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대화]슬퍼하는 힘과 삶의 가치

[철학시 4-2 해설] 슬픈 부활

by푸른킴

작은 철학시 4-2 슬픈 부활 -다시 5월 8일에


잠 깨니 소리 사라져
살며시 옛 앨범 먼지 툭툭ㅡ
소풍 마치고 돌아간 자잘한 그 소리들, 자박자박



#1. 깨어남과 사라짐: 헤벨(Hebel)의 시간

1. 시의 소개

나: 반갑습니다. 지난번 대화에 이어 오늘 두 번째로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은 저의 단시 「슬픈 부활」에 대해 여러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제 시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비평적인 어조로 감상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벤야민: 제가 먼저 말하고 싶군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먼지 툭툭”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마치 제 곁에서 실제로 들리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 먼지를 털어내는 손길과 오래된 앨범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시간이 멈춰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재의 그리움과 충돌할 준비가 된 과거의 ‘파편의 집합’ 같았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이 시를 제가 말해온 ‘묵시적 현재’의 관점에서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과거의 앨범을 지금 여기에서 펼치는 순간, 연대기적 시간은 잠시 정지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잔소리는 과거 속에 박제된 소리가 아니라, 섬광처럼 솟아올라 현재의 나를 찌르는 ‘지금-시간(Jetztzeit)’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니 “툭툭”은 단순한 먼지떨이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화석을 지금 이 순간으로 끌어와 시인의 잠든 의식을 깨우는 구원의 불꽃이며, 삶의 폭주를 멈추는 ‘비상 브레이크’로 읽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좋았습니다.


코헬렛: 벤야민 선생의 비평에 저도 동의합니다. 덧붙여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잠 깨니 소리 사라져”라는 탄식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이 구절에는 부모라는 거대한 실재를 소리로 환유하여 그것이 사라진 뒤 느끼는 ‘헤벨(Hebel)’의 정서가 짙게 담겨 있습니다. 이 시어는 바로 그 헤벨을 자각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사실 잔소리처럼 지극히 사적인 경험은, 그 존재가 사라졌다고 해서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유되지 않는 실재’로 여전히 우리 곁에 남습니다. 기억이 바로 그런 현상이지요. 붙잡을 수 없는 바람 같지만, 그 숨결은 역설적으로 이 시의 정서를 더 깊이 다독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에 드러나지 않는 존재, 곧 부모님은 시인에게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경청의 대상으로 부활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제 허름한 시의 언어가 조금 더 단단하게 조여져 탄력을 얻는 듯합니다. 삶을 잠시 멈추는 브레이크, 그리고 영원한 경청의 대상이라는 표현이 제게는 참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2. 경미(輕味)와 낯설게 하기

바쇼: 두 분 말씀이 참 좋습니다. 저는 본래 방랑시인이자 하이쿠를 써온 사람이니, 이런 단시를 만나면 괜스레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 시에서 “옛 앨범 먼지 툭툭”이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저는 제가 알지 못하던 한 세계가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디선가 굳어버린 삶에 균열을 내는 작은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 작은 소리는 제 하이쿠에서 제가 노래한 ‘물소리’처럼 고요를 깨우는 장치와 비슷합니다. 저는 방랑의 길을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여러 장면 속에서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감각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의 감각이지요. 아마 당신도 이 시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지루하게만 들렸던 부모님의 잔소리가 이제는 “자박자박” 걸어오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아주 좋습니다. 그 의성어는 이 시를 살아 있는 것처럼 들리게 합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 걸음이 예술적 파동으로 변한 듯합니다. 생각해 보면 사물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지각되어야 할 감각의 대상입니다. 제가 말하는 경미(輕味)의 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낡고 오래된 것에서 우주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사비(寂)’의 정수도 이 단시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천상병: 허허, 바쇼 선생, 말이 너무 어렵구먼. 나는 그냥 이 시를 보니 막걸리 생각이 나네. “소풍 마치고 돌아간”이라는 표현은 내 시의 한 구절과도 닮아 있고, 내 마음과도 꼭 같아서 말이야. 부모님도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신 게지. 살아생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그 잔소리들이,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을 소풍 하듯 살아가도록 지탱해 주던 가장 따뜻한 기운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네. 당신은 이 시에서 그것을 아주 세밀하게 포착했어.


나: 그렇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천 시인님의 시어를 누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삶을 ‘소풍’이라는 경이로운 말로 번역해 주신 것에 늘 감사드립니다. ‘돌아가셨다’라는 엄숙한 표현이 ‘소풍을 마쳤다’라는 유쾌하고도 정겨운 말로 바뀔 때, 역설적으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가 생겨납니다.


3. 예언자적 상상력과 서사적 자아

코헬렛: 저는 우리가 주목하고 글로 옮기는 시에는 어느 정도 ‘예언자적 상상력’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에게 슬퍼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리라고 강요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간 끝도 결국 헤벨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시에서는 조금 다른 헤벨이 포착됩니다. 당신은 어버이날, 부재하는 부모님의 소리를 그리워하며 멈춰 섭니다. 그리고 사라진 잔소리가 다시 들리는 순간을 ‘슬픈 부활’로 명명합니다. 저는 그 대목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것은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시대의 속도에 맞서 ‘상실의 가치’를 선포하는 행위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천상병: 맞네, 그려. 시를 쓴 당신이 앨범을 털어내며 과거의 소리를 불러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 소풍 길 조심히 다니라던 부모의 잔소리를 이제는 ‘유산’으로 읽어내고 있지 않나. 이게 바로 시를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되돌리는 장치가 아닌가 싶으이.


