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시 해설]
4-6. 답.답 한가(答答閑歌)

방황이라는 순행(順行)에 대한 검은 안식의 시학

by푸른킴

1. 새벽 차선의 어긋남

“빠앙~” 순간 몸이 놀랐다. 이른 새벽, 아이가 지방에 다녀올 일이 있다 해서 근처 KTX 역에 데려다주려 했다. 아직 5월 중순인데도 새벽 공기는 초여름처럼 후덥지근했다. 주말이라서인지, 시간이 일러서인지 다행히 길은 한산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도 많지 않아 마음은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신호등 앞에서 막 빨간불이 들어왔다. 차를 세웠다. 차선을 세심히 살피지는 않았다. 본래 1차선에 서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3차선에 들어섰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어느 차선에 서도 크게 문제 될 도로는 아니었다. 다만 2·3차선은 우회전하거나 직진해 샛길로 빠져나가는 차들을 위한 방향선이 그려져 있었기에 평소라면 조심했을 자리였다. 그러나 그 새벽에는 차도 많지 않았고, 몸도 잠에서 덜 깨었는지, 별일 없을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무심코 차를 움직여 왼쪽으로 조금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2차선에서 직진하던 차량이 바짝 따라오며 경적을 울렸다. 깜짝 놀랐다. 방심하고 있던 몸이 잠깐 굳었다. 나는 곧바로 비상등을 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고, 일단 그 차를 보내고 조심스레 안쪽 차선으로 들어섰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황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온몸은 묵직한 무엇인가에 눌린 듯 답답했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 내가 잠시 길의 질서에서 어긋났다는 감각이 몸을 따끔따끔 찔렀다. 몸의 작은 균열이었다.


비슷한 경험은 전에도 있었다. 언젠가 서재 근처 골목길에 들어섰다가 일방통행에 막혀 한동안 빙빙 돈 적이 있다.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비슷한 길이 자꾸만 나타났다. 일방통행 표지 앞에서 멈칫멈칫하다 먼 길을 돌아돌아 나왔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떤 답답함이 내 몸 안에 가득했었다.


정해진 길, 서로 암묵적으로 지켜야 할 길의 질서 앞에서 느닷없이 방황하게 될 때 몸은 먼저 답답해지고 아파온다. 하지만, 그 답답함은 길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는 아니다. 어긋나게 길에 들어선 나와 길의 질서가 서로 스치며 부드득하며 일어나는 불편한 감성이다.


2. 작은 사건에서 만든 철학시

나의 철학시 「답.답 한가(答答閑歌)」는 오늘 새벽 겪은 이 미미한 경험을 나름대로 시로 옮긴 것이다. 생각해 보면 별일은 아니었다고 거듭 나를 다독이지만, 그 순간이 내 몸 어딘가에 작은 생채기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쉽게 물리치지 못했다. 차선을 잘못 들어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어긋남이 내게 커다란 자기 성찰의 신호처럼 나를 찔렀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잠시 흔들린 몸은 곧 안도감을 되찾았다.


사실, 누구에게나 몸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사유의 한 파편임을 감지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길을 잘못 들어 어수선해진 몸으로 계속 엉뚱한 길을 헤매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은 단순히 빨리 극복하거나 서둘러 정돈해야 할 감정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방황은 아무리 미미해도 삶 속에서 반복해 일어나는 필수적인 리듬이며, 자기 삶이 지나가야 할 고유한 도정일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이 감각이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는 것이 행운이다. 집에 돌아와 잠시 숨을 고른 뒤, 내 삶의 뾰족한 파편 하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의 철학시에 담아 다듬어둔다.


답.답 한가 答答閑歌

차선 어긋나 갈팡올팡
여기가 거기같은 골목 둘러둘러, 사이
늦었다 싶었을 때 결국 제 길로ㅡ


이 시는 제목과 세 행, 그리고 두 개의 변주된 부사어로 이루어져 있다. “갈팡올팡”과 “둘러둘러”는 모두 길 위에서 흔들린 몸의 감각을 담기 위해 새롭게 다듬어 쓴 말이다. 짧은 시 안에는 차선의 이탈, 골목의 반복, 늦음의 자각, 그리고 제 길로 돌아서는 감각이 겹겹이 놓여 있다.


