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철학시 4-4 해설 <공원 空園- 5월 캠핑을 마치고>
는개 머뭇머뭇, 조용히 밀어주는 하늘,
분수 알갱이 사르르―
너의 흙길 푸릇푸릇, 다시 진록 정원
1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집 근처 캠핑장에서 하룻저녁 가족 모임을 하기로 했다. 일부러 약속하지 않아도 일정이 정해지면 각자 맡은 것들을 준비해서 저녁 전에 한자리에 모인다. 열두 번째 캠핑은 는개가 내리는 중에 시작되었다. 타프를 치는 중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비가 가볍게 내리는 풍경을 배경 삼아 텐트 안에서의 식사는 오히려 운치 있었다. 가끔 내다본 먼 산에는 지난 4월에 비해 초록이 짙어졌고,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 내음은 더욱 푸릇했다. 늦은 밤, 비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밤이 깊었고 고요한 숲 안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간밤에 고요하게 내리던 비가 새벽녘 거센 비로 바뀌어 한번 몰아친 뒤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고요함에 놀란 새들이 마구 울어대며 새벽을 깨워 나를 텐트 밖으로 불렀다. 어느 사이 어제 물러났던 햇살이 되돌아와 산 위아래가 선명했고, 맑은 하늘이 빠르게 산 위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 길을 마중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산바카라을 나섰다.
1. 팽팽한 생략이 빚어낸 사유의 결정체
캠핑장이 있는 공원은 도심 끝에 있다. 한가운데 작지 않은 연못이 있고, 그 안에 분수대 세 개가 이어져 있다. 솟아올랐다가 쏟아지는 물방울 사이로 햇살이 빠르게 스며드는 순간은 아름답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이 공원이 마치 모든 것이 있으나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공원(空園)’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디를 걸어도 내 몸 하나로 가득 찰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철학시를 써보기로 하고 한두 편 적어 가는 사이, 나는 누군가 내 시를 읽고 나처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알아가고 있다. 세계는 누가 뭐래도 홀로 존재할 때 가장 자신다운 세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장 사이에 이제 막 끄집어낸 생각의 파편을 그대로 옮겨두는 일은 그 자체로 ‘고유하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공감의 대상이며, 완성이 아니라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시의 핵심은 글은 짧고 사유는 길어야 한다는 데 있다. 드러나는 것은 작지만 찾아낼 사유는 거대하면 좋다.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 관건이다. 나의 언어 범주는 좁고 내가 바라본 세계는 넓다. 이런 인식의 부조화를 딛고 나는 내 생각을 ‘지금-여기’의 언어로 다듬는다. 그러므로 나의 철학시는 그저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생략된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어야 한다.
철학시는 길을 걸으며 관찰되는 현상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 세계를 처음부터 상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끝내 상상의 사유까지 확장되는 시(詩)여야 한다. 축약된 언어와 생략된 문장 요소 속에, 길을 걸으며 충분히 숙성한 사유의 단서를 잃어버리지 않고 글로 남기는 것이다.
철학시는 가능한 세 행을 넘어서지 않는다. 단어와 단어 사이는 명사의 결을 살려가며 여백을 남긴다. 이 여백은 비움이며, 그 비움은 곧 충만의 문턱이다. 나는 그 충만함을 의도된 단어를 통해 온 감각을 활용하여 밖으로 끄집어내려 한다. 이를 위해 미세한 감각이 반영된 의성어와 의태어는 필수적이다. 나의 관찰에 기대어 세계를 포용한 타자 윤리를 함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지극히 개인적인 관찰이지만, 결국에는 세계의 공감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인위적인 의도가 아니라 시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그 길로 가야 함을 의미한다. 세계에 대한 응시가 촘촘하게 층을 이루며 포개져 있어야 한다.
결국 겉으로는 풍경이나 눈앞의 현실을 말하는 듯 보이나, 결코 그 풍경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끌어가며, 삶의 외양에 주목하는 듯하나 실상은 세계 속에 숨겨진 본연의 숨을 되찾기 위한 질문을 남긴다. 이것은 곧 나의 철학시가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고, ‘전략적 불친절함’을 통해 느리고 낯선 세계 읽기를 이끌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2. ‘공원(空園)’이라는 제목의 의도: 비어 있음이라는 새로운 생성의 조건
나는 이 시를 ‘공원(空園)’이라고 이름 붙였다. 공적인 정원이 아니라 비어 있는 정원이다. 공공재가 가진 혜택의 자유로움 뒤로, 비어 있음을 공감각으로 느껴야 하는 바카라임의 자유를 담아보려 했다. 이는 곧 ‘낯설게 하기’다. 한글로만 읽었을 때 느껴지는 일상의 공원을 한자로 번역함으로써 낯선 공간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은 제시된 순간부터 인간의 자동화된 사유를 느릿하게 움직이도록 만든다. 나도 그것을 따라 느릿한 읽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원은 그저 마음껏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속을 거니는 자의 발걸음과 몸의 움직임으로 채워지는 공간임을 말하고 싶었다. 채우지 않으면 끝내 비어 있는 공간이 바로 공원인 것이다. 결국 일상적 명사로서의 공원은 빡빡한 도시 삶에 숨통을 틔워주는 인위적 장치이며, 효율성과 성과 중심의 세계에서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착된 삶의 자리를 인위적으로 이격 시켜 주는 ‘사람의 자연’이다.
