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시해설]4-7. 8.1.5.1.8
‘얼쑤’의 미학

"— 과거가 현재를 찌르고, 포도시 미래를 끌어오는 현재에 대하여 —

by푸른킴

*2026. 3월. 광주 전남동청과 상무대 앞에서 <5.18 전야제>준비 위원회 위경종 상임위원장의 안내를 받은 뒤

[전문]

8.1.5.1.8


오! 과거는 미래의 어머니

일어나 일렁이는 깃발, “해방은 자유의구속자”

팔 뻗어 포도시 건네는 주먹밥― 얼쑤


1. 들어가며 — 5월, 정다운 달 이후의 시간

5월은 4월보다 정다운 달이라 노래한 황금찬 시인의 세계에는, ‘4월 혁명’ 뒤에 스며든 희망이 허전해진 듯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삶이 모호해지고 흐릿해질 때, 사람은 풀과 나무로 상징되는 어떤 초록의 세계를 꿈꿀 때가 많다. 상상은 현실의 핍절함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조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절로부터 강산이 막 변해가던 1980년대의 5월은, 4월보다 더 힘겨운 달이 되어버렸다. 평범한 나에게도 1980년 이후 해마다 돌아오는 5월은 더 이상 정다운 달만은 아니었다. 에둘러 정다운 풍경을 찾아보려 했으나, 이내 마음의 눈은 저 낮고 넓은 땅의 도시, 그 도시의 굉음과 함성에 기울어진다.


올해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일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 역시 이 처연한 그날의 풍경을 되살리고, 내 삶에 그날의 의의를 다시 오롯이 새겨두기 위해 한 편의 작은 철학시를 남겨둔다. 시의 여백을 채우는 일이야 누구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시에 담긴 나의 마음을, 나의 글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는 숫자로 시작한다.


2. 제목 — 8.15와 5.18, 두 시간이 서로를 통과하는 방식

시의 제목부터 말해야겠다.


8.1.5.1.8


얼핏 보면 숫자의 나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숫자는 사건의 해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결합이다. 흩어진 파편을 임의로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두 거대한 사건을 하나의 숨으로 다시 꿰맨 기호다. 바로 8.15와 5.18이다. 광복의 그날과 광주의 그날은 한 선상에 놓인다. 해방과 항쟁은 연속적인 사건이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도래하지 못한 자유를 향한 민중의 봉기는 다른 듯 같은 역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덧붙인다면, 8.15와 5.18은 하나의 역사 안에서 서로를 향해 움직이는 사건이라는 의미다. 그 둘은 쪼개지고 겹쳐진다. 서로의 내부로 이념과 행동, 기억과 사상이 스며든다. 8.15는 5.18로 이어지고, 5.18은 8.15를 되묻는다. 광복은 광주로, 광주는 다시 광복의 의미를 질문한다.


무엇보다 이 두 숫자는 기념일의 나열이 아니다. 지나온 역사의 압축이다. 과거와 미래, 미래와 현재가 서로를 일깨우는 숫자다. 조금 과하게 말하자면, 이 제목에는 이미 벤야민의 역사철학의 한 흔적이 담겨 있다. 그에 의하면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다. 과거는 어느 현재의 순간에 불현듯 도래하여 현재를 찌르는 사건이다. 과거는 연대기 속에 일렬로 늘어선 것이 아니다. 지난날 죽은 자들의 소리는 지금 여기 산 자들의 시간 속에 다시 말을 걸어온다.


이 철학시의 제목은 바로 그 여기시간, 곧 지금-여기에서 번쩍이는 역사적 순간을 포착한 역사의 변주다. 8.15는 먼 과거가 아니다. 5.18도 가까운 과거가 아니다. 둘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이면서, 미래를 끌어당기는 공동의 힘이다. 하나는 해방을 향한 열정으로, 다른 하나는 자유를 향한 저항으로 이 땅의 삶을 견인한다. 이를 통해 이 두 사건은 미래가 과거에 담겨 있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 만들어내는 긴장의 장소라는 것을 입증한다. 또한 이 두 사건은 그날의 함성 이후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삶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선택’의 가치를 일깨운다.


여기서 내가 붙들고 싶은 핵심은 이것이다. 8.15는 자유의 해방이고, 5.18은 해방의 자유다. 8.15는 자유가 식민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나는 사건이다. 빼앗긴 말, 빼앗긴 몸, 빼앗긴 주권이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되찾는 순간이다. 여기서 자유는 해방의 목적이고, 해방은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문이다.


반면 5.18은 해방 그 자체가 과연 자유로운가를 묻는 사건이다. 이미 주어졌다고 말해진 해방이 다시 국가의 이름으로 자유를 묶을 때, 광주는 해방을 다시 해방시키려 했다. 해방 이후의 국가가 자유를 구속할 때, 광주는 그 해방의 이름을 자유롭게 하려 했다.


