, 나의 마음속에서 더 깊은 울림으로 자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심은 빗나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5월, 광주 한복판에는 정의가 불의를 제압한 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의가 정의를 숨 막히게 했고, 아예 정의와 불의의 이름이 완전히 뒤바뀐 무력의 시간이 있었다. 청년이 되어 나는 그 소리를 점점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억이 다시 살아난 날부터 흐릿했던 나의 과거는 오히려 또렷해졌다.


역사는 때로 처음부터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떤 역사는 뒤늦게, 아주 늦게, 한 사람의 삶과 죽음, 가족의 침묵, 오래된 신문 한 장, 그리고 노래 한 구절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기록은 나에게 잊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가르치지만, 노래는 이유 없이 나를 발밑부터 흔들 수 있다. 보지 못한 것을 설명하려는 욕구는 머리를 자극하지만, 알 수 없는 시간을 노래에 담아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내 삶의 안쪽 어딘가를 찌르는 과거의 촌철일 수 있다. 그렇게 역사는 지식이 되기 전에 먼저 찌름이 되고, 떨림이 되기도 한다.

노래가 나를 데리고 간 자리

그랬다. 노래였다. 기억은 노래를 타고 삶에 더 강인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흐릿한 풍경이 조금씩 선명한 사건으로 되살아날 때, 나를 그 사건 곁으로 데려간 것은 몇 권의 바카라보다도, 몇 편의 설명보다도, 그날을 품고 있는 몇 개의 노래였다. 노래는 과거를 이해하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낮은 선율로 되돌려준다. 내가 잊고 살던 얼굴들,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거리들, 이름 없이 지나간 죽음들이 노래 속에서 이상하게도 다시 숨을 쉰다. 그래서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기억이 몸을 입고 내 앞에 다시 부활하는 방식이다.


솔직히, 대학 생활을 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때 나는 그 노래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경험을 온전히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 노래들이 태어난 자리의 고통을 내 몸으로 겪은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내가 그 노래를 부를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날의 총성을 들은 사람이 아니고, 거리에서 도망치거나 누군가를 부축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르는 노래에는 언제나 한 겹의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감 때문에, 나는 이후에 더 조심스럽게 그 노래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기억해야 할 바카라임은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나를 채근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그 노래들은 내 젊은 시절의 삶과 생각의 테두리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노래들이 내 안에서 쉬지 않고 울려 퍼지도록 나를 노래 앞에 스스로 열어놓았다. 그러나 뿌리 없는 기억은 쉽게 흔들린다. 남의 고통을 빌려 자기감정만 풍성하게 만드는 위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노래 앞에서 자주 머뭇거렸다. 그러나 노래는 나에게 완전한 증인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외면하지 말라고, 모르는 채로라도 가까이 오라고, 그날의 이름 앞에서 마음을 낮추라고 말하는 듯했다.


노래는 사건을 경험한 자들에 의해 불릴 때 당연히 더욱 실감 나게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경험이 없었으니 노래에 대한 기억마저 뿌리가 없었다. 노래에 담긴 광주의 풍경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근처에도 가지 못했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즈음 피와 공포와 저항으로 점철된 시공간을 단 한 자락이라도 내 몸으로 온전히 떠올릴 수 없었다. 이런 형편이지만, 나는 노래에 힘입어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는 있었다. 유아기 같은 역사의식이라도 머물 공간을 내어주었다. 노래는 내게 완전한 역사 인식을 준 것이 아니라, 역사 앞에 서야 한다는 부끄러운 감각을 먼저 주었다.


이처럼 노래들은 일종의 역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통행증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통해 역사의 현장 언저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치열했던 자리 안으로 당당히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까치발을 들고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 통행증을 들고도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심에는 실제로 피 흘린 사람들, 잃어버린 사람들, 살아남은 죄바카라감을 견딘 사람들이 아직도 그 아픈 역사의 절망감을 간직한 채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곁, 사건의 변두리에서 경계를 서듯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으로도 충분하다. 변두리에 선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변두리에 오래 서서 안을 다독이고 밖을 관찰하는 태도를 지속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 작은 접근만으로도 나는 위안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여전히 부끄러운 마음이 더 크다. 하여 나는 자주 노래를 듣고, 부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새기는 일을 마치 그 역사에 내재한 바카라임을 충분히 감당한 것처럼 착각하지 않으려 한다.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으로 나의 몫을 다했다고 여기지 않으려 한다. 여전히 나는 노래를 통해 때때로 면죄부를 얻기도 하고, 투사가 된 듯 감정의 호사를 누리기도 했으며, 노래 너머 그들이 꿈꿨던 세계를 무상으로 공유한 것 같은 흥분을 내 것인 양 누려 오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노래를 통해 너무 쉽게 뜨거워졌고, 너무 쉽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그 죽음의 무게보다 내 감정의 고양을 먼저 누린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쓰리다.

