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득, 평화의 회로를 잇다

작은 철학시 4-3 전선 변경 해설- 종전을 요구하며

by푸른킴

전선 변경


불이 사라진, 잠시 어둠과 빛

부드득 전선 갈아 끼우니

세계가 검은 안식ㅡ


해마다 어린이날 무렵이면 아카시아 꽃이 무성하다. 향기가 예년만 못하다는 말도 들리지만, 시절은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또 진다. 계절의 꽃이 그어 놓는 선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둣빛 잎새 사이로 활짝 핀 하얀 꽃송이들은 보고만 있어도 그 꽃을 따 먹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 꺼내어, 내 삶에 기억의 선을 하나 더 그어 준다.


전선을 고치며

며칠 전,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닌 큰아이가 제 방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 모양이다. 날도 좋은데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말없이 혼자 바카라상과 바카라장의 자리를 옮기더니 제법 그럴듯하게 방의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이튿날 외출에서 돌아온 아이는 벽면 콘센트 함 앞에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콘센트 케이스가 살짝 깨져 있었고, 아이의 손에는 새 콘센트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든 제힘으로 고쳐 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이는 방을 정리하다 콘센트 케이스를 건드려 깨뜨렸고, 직접 고쳐 보고 싶어 새것을 사 왔다고 했다. 새 콘센트 케이스를 벽에 대어 보니 오래된 집이라 그런지 미세하게 맞지 않았다. 오래된 벽은 제 몸에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려는 듯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안전하게 바꾸려면 먼저 집 전체 전원부터 내려야 해. 쉬워 보여도 선을 다루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야.”


아이는 잠시 머뭇했다. 나는 메인 차단기를 내렸다. 방 안의 불이 꺼지고, 윙윙거리던 소리가 차례로 사라졌다. 빛이 빠진 자리에 어둠이 천천히 스며들었고, 집 안의 어둠은 한 겹 더 깊어졌다. 조금 전까지 눈에 익던 사물들은 윤곽을 잃고, 적막만이 집 안을 천천히 감돌았다.


아이 앞에서 자신 있게 시작했지만, 작업은 더뎠다. 전선은 생각보다 벽 깊숙이 엉켜 있었고, 낡은 선들을 끌어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거칠고 뻣뻣한 선들을 꺼내는 일부터 난감했다. 벽 속에 오래 묵혀 있던 구리선은 손끝에서 자꾸 되밀렸다. 나는 그것들을 이리저리 정돈한 뒤, 마침내 새 콘센트 함의 좁은 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한참 작업하던 중 아이가 장갑을 내밀었다. 전선을 직접 만지면 위험할 것 같아 미리 사 왔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이는 위험하다며 장갑을 거두지 않았다. 문득 이 장갑에 아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힘 앞에서 몸을 낮추는 마음, 위험한 것을 함부로 다루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자기 때문에 생긴 일을 누군가와 함께 건너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장갑 낀 손은 조금 둔해졌지만, 그 둔한 감각 속에서도 아이의 마음은 오히려 더 또렷이 전해졌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남은 일을 마쳤다.


전원을 다시 올리고 시험 삼아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바람 소리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조금 전까지 멎어 있던 집 안에 밝은 빛이 다시 감돌기 시작했다. 끊어졌던 회로는 이어졌고, 아이의 얼굴도 다시 밝아졌다. 빛이 돌아온 지금, 제 손으로 흐트러진 방의 질서를 다시 세웠다는 기쁨이 그 얼굴에 가득했다. 우리 사이에 있던 어색한 긴장의 선 하나도 그렇게 지워졌다.