그래서 둘은 이렇게 맞물린다. 8.15: 자유가 해방된다. 5.18: 해방이 자유로워진다. 이 역설적 보완관계가 이 시의 중심 논리다. 8.15가 없었다면 5.18의 역사적 계보는 성립하기 어렵고, 5.18이 없었다면 8.15는 미완의 해방으로 남는다. 8.15는 자유의 가능성을 열었고, 5.18은 그 가능성이 국가와 폭력에 의해 다시 묶였음을 폭로하여 자유를 다시 민중의 몸으로 회복했다. 그러므로 8.15는 자유의 해방이고, 5.18은 해방의 자유다. 이 둘은 대칭이면서 반전이고, 계승이면서 심문이다.


3. 시의 형식 — 단시, 삼행시, 두운, 암송의 리듬

이 철학시는 나의 단시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덧붙인 것은 일반적인 삼행시의 구조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세 행 구조, 마흔 자 내외의 압축, 부사어의 적절한 활용, 중의적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덧붙여 오(5), 일(1), 팔(8)을 문두에 두는 두운법을 활용했다. 이로써 이 철학시는 암송에 적합한 문체를 유지하려 했다. 짧지만, 짧음 속에 소리와 사건과 철학이 함께 접히기를 바랐다.


8.1.5.1.8

오! 과거는 미래의 어머니
일어나 일렁이는 깃발, “해방은 자유의구속자”
팔 뻗어 포도시 건네는 주먹밥― 얼쑤


이 시는 내용상 5.18을 말할 뿐 아니라, 형식상으로도 오일팔을 품고 있다.


오!

일어나

팔 뻗어


이 형식은 단지 언어유희가 아니다. 오일팔이라는 사건의 이름을 시의 뼈대로 삼으려는 의도적 기법이다. 이 철학시는 5.18을 추모하거나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역사와 문학 속에서 자기 의의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각 행의 첫소리는 사건의 날짜인 5.18을 호출한다. 그리고 그 날짜는 다시 문장 속에서 역사철학으로 확장된다.


“오!”는 감탄이자 소환이다.
“일어나”는 봉기이자 깃발이다.
“팔 뻗어”는 연대이자 나눔이다.


따라서 이 삼행 구조는 거칠지만, 5.18의 운동을 세 가지 측면으로 압축한다. 1행은 매해 그날의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는 깨달음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과거의 등장이다. 2행에서는 그날의 봉기를 상상한다. 깃발은 그 상상의 핵심이다. 3행은 그날 그 자리를 지켜낸 공동체를 그려낸다.


이를 통해 이 삼행시는 구조상 감탄—깃발—주먹밥—잔치로 이어지는 운동감을 유지한다. 특히 마지막의 “팔”은 숫자 8의 음가를 받으면서 동시에 신체의 팔을 연상시킨다. 어찌 보면 숫자가 몸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무생물이 생물처럼 움직이는 순간이다. 역사는 추상적인 기념일로만 남아 있을 때 온전히 기억되지 않는다. 역사는 팔을 뻗어 밥을 건네는 구체적 몸짓으로 귀환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이것이 이 시의 중요한 시학이다. 숫자는 사건이 되고, 사건은 몸이 되고, 몸은 밥을 건네고, 밥은 미래를 낳는다. 결국 오일팔이라는 명칭은 내 몸의 탄성과 일어나는 행동, 나아가 대동세계를 공유하는 슬픈 즐거움이라는 몸의 행동과 무관하지 않다.


4. 제1행 — “오! 과거는 미래의 어머니”

첫 행은 특별히 감탄으로 시작했다.


“오!”

이 감탄은 단순한 놀람과 경이로움이 아니다. 탄원이다. 지극히 비운의 서정을 담은 탄성이다. 동시에 이 소리는 각성이다. 결국 이 외마디 첫 글자는 탄식과 득음의 정서를 동시에 함의한다.


나는 이제야 지난 역사가 죽은 기록이 아니라 살아서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키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과거는 누군가에 의해서만 현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만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역사 자체가 지닌 생명력으로 시대를 흘러 역동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기억으로만 과거가 소생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 자체에 잉태된 기억의 힘이 강물처럼 시대 속을 흘러간다. 나는 5월이 오면 그런 작은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요컨대 이 외마디 탄성 “오!”는 탄식과 각성, 나아가 기쁨의 숨소리가 뒤섞인 흔적이다.