리쾨르: 아, ‘서사적 자아’를 말씀하시는군요.


천상병: 그렇지, 바로 그거. “자박자박” 들려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 시인의 부모님은 완전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 아니겠나. 시 안에서 시인과, 그에게 잔소리를 들려주신 분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실감 나네.


나: 아, 그렇게까지 이해해 주시는군요. 코헬렛님의 ‘헤벨’은 여전히 저에게 큰 물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것이 제 삶의 현실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4. 검은 안식의 결론: 지속(遲速/持續)의 윤리

벤야민: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저에게도 여러 생각이 떠올라 잠깐 끼어들어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시인이 평소에 쓰는 개념처럼 ‘검은 안식’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검은 안식의 관점에서 이 시는 사라진 ‘소리들’을 억지로 되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둠 속에서 그 부재의 흔적을 받아들이고, 느릿하게 자기 삶 안으로 수집합니다. 바로 이 비(非)-소유의 태도가 이 시의 중요한 진실입니다.

바쇼: 느린 속도로 과거를 돌아보고, 그 기억을 통해 삶을 유지해 나가는 미학이군요. 말하자면 시인이 다른 시에서 말한 것처럼 지속(遲速)과 지속(持續)이 함께 있는 셈입니다.


천상병: 맞소. 삶은 선과 악, 어둠과 밝음, 죽음과 소생이 뒤섞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니, 검은 안식이라는 말이 아주 적절하게 들리네. 자, 이제 어려운 대화는 잠시 쉬고, 각자 자기 부모님 생각하며 다 같이 한잔 하면 어떻겠나. 이 세상 소풍, 그 자잘한 잔소리들 덕분에 참 아름다웠노라고 허허 웃으면서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사실 나도 문득 한 가지, 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주제도 있는 것 같네. 이 시는 어쩌면 일상의 소중한 슬픔을 너무 많이 함축한 나머지, 그 생생한 아픔이 많이 배운 사람의 언어로만 들릴 위험도 있어 보이네. 슬픔이란 고급 언어로 설명되기 전에 이미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파편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야.


나: 아,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쓴 「슬픈 부활」이 자칫 슬픔을 인위적으로 각색하거나, 특정한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 고도의 언어를 지나치게 끌어왔다는 위험이 있다는 지적은 적절합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부모님의 ‘잔소리’는 그저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분들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면,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그 슬픔을 견디며 어느 순간 자기 부모님과의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질 테니까요.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라는 데 저도 깊이 동의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이 일상적 소재를 통해 상실의 고통을 견디고 싶었습니다.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그 슬픔을 마주하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그것을 하나의 예술적 사건으로 승화해보고 싶었습니다. 상실의 고통을 멈춰진 지금-시간 속에서 서사적으로 재구성하고,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의 흔적을 경청함으로써 저만의 검은 안식의 평화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게 그것은 슬픔과 상실에 대한 진정한 동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코헬렛: 천 선생님의 말씀은 참 적절한 지점을 짚어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말에도 수긍되는 점이 많습니다. 삶은 아무리 엉망으로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뜻밖의 질서가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사실 저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시를 보았습니다. 이 시가 어떻게 과거의 파편을 ‘지금-여기’로 불러내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잠 깨니 소리 사라져”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이 시가 처음부터 존재의 부재를 자각하는 각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라지는 것을 먼저 인지하고, 그 사라짐을 다시 소환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주저 없이 헤벨(Hebel)을 떠올렸습니다.


바쇼, 벤야민: 아하, 그렇군요. 헤벨이라…….


코헬렛: 헤벨은 간단히 말해,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으며, 결국 모든 소리가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현상입니다. 이 시에서처럼 그 사라짐을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바닥에 깔린 슬픔을 지나치지 않는 지혜로운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상병: 허허, 사라지는 게 어디 소리뿐이겠나. 나도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준비를 하며 살았네. 이 시의 “소풍 마치고 돌아간 자잘한 그 소리들”이라는 표현을 보니,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내 마음과 닮아 있구먼.


5. ‘툭툭’과 ‘자박자박’: 경미(輕味)와 파열음

바쇼: 제가 오랜 시간 길을 걷다 만난 것 중에 여전히 인상적인 것은 들풀들이었습니다. 꾸미지도 않고 욕심부리지도 않으면서, 마치 가볍게 길을 걷듯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야생화들에게서 제가 배운 것이 바로 소박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경미(輕味)’였습니다.


헤벨이 아련한 아쉬움을 배어 나오게 하는 말이라면, 경미는 그 속에서도 애처로운 작은 희열을 발견하려는 태도입니다. 세속의 큰 소음이 아니라, 잊혔던 존재들이 조용히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의 경쾌함 같은 것 말입니다.


벤야민: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툭툭” 하는 소리가 단순한 먼지떨이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멈춰 있던 과거의 시간을 깨우는 ‘정지된 변증법’과 관련됩니다.