나는 이 공원을 ‘空’이라는 낯선 단어로 다시 번역함으로써, 이 장소가 가진 정적이고 인위적인 의의를 토대로 철학적 역동성이 살아있는 ‘동적인 사건의 장’으로 바꿔보고 싶었다. ‘비어 있음’은 허무나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는 ‘텅 빈 충만’을 함의한다. 동양적 사유에서의 공(空)이며, 고대 히브리 지혜서 코헬렛의 ‘헤벨’과도 연동된다. 나아가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원초적 발원지’를 의미한다. 산바카라이라는 인간의 작은 행위는 언제나 탈목적론적이다. 꼭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길에 서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적이 휘발된 뒤 내 몸 하나가 공원에 들어설 때 공원은 가득해진다. 가득하다는 것은 비어 있기 때문이며, 채워졌다는 것은 그곳이 이제 폐허가 아니라 소생하는 터전임을 의미한다. 결국 비어 있기에 비로소 우주 본연의 기운이 차오를 수 있는 빈 정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공원(空園)을 산바카라하는 일은 비움을 소멸이 아니라 생성의 발판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특히 나의 부제 ‘-5월 캠핑을 마치고’는 바로 그런 시의 시공간적 감각을 재정위 한다. 또한 이 시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표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나에게 5월은 연한 봄의 생기가 여름의 짙은 녹음으로 이행하는 계절이다. 나는 캠핑의 상황보다 그것이 모두 끝난 뒤의 정황을 포착했다. 바로 ‘사건 이후’의 시공간이다. 캠핑의 데크를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캠핑 밖의 캠핑’의 의의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사건의 바깥으로 걸어 나간 결과다.
3. 시어의 흐름: 사건 이후의 시간,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의 안식
철학시의 시어는 대체로 세 행, 마흔 글자 이내로 구성하며 그 안에 적절한 의성어나 의태어를 활용해야 한다. 이 시에서는 다른 시들과 달리 부사어가 총 세 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부사어의 활용은 “시적 화자의 정서와 상황을 구체화하고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핵심적인 역할”로 설명된다. 나는 이 기능을 두 가지로 더 세분한다. 첫째는 운동감의 전환이다. 즉 정적 상태에서 동적 상태로의 전환이다. 둘째는 미학의 강화다.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 철학시는 바로 이런 운동감과 미학을 염두에 두었다.
3.1. “는개 머뭇머뭇, 조용히 밀어주는 하늘,”
‘는개’는 낯설게 하기를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된 용어다. 봄의 끝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즈음에 조용하고 곱게 내리는 비를 형상화한 것이다. 밤새 거칠게 내리던 비가 새벽부터 조금씩 맑아지는 날씨 속에서, 물러갈지 더 내릴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비의 고민을 나는 ‘머뭇머뭇’으로 표현했다. 특히 이 시에서 쉼표를 두 번 사용한 것은 바로 그런 주저함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봄비의 살가움이 이제 여름비로 넘어가려는 틈에 세계가 비처럼 머뭇거리고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틈에 해가 떠오르고, 맑고 푸른 구름 사이로 하늘이 배어 나온다. 새벽의 하늘은 비구름과 어둠을 동시에 밀어낸다. 하지만, 이 밀어냄은 거친 싸움이나 배척이 아니다. 그것은 지원이며 지지이다. 물러남을 응원하는 태도다. 이유는 분명하다.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계절을 장식하는 비는 사라짐, 그 후에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기에 그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다. 캠핑장의 아침, 텐트 밖의 풍경은 나에게 물러남과 돌아옴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조화로운 순간이며 여백이다. 이는 회색 구름이 사라진 하늘과 맑아진 하늘의 단순한 대비가 아니라, 다시 비구름으로 채워질 맑은 하늘이며, 물러난 비구름을 조용히 응원하는 하늘의 소리 없는 대화다.