이제 다시 생각한다. 노래를 통해 역사에 다가가려는 일은 그것이 비록 불완전하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은 아니라고 말이다. 노래는 때로 무릎이 약한 사람에게 허락된 가장 낮은 형태의 참여일 수 있다. 말보다 먼저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보다 먼저 기억을 깨우는 작은 불씨인 셈이다. 그렇다 해도 노래를 부르는 일은 자랑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공적도 아니고, 면죄부도 아니며, 역사 앞에서 내세울 만한 훈장도 아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음이 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떨림을 붙잡아두는 일일 수는 있다. 아주 낮은 곳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잊지 않겠다고 중얼거리는 일. 내게 노래는 그런 정도의 참여였다.

역사의 노래가 가진 힘

역사를 기억한 노래는 역사에 빚진 자들을 조용히 위로하는 힘이 있다. 역사를 직접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그 역사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배려와 용납의 신호일 수 있다. 생각은 있으나 몸을 움직이기 힘겨워하는 사람, 현장의 중심에 서기에는 겁이 많고 무릎이 약한 사람, 그러나 역사의 바깥에 완전히 머물고 싶지는 않은 사람에게 노래는 손을 내민다.


그 위로는 편안한 위로가 아니다. 역사의 노래는 듣는 사람을 안심시키기보다 오히려 불편하게 만든다. 왜 나는 그 자리에 없었는가, 왜 나는 그 일을 늦게 알았는가, 왜 아직도 충분히 기억하지 못하는가를 묻게 한다. 노래의 위로는 부드럽지만, 그 부드러움 안에는 작은 가시가 있다.


물론, 노래 한 곡을 마음에 품는다고 해서 모든 바카라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역사의 채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노래는 적어도 한 사람을 그 역사의 변두리에 세워줄 수 있다. 역사의 안쪽으로 선뜻 들어갈 수는 없을지 몰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 강물에 발을 담그게 할 수는 있다. 역사의 중심에 서는 일만이 기억은 아니다. 때로 기억은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일로 이루어진다. 그 자리에 서서 이름을 다시 듣고, 노래를 다시 듣고, 한 번 더 마음을 조용히 낮추는 일. 그런 반복이 한 사람의 역사 감각을 만든다.


그런 뜻에서 역사의 노래를 부르는 일만으로 기억의 가치가 있다. 다행히 나는 노래가 역사의 기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노래를 부르는 일, 혹은 마음으로 듣는 일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공감이며 기억이라는 것도 경험했다. 노래는 역사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를 향해 돌아서는 몸짓은 될 수 있다. 노래는 희생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비워두지 않게 만든다. 내가, 노래를 기억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완전하지 않지만, 비어 있지도 않은 그릇이며, 부족하지만, 외면보다는 나은 그릇 말이다. 이렇게 노래는 적어도 나에게는 기억이며, 참여이다. 노래를 부름으로써 역사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역사의 노래를 애써 몸 밖으로 밀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조심스럽게라도 품으려 해야 한다. 그날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내 몸에 완전히 채우지 못해도, 그 노래가 부르는 자리 앞에서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기억은 완전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 자기 부족함을 인정하며 다시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노래를 통해 바로 그 부족한 기억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오늘, 다시 그 노래들 앞에서

그럼에도 어떤 이가 역사의 노래 하나에 담긴 의미의 끄나풀조차 마음에 품지 못한 채, 애써 사양하고, 입을 다문 채 꼿꼿이 서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사람에게는 각자 양보할 수 없는 자기의 길이 있다. 누구도 모든 노래를 같은 방식으로 부를 수는 없다. 어떤 이는 큰 소리로 부르고, 어떤 이는 속으로만 따라 부르며, 어떤 이는 끝내 침묵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기억의 형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노래를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침묵은 조용한 애도일 수 있지만, 어떤 침묵은 외면일 수 있다. 문제는 입술의 움직임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다. 노래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억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문제다.