흘러가는 모든 것은 그저 조화롭게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쌓여 있던 먼지를 털어내듯 잠시 멈춰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 속에 감춰진 의미를 다시 읽어내야 합니다. 먼지에 덮여 있던 과거의 파편이 현재의 위기 혹은 그리움과 충돌하여 섬광을 일으키는 순간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이 시에서 사라졌던 소리들이 “자박자박” 돌아오는 것처럼, 삶의 폭주를 멈추는 지성적 비상 브레이크가 작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선생님, 그렇다면 그런 정지의 변증법은 제가 말하는 검은 안식과도 개념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벤야민: 저는 연결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바쇼: 그것 참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나도 삶이란 계속 걷는 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높아졌다 낮아지는 일이 태반이고, 때로는 죽음 같은 삶도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옳고 선한 일에 정당한 보응이 주어져야 할 텐데, 세계는 거의 그런 식으로 계산되지 않더군요. 저만 그것을 경험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문제를 지나치게 해명하려 하기보다, 내 몸이 닿는 대로, 내 걸음이 가는 대로 세계를 보고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더 적절한 지혜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코헬렛: 아, 나도 검은 안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바쇼 선생님 말씀에도 깊이 동감합니다. 저는 특히 그런 모순을 재판하는 자리에서 자주 목격했습니다.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제가 관찰한 세계 역시 그런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검은 안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모두 해명하려 하기보다, 그 세계의 어둠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살아갈 길을 찾는 것 말입니다.

천상병: 아…… 그런 일은 생각할수록 답답하니 그 정도로 해야겠네. 다만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가 이 세계를 더 깊이 생각하고, 삶의 가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준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면 좋겠네. 시를 쓰고, 참여하고, 살아내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한 방식 아니겠나.


6. 왜 ‘슬픈’ 부활인가: 검은 안식의 윤리

나: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으니 제 생각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뤄도 좋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생깁니다. 특히 벤야민 선생의 말씀대로, 저는 이 시에서 시간을 멈춰 ‘현재를 두껍게 만드는 사건성’을 포착하려 했는데 그것이 잘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께서는 왜 제가 ‘기쁜’ 부활이 아니라 ‘슬픈’ 부활이라고 말했는지에 대해 덧붙여주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저는 돌아온 옛 소리들이 이미 이 세상에서 생생한 현실로 되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긴 한데...


천상병: 그렇지, 그렇지. 소풍은 끝났고, 그 소리들은 이제 ‘추억’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로만 머물지.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슬픔은 깊어지지만, 그 슬픔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증거 아니겠나.


나: 맞습니다. 제가 말하는 검은 안식이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사라진 것들을 억지로 소유하거나 다시 생생한 현실로 되돌리려는 욕망, 곧 폭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사라져 가는 존재의 흔적을 수집하되,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비-소유의 진실이 바로 ‘슬픈 부활’의 핵심입니다.


코헬렛: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더 정직하게 만지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아주 좋습니다. 그것이 내가 말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진리를 카이로스적 현재로 살아내는 방식이겠지요.


벤야민: 저도 당연히 슬픈 부활이 우리의 삶을 제대로 인식하는 개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7. 결론: 반복되는 소풍, 지속되는 안식

바쇼: 어쨌든 당신의 단시는 짧지만, 그 속에 “소풍”이라는 생의 비유와 “부활”이라는 형이상학적 긴장을 잘 숨겨두었습니다. 낡은 앨범의 먼지를 털어내는 행위는 사비(寂)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나: 네, 그렇습니다. 저의 검은 안식 시학은 앞서 말씀해 주신 대로, ‘지속(遲速/持續)’의 미학입니다. 느린 속도로 과거를 돌아보고, 그 기억을 통해 삶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박자박” 들려오는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한, 우리의 소풍은 슬프지만 아름답게 부활할 것입니다.


천상병: 갈수록 대화가 심오해지는구먼, 자, 이제 대화도 어느 정도 무르익었으니 산바카라을 좀 하러 나가면 어떤가. 이 세상 소풍, 참 잘 쉬다 가는 것이 최고의 안식 아니겠나.


나: 시 「슬픈 부활」은 사라진 과거의 소리, 곧 헤벨을 앨범의 먼지를 터는 행위, 곧 중지와 각성을 통해 현재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저 경청함으로써, 속도의 시대에 저항하는 검은 안식의 윤리를 보여줍니다. 괜찮으시면 다들 함께 숲으로 한번 다녀오시죠.


(섹션 1 마침)



#2. 헤벨의 시대에서 안식의 시대로-산바카라을 하며


1. 헤벨의 정의: 고대 광야의 숨결과 오늘날의 데이터 노이즈

나: 코헬렛 선생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헤벨’은 오늘날 흔히 ‘허무’로 번역되곤 합니다. 하지만 저의 시학에서 헤벨은 단순한 허무라기보다 ‘이해할 수 없음’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 깨니 사라지는 소리”처럼 분명히 존재했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 실재의 성격을 뜻합니다. 선생님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는 이 점에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코헬렛: 아, 사실 어려운 주제입니다. 내가 말했던 바가 후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릴지까지 깊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당신이 사용한 ‘헤벨’이 나의 중요한 언어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본래 그것은 ‘숨결’ 혹은 ‘수증기’를 뜻합니다. 나의 시대에 헤벨은, 해 아래서 인간이 수고하며 붙잡으려 하는 모든 것이 결국 바람을 잡으려는 일과 같다는 존재론적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단순히 허무를 선언하기 위해 반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헤벨은 삶의 현실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전략적 언어였습니다. 삶은 한 가지 뜻으로만 고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허무처럼 보이고, 어떤 자리에서는 덧없음으로, 또 어떤 자리에서는 인간이 끝내 소유할 수 없는 신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헤벨은 이야기라는 담론 속에서 계속 변주되고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당신들의 시대는 정보와 물질이 넘쳐나는 복잡한 세계입니다. 나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다양해졌지요. 그래서 헤벨의 의미도 당신들의 시대 안에서 더 복잡하고 다양한 담론으로 재배열될 것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함께 붙들 수 있는 하나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헤벨은 결국 ‘소유할 수 없는 실재’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천상병: 껄껄, 숨결이라…… 참 좋구먼. 하긴 나에게도 헤벨은 이 세상 소풍 와서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의 거품 같은 것이었네. 금방 사라지지만, 그 순간의 시원함은 진짜지. 이 숲의 향기를 한번 훅 들이켜보게. 얼마나 좋은가. 오늘날 사람들이 헤벨을 지나치게 무겁게만 느끼는 것은, 아마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는 욕심이 예전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


2. 왜 모든 것이 헤벨인가: 허무를 넘어선 비-소유의 저항

나: 맞습니다. 충분히 공감합니다. 사실 제가 ‘검은 안식’의 시학에서 헤벨을 강조하는 이유도 역설적으로 삶을 더 정직하게 대면하고, 더 깊이 긍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이 헤벨이라는 말은 단순히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비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며, 그럼에도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자기 결정에 가깝습니다.