이것을 철학적 함의로 해석하자면, 첫 행은 소멸과 생성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 장면은 선명한 비도, 완전히 갠 하늘도 아닌 그 사이에서 정체성을 유예하는 미세한 입자들의 마주침이다. ‘머뭇머뭇’이라는 부사는 세계가 결론을 서두르지 않고 존재의 무게를 가다듬는 찰나를 감각화한다. 이것은 현대의 빠른 속도와 명확한 정의에 길든 자동적 인식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는 ‘느린 프락시스’의 실천이다. 회복은 천둥 같은 명령이나 장엄한 빛으로 임하지 않는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 존재의 등을 아주 살짝 떠미는 하늘의 ‘조용한 손길’을 통해 온다. 이 낮은 힘은 권위적이지 않으며, 세계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존재론적 배려와 닮아 있다. ‘머뭇머뭇’ 태도를 ‘밀어주는’ 몸의 대화가 5월의 숲 아래서 정겹다.
3.2. “분수 알갱이 사르르―”
공원 한복판에는 몇 번에 걸쳐 다듬어진 인공 호수가 있다. 지난겨울 물 푸기 작업으로 이제는 한결 정갈해진 모습이다. 분수까지 막힘없이 시원하게 내뿜는 풍경이 상쾌하다. 아침 햇살이 무르익어 정오로 향하는 시간, 호수를 지나서 산 위로 이어진 산바카라길을 오르는 걸음이 더디다. 분수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호수 위로 퍼지는 모습이 익숙한 듯 이채롭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한참 그 자리에 서서 분수의 춤을 관람했다. 그사이 분수의 물 알갱이가 안개처럼 호수 위를 가득 채우며 퍼진다. 분명 물방울인데 내 눈에는 분수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옥수수 알갱이처럼 보인다. 나는 이 순간 모든 물방울이 하늘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장면을 보았다. 마치 눈이나 설탕 등이 녹아내리며 흩어지고,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모양이 떠오른다. ‘사르르’는 물방울의 사라짐이다. 아니,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감이었다.
나는 순간 모든 결정체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부서질 때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모든 입자는 부서짐으로써 더 미분되어 마침내 새로운 것들 속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 ‘분수’는 바닥의 물을 중력에 거슬러 위로 뿜어 올리는 장치다. 하지만 모든 분수는 위로 올랐다가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포물선을 그리며 분사된다. 중력을 거스를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중력의 결을 조금 거스르며 옆으로 퍼지는 것이다.
또한, 분수의 상승은 처음에는 기계적 힘에 의존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물줄기가 물 알갱이로 파편화되는 것은 더 이상 기계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원리이며 주어진 운명이다. 거대한 물줄기가 미세한 물방울로 미분되는 과정이다. 또한 의태어 ‘사르르’는 가만히 들으면 의성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부사어는 시각을 넘어 청각과 촉각을 동시에 함의하며, 무엇보다 그 장면을 보는 이에게 다가오는 총체적 감각이다. 저 멀리 호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지극히 관념에서만 작동하며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은 더 이상 피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 내 몸에 와닿는 물방울의 실체가 일으킨 사건이다. 이 물방울의 변화가 내 몸에 물리적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나는 이 스며듦을 둘째 행 끝에 긴 줄표(—)로 표현했다. 소리와 감촉은 사라진 뒤에도 여운이 남으며, 물방울은 흩어지면서도 하늘 아래 비어 있는, 즉 공간에 여백을 만든다. 그 물방울이 퍼지는 곳은 이제 하늘 같기도 하고 하늘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줄표는 내달리려는 나의 사유를 멈추게 하고,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일어나는 사건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적인 장치다.
결국 두 번째 행은 분수를 통해 하늘과 물방울의 만남, 나와 분수 사이의 거리감 소멸, 그리고 나와 하늘과 분수 사이에 일어나는 교감을 입체적으로 통각하게 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세계는 이렇게 가벼운 사건, 그러나 거대한 흐름을 따라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서로를 지탱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열매는 다시 씨앗이 되어야만 새롭게 결실할 수 있다는 땅의 이치를 재구성한 결과이기도 하다.
3.3. “너의 흙길 푸릇푸릇, 다시 진록 정원”
세 번째 행은 다시 산바카라하는 나의 길로 되돌아왔다. 멀리 바라보던 분수를 지나 숲으로 이어지다 공원 밖으로 나가는 길은 흙으로 덮여 있다. 이 공원에서 유일하게 포장되지 않은 오래된 길이다. 사실 20년 전 이 길은 한 사람 정도 드나들 수 있는 오솔길이었다. 이제는 정지 작업과 함께 넓어졌지만, 다행히 처음의 흙 그대로 두었다. 그 길옆으로 흐르는 개천도 여전하다. 인위적인 풍경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장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길이다. 길옆으로는 도심 가로 정원처럼 꽃들이 나란히 서 있다.