이어지는 시어, “과거는 미래의 어머니”는 내가 이해한 과거의 의의를 표현한 것이다. 과거는 새로운 역사, 아직 도래하지 않은 역사를 품는 어머니와 같다. 이 철학시는 8.15와 5.18이라는 두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태어난 새로운 역사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따라서 이 시어는 이 시의 존재론적 선언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든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을 관찰해 보면, 과거는 단순히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언저리에서 맴돈다. 때로는 오래된 기억의 형태로, 때로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형태로, 때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가능성의 형태로 우리 곁을 돈다.


과거는 미래를 낳는 토대이기도 하다. 모든 미래는 없는 것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텅 빈 세계에서 밀려오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과거, 역동하는 죽음, 경계 없는 해방을 잉태한 과거에서 창발 한다.

과거는 지난날의 역사만이 아니다. 묘비에 새겨지거나 자서전에 쓰인 옛이야기도 아니다.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과거를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과거는 새로운 역사를 태어나게 한다. 사람의 몸을 지탱하는 혈관처럼, 이 세계 곳곳을 타고 흐른다. 나의 과거는 너의 미래이며, 너의 현재는 나의 과거로부터 도출된다. 나아가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다시 생각한다. 이 시어는 벤야민의 사유를 나의 것으로 되새겨본 것이다. 벤야민에게 역사는 승리자의 행렬이 아니라 패배한 자들의 울음이 현재에 소생하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 속에서 죽어간 것들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듯이 현재 속에서 다시 소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미래의 어머니”라는 말은 따뜻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나를 경각하게 하는 말이다.


특히 과거와 미래, 어머니라는 낱말들은 단순히 낳는다는 은유에 머물지 않는다. 미래는 과거의 상처를 외면하고 태어날 수 없다는 의미를 품는다. 미래는 과거의 자식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끊어낼 수 없는 혈족이 이어져 있다. 살아 있는 과거, 죽음 너머 새로운 생존의 힘이 만들어낸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현실, 그것이 곧 미래다.


결과적으로 8.15라는 과거가 태어나게 한 해방은 훗날 5.18이라는 슬픈 역사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날 민주와 자유라는 미래가 이 땅에 충분히 드러나기도 전에, 지난날의 해방과 민주와 자유는 다시 미완으로 남겨졌다. 5.18이 서러운 절기인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시 첫 행은 지난 8.15와 5.18을 지금-여기 시간이라는 역사철학 안에서 연속성을 가진 사건으로

일깨우려 했다. 실제 일어난 두 사건은 결국 하나의 역사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5. 제2행 전반 — “일어나 일렁이는 깃발”

둘째 행은 첫 행의 사건 묘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클로즈업한 것이다. 군중이라는 덩어리를 관찰한 것이다. 나아가 시의 역동성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일어나 일렁이는 깃발,”

이 시어는 군중 속에 휘날리는 만장과 걸개를 연상한 것이다. “일어나”는 단순히 앉아 있다가 몸을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사건과 운동, 몸부림의 기동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사건의 발발이며, 의지의 발현이다. 그 일어남은 “일렁이는”이라는 시어와 바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 두 단어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 일어남은 개인의 움직임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일으킨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일렁인다”는 것은 물결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현상을 연상시킨다. 하나가 아니라 물덩어리다. 그것이 출렁이는 장면이다. 어우러짐이며, 대동의 물결이다. 마지막 시어에서 이 덩어리의 움직임은 다시 하나로 수렴한다. 나는 “깃발”을 단수로 썼다. 수많은 깃발들이 더는 제각각 펄럭이지 않고, 하나의 상징 속으로 모여드는 장면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렁이는”이라는 말은 이 철학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일렁임은 8.15의 순간에도 있었다. 더 멀리는 3.1 만세 항쟁에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일렁임은 군중의 물결이다. 하나의 일어남이 거대한 군중의 물결로 이어짐으로써 비로소 민중이 탄생한다.


이제 깃발의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깃발은 흩어진 것들을 하나로 집결하는 공동체성을 함의한다. 그것은 고정된 표상이 아니다. 흔들리는 군중을 기표한다. 바람을 받을수록 더욱 휘청거린다. 그것은 “풀이 눕는 것” 같은 연약한 흔들림을 떠올리게 한다. 이 깃발은 곧 여린 사람들의 일사불란하면서도 뒤엉킨 몸짓이다. 분노와 슬픔과 환희, 그리고 희망 사이에서 파동 치는 인간성의 흔들림이다. 깃발은 숱한 일렁거림들의 일렁거림이 집약된 표징이다.


또한 일렁인다는 것은 역사가 아직 봉인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깃발이 일렁이면, 해방과 자유와 민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깃발은 선언이면서 질문이다. 상징이면서 상처다. 승리를 향한 여정의 표지판이며,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완의 역동이다.