코헬렛: 그렇다면 정확합니다. 내가 “모든 것이 헤벨이다”라고 말한 것은 삶을 비관하라거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순간적 즐거움에 몰입하다 생을 마감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이익을 위해 삶 전체를 소유하려는 지적 오만을 멈추게 하려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지식으로 붙잡고, 시간을 자기 뜻대로 묶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손이 결국 폭력을 낳습니다. 헤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헤벨은 허무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비-소유의 윤리를 여는 언어입니다.


천상병: 나도 동감일세. “가서 아름다웠노라”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이 세상을 끝내 내 것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야. 내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잃을 것이 없으니 사라지는 소리조차 “자박자박” 정겹게 들리는 법이지. 바쇼 선생의 말이나 코헬렛 선생의 말에 비추어 보면, 헤벨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경미(輕味)의 지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네.


3. 헤벨의 배치: 끝에서의 체념인가, 처음으로부터의 각성인가

나: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코헬렛 선생님의 어떤 글에서 헤벨은 모든 수고의 결론으로, 말하자면 ‘끝’에 등장합니다. 그러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글의 처음부터 등장합니다. 아예 헤벨이라고 상정하는 것이지요. 사실 저는 이 첫 부분의 헤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시 「슬픈 부활」도 그 점을 반영했습니다. 처음부터 “소리가 사라졌다”는 자각으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 헤벨이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에 놓이는 셈입니다.


코헬렛: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헤벨은 삶의 끝에서 얻는 결론처럼 등장합니다. 온갖 수고를 다 해본 뒤에야 인간이 도달하는 겸손이지요. 이때 헤벨은 ‘경험적 진리’가 됩니다. 살아보고, 잃어보고, 붙잡으려 애써본 뒤에야 깨닫게 되는 진실입니다.


반면 헤벨이 처음에 등장할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첫머리에서부터 ‘선언적 각성’을 요청합니다. 다시 말해, 헤벨의 세계 속에서 당신의 삶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세계의 명령과 속도를 끊고 들어가는 태도, 바로 ‘중지의 윤리’가 여기서 열립니다.


벤야민: 아, 그렇다면 선언적 헤벨은 내가 말한 정지의 변증법과도 닿아 있겠군요.


코헬렛: 충분히 가능합니다.


나: 아 그렇군요. 처음부터 헤벨을 응시하는 것은 마치 하늘이 “쩌억” 갈라지며 세계를 열어주는 파열음을 듣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라짐을 먼저 인정한 뒤에 눈앞의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다시 오르는 일과도 같고, 죽음을 인식하면서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도 마치 영원을 사는 사람처럼 하루를 살아내는 일 역시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은 달라집니다. ‘끝’의 헤벨이 삶을 요약하는 말이라면, ‘처음’의 헤벨은 주어진 삶을 다른 문장으로 읽어내기 위한 문턱입니다. 그것은 체념의 언어가 아니라, 각성의 언어입니다.


천상병: 그렇지. 그래도 처음이든 끝이든 무슨 상관인가. 소풍을 시작할 때의 아침 이슬이 곧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길을 나서는 것도 헤벨이고, 돌아갈 때의 저녁노을도 헤벨인 것을. 자네 시처럼 사라진 소리들이 “자박자박” 다시 돌아오는 것을 듣다 보면, 어느새 우리 모두 그 검은 안식의 평화에 닿아 있지 않겠나.


(섹션 2 마침)



#3. 소리와 비-소유의 미학: 툭툭, 자박자박, 소풍


참석자: 마츠오 바쇼, 발터 벤야민, 나(시인)


1. 경미(輕味)와 툭툭: 집착을 털어내는 낮은 목소리

바쇼: 이 시 「슬픈 부활」에서 “먼지 툭툭”이라는 표현을 보고 내 마음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나는 평생 길 위에서 ‘가볍게 비우는 것’, 즉 경미(輕味)의 도를 닦아왔지요. 많은 이들이 세상을 소유하고 확정하려 할 때, 나는 오히려 집착을 벗어나 자기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윤리로서 하이쿠라는 단순한 시를 썼습니다. 이를 통해 과거를 박제하려는 욕망을 털어내고, 그저 그 가벼운 존재감을 받아들이는 아주 ‘하이쿠적인’ 순간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 하하 말씀해 주시니 더 잘 알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바쇼 선생님의 “퐁당” 소리를 들으며 내 삶의 적막이 깨지는 것을 경험했을 때처럼, 지금 저의 “툭툭” 역시 멈춰 있던 일상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파열음입니다. 이것은 안식 그 자체라기보다, 잠든 지성을 깨우는 각성의 순간입니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툭툭”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경미한 소리를 통해, 속도의 시대가 강요하는 ‘망각’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 정지된 변증법: 앨범 속에 숨겨진 지금-시간

벤야민: 당신의 이 시에서 나는 단순한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시간이 멈춰 있는 공간을 떠올립니다. 현재의 그리움과 충돌할 준비가 된 ‘파편의 수집소’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가 ‘정지된 변증법’이라 부른 것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의 억눌린 기억, 곧 소풍의 소리들이 먼지를 터는 행위, 곧 현재의 각성과 만날 때 시간은 더 이상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멈춰 서고, 우리는 그 멈춤 속에서 진실의 섬광을 감지하게 됩니다.