나는 세 번째 행에서 ‘너’라는 이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다. 이는 중의적이다. 우선 ‘너’는 공원이다. 동시에 길을 둘러싼 숲이다. 비어 있는 공간과 가득 찬 숲의 대비가 이 ‘너’라는 호명에 담겨 있다. 비가 내린 뒤 숲 깊은 곳은 유난히 초록색이 짙어진다. 푸석한 흙길이 촉촉해졌다는 것은 그 ‘푸릇함’이 진해졌음을 의미한다. 모든 흙길은 물을 머금을 때 주위 풀들을 소생시킨다.
특히 여기서 ‘푸릇푸릇’이라는 부사어는 의성어이면서 의태어다. 밤새 거친 비와 습한 날씨에 지쳐있던 풀이 햇살 가득한 아침에 소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초고속카메라에 포착된 식물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쉼 없이 일어나는 살아남의 소리이자, 숨죽였던 모습이 사라지는 사건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그것은 내 발밑에서 벌어지는 온갖 생멸의 현상이기도 하다. 하여 그것은 ‘너’라고 불릴 때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이 뒤에 붙인 쉼표는 바로 그 생멸의 순간을 관찰하는 내가 잠시 멈춰 서는 찰나이기도 하다. “다시 진록 정원”으로 나아가는 최후의 징검다리다.
따라서 ‘너’라는 지평은 세계 만물이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것은 ‘너’라는 관계론적 대상이며 인간에게 소유되지 않는다. 따라서 ‘너’는 이 시어에서 공공적 번역을 함의한다.
세계를 ‘너’라고 부를 때 마침내 나의 시선은 타자를 향해 열릴 수 있다. “너의 흙길”이라는 표현은 이 시가 도달한 윤리적 정점이라 할 만하다. 나의 철학시에서 풍경은 언제나 인간의 소유물로 박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타자의 영역인 ‘너’로 남겨둔다. 타인의 삶이나 자연의 본질을 나의 좁은 관점으로 재단하거나 점유하지 않고, 그 존재가 가진 고유한 영역을 ‘너’로 호명하며 그 자체의 생명력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세계가 자신을 스스로 재건하는 과정을 경탄하며 바라보는 창조주의 대리인이자 세계의 증인이다. 호칭 전환에 담긴 의의는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가식적인 의지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정복 언어가 공존 언어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문학적 저항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타자와 연대할 수 있는지를 묵묵히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다시’라는 시어 역시 이 철학시에서 내가 주의 깊게 읽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비관의 세계에서 낙관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시에 따르면 그 낙관은 상처와 비움을 통과한 진록의 생명력에서 비롯된다. ‘다시’라는 평범한 부사는 나의 시가 지향해야 할 철학적 무게를 끌어올리려는 장치다. 이 말 뒤에 이어지는 ‘진록 정원’은 그 ‘다시’가 가리키는 사유의 실체이자 선언이다. 이는 이전에 존재했던 상실과 메마름의 시간이 회복과 풍요로 이행되었음을 전제한다. 세계는 원시 정원을 상실했다. 고대 페르시아의 공중 정원 같은 환상도 완벽한 정원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인간의 소란에 짓밟히고 건조하게 말라버린 사건은 비일비재했다. 왕국의 소멸은 바로 그런 정원의 모순을 보여준다. 정원을 채운 것이 결국 인간의 힘에 대한 동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태초의 원시 정원처럼 인간의 공원은 비움(空)을 회복하고, 그 사이를 오가는 물안개 같은 는개를 소환함으로써 생성하는 ‘진록(=深綠)’으로 소생할 수 있다. 그 공원(空園)은 생명의 뿌리가 견고해짐으로써 ‘푸릇푸릇’해진다. 연약한 생기가 ‘진록’이라는 단단한 생존의 빛깔로 치환된다. 이 과정은 거친 늦봄 비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숭고한 회복의 드라마이다. 모든 푸르름은 거친 흙을 지나가야 태어나는 생명이 아니라, 그 거친 흙에서 피어난다. 따라서 이 낙관은 고난을 넘어서야 오는 희망이 아니라 고난과 함께, 마치 새벽과 함께 빛이 오듯 살아나는 존재에게서만 드러나는 생의 의지이자 생존 증명이다.