나의 시에서 앞서 언급한 제목과 관련해 보면, 이 깃발은 8.15의 깃발이면서 5.18의 깃발이다. 광복의 날에 일렁이던 태극기의 환희와, 광주의 거리에서 다시 출렁이던 민주주의의 깃발이 겹쳐 있다. 그러나 두 깃발은 여전히 미완의 운동을 일깨우는 자극이다. 8.15의 깃발이 해방의 도래를 알렸다면, 5.18의 깃발은 그 해방이 왜 자유가 되지 못했는지를 되묻는다.


이처럼 나의 시어 “일어나 일렁이는 깃발”은 응시해야 할 역사적 아픔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고자 일어선 민중을 떠올린다. 나아가 그 민중 속에 함의된 공동체성의 흔들림을 연상하려는 문학적 저항이다. 5.18과 8.15는 다른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 둘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공통점을 지닌다. 바로 깃발의 의미다. 우리는 이 깃발 아래에서 해방과 자유, 그리고 민주는 어느 시대의 어느 역사든 폐기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라는 점을 배운다. 해방은 끝나지 않았다. 자유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깃발이 다시 들리고, 그 아래 모여 함께 민중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일깨우는 역사의 찌름이다.


6. 제2행 후반 — “해방은 자유의구속자”

둘째 행의 마지막 구문은 그 깃발에 쓰인 구체적인 문장을 연상한 것이다.


“해방은 자유의구속자”


이 문장은 이 시의 선언이자, 나의 시가 지향하는 철학적 핵심이다. 마치 사람 몸의 심장처럼 이 시어는 “구속자”라는 표현에서 두 개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구속자救贖者이다. 곧 구원자다. 다른 하나는 구속자拘束者이다. 곧 묶는 자다.


해방은 자유를 구원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자유를 묶는 자다. 나는 한국 현대사에서 8.15와 5.18이 모두 이 이중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 두 사건이 가진 가장 깊은 역설이다. 이 말은 특히 야누스적인 말놀이가 반영된 역설의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해방은 자유의 구원자다. 8.15는 서른여섯 해 동안의 식민지 폭력 속에서 끝내 얻어낸 자유의 사건이었다. 이 시기 언어는 빼앗겼고, 몸은 동원되었고, 삶은 제국의 질서에 갇혔다. 그런 점에서 8.15는 자유를 구원하는 사건이었다. 해방은 빼앗긴 이름을 되찾고, 짓밟힌 존엄을 일으키며, 억압된 민족의 시간을 다시 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단순한 완성의 사건이 아니었다. 국제정세와 외부 조건 속에서 주어진 해방의 성격도 있었고, 내부의 민족적 운동이 끝내 자기 힘만으로 완성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자유는 시작부터 제한성을 품은 자유였다. 해방은 왔지만, 자유가 온전히 제 몸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해방은 동시에 자유의 구속자였다. 자유를 억압하는 구원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해방 이후의 역사가 곧바로 국가와 세계 속에서 정치 체제의 자유를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끝내 분단이 왔고, 전쟁이 왔고, 독재가 왔고, 국가폭력이 자연스럽게 밀려들어왔다. 해방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세워졌지만, 그 국가는 자주 자유를 다시 억압했다. 이념으로, 체제로, 심지어 질서유지의 이름으로 몸이 묶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전의 이름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강요도 허용되었다.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자유는 꼼짝 못 할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깃발에 실린 저 문장은 희망이면서도 잔혹한 질문이다. 해방은 자유를 구원했는가. 아니면 자유를 구속했는가. 나는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오히려 두 뜻을 한 단어 안에 동시에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의구속자”라는 붙여쓰기 역시 자유와 구속이 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자유는 구속과 불가분이며, 구원은 속박과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역사 안에서 해방은 자유를 낳았지만, 그 자유가 곧바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나는 5.18이 8.15의 역사적 모형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5.18에서 그 계승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8.15가 남긴 미완의 아픔을 미래의 민중들이 다시 겪어야만 했던 역사의 비극적 귀결을 담고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해방이 자유를 충분히 구원하지 못했음을 증언한 실제였다. 동시에 나는 광주가 거기서 굴복하지 않고, 다시 깃발을 들고, 구속된 그 자유를 구원하려는 해방 사건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5.18은 해방과 자유, 다시 억압의 반복을 끊어내고, 숨겨져 있던 해방의 본래 의미를 재구속救贖하는 역사적 운동이다. 묶인 자유를 다시 구원하려는 사건이며, 해방이라는 이름에 묶인 자유를 민중의 몸으로 다시 풀어낸 지금-여기의 사건이다.


내가 이 문장에서 구현하려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어느 시대나 해방은 구속과 억압을 끊어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희망의 말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말일수록 더 쉽게 권력이 되는 아이러니도 여전하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자유라는 말은 해방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때때로 개인의 삶을 국가에게 귀속시키는 강제적 형식으로 변한다.