3. 규범의 어긋남과 몸의 혼미

첫 행은 오늘 새벽 내가 겪은 상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차선 어긋나 갈팡올팡”


“차선”은 도로 위의 공동 질서다. 그것은 단순한 표시선에 그치지 않는다. 슬롯가 부여하고 공동이 동의한 약속이다. 타인과 함께 공유하는 삶의 규범이다. 어떤 경우에는 합법적인 속도를 보장하고, 동시에 움직임의 한계를 정해주는 제도적 장치의 은유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삶의 자리에는 혼선이 생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내가 그 틀을 잠시 “어긋나게” 해버렸다. 내가 스스로 질서의 바깥으로 나를 밀어냈다. 게다가 내가 그 어긋남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이 나를 조금 더 당황하게 했다. 뒤따라오던 차의 경적을 듣고서야 몸은 뒤늦게 흔들렸고, 그때 나는 스스로 “갈팡올팡” 했다.


나의 철학시에서 부사어는 중요한 시어다. 시의 정서를 지탱하는 중추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갈팡올팡”은 “갈팡질팡”의 변주다. “갈팡질팡”이 어찌할 줄 몰라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가리킨다면, “갈팡올팡”이라는 말을 통해 나는 다른 감각을 말하려고 했다. 운전하는 동안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앎이 순간적으로 내 몸의 질서와 어긋났고, 그것이 내 안의 리듬을 뒤흔들었다.


한편, 이 말은 독특한 리듬도 만든다. “갈팡질팡”이 익숙한 관용의 리듬이라면, “갈팡올팡”은 그 익숙함을 살짝 비틀어 낯선 출렁임을 만든다. 낯설게 하기다. 특히 “갈”과 “올” 사이에는 나아감과 되돌아옴의 감각이 함께 들어 있다. 가려는 힘과 돌아오는 힘, 밀려나는 몸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몸이 그 짧은 말속에서 부드득 마찰한다. 이처럼 “갈팡올팡”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차가 가야 할 방향을 잠시 놓친 장면을 넘어, 그 순간 내가 겪은 내면의 출렁임을 발화한 말이다. 이 말을 통해 나는 내가 인지하지 않은 어긋난 상황을 관념적으로 포장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 몸이 직접 부딪혀 만들어낸 거친 호흡을 언어 안에 담아 적어두고 싶었다.


4. 보이지 않는 규율과 사이의 감각

이어지는 두 번째 행은 어느 날 내가 겪었던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늘 새벽의 경험은 오래전 내가 겪었던 또 다른 이탈의 감각과 자연스럽게 겹쳤다. 그 기억은 잘 닦인 도로가 아니라, 일방통행과 진입 금지가 뒤엉킨 어느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처럼 첫 행과 둘째 행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두 장면은 내 삶에서 하나의 동심원 안에 놓인 셈이다.


“여기가 거기같은 골목 둘러둘러, 사이”


여느 골목길에는 도로 위의 차선처럼 선명한 표시가 없다. 흰 선이 방향을 구별해주지도 않고, 넓은 차로처럼 차량이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깔끔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 넓은 도로에서 차선이 명백한 규율로 타인이 나를 견제한다면, 골목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규율이 나를 스스로 이끌어간다.

무엇보다 이 공간에서는 경계가 자주 흐려진다. “여기”와 “거기”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이 골목과 저 골목은 서로 비슷하고,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도 때로는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분명 다른 곳을 지나고 있는데, 자꾸만 방금 전의 자리로 되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길은 이어져 있지만, 그 이어짐이 오히려 길을 잃게 한다.


그러므로 골목에서의 방황은 길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인식하는 나의 감각이 희미해지는 데서 일어나는 몸의 착시다. 여기와 거기가 서로를 침식하고, 서로 다른 골목들이 하나의 낯익은 혼돈처럼 섞여버리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어딘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돈다는 느낌만 강해지는 몸의 무감각 현상이다.