전선에서 전선으로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문득 전깃줄을 뜻하는 전선(電線)을 다시 생각했다. 나의 어린 시절과 달리 요즘은 전선보다는 케이블, 코드, 충전선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듯하다. 문명의 속도는 오래된 말들을 낡은 공구함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조심스레 꺼내 쓰게 만든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은 다른 곳에서 더 자주 들린다. 뉴스에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어느 나라들의 전선(戰線)이다. 그 말이 들릴 때마다, 벽 속 깊이 숨어 있던 차가운 전류가 문득 몸 안으로 밀려들어 삶을 죄는 듯하다. 멀리서 날아온 단어 하나가 어느새 내 일상의 질서마저 날카롭게 베어 내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전기선으로서의 전선은 몸의 혈관처럼 집 안에 빛을 들인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벽 속 어딘가에서 오랜 세월 묵묵히 이어져 있다. 누군가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방을 밝히고, 기계를 움직이고, 식어 있던 일상에 다시 온기를 돌게 한다. 늘 곁에 있으면서도 거의 의식되지 않는 것, 그것이 삶을 평안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선의 힘이다.


그러나 전쟁의 전선은 다르다. 그 선은 내 몸에 직접 닿지 않아도 삶을 가른다. 지도 위에서는 가늘고 얇은 선일지라도, 실제로는 집과 학교와 병원과 식탁 사이를 마구 지나간다. 누군가의 아침 식사를 멈추게 하고, 누군가의 귀가를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로 바꾸며, 누군가의 창문 밖 풍경을 하루아침에 폐허로 만든다. 평소에는 나와 무관한 듯 멀리 있던 선이 어느 날 가까이 밀려와, 삶의 시간을 끊는 절연의 선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두 전선은 서로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아 있다. 하나는 어둠 속으로 빛을 데려오고, 다른 하나는 빛나던 삶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둘 다 보이지 않는 힘을 품고 있고, 잘못 다루면 사람을 다치게 한다. 오래 방치하면 낡고 엉키며,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을 기다린다. 무엇보다 둘 다 저절로 놓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판단에 따라 이어지고,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끊기거나 바뀐다.


일상과 세계가 마주친 자리

사실 집 안의 오래된 배선을 갈아 끼우는 일은 작고 사소한 수리다. 그러나 그 작은 일을 위해서도 신중한 절차가 필요하다. 먼저 전원을 내리고, 잠시 어둠을 감수하며, 위험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야 한다. 함께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일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다시 빛을 맞이한다. 선은 하나의 질서이기에, 끊어진 선을 잇는 일에도 조화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계의 전선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운 선이다. 겉으로는 질서 있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질서하게 움직일 때가 많다. 무엇보다 집 안의 전선이 벽 속에 있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듯, 먼 나라의 전선 또한 멀리 있다고 해서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생명을 가르고 삶을 흩트리는 그 선이 우리와 너무 멀리 있는 듯해,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아 왔는지도 모른다. 나의 단시는 이런 선의 이중적인 가치를 짧은 문장에 담아 둔 것이다.


“불이 사라진, 잠시 어둠과 빛”은 메인 차단기를 내리던 순간을 묘사한 문장이다. 집 안의 불이 꺼졌을 때 오히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빛이 물러난 뒤에는 어둠이 확 밀려든 것이 아니라, 빛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순간에도 사물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용히 제 형태를 지키고 있었다. 빛과 어둠은 늘 공존했다. 빛이 자리를 내어줄 때 어둠은 살아나고, 빛이 되돌아오면 어둠은 기꺼이 제 자리를 내어 준다. 이렇게 끄지 않고는 다시 이을 수 없는 빛의 회로가 있다.


“부드득 전선 갈아 끼우니”의 ‘부드득’은 굳어 있던 것이 방향을 바꿀 때 나는 소리다. 낡은 선이 버티고, 내 손이 그것을 조금씩 꺾어 제자리로 데려가는 순간에 들린 마찰음이다. 그것은 구질서의 뼈마디가 어긋나며 내는 뼈맞춤의 소리이기도 하다. 변화에도 소리가 뒤따른다. 오래 굳은 질서는 저절로 부드러워지지 않고, 평화 또한 아무 소리 없이 오지는 않는다. 때로는 굳은 것을 꺾는 손끝에서만 새로운 길이 열린다. 선은 스스로 제 길을 바꾸기 어렵다.