나는 이 역설을 “해방은 자유의구속자”라는 문장에 담아보려 했다. 이 문장은 구원과 속박이 한 몸에 들어 있고, 광복과 광주가 서로를 바라보며, 역사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감추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다시 풀어 말하면 이렇다.


8.15는 자유의 해방이다.
5.18은 해방의 자유다.


8.15에서 자유는 식민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나 5.18에서 해방은 자기 안의 구속성을 폭로당한다. 해방이 자유를 약속했으나, 해방 이후의 국가는 다시 자유를 묶었다. 그러므로 광주는 자유를 다시 해방하는 사건인 동시에, 해방 그 자체를 자유롭게 하는 사건이다. 8.15가 자유의 문을 열었다면, 5.18은 그 문이 다시 감옥이 되지 않도록 민중의 몸으로 밀어젖힌 사건이다.


7. 제3행 전반 — “팔 뻗어 포도시 건네는 주먹밥”

이제 마지막 셋째 행은 이 철학시가 지향하는 마지막 상상력의 산물이다. 앞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 그날의 거대한 풍경을 거쳐 이제 더 미세한 지점에 정착한다. 바로 5.18의 한 장면이다.


“팔 뻗어 포도시 건네는 주먹밥”

앞선 2행과 견주어 보면, 이 행에서 나의 시는 깃발에서 밥으로 내려온다. 해방과 자유라는 큰 덩어리에서 손에 쥐어지는 주먹밥으로 하향한다. 거대한 허공에서 미세한 작은 사물 하나로 줌인된다. 나의 시에서 언제나 하강은 축소나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시가 지향하는 윤리의 알짬이다. 나는 이런 윤리적 핵심을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 그 자체로 묘사하고자 했다.


“팔 뻗어”는 팔을 내어 뻗는 모습이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거나, 다른 이에게서 받아 드는 장면이 교차한다. 밥을 건넬 수도 있고, 밥을 받을 수도 있다. 팔 뻗음은 거리를 상쇄한다. 그것은 나의 의지를 드러내는 몸의 장치다. 팔을 내어주는 일은 나와 너 사이의 틈을 메우겠다는 의지다. 이때 팔은 관계의 상징이다. 돌봄의 팔이면서 저항의 팔이다. 주먹을 쥐어 나를 보호하는 도구로 쓸 수 있지만, 팔을 뻗음으로써 이제는 나를 열어주는 표식으로 삼을 수도 있다.


나의 철학시가 2행에서 3행으로 전환되는 일이 핵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거대하고 높은 가치를 상상하듯 꿈꾸면서도, 그 현실을 내 손안에, 내 발밑에 일어난 사건으로 주목한다. 나에게 팔을 움츠려 힘을 주는 주먹은 투쟁의 형상이다. 그러나 그 팔을 뻗어 주고받는 주먹밥은 환대와 공존의 실제 형상이다. 움켜쥔 손, 웅크린 팔을 뻗으면 그것은 생명과 공재의 양식을 주고받는 도구가 된다.


광주의 민중성은 거창한 담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팔을 뻗고 거두어들이는 유기적인 행동이라는 미미한 이야기에 있다. 5.18을 무력의 시위처럼 말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지만, 그날의 이야기는 거대한 항쟁인 동시에 인간다움이 빚어낸 대동의 사건이었다.


그날 시민들은 자유와 해방이 거세된 땅에서도 자유롭게, 해방을 위해 함께 피 흘렸다. 함께 팔을 뻗어 밥을 나누었고, 함께 죽음의 자리를 지켰으며, 자유의 상징인 도청을 사수하고 싶어 했다. 도청이라는 건물만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자기 몸 하나 지켜낼 수 없는 사람들의 뒤엉킨 몸을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다. 주먹밥은 그래서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을 상실한 광주에서 서로의 팔을 뻗어 만들어낸 자유의 성찬이다. 민중의 잔치였으며, 빵과 자유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작은 몸이었다.


8. 제3행 중반 — “포도시”와 약한 메시아적 힘

나는 이 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포도시”라는 전라도 방언을 언급했다. “겨우,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라는 이 부사어는 이 철학시에 내재된 시의 영혼이다. 겨우, 간신히, 가까스로. 충분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완전하지 않지만 멈추지 않고, 숨 넘어갈 듯한 상태에서도 끝내 무엇인가를 이뤄냈다는 자기 결실이 담긴 말이다. 승리의 개선가가 아니라 겨우 버텨내었다는 숨소리다. 거대한 구원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고 붙잡은 승리의 미미한 끝자락이다.