나는 이 틀어진 감각을 “둘러둘러”라고 적었다. “둘러 가다”가 한 번의 우회라면, “둘러둘러”는 우회가 반복되는 상태다. 골목길은 명쾌하게 열리지 않고, 여러 번 꺾이며 감춰져 있다.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생각이 사라지고, 긴장감만 요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골목길에 제법 여유롭게 차를 움직이는 일이 많다. 긴장이 사라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해진다. 그러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사유는 더 깊이 전개되는 듯하다가 다시 한자리에 빠져 침전한다. 골목에서는 자칫 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몸의 움직임과, 느닷없는 돌출, 또 그 당황스러움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막막함이 함께 들어 있다.


한편, “둘러둘러”는 회화적인 부사어다. 이 말은 길이 아니라 길 위에 있는 나를 설명한다. 길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내 몸의 곡선을 그려내는 말이다. 곧게 뻗은 선이 아니라 휘어지고 겹치고 되돌아오는 곡선이다. 발음 속에도 그런 굴곡이 있다. 말 자체가 골목처럼 구부러진다. 입안에서 길이 한 번 돌고, 다시 돈다.


그런데 나는 이 부사어 뒤에 쉼표를 찍었다. “둘러둘러, 사이”이다. 이 쉼표는 단순한 문장부호가 아니다. 길의 풍경처럼 문장 속에 만들어 놓은 작은 둔턱이다. 문장은 “둘러둘러”까지 흘러가다가 그 자리에서 잠시 속도를 늦춘다. 읽는 사람도 그 쉼표 앞에서 짧게 멈춘다. 골목을 돌다가 갑자기 나타난 방지턱 앞에서 속도를 늦추는 것과 같이 사유도 쉼표 앞에서 한 번 멈칫한다. 골목길에서 운전할 때는 언제나 멈출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쉼표를 통해 나는 문장을 읽어가는 호흡을 한번 멈추고, 그 멈춤 속에서 조금 열리는 생각의 “사이”를 포착했다. 사이는 질서와 무질서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평범한 간극이다. 또한, 전진과 멈춤, 여기와 거기 사이, 갈 수 있음과 가서는 안 됨의 불편한 대응이다. 나아가려는 몸과 멈춰야 한다는 판단 사이에서 당연히 생겨나는 작은 내적 흔들림이다.


결국 이 행은 오래전 골목을 헤매던 때의 기억을 오늘의 상황에 소환한 것이다. 차선이 그러하듯 골목은 내가 내 안의 규율과 마주치는 보이지 않는 규범적 장소다. 규범 세계보다 더 철저하게, 차선이 없는 곳에서 오히려 더 경계하는 공간이다. 아무도 막아 세우지 않는 곳에서 오히려 나 자신을 스스로 멈추어야 하는 세계다. 도로 위의 차선 이탈이 바깥의 경적을 불러왔다면, 골목의 무 경계심에 의한 이탈은 내 안의 경적을 울린다.


5. “늦었다 싶었을 때”: 평범한 사건의 철학적 전환

세 번째 행에는 이 시 전체의 방향을 바꾸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 방향 전환은 거창한 사건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흐트러졌던 몸의 질서가 다시 본연의 길로 들어오는 과정, 바깥의 도로와 안쪽의 감각이 늦게나마 서로의 박자를 되찾는 순간을 포착했다.


“늦었다 싶었을 때 결국 제 길로ㅡ”


이 행에서 내가 성찰하려는 주제는 방황이란 내가 가는 길 자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는 내내 방황은 계속되었고, 내가 가려던 방향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 느껴지는 순간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것마저도 내가 가야 할 길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에는 거창한 반전이나 영웅적 서사가 들어있지 않다. 위기 상황에서 지혜롭게 그것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주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다시 자기 길을 되찾는 한 사람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처음에 나는 이 행을 “늦었다 싶었지만”이라고 썼다. 첨삭 후에 퇴고해 보니, 만약 그렇게 썼다면 시의 결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늦었다 싶었지만”에는 앞의 방황을 극복하고 뒤집는 역접의 논리가 들어 있다.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제대로 된 길을 찾았다는 당연한 반전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방황은 극복되어야 할 장애라는 생각에 갇히고 만다. ‘제 길’이라는 시어가 마치 그 장애물을 넘어선 뒤에 얻어지는 보상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역경 극복의 서사가 아니다. “했지만”이라는 표현이 방황과 제 길의 순차적 이행이라는 관점을 극대화한다면, “했을 때”는 그 둘이 같은 순간 안에 겹치는 사건이 된다. 늦었다는 자각과 제 길에 들어섰다는 인식은 동시에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 나의 시는 단순한 반전 구조를 벗어난다. 고통과 위기는 곧 삶 그 자체라는 일상 철학으로 전환한다.