“세계가 검은 안식ㅡ”에 이르러,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전선을 어느새 세계의 전선과 겹쳐 보았다. 갈등과 증오가 회로처럼 엉킨 오늘의 세계를 떠올렸다. 무엇보다 전선의 끝에서 제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지 못한 채 떠밀리는 이들을 생각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어떤 빛은 잠시 꺼져야 한다고 느꼈다. 포격의 섬광과 감시의 탐조등, 권력의 눈부신 명령이 만들어 내는 불합리한 빛은 물러나야 한다. 그 뒤에야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숨의 선을 다시 열 수 있다. ‘검은 안식’은 바로 그런 생존의 선이 되살아난 자리다.

검은 안식은 패배의 어둠이 아니다. 강요된 무력의 빛이 물러난 뒤 찾아오는 세계의 균등한 정지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하지 않는 상태,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는 상태,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고 조용히 멈추어 서는 능동적 정지다. 마지막 줄표 ‘ㅡ’에는 그 정적이 조금 더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두었다.


누가 세계의 선을 그을 수 있는가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손과 그 선 위에서 쓰러지는 몸은 같지 않다. 국가는 생존과 안보를 말하고, 통치자는 결단을 말하며 누군가를 대신 전선으로 내보낸다. 그러나 전선 가까이에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집과 얼굴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다. 지도 위의 선은 반듯하지만, 그 선 아래에서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무너진다.


게다가 오늘의 전쟁은 사람이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더 냉정하고 서늘해졌다. 모니터 너머의 명령 하나가 수많은 삶을 끊어 버리고, 기술은 죽음과 삶의 거리를 한없이 좁히면서도 어떤 이들의 바카라임 감각은 한없이 멀어지게 한다. 손끝 하나가 가까운 곳의 생존을 잇는 삶의 전선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먼 곳의 불빛을 꺼뜨리는 죽음의 전선이 되기도 하는 시대다. 위임받은 어떤 특권자가 버튼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화면 속 점 하나를 지우는 사이, 그에게 권한을 위임한 누군가의 저녁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선은 대체 누구를 위한 선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권한은 왜 그토록 쉽게 소수의 손에 머물러야 하는가. 국민주권을 말하는 시대에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권자는 오히려 선 밖으로 밀려나곤 한다. 자기 생명을 타인의 판단에 내어 맡겨야 하는 운명, 그 오래된 어긋남은 아직 죽음의 장벽처럼 굳게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세계는 이미 먼 곳과 가까운 곳을 가르는 선이 무의미해졌다. 어느 한 사람의 결정으로 시작된 전쟁은 바다와 산맥을 건너 어느 날 우리의 일상까지 흔든다. 집 안의 전선이 끊어지면 불이 꺼지듯, 세계의 전선이 흔들리면 삶의 평범한 회로도 함께 흔들린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던 사람들, 작고 사소해 보여도 나에게는 전부였던 것들이 무력이 그어 버린 울타리 안에서 소멸한다.


그러므로 전선을 갈아 끼우는 행위는 단순한 수리가 아니다. 몇 사람의 손에 오래 맡겨져 있던 선을 다시 많은 사람의 눈앞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세계라는 이름 아래 쉽게 끊겨 왔던 삶의 선을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곁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이것은 지도 밖으로 밀려난 개인이 다시 세계의 회로 안으로 진입하는 프락시스(Praxis)다.


이런 점에서 나의 시 「전선 변경」은 전선(戰線)이라는 크고 위험한 말을 전선(電線)이라는 작고 평범한 사물 곁으로 데려오려는 시도다. 지도 위에서 쉽게 그어지는 선을 다시 집 안의 벽과 손끝의 감각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그렇게 가까이 가져다 놓고 보면 전선은 더는 추상적인 경계가 아니다. 누군가의 집에 불을 끄고, 누군가의 식탁을 비우고, 누군가의 내일을 어둠 속에 남겨 두는 현실의 회로다.