나: 맞습니다, 벤야민 선생님. 제가 앨범을 펼친 것은 내일을 위해 그저 오늘을 소모하는 행위에 조금 저항해보기 위함입니다. 직선적으로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의 사슬을 끊고, 한 자리에 머물러 정지된 어둠 속에서 오래전 사라져 버린 존재의 흔적을 다시 소환해 내고 싶었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적이며 상대적이고 맴도는 시공간’을 읽어보려는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간의 공간화입니다. 선생님의 말대로 저의 “툭툭”은 마치 내달리는 기차를 멈춰 세우는 ‘지성적 비상 브레이크’를 반영한 소리입니다.


3. 자박자박: 중지의 윤리가 불러온 소리들

바쇼: 나 역시 이렇게 정지하는 지성의 역할을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나는 그런 제동 장치를 내 앞에 펼쳐진 자연 속에서 찾으려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시 안에서 “자박자박”이라는 표현은 시간을 멈춘 뒤에 들려오는 참 묘한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하이쿠가 여백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 시에서 “자박자박”은 그런 틈새였습니다. 다시 말해, 내 안에 마치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 타자의 숨결처럼 들렸습니다.


나: 그러셨군요. 사실 “자박자박”은 요즘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 자체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의태어이자 의성어가, 마치 사라졌던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를 떠올리기에 아주 알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제가 추구하는 ‘검은 안식’이 내딛는 발걸음에도 적합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검은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밀려오는 세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내 성급한 판단을 잠시 끊은 뒤, 다른 문장이 내게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중지의 윤리’입니다. “툭툭”과 “자박자박”은 빠르게 사라지는 삶의 이야기에 묻혀 저절로 떠내려갈 법한 자잘한 삶의 소리들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들은 내 걸음과 내 몸을 멈추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슬픈 부활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이들이 베풀어준 사랑은 대부분 그들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아챌 때가 많았습니다.


벤야민: 그렇죠. 모든 과거는 현재를 찌르는 지혜의 촌철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기억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의 소음 속에서 우리가 놓쳤던 구원의 파편들이 돌아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문득 ‘호모 레겐스(Homo Regens)’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읽는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의 강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여울목을 포착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강 밑으로 쓸려가는 작은 소리를 건져 올리는 사유의 낚시꾼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코헬렛: 사유의 낚시꾼이라, 참 절묘한 비유입니다. 사실 나도 그런 삶의 방식에 관심이 많아서 내 생애의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삶을 관찰하고, 마음 깊이 되새겨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내가 신뢰하고 믿으려 한 나의 야훼가 왜 이렇게 모순된 일들을 방치하는지, 그 속마음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이 왜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먼저 떠나고, 내 삶에서 멀어졌으면 하는 존재들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내 삶을 가로막는 일은 왜 여전한지 말입니다.

나: 저의 시에서도 그런 마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현실에서가 아니라 꿈에서 만날 수밖에 없고, 그마저도 짧은 시간, 연기처럼 사라지는 상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못내 마음 아픕니다. 하릴없이 내게 남겨진 기억의 서랍만 열었다 닫았다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여전히 슬픈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잠시 휴식)


참석자: 천상병, 코헬렛, 벤야민, 나(시인)


4. 비-소유의 미학: 슬픈 부활과 천상병의 소풍론

4-1. 슬픔의 정체: 소유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예의

나: 앞서 여쭤본 대로 ‘슬픈 부활’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인 이유는 우리가 불러낸 과거의 파편들이 결코 현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결핍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벤야민 선생이 말씀하신 ‘현재를 두껍게 만드는 사건성’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소리들이 이제는 ‘부재’한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인식하는 일입니다.


코헬렛: 하지만 나는 그 슬픔이야말로 지혜의 문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맞습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코헬렛: 내가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새로움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을 부정하고, 우리가 붙잡으려는 모든 수고가 결국 ‘헤벨’ 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나 자신에 대한 권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해 위에서 보면 모든 것이 이해 가능한 것 아니냐?” 어떤 이들은 더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니까요.” 그러나 ‘해 아래’라는 말은 단순히 ‘해 위를 상상하라’는 말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해 아래’에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해 아래에서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수용할 수 있는가를 묻는 말입니다.


결국 나는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더 정직하게 경험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 그것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가장 깊은 예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2. 천상병의 소풍론: 잠시 빌려온 생에 대한 문학적 헌사

천상병: 허허, 내 시 「귀천」을 다시 말하는 것이 좋겠네. 나는 남이 보면 기구한 삶을 시인이라는 그늘로 가리고 살아온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이 내가 발견한 삶의 지혜였다는 것을 다시 말해두고 싶네.


소풍은 거창한 게 아니네. 이 세상은 누구나 유한한 시공간을 살아갈 뿐이지. 떠나온 곳이 있으니 돌아가야 하는 것도 당연하고, 그러니 잠시 소풍 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 말하면, 곧 돌아갈 몸이니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지. 무소유가 되었든 비소유가 되었든, 돌아가야 할 날이 오면 돌아가야 하네. 그러면 남은 자들에게는 ‘기억’만 유산으로 남겨주게 되겠지. 결국 자네 시가 ‘비-소유의 진실’을 말하면서 ‘기억의 소환’을 그리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게는 ‘소풍’이라는 가벼운 차림이었던 셈이야.