알다시피, 길에서 방황은 도착 지점에 늦을 수 있는 난감한 상황을 초래한다. 이탈은 지연을 만든다. 길을 잘못 들었으니 늦었고, 차선을 어긋났으니 헤맸으며, 골목을 둘러둘러 돌았으니, 목적지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착하고, 지연은 곧 만회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늦었다 싶었을 때”라는 구절은 그 인습적인 판단을 가만히 뒤집는다. 늦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제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늦었다는 감각을 자각하는 바로 그때 비로소 내가 걷는 길이 본래 내가 가야 할 길이었음을 알아차린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 인식의 변화가 더 인간다움이라는 것이다.


돌아보면 예로부터 나는 자주 길 위에서 이탈했을 것이다. 잘 가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흔들리고, 바르게 나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옆으로 밀려나 있던 일이 태반이었다. 삶의 길은 한 번 정렬되었다고 해서 끝까지 곧게 이어지는 도로가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차선처럼 선명하다가도 골목처럼 흐려지고, 때로는 내 몸보다 먼저 방향을 잃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한때 나는 그런 방황을 서둘러 극복하고 얼른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지난 후에도 길에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이탈하는 방황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한 번도 어긋나지 않는 일이 아니야. 오히려 어긋남 속에서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 더 필요해. ‘늦었다, 벗어났다’라는 자각은 단순히 후회할 일이 아니야. 그것은 실패의 표지가 아니라, 길에 대한 감각이 온전히 깨어나는 순간이니까. 방황의 터널 끝에서 우연히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방황하고 있다는 자각 자체가 이미 ‘나의 길’의 일부야.”


내가 적은 시어, “때”는 단순한 시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시계 눈금으로 잴 수 있는 한 지점이 아니라, 길과 차와 몸이 동시에 만나는 미묘한 접점이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감각인 동시에 인식이다. 차선의 어긋남, 골목의 반복, 몸의 당황, 마음의 지연이 이 한순간에 함께 모이는 사건의 교점이다. 늦음과 도착, 상실과 발견, 이탈과 순행이 하나의 찰나 안에서 겹치는 과정이다. 그렇게 길에서 이탈하거나 방향을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 그 순간 상실 속에서 오히려 제 길의 윤곽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일어난 사건과 인식의 시간차이다. 그 간극이 제로에 가까울 때, 비로소 나이 든 사람다운 관조의 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마지막의 “결국 제 길로ㅡ”는 단순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의 문장만은 아니다. “제 길”은 중의적 언어다. 제대로 된 길이면서 ‘나의 길’ 자체를 함의한다. 흔들림과 지연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자기 것으로 감각되는 제대로 진행 중인 자신의 길이다. 처음부터 내 앞에 만들어져 주어진 길이 아니라, 차선을 어긋나고 골목을 둘러둘러 지나온 뒤에야 몸으로 알아볼 때 생겨나는 나의 새로운 길이다.


끝에 놓인 긴 줄표 “ㅡ”도 같은 맥락이다. 이 줄표는 마침표가 아니다. 도착의 종결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나지 않은 나의 길을 보여준다. “결국 제 길로” 들어섰지만, 그 길은 끝난 길이 아니라 다시 흔들릴 수 있고, 다시 늦었다고 느낄 수 있으며, 다시 골목을 둘러둘러 돌아야 할 수도 있는 길이다. 분명한 것은 그 새로운 길에서도 흔들림은 있을 것이고, 그것은 단순한 실패로 남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요동은 삶이 자기의 방향을 되찾는 느린 방식이라는 것을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의 시는 짧은 삶의 경험을 통해 삶의 우회와 지연, 오답과 실패마저도 존재의 필연적인 순행(順行)으로 끌어안아 보려는 나의 수행적 시도이다. 순행이란 언제나 곧게 나아가는 일이 아니다. 때로 멀리 돌아가는 일이며, 굽어진 길을 느릿하게 지나가는 일이다. 어긋남을 불편한 마음으로 통과하는 일이다. 방황은 똑바른 길의 반대가 아니다. 몸 안에서 길이 다시 태어나는 방식이다.