나의 이 말은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적 힘과 닿아 있다. 벤야민에게 현재의 인간들은 과거의 패배한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약한 메시아적 힘을 부여받았다. 5.18은 8.15의 실패를 다시 견인하는 미력한 메시아적 힘이었다. 그 힘은 전능하지 않다. 역사를 한 번에 완성하는 강한 구원의 힘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미약하고, 불완전하고, 때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힘이다. 그러나 바로 그 약한 힘이 인간을 인간으로 붙든다. 광주는 “포도시”의 힘으로 막강한 권력의 탱크 앞에 섰던 약한 메시아의 터전이었다.


이런 관점에 근거하면 광주의 담론은 우리에게 몇 가지 인상적인 현상을 남겨준다. 구원은 포도시 온다. 자유는 포도시 건네진다. 미래는 포도시 태어난다. 역사는 포도시 다시 일어난다.


이처럼 “포도시”라는 말은 주먹밥과 다시 맞물려, 그 밥을 약한 메시아적 사물로 전환해 준다. 그것은 총을 이길 수 없는 힘이다. 탱크를 막아 세우지 못하는 힘이다. 국가폭력을 단숨에 무너뜨리지 못하는 힘이다.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에게 밥을 건네는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흔들리는 작은 깃발이다. 그 작은 밥 한 덩이가 인간의 존엄을 가까스로 붙든다는 표식이다.

그러므로 이 행에서 나는 몇 가지 점을 강조하려 했다. 혁명은 거창하지 않다. 때때로 밥의 모양으로 온다. 구원은 불가항력적 기적이 아니다. 때때로 팔을 뻗는 일 그 자체다. 미래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주먹밥 하나를 건네는 일로 시작된다. 그 일은 힘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힘으로 건너오는 역사의 장치다.


9. 제3행 후반 — “얼쑤”, 대동의 추임새

셋째 행의 마지막 단어는 추임새다.


“얼쑤”

이 단어는 나의 철학시를 저항에서 대동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대동”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지 않은 것은, 이 철학시의 끝이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쑤”는 완성된 세계, 대동의 성취에 대한 흥겨움만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미완의 자유와 해방, 수습되지 않은 죽음, 밝혀지지 않은 바카라임 앞에서도 역사는 반드시 정의로운 결말로 민중을 이끌어간다는 확신과 희망을 담은 시그널이다.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추임새다. 사유를 이해시키기 위한 호소가 아니라, 그저 자유를 희망하고 그것을 향해 내 몸을 움직인다는 소리 자체다.


이 “얼쑤”는 민중적 긍정의 소리다. 단순한 흥이 아니라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그 너머 부활의 시공간을 내다보는 낙인의 환희의 소리다. 슬픔을 지우는 흥이 아니라, 슬픔을 끌어안고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기막힌 장단이다. 피로 얼룩진 역사 속에서도 몸은 아직 생존의 박자를 잃지 않았다는 달관의 증거다.


앞서 “포도시”가 약한 메시아론의 부사라면, “얼쑤”는 그 약한 구원이 몸으로 터져 나오는 탄원의 소리다. 그날 광주에는 포도시 건네는 손이 있었고, 그 손을 받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 사이에 공동체의 장단을 만드는 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은 대동이 분명하다. 하지만 광주는 대동세계라는 별칭으로만 끝날 수는 없다. 광주는 끝나지 않은 슬픔과 회한을 품고도, 가면을 쓰고 군중을 행복하게 하는 주인공들의 눈물이 “얼쑤”라는 말로 슬픔을 쏟아내는 땅이다. 곧 비지悲地, 땀 가득한 곳, 생명의 투쟁으로 생동하는 토지이다.


결국 대동세계란 이름만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몸으로, 삶으로 수행되는 땀의 결실이다. 주먹밥을 건네는 팔에서, 그것을 받아 드는 몸에서, 함께 나누는 “얼쑤”에서 실현된다. 말이 사건이 된다. 나의 시가 “대동”이라는 명사가 아닌 “얼쑤”라는 의성어이자 의태어로 마감한 이유다. 개념을 버리고 사유하는 몸을 얻는다. 이 시에서 철학은 개념이 아니라 장단과 리듬으로 구현된다. 특히 5.18이라는 역사의 철학은 이념이나 이상적 사유가 아니라, 땅의 인간이 들썩이는 어깨 위에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자유의 추임새로 실현된다. 그날 광주에는 장례식과 마을 잔치가 함께 있었다. 상여의 꽃은 풍물의 장식이었고, 상무관은 죽은 자를 애도하면서도 산 자들이 서로를 먹이고 일으킨 대동의 잔치판이었다.