문제는 노래를 부르느냐 부르지 않느냐 그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더 깊은 문제는 그 노래가 품은 역사적 고통과 기억을 자기 감성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다. 노래가 문제가 되는 순간은, 노래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노래를 듣지 않으려는 세계, 그 노래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기억마저 밀어내려는 세계가 존재할 때다. 역사의 노래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그 노래는 아름다운 선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죽음과 부당함과 오래된 억울함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노래를 밀어내면, 우리는 그 노래가 붙들고 있던 기억까지 함께 밀어내게 된다. 불편한 기억을 견디는 능력, 그것이 어쩌면 한 슬롯가 인간다움을 지키는 최소한의 힘인지 모른다.


어느 해 기념일에는 또다시 이 역사의 노래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노래 부르는 방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노래가 문제’라는 말 자체가 더 큰 문제처럼 들린다. 역사의 노래를 부르는 일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작고 낮은 행동이다. 아주 미세한 공감의 표시이며,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는 일이다. 노래는 총을 대신하지 못하고, 판결을 대신하지 못하고, 진실 규명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노래는 진실이 사라지지 않도록 마음 한쪽에 자리를 마련한다.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도, 문서가 낡은 뒤에도, 증언이 멀어진 뒤에도 노래는 남아 다시 사람을 부른다. 그런 점에서 노래는 약하지만 오래가는 기억의 방식이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라는 한 자락을 듣는다. 그 노래는 단지 선율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누군가의 슬픔이었고, 누군가의 저항이었으며, 누군가의 죽음을 지나 오늘 우리에게 도착한 기억이다. 한 노래가 처음 태어난 자리와 훗날 머물게 되는 자리는 언제나 같지 않다. 어떤 노래는 개인의 슬픔에서 출발해 공동의 애도가 되고, 어떤 노래는 사랑의 상실에서 출발해 역사의 상처를 품게 된다. 노래의 운명은 그렇게 이동한다. 사람들의 입과 눈물과 시대의 고통을 지나며, 처음의 의미보다 더 넓은 의미를 얻게 된다.


부인할 수 없듯이, 사람에게는 각자 양보할 수 없는 자기만의 길이 있다. 그렇다 해도 해마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를 한 자락이라도 듣는 이라면, 그것이 개인사의 애환을 담은 ‘샹송’으로부터 발원하여(미셸 폴나레프의 샹송 Qui a tue grand maman) 우연히 우리 삶의 역사적 자리에 머물게 된 깊은 이유를 반추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노래도 사람처럼 이동한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개인의 사연에서 한 공동체의 기억으로, 한 시대의 감정에서 다른 시대의 윤리로 옮겨간다. 그러는 동안 노래는 원래의 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얻어 성숙해진다. 우리가 그 노래를 다시 듣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노래의 기원을 따지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노래가 왜 이 땅에서 이런 기억의 옷을 입게 되었는지를 묻고 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wWogzBVChQ


또한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노래의 가사도 그렇다. 특히 이 노래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투쟁적으로만 압축한 노래가 아니다. 그 안에는 애달픈 두 사람의 ‘님’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 함께 흐른다. 그러므로 그 노래들은 단지 구호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된 애도이며, 사랑이며, 기억의 형식이다. 연민과 사랑의 동행곡이다. 그 노래가 오래 살아남은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분노만으로 된 노래는 시간이 지나면 쉽게 굳어지는 듯하지만, 사랑과 애도를 품은 노래는 오래 사람의 가슴을 통과할 때가 많다. 사랑은 여려 보이지만, 그것은 인생을 연대하게 한다. 결혼이라는 개인들의 동행 출정이 깃발이 나부끼는 시대의 자리에서는 투사들의 선언이기도 한다. 이처럼 연대와 분투가 있는 자리에는 언제나 사라져 버린 얼굴이 있고, 동지가 없는 자리에는 남겨진 사람의 떨림이 있다. 그래서 노래는 외침이면서 동시에 울음이다. 역사 속에서 개인이 홀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시대의 탄원으로, 공동체가 함께 부르는 탄원으로 오래 생명을 이어간다.