6. 제목 「답.답 한가(答答閑歌)」: 역설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백의 노래

제목 「답.답 한가(答答閑歌)」에 대해 조금 덧붙이려 한다. 이 제목은 앞서 말한 시의 주제, 시적 고민을 가장 압축한 명명이다. 소리 내어 읽으면 일상어 “답답한가”가 먼저 들린다. 가슴이 막히고, 길이 막히고, 마음의 흐름이 멎는 듯할 것이다. 그런데 한자로 치환하고 리듬을 조율하여 다시 읽어보면 이 텍스트는 조금 느려지고 깊어질 수 있다.


우선, ‘答答(답답)’은 삶이 던지는 무수한 질문에 홀로 부딪히며 끝내 자신의 대답을 채워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어지는 ‘閑歌(한가)’는 그 모든 헤맴의 시간을 통과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느긋하고 조용한 노래를 상징한다. ‘답답한가’라는 자기 질문에 그런 상황이 답을 찾아가는 답의 여정이며, 그것이 조급함과 서두름이 아니라 여유로운 노래처럼 들리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제목에서 삶의 답답함을 부정하거나 지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답답했던 시간 전체를 정면으로 통과해 보려 했다. 그리고 난 뒤 비로소 부를 수 있는, 묵직하고 한가로운 노래로 전환해보고자 했다. 답답함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노래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그 가라앉음 때문에 이 시는 가볍게, 쉽게 밝아지지 않는다. 대신 낮고 어두운 평온을 잔잔하게 유지한다.


7. 검은 안식의 시학

그런 점에서 이 시에는 내가 천착해 온 ‘검은 안식(安息)의 시학’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이 안식은 전형적인 구원이나 밝은 귀환의 형태가 아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골목 같은 세계에 붙들려 있으면서도, 그 불완전한 상태를 자기 삶의 일부로 승인하는 일에 가깝다.


“차선 어긋나 갈팡올팡”하는 몸, “여기가 거기같은 골목”의 세계, 이것들은 여전히 흐릿하게, 사라지지 않은 채 나를 지배한다. 내 삶에서 세계는 아직 어둡고, 길은 여전히 미로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의 안식은 생겨난다. 그것은 외부에서 찾아든 평화가 아니라, 길 잃음이라는 불완전한 상태 자체를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발생하는 침잠의 평온이다. 어두운 빛이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행의 열린 종결은 이 시의 모든 정서가 수렴하는 시어이다. 단정적인 서술어로 마무리되지 않고, “제 길로―”라는 미완의 형태로 남겨두어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드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2행에서 “둘러둘러, 사이”의 쉼표와 마지막 3행의 줄표는 모두 이렇게 빛이 틈입하는 균열이며 흔들리는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열린 결론을 미리 보여주는 흔적이다. 이 흔적은 계속 흔들리면서도, 그 흔들림을 더는 실패로만 읽지 않는 어두운 안정감이라는 것을 들려주는 표지이다.


8. 정리: 삶은 진행형의 여운

「답.답 한가(答答閑歌)」는 개인 성찰의 시다. 차를 운전하며 겪었던 작은 황당함과 의식의 미미한 균열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길 위에서 순간적으로 경험했던 차선의 착각은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실수라 하겠지만, “결국 길을 찾았다”라는 당연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핵심은 길을 잃었다고 믿으며 자바카라했던 시간조차 이미 ‘제 길’로 들어서는 과정이었다는 자각이다. 그 인식에 도달하는 순간, 방황은 삶의 순행(順行)이 될 수 있다. 마지막에 놓인 문장부호 ‘―’는 그 순행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삶의 깃발이다.


요컨대, 우리의 삶은 혼돈을 완전히 극복한 뒤에야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때로는 혼돈 자체를 받아들일 때, 그 안에서 조금씩 자기 질서를 얻는다. 「답.답 한가」는 그 사실을 흔들리면서도 조용히 경험한 시다. 늦었다 싶은 바로 그때, 삶은 멈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제 방향을 다시 감지하고 새 길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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