그러므로 “얼쑤”는 이 시가 지향하는 철학을 함축하면서도, 이 시가 지향하는 마지막 저항을 상징한다. 어떤 폭력은 인간을 눌러 침묵시키려 하지만, 민중의 카니발은 끝내 미미한 소리로 마무리된다. 그날,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느닷없던 계엄은 거리를 얼어붙게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둠에서도 다시 장단을 만들었다. 그날 광주의 땅과 하늘에서 일어난 총성은 공동체를 찢으려 했지만, 주먹밥 하나가 포도시 그 찢어진 자리를 꿰맸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슬픈 현실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송출한다.


얼쑤―.

이 말은 과거가 미래를 현재로 견인하는 약하나 강한 힘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생명의 기호다.


10. 벤야민적 여기시간과 역사적 계승

이 시의 토대는 앞서 말한 대로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근간으로 한다. 그에 따르면 직선적 진보의 역사관보다, 회귀적이고 재현되는 역사관이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해석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 과거가 지나가고, 현재가 오고, 미래가 열린다는 단순한 시간관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겹친다. 그 겹침에서 새로운 의미가 지금 여기에서 창발 한다. 8.15와 5.18은 서로 멀리 떨어진 날짜가 아니라, 한순간에 겹쳐지는 역사적 좌표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은 연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어느 순간 번쩍이는 지금시간이다. 과거의 특정 순간이 현재와 만나며, 그 만남 속에서 새로운 역사적 인식이 열린다. 그리하여 8.15는 5.18을 통해 다시 읽힌다. 5.18은 8.15의 미완을 드러낸다. 둘은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지금을 만든다. 이때 과거는 현재를 찌른다. 해방의 과거가 광주의 현재를 찌르고, 광주의 과거가 오늘의 현재를 찌른다. 과거는 안전하게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 구원되지 못했기 때문에 되돌아온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과거 속의 미완의 자유가 오늘 우리에게 빚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빚은 거대한 이념으로만 갚을 수 없다. 시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마지막에 주먹밥을 놓는다. 구원은 거창한 역사법칙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포도시 건네지는 밥 한 덩이로 온다.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론은 여기서 광주의 주먹밥과 만난다.


과거의 죽은 자들은 산 자들에게 강한 구원의 권능을 준 것이 아니다. 다만 약한 힘을 남겼다. 그 힘은 기억할 힘, 애도할 힘, 팔을 뻗을 힘, 포도시 밥을 건넬 힘, 얼쑤, 하고 다시 장단을 시작할 힘 정도다. 나는 그 약한 힘을 강한 무력보다 신뢰한다. 아니, 붙든다. 그것도 포도시 붙든다.


11. 해방 이후의 해방, 자유 이후의 자유를 향하여

「8.1.5.1.8」은 짧은 시다. 그러나 그 짧음은 빈약함이 아니라 압축이다. 숫자 하나, 감탄 하나, 깃발 하나, 주먹밥 하나, 추임새 하나가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균열을 품고 있다.


나는 이 시에서 8.15나 5.18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건을 연결시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두 개의 심장을 공유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8.15와 5.18에서 얻게 된 해방은 여전히 이 땅의 자유를 유지하는 힘인가라는 질문이 시 안에서 일렁인다.


결국 나는 이 시에서 자유와 해방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투쟁되어야 할 미완의 가치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 가치는 놀라운 문명의 발전이나 거대한 이념의 성취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작은 어울림, 잔치, 팔 뻗어 나누는 주먹밥과 얼쑤 외치는 추임새에서 더 빛을 발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철학시는 해방 이후의 해방을 추구하고, 자유 이후의 자유를 희구한다. 해방은 한 번 온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방은 계속 구원되어야 한다. 자유는 계속 풀려나야 한다. 구원은 그것의 성취를 위해 다시 전진해야 한다. 과거는 계속 현재를 찔러야 하고, 현재는 그 찔림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태어난다. 미래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과거에 미래가 담겨 있다. 현재는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가시적으로 끌어당기는 삶의 중력이다. 누구든지 팔을 뻗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포도시 건네는 일이어도 충분히 의미 있다. 그리고 얼쑤, 다시 장단을 받아야 한다.


지난날 역사 속에서 광주는 한 덩이 주먹밥처럼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 행복한 잔치의 땅이었다. 누군가는 그 자유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수작을 펼쳤지만, 광주는 대동의 노래로 그 전술을 전복시켰다. 광주는 진압의 힘에는 졌고, 진리에서는 승리했다.


하여 지난날 우리가 겪은 역사는 광복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전진한다. 그 건너감은 장엄하지 않고, 포도시 움직이는 발걸음이다. 그러나 바로 그 포도시가 역사를 살린다. 그날 광주의 땅과 하늘에서 일어난 총성은 공동체를 찢으려 했지만, 주먹밥 하나가 포도시 그 찢어진 자리를 꿰맸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슬픈 현실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송출했다.