왜 이 노래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두려움 너머를 내다보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지금도 불리는가? 우리가 그 노래들을 다시 듣고 부르는 이유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어느 사건에서 불린 노래는 죽은 자를 완전히 과거에 봉인하지 않고, 또 살아남은 자들이 쉽게 그 이야기를 잊지 못하도록 마음 어딘가에 작은 통증을 남긴다. 망각은 때로 너무 자연스럽다. 살아남은 사람은 다음 날 아침밥을 먹고, 일을 하고, 계절을 지나며 조금씩 잊는다. 하지만 노래를 기억하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자연스러운 망각의 흐름을 잠시라도 멈춰 세울 수 있다. 잊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야 해서 잊어가는 사람들에게, 노래는 조용히 다독이며 묻는다. 정말 다 지나간 일인지 말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냐고. 그 질문이 일으키는 통증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기억

다른 이가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글 하나를 다시 읽고 노래를 부르며 이날을 보낸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글 한 편이 역사를 대신할 수 없고, 노래 한 곡이 바카라임을 완성할 수 없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작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너무 작아서 때로는 부끄럽다. 그러나 작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기억은 더 빨리 사라질 것이다. 거대한 역사는 늘 거대한 방식으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날에는 한 사람이 오래된 노래를 다시 듣는 일로, 사라진 이름 하나를 조용히 떠올리는 일로, 흐릿한 기억을 문장으로 붙잡는 일로 가까스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방식으로 이 거대한 역사의 강물 앞에 선다. 노래를 다시 듣고,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고, 오래전 흐릿했던 신문 한 장과 일찍 세상을 떠난 이모부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것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기억의 노력이다. 이 기억은 부끄럽다. 완전하지도 않다. 늦게 도착한 기억도 기억이고, 부끄러움 속에서 다시 떠올리는 이름도 기억이다. 나는 그날을 늦게 알았다는 사실조차 다행이라 여긴다. 나처럼 이런 역사적 현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사람에게도, 아니 그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에게도, 누구에게나 자기 노래를 찾아 부를 시간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역사의 중심에 서기에 주저하는 사람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나는 변두리에서라도 나의 자리를 지키며 오래 서 있고 싶다.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보던 사람이 이제는 경계를 넘어 한 걸음씩, 낮은 자세로, 조금 더 오래, 나의 길을 걷고 싶다. 변두리에 선다는 것은 물러난다는 뜻이 아니다. 중심을 차지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함부로 증언자의 자리를 경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는 그날을 겪은 이들의 고통을 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해도 그들이 남긴 침묵과 노래와 이름 앞에서 오래 머물 수는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기억은 아마 그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의 기억이라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흐릿했던 그날의 신문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노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그 노래가 다시 불릴 때마다, 내가 너무 늦게 알아차린 정의의 본면을 다시 생각한다. 나는 이제 안다. 그날을 늦게 알았다는 사실도 내 기억의 일부이며,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나왔다는 부끄러움도 내 바카라임의 일부라는 것을 말이다. 역사의 기억은 누구에게도 완전하지 못하다. 부족한 사람이 자기 부족함을 인정하며 다시 돌아보는 일이어도 충분하다.


나는 오늘도 노래 앞에 선다. 부족한 채로도 그 역사로부터 끝내 떠나지는 않으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기억은 때로 기록과 함께 노래로 온다. 노래는 그 역사 앞에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도 그날 앞에 설 작은 자리를 내어준다. 나는 그 자리가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작은 자리라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해마다 오월이 오고, 노래가 다시 들려오면, 오래전 그 호외의 검은 글씨와 이모부의 흐릿한 얼굴과 광주의 이름이 내 안에서 함께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아직 남아 있다면, 나는 완전히 잊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노래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는다.“당신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나는 그 질문 앞에서, 매번 조금 늦게, 그러나 다시 노래로써 대답하려 한다. 그 노래를 더욱 다양하게, 많이 부르며 새로운 기억으로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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