나: 천 시인님의 소풍론은 한국 문학사에서 ‘실존적 허무를 초월한 작은 긍정’으로 평가받습니다. 저는 특히 ‘소소한 일상’을 긍정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죽음을 비극적인 종말이 아니라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생의 고통과 가난마저도 어린아이의 순전한 추억으로 우리를 데려가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삶이 여행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인간 사유에서 핵심적인 비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경험으로 삶을 치환하신 것이기도 하지요. 나아가 세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욕망, 곧 폭력을 멈출 때, 비로소 생은 “아름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소풍이 되지 않을까요?


벤야민: 당신의 시를 소풍에 비유하여 생각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합니다. 다시 ‘수집가의 윤리’로 돌아가보면, 당신은 마치 기억과 언어의 수집가 같습니다. 대상을 지나치게 확대한 언어로 표현하거나 그 사물을 실용적으로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지닌 역사적 아우라와 기억의 흔적을 개인사의 영역에서 다시 소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소풍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세계일주 여행이나 에베레스트 등정, 장거리 트레일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여행입니다. 소풍은 개인적으로 소박하면서도 기억의 보편성을 보장하는 경험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풍’이라는 관념을 일상에서 촉감을 가진 언어로 소생시킨 천 선생님이나, 또 이 단시가 나의 ‘역사 이해’와도 적잖게 연관된다는 것이 아주 고무적입니다. 그래서 ‘슬픈 부활’이라는 시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나: 그래서 ‘슬픈 부활’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도와 성취로 삶을 증명하라는 시대의 명령에 저항하여, 사라진 것들을 억지로 되돌리려 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그 흔적을 수집하는 일입니다. 또한 ‘이미 저기’와 ‘아직 여기’의 긴장 속에 머무는 일입니다.


코헬렛: 우리가 영원을 소유하려 할 때 헤벨은 절망이 되지만,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헤벨은 비로소 안식이 됩니다.


천상병: 하긴, 좀 슬퍼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 슬픔은 우리가 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증거니까. 소풍 끝나고 돌아갈 때 챙겨갈 것은 그 슬픈 기억 하나면 충분해.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가장 인간다운 연대이자 검은 안식 아니겠나.


나: 그 표현도 아주 좋습니다. 끝내 가지고 갈 마지막 유품이 ‘슬픔’이 될 수 있다면, 슬픔은 그저 불행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삶의 가장 숭고한 덕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소풍론이 생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유한한 생의 너머까지 이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슬픔’이라는 감정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의 철학시 「슬픈 부활」은 바로 그 ‘슬퍼하는 힘’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최후의 지혜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섹션 3 마침)



#4. 지속의 미학: 슬픈 부활이 도달하는 안식의 지평


참석자: 마츠오 바쇼, 나, 천상병


1. 사비(寂)의 정서와 낡은 앨범: 시간의 덧없음을 마주하는 용기

바쇼: 그것 참 좋은 발견입니다. ‘슬퍼하는 힘이라는 유산’ 말입니다. 당신의 단시는 하이쿠와 비슷하지만, 사실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자연의 한순간을 발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순간 너머에 숨겨진 카이로스, 곧 지속되는 은총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당신의 시는 자연과 인간의 작은 기억을 주목하면서도, 결정적으로 형이상학적 긴장으로 창발 하는 면이 있습니다. 내가 천착한 사비(寂)가 당신의 시에서는 그저 오래되고 낡은 정서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쇠락함으로써 빛나는 존재를 보여줍니다. 나아가 그 안에서 우주의 깊은 정적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앨범의 먼지를 터는 그 미세한 소리에서 덧없는 생의 비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2. 지속(遲速/持續)의 미학: 속도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기억

나: 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바쇼 선생님이 더 깊은 사유로 일깨워주신 것 같습니다. 일전에 저는 「낙화지속」이라는 단시에서 두 겹의 ‘지속’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느린 속도로서의 지속(遲速)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빠르게 소비하고 확정해 버리는 현대 문명의 속도에 제동을 거는 일입니다. 둘째는 삶이 유지된다는 의미의 지속(持續)입니다. 저는 삶이 죽어가는 여정으로서 지속된다고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단순히 연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다가 이어지고, 떨어지다가 올라가며, 넘어지다가 다시 일어서는 반복된 등락 속에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저는 ‘지속’을 베르그송 님의 순수 지속과도 연결해보고 싶었습니다. 반복해서 말하게 되지만, 과거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겹쳐져 있습니다. 저는 자주 의성어와 의태어를 통해 그 중첩된 시간의 층위를 감각적으로 복원해내고 싶었습니다. 이는 “바카라이 쏟아질수록 지성이 얕아지는” 시대에 맞서, 한 문장 아래로 깊이 파고드는 카이로스(Kairos)적 저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소풍론과 부활: 허무를 넘어서는 인간다운 연대

천상병: 창문을 내다보니, 자네가 말하는 ‘슬픈 부활’이 이제야 더 깊이 이해되네. 부활이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픈 이유는, 삶 자체가 슬프고 그 슬픔이 계속 지속되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들리네.


나도 이 세상 소풍 와서 참 많은 일을 겪었네. 사실 내 삶에서 소풍의 즐거움은 겨우 잠시뿐이었고, 많은 날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지. 단절되기 일쑤였고, 멈춰야 할 때가 더 많았네. 소풍을 제대로 다닐 여유도 없었지만, 돌아보면 소풍 아닌 때도 없었어.