최근 다시 거론된 45년 전 전보 한 통을 나는 여기서 떠올린다. 1980년 5·18 직후, 미국 LA에서 광주를 돕고자 헌혈 농성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한국에서 짧은 영문 전보가 도착했다고 한다. 그 문구는 “Long live Korea. Long live Democracy.”였다.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발신자가 분명하지 않은 이 전보를 들었을 때, 나는 이 말이 단순히 국가의 만세도, 추상적 민주주의의 만세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문장은 검열과 총성 너머에서 가까스로 건너온 광주의 숨이었다. 한국이라는 이름을 빌려 광주가 말했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빌려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를 불렀다. 그러므로 그 전보는 이렇게 다시 치환하여 읽을 수 있다.


Long live Gwangju.


광주여, 살아 있으라.
광주여, 오래 살아남으라.
광주여, 죽은 자의 도시로만 머물지 말고 산 자의 장단으로 다시 돌아오라.


이 외국어의 짧은 문장은 광주의 바깥에서 광주 안으로 되돌아온 또 하나의 추임새다. 전보는 기계의 언어였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인간의 피와 밥과 울음이었다. 그것은 멀리서 날아온 “얼쑤”였다. 국경을 넘어온 장단이었다. 총성이 공동체를 찢을 때, 누군가는 피를 보내려 했고, 누군가는 말을 보냈고, 누군가는 그 말을 45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다.


얼쑤~.


이 말은 과거가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생명의 기호다. 그리고 “Long live Gwangju”는 그 기호가 세계의 언어로 번역된 순간이다.


하여 나는 「8.1.5.1.8」를 쓰면서, 이 글 앞에 잠시 머물러 큰 사건을 작은 몸의 소리로 입증했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그들을 통해 철학을 품되 철학에 갇히지 않고, 역사를 말하되 역사바카라이 되지 않으며, 민중을 부르되 구호로 굳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배운다. 이들이 보여준 것은, 역사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하나의 장면이라는 사실이다. 과거가 미래를 낳으려 진통한다. 깃발은 일어나 일렁인다. 해방은 자유를 구원하면서도 묶는다. 그 모순의 거리에서 누군가 팔을 뻗는다. 포도시, 주먹밥 하나가 건네진다. 그리고 누군가 말한다.


그대의 투쟁은 영원하다, 얼쑤.

그 한마디 속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장단을 탄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미래는 아직 태어나는 중이다.


이처럼 시 전체를 관통하는 축은 자유의 해방 / 해방의 자유라 할 수 있다. 8.15는 자유의 해방이고, 5.18은 해방의 자유다. 8.15에서 자유는 식민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나 5.18에서 해방은 자기 안의 구속성을 폭로당한다. 해방이 자유를 약속했으나, 해방 이후의 국가는 다시 자유를 묶었다.


그러므로 광주는 자유를 다시 해방하는 사건인 동시에, 해방 그 자체를 자유롭게 하는 사건이다. 8.15가 자유의 문을 열었다면, 5.18은 그 문이 다시 감옥이 되지 않도록 민중의 몸으로 밀어젖힌 사건이다.


12. 결론 — 새로운 빛고을을 상상하며

올해 5.18 기념일은 전남도청을 새롭게 꾸미고 더 뜻깊은 행사로 보냈다고 한다. 갈수록 나의 세계에서 이날은 사라지지 않는 작은 축제로 남아, 나에게 역동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내 삶을 맴돌고 있다. 이날의 의의를 잊지 않는다면, 나는 스스로 개혁하는 과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개혁이 도달해야 할 목표는 화려한 무력의 나라가 아니다. 주먹밥 하나를 건네주는 얼쑤의 세계라는 것도 더 분명해질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기 탄식을 리듬에 담아 말할 수 있는 초정상적 생의 의지를 가진 땅의 사람들, 그들의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어쩌면 광주는 늘 이런 방식으로 내 삶에서 살아남아 있다. 주먹밥으로, 깃발로, 전보로, 추임새로. 누군가의 팔에서 누군가의 손으로 건너가고, 누군가의 피에서 누군가의 말로 번역되면서 말이다. “Long live Korea. Long live Democracy”라는 짧은 전보가 끝내 “Long live Gwangju”로 들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광주는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자유가 다시 해방되는 살아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해방은 다시 자유로워진다. 그곳에서 자유는 다시 해방된다. 그리고 과거는, 포도시, 미래의 어머니가 된다. 오늘의 5.18은 그날 광주의 빛을 제압하려 했던 어둠의 무력을 넘어, 그 어둠마저 품어 안은 채 광주를 빛나는 검은 안식의 ‘빛고을’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늘과 땅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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