결국 나의 시는 세계가 나와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개인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 부품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는 토대다. 세계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삶을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권한 또한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부드득, 연대하는 손들의 소리

모든 변형과 수리에는 소리가 난다. 낡은 전선을 걷어내고 새 전선을 끼워 넣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부드득’ 하는 소리가 따른다. 굳어 있던 관성이 뒤틀리고, 오래 버티던 것이 마침내 자리를 내어줄 때 나는 소리다.

세계의 전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래 독점되어 온 권한을 다시 사람들의 자리로 되돌리려 할 때, 그 벽이 조금씩 깎여 나가며 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파괴의 전조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세계의 질서를 고쳐 매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죽음과 단절의 전선(戰線)이 삶과 온기의 전선(電線)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소리다.


그 소리를 따라 열리는 변혁의 길은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이견과 충돌, 치열한 숙의와 갈등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몇 사람의 이익을 위해 그어진 선이라면, 소란을 감수해서라도 다시 살펴야 한다. 평화를 위한 선으로 말이다.

그 선의 의미를 인식할 때, 세계의 운명이 한 사람의 일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전쟁이 모두의 삶과 죽음을 요구한다면, 그 시작과 끝을 묻는 권리 또한 특정인에게서 모두에게 되돌아가야 한다. 세계의 끊어진 회로를 다시 잇는 힘은 위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명령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믿으며 손을 더듬어 찾는 따뜻한 동의에서 솟아나야 한다. 녹슬어 뻑뻑해진 나사를 함께 움켜쥐고 돌릴 때, 비로소 세상을 움직이는 회로의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검은 안식, 강요된 빛이 꺼진 자리

우리는 흔히 전쟁을 어둠으로, 평화를 빛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도 빛은 수시로 번쩍인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이기보다 포격의 섬광일 때가 많고, 길을 비추는 등불이기보다 감시의 탐조등일 때가 많다. 전쟁으로 얻어 낸 빛은 때로 우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눈멀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검은 안식은 단순히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일이 아니다. 거짓된 빛, 강요된 빛, 타인의 생명을 허물어도 된다고 속삭이는 위장된 빛을 잠시 끄는, 선의 임시 단절이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명령되는 세계에서 벗어나 서로의 존재를 다시 감각하는 고요한 자리다.


그 안식은 누군가가 위에서 내려주는 자비로운 휴전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함께 도달해야 할 능동적인 평화의 공간이다. 그 평등한 어둠 속에서 만인이 고요히 숨 쉬는 풍경, 나는 그곳을 검은 안식이라 부르고 싶다. 검은 안식은 무력한 침묵이 아니다. 누구도 타인의 삶을 독단적인 위력으로 끊어낼 수 없다는 선언을 각자의 삶에서 실현하는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불필요한 섬광이 터지는 중에도, 생명의 작은 숨빛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오래 살아 있다.


세계의 회로를 다시 잇는 손

나의 시적 상상은 집 안의 작은 콘센트 앞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장면은 이내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지금 이 세계의 전선을 쥐고 있는 손은 누구인가. 나는 세계의 전선을 허물고 다시 잇는 개인들의 손을 믿는다. 그 손은 작지만 무력하지 않다. 콘센트 속 낡은 선을 갈아 끼우던 손처럼, 세계의 회로 또한 언젠가는 그런 손들에 의해 다시 정돈될 것이다.

개인은 세계의 부품이 아니다. 개인은 세계의 토대다.
세계는 강요된 빛이 아니라, 서로의 숨소리를 해치지 않는 검은 안식으로 자신을 유지한다. 섬광이 멎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다시 알아보고, 어둠 속에 남은 작은 숨빛들은 오래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줄표가 가리키는 그 정지된 선 위에서, 평화의 노래는 그 선율을 따라 가장 낮은 자리까지 오래 울려 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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