하지만 결국 삶이 끝날 때에는 어느 것 하나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네. 다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 비로소 진짜 안식을 얻었지. 막걸리가 주는 안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게 안식은 거창한 게 아니야. 굳이 소풍이 아니라도, 오늘 하루 참 잘 놀았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


나: 소풍이라는 일상이 아니라, ‘일상의 소풍’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슬픈 날들의 연속이라도 집에 돌아와 하루를 마감하는 말이 “즐거웠다”라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풍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소풍이라는 기억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누군가 떠나고 난 뒤에도 그 슬픔을 삶의 애환 너머에서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소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풍은 슬픔의 잔치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존재에 대한 깊은 애착이자 경외감으로 승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상처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인간다운 연대의 검은 안식과도 이어지는 선생님의 사유 같습니다.


이처럼 저의 시 「슬픈 부활」은 코헬렛 선생님의 헤벨, 곧 비-소유, 바쇼 선생님의 경미, 곧 비움, 벤야민 선생님의 정지, 곧 각성, 그리고 천상병 선생님의 소풍, 곧 긍정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문득 귀천하신 부모님의 잔소리를 그리워하며 남겨진 앨범의 먼지를 터는 찰나의 행위, 곧 중지의 순간에 사라진 과거는 ‘깊은 현재’, 곧 카이로스로 소환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저 존재의 파동으로 경청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속도의 폭력에 저항하고, 생의 유한성을 안식으로 치환하는 독특한 시적 윤리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과도한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들 덕분에 그 의미를 조금 더 깊이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던 ‘잔소리’라는 실체가 가진 사유의 깊이 말입니다.


(섹션 4 마침)



#5. 잔소리의 부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생의 파동


참석자: 코헬렛, 마츠오 바쇼, 발터 벤야민, 천상병, 나(시인)


1. 존재의 부재가 남긴 헤벨의 소리

나: 어제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기 전 이제는 곁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을 꿈에서 뵈었습니다. 그러나 깨어나 보니 방 안에는 정적만 가득하더군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살아생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그 ‘잔소리’들이, 사실은 제가 이 세상을 소풍 하듯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던 가장 귀한 소리였다는 것을요.


코헬렛: 그렇다면 당신의 시구 가운데 “잠 깨니 소리 사라져”라는 탄식은, 부모라는 거대한 실재가 ‘헤벨’로 변했음을 자각하는 순간인 셈이군요. 하지만 그 잔소리는 사라졌기에 비로소 ‘소유되지 않는 실재’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붙잡을 수 없는 바람 같지만, 헤벨 같은 그 숨결이 당신을 길러냈음을 인정할 때 부모님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경청의 대상으로 부활합니다.


2. ‘툭툭’과 ‘자박자박’: 잔소리가 경미(輕味)로 돌아오는 길

바쇼: 그렇다면 “옛 앨범 먼지 툭툭” 터는 행위는 부모님과의 기억 위에 쌓인 망각을 걷어내는 경미(輕味)의 몸짓이군요. 당시에는 무겁고 귀찮게만 들렸던 잔소리가, 이제는 “자박자박” 걸어오는 맑은 시냇물 소리처럼 가볍고 소박하게 들리는 법입니다.


하이쿠가 지향하는 사비(寂)의 정서를 따라가면, 낡고 오래된 과거의 잔소리에서 비로소 우주의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시인은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듣고 있는 것입니다.


벤야민: 물론입니다. 그 잔소리들은 단순한 추억 속의 소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길을 잃으려 할 때마다 작동했던 안내판입니다. 부모님이 남기신 말씀의 조각들은 당신의 역사 속에 흩어져 있다가, 어버이날이라는 위기의 순간에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지금-시간(Jetztzeit)’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당신을 일깨우는 구원의 파편이 됩니다.


3. 검은 안식: ‘슬픈 부활’이 건네는 위로

나: 맞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잔소리를 다시 실제로 들을 수 없기에, 이런 소리의 부활은 오히려 ‘슬픔’입니다. 다만 저는 그 슬픔을 억지로 기쁨으로 바꾸려 하거나, 부모님의 실제 부활만을 기대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 기억의 소리를 다시 듣는 일은 제가 비-소유의 진실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부재를 인정할 때 비로소 그분들의 목소리는 제 내면에서 가장 정직하게 울려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상병: 허허, 나도 그랬네.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리울 때가 진짜 어른이 된 때지. 그 자잘한 소리들이 다 소풍길 조심히 다니라는 ‘사랑’ 아니었겠나. 이제 그 소리가 자네 안에서 “자박자박” 걷고 있으니 걱정 말게. 우리 모두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면, 그 잔소리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나 “덕분에 잘 놀다 왔습니다” 하고 인사하면 그만일세.


4. 지속(遲速/持續)의 윤리: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법

나: 결국 이번 「슬픈 부활」에도 나의 ‘지속’의 중의적 원리는 유효합니다. 느린 속도로 부모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지속(遲速), 그리고 그 가르침을 통해 남은 생을 아름답게 유지해 나가는 지속(持續)의 과정입니다. 이제 잔소리는 ‘폭력’이 아니라 ‘빛’이 되어 저의 어둠, 곧 검은 안식을 밝혀줍니다.


이렇게 저의 시 「슬픈 부활」에서도 저는 아주 개인적인 소소한 일상을 토대로 철학시를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어버이날 꿈에서 깨어난 뒤, 소유할 수 없는 부모님의 ‘잔소리’, 곧 헤벨을 앨범의 먼지를 터는 행위, 곧 각성을 통해 현재로 불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의 폭주를 멈추게 하던 가장 다정한 제동 장치였음을 경청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는 바로 그 검은 안식의 윤리를 다시 생각해 본 시입니다.