3.4. 총체적 이해: 미세함의 윤리가 건네는 ‘검은 안식의 철학’
나의 철학시 「공원 空園」은 내가 천착해 온 검은 안식을 재현한 것이다. 이 안식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빛과 함께 거할 때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창조주의 행위를 본받으려는 사유의 방식이다. 거대한 담론은 절대 아니다. 미세함의 힘, 내 발밑의 세계가 곧 전체 세계와 연대한다는 의지이자 의식이다.
내가 표현한 대로, 그것은 폭우가 아닌 는개를 관조하는 미학이다. 배척이 아닌 조용한 밀어줌을, 인위적인 힘으로 밀어 올린 분수가 잘게 부서지는 알갱이를, 거대한 숲으로 들어서기 직전 오래된 흙길 위에서 소생하며 짙어지는 초록을 바라보는 미미학(微美學)이다. 이 작음에 대한 미학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기다림과 여백의 윤리’를 다시 내 삶으로 불러들이려는 노력이다. 인간이 중심에서 물러나고 압박하며 단정하는 말을 줄인 그 자리에서 비로소 존재 본연의 리듬이 돌아온다.
이 역설은 지치고 메마른 모든 존재가 공존재(共存在) 임을 의미한다. 공생의 존재로서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 창조주가 스스로 어둠으로 물러나 세계를 조율하는 그 질서가 바로 ‘검은 안식’이다. 비어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머뭇거리기에 더 깊게 젖을 수 있으며, 흩어지기에 더 넓게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적 행위이다. 따라서 이 작은 철학시는 감각의 언어로 구현하려는 낮은 철학이며, 우리가 언젠가 각자의 ‘진록 정원’에 도착할 것임을 이 어둠 가득한 세계에서 ‘믿으려는 용기’이다. 그 신뢰가 흙길의 물기처럼 촉촉하게 전해지기를 기대한 철학이다.
4. 정리 - 비움(空)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검은 안식’의 원초적 발원지
나의 철학시 「공원 空園」은 내가 상상하는 원시 정원의 미메시스(mimesis)다. 그곳은 피조물에 결핍의 공간이었으나, 그 비어 있음이 곧 충만함이었던 시공간이었다. 죽음을 감지하면서도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원초적 발원지였다. 이 작은 철학시는 그런 점에서 나의 히브리 철학을 포괄하는 존재론적 고백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지향하는 ‘검은 안식의 철학’을 시학에 담아 표현했다. 인간의 집요한 욕망과 목적 지향적 생존 의지가 비구름처럼 밀려난 자리, 즉 ‘사건 이후의 시간’에서 비로소 생명은 어둠을 간직한 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시를 통해 내 삶의 터전인 도심 공원을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생명이 생멸하는 존재론적 시공간으로 치환했다. 는개의 머뭇거림과 하늘의 조용한 손길, 그리고 분수 알갱이의 자발적인 부서짐이 교차하는 ‘동적인 사건의 장’으로 번역하고자 했다. 나는 세계의 지배자가 아닌 ‘너’라고 호명되는 타자의 생명력을 경탄하며 지켜보는 증인이자 공공적 번역자로서 그 길 위에 서려했다. 공원에서 정작 비워야(空) 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고, 채워야 할 것은 타자의 자리였다. 부서짐(사르르)으로 새로운 생명과 연대해야만 마침내 ‘진록(深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상처와 비움을 간직한 존재만이 가장 단단한 생존의 빛깔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하지만 시인이 아니기에 ‘시’를 쓴다. 나의 철학시는 거대한 피조 세계 안에서 한 점처럼 살아가는 인간이 남기는 생의 흔적이다. 이 철학시를 읽어주는 분들은 이 글이 지향하는 세계를 이미 조망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을 넘어 ‘만들어가는 것’ 임을 경험하는 분들일 것이다. 나 역시 쓰는 단계를 넘어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끌어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세계는 늘 정원이었던 것이 아니라, 비움과 인고의 시간을 거쳐 ‘다시’ 정원이 된다는 것을 글로 조각하고 싶었다.
작은 철학시 「공원 空園」은 일상이 곧 철학의 토대라는 나의 관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시이다. 이것이 나에게 촉촉한 위로가 된다. 바라건대 이 작은 철학시가 메마른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향해 내가 건네는 가장 따뜻한 ‘검은 안식의 초대장’으로 날아갔으면 한다. 나와 너는 언젠가 각자의 진록 정원에 도착할 것이다. 이것은 비관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내가 만지작거리는 숭고한 낙관에 대한, 미세하나 견고한 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