(섹션 5 마침)



#6. 슬픈 부활의 현상학: 잔소리라는 이름의 묵시


참석자: 영상 참여자 — 월터 브루그만, 빅토르 쉬클로프스키, 폴 리쾨르 / 현장 참여자 — 발터 벤야민, 나


1. 예언자적 상상력: 제국적 속도에 맞서는 애통의 힘

브루그만: 이 시에서 “잠 깨니 소리 사라져”라고 탄식할 때, 저는 거기서 예언자적 상상력의 시작인 ‘애통(Grief)’을 봅니다. 오늘날의 제국은 우리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리라고 강요하죠. 하지만 시인은 어버이날, 부재하는 부모님의 소리를 그리워하며 멈춰 섰습니다. 사라진 잔소리를 ‘슬픈 부활’로 명명하는 것은,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세상에 맞서 ‘상실의 진실’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행위입니다.

나: 아, 그런 관점도 있을 수 있군요. 부모님의 잔소리는 당시에는 저를 구속하는 ‘율법’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은 제가 세상의 속도에 함몰되지 않도록 붙잡아주던 ‘거룩한 제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가 사라진 빈자리에서 비로소 저는 참된 안식의 의미를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결국 나를 깨우는 하늘의 촉구가 분명합니다.


2. 낯설게 하기: 일상의 잔소리, 예술이 되다

쉬클로프스키: 대화를 쭉 듣고 있으니 여러모로 흥미롭군요. 저도 한 말씀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평소 부모님의 잔소리를 너무나 자동화된 방식으로, 지루한 소리처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박자박”이라는 의성어와 “먼지 툭툭”이라는 감각을 통해 그 익숙한 소음을 낯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잔소리는 단순한 잔소리가 아닙니다. 앨범 속에서 튀어나온 자잘하고 귀한 생의 파동으로 재탄생합니다. 사물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의 대상으로 되돌려놓는 것, 그것이 이 시가 보여주는 예술적 승리입니다.


나: “자박자박”이라는 다가오는 소리는 사실 부모님이 곁에 계실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입니다. 그분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 소리들이 제 삶의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낯설게 감각하게 된 것이지요.

3. 서사적 자아: 기억의 편집을 통해 재구성되는 나

리쾨르: 저도 한 말씀 거들겠습니다. 이 시에서 앨범의 먼지를 털어내며 과거의 소리를 불러내는 행위는, 내가 말하는 ‘서사적 자아(Narrative Identity)’를 형성하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여기서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기억의 파편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천 시인님의 시구를 연상시키는 “소풍 마치고 돌아간 소리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만의 경험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삶의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시어가 됩니다. 이 은유는 부모님의 삶과 나의 삶을 ‘소풍’이라는 하나의 큰 서사 속에 통합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잔소리를 듣던 아이’에서 ‘그 잔소리를 유산으로 읽어내는 해석자’로 자아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나: 그렇군요. 돌이켜보면, 이런 서사는 꼭 저만의 주제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에게나 부모님이 남기신 말씀은 자기 삶의 서사 속에서 단순한 조언을 넘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뿌리의 언어’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슬픈 부활」은 곧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절기가 돌아오면 필연적으로 그를 추억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자기 정체성의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묵시적 현재: 멈춰진 시간 속의 구원

벤야민: 저는 이 시의 절정이 “먼지 툭툭”과 함께 찾아오는 ‘지금-시간(Jetztzeit)’에 있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이 시에서 앨범을 여는 순간 연대기적 시간, 곧 크로노스는 멈추고 묵시적 시간, 곧 카이로스가 열립니다.


부모님의 잔소리는 과거에 박제된 화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시인의 잠을 깨우고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구원의 불꽃입니다. 동시에 이 짧은 시는 한 개인의 특정한 경험에 머물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간직되어 있으나 쉽게 꺼내지 않았던 묵시적 의식을 불러냅니다. 단시 한 수가 우리의 평범한 삶을 영원한 안식의 지평 앞에 잠시 정지시킨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 벤야민 선생의 말씀대로, 그 “자박자박” 소리를 듣는 찰나에 저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검은 안식의 심연을 경험합니다. 부모님은 더 이상 과거의 인물로만 남지 않습니다. 지금 제 곁에서 함께 소풍의 길을 걷고 있는 동반자로 부활합니다. 그것이 제게는 참 큰 위로가 됩니다.


오늘 모든 말씀을 종합하면, 저의 시 「슬픈 부활」은 부모님의 부재라는 절망적 현실을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견뎌내고, 일상의 잔소리를 낯설게 하여 예술적 사건으로 승화하려는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자라나는 존재로서의 나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하고, 상실의 고통이 멈춰진 지금-시간 속에서 검은 안식이라는 구원적 평화에 도달하려는 저의 문학적 분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은 여전히 어두운 계곡 같은 길을 걸어가는 소풍입니다. 이 소풍은 이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 제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상의 순례이기도 합니다. 그 소풍이 처음부터 슬픔, 곧 헤벨을 품고 있다 해도, 묵묵히 길을 걷는 순례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저의 본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슬퍼하는 힘은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건넬 수 있는 가장 지적인 경의이자, 가장 오래 남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랜 시간 이 대화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다시 그 “자박자박”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라진 것들이 남긴 빛을 따라 오늘의 길을 조용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섹션 6 마침. 모든 대화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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