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출입일상(出入日常)의 도석(道釋)

시편 121편 8절과 공공적 번역의 시학

by푸른킴

1. 공공적 번역에 대한 질문

올해, 제가 참여하는 학회 제131차 춘계 학술대회에서 저는 “구약 주석이 공공적 번역을 수행해야 한다”라는 논지의 비평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제 글을 읽고 차분히 논찬해 주신 분은 “공공적 번역”의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청중 가운데 몇 분은 “주석이라면 번역보다 해석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번역 자체가 이미 해석 아닌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들을 함께 모아보면, 그날의 논쟁은 결국 두 가지로 좁혀졌습니다. 하나는 공공적 번역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구약 주석에서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질문들은 제 논문을 더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청중들은 제 논지의 핵심과 그 취약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주었습니다. 그날 제가 충분히 답하지 못했던 말들을 지금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공공적 번역은 경전이라는 고대의 텍스트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 특별히 요청되는 글쓰기입니다. 고대 언어를 오늘 우리의 언어로 옮기는 일은 단순한 단어의 치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의 문장과 리듬을 따라가며, 그 말이 처음 남기고자 했던 울림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들리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은 주석의 바깥에 있는 보조 작업이 아니라, 주석이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몸의 행위일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공공적 번역은 사역(私譯)에 머물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다양한 비평방법을 활용하여 자기만의 메시지를 찾아 본문 위에 덧씌우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원문의 글쓰기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면서, 오늘의 독자가 자기 몸과 자기 언어로 본문과 직접 만나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본문을 설명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가 다시 그 본문을 읽고, 되뇌고, 자기 언어로 살아보도록 돕는 글쓰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공적 번역은 고정된 뜻을 전달하는 풀이가 아니라 하나의 도석(道釋)에 가깝습니다. 도석은 길 위에서 풀어내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바카라상 위에서 의미를 확정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을 들고 길 위에 서서 그 문장을 몸으로 다시 읽는 일입니다. 길을 걸으며 경전의 텍스트를 읊조리고, 그 길에서 얻어낸 경전의 고귀한 결이 우리의 비천한 일상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통로를 여는 작업입니다.


정리하면, 공공적 번역이란 고대 경전의 언어를 사적 의미화나 교리적 확정에 가두지 않고, 원문의 글쓰기와 리듬을 따라 오늘의 독자가 자기 몸과 언어로 본문과 대면하도록 길을 여는 글쓰기입니다. 그 글쓰기는 바카라상 위에서 뜻을 확정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을 들고 길 위에 서서 몸으로 그 문장을 다시 읽고, 견디고, 살아내는 일입니다.


2. 번역, 사적 경건에서 공공의 길로

내가 말하는 번역은 히브리어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기반한 뜻풀이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번역한 시편 121편 8절은 그 예입니다.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에 대한 나의 글 역시 이런 공공적 번역의 한 사례입니다. 그것은 서재에서 본문을 펼쳐놓고 분석한 결과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구절을 들고 길로 나가, 숲길을 걸으며,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암송하면서 처음 그 글을 남긴 시인의 언어를 뒤따라가 본 결과였습니다.


물론 그 시인의 깊은 마음에 완전히 가닿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의 결을 따라가며, 그 말이 오늘 우리의 언어와 몸 안에서 다시 울리도록 돕는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공적 번역은 나의 의미를 본문에 덧씌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문이 남긴 글쓰기의 방향을 따라가며, 그 말이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움직이도록 길을 여는 일입니다.


시편 121편 8절을 반복해서 읽고 걷는 동안, 나는 이 구절을 조금 다르게 듣게 되었습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성전에 올라온 이들을 향한 제사장의 덕담이나 권면으로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앞에서 다시 세계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야훼에게 호소하는 탄원 기도의 구절로 들렸습니다. 인간의 출입을 지켜 달라는 말은 곧 야훼의 출입을 요청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겨보았습니다.


야훼여, 당신의 나아오심과 돌아오심,

그 한결같은 출입일상을 준수해 주십시오.

지금 여기 우리의 세계에서부터, 저 너머 감춰진 영원의 자리까지. (2026. 5. 3 다시 번역하다)


이 번역은 내가 결정한 공공적 번역입니다. 여기서 신은 하늘의 보좌에 유폐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의 일상 속으로 끊임없이 출입해야 하는 분입니다. 인간이 들고 나는 그 모든 길에 함께 들어오고, 함께 나가며, 함께 머물러야 하는 분입니다. 그것이 내가 이 구절에서 들은 번역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바꾸어 놓은 말이 바로 “출입일상”입니다. 들고 나는 행위가 일상으로 유지되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샬롬의 조건이라면, 야훼에게도 출입의 일상은 인간의 샬롬을 보존하는 근원적 조건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들고 나는 일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그가 인간의 길 위로 여전히 출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3. 반복의 리듬, 몸의 신학

이번 글쓰기에서 유독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출입(出入)”이라는 두 글자입니다. 이 말을 끊임없이 되뇌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행동 리듬이기 때문입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일, 누군가의 품에서 태어나 다시 죽음으로 귀환하는 일. 이 모든 것은 출입의 리듬 안에 있습니다.


출입일상은 삶의 가장 순수한 반복입니다. 그리고 이 반복이 멈추는 날, 살아 있는 것들에게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숨의 출입이 멈추면 생명이 멈춥니다. 사람의 출입이 막히면 자유가 무너집니다. 신의 출입이 사라지면 세계는 닫힌 폐허가 됩니다.


출입은 반복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루한 순환이 아닙니다. 매번 다른 무게의 윤리를 짊어지고 돌아오는 성찰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같은 문을 열고 들어와도, 같은 사람이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출입은 언제나 삶을 조금씩 바꾸어 놓습니다.


내가 이 글에서 “출입”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독자가 이 개념을 머리로만 이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의 체온을 함께 느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출입은 본향, 경계, 관계라는 말들과 만나며 의미를 넓혀갑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신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감각입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일, 다시 돌아오는 일,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일, 끝내 어떤 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일. 그 모든 것이 출입의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공공적 번역은 생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몸의 반응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을 읽는 몸, 걷는 몸, 암송하는 몸, 멈추어 서는 몸, 다시 돌아오는 몸. 이 몸의 반복 속에서 문장은 조금씩 자기 뜻을 엽니다. 그리고 그때 번역은 바카라상 위의 언어가 아니라 길 위의 언어가 됩니다.


4. 검은 안식의 철학과 시학

이 글쓰기의 바탕에는 내가 “검은 안식”이라고 부르는 감각이 놓여 있습니다. 세상은 안식을 흔히 빛의 세계에서 누리는 평온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고통이 물러가고, 삶이 안정된 뒤 찾아오는 맑은 휴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몸으로 목격한 안식은 언제나 그런 얼굴만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안식은 때로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겨우 숨을 붙들고 있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검은 안식은 고통을 극복한 뒤 얻어지는 값싼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삶의 바깥으로 밀어낸 뒤 찾아오는 깨끗한 위안도 아닙니다. 검은 안식은 돌아갈 집을 잃은 자들, 안식처가 폐허로 변한 이들이 캄캄한 심연 속에서도 새벽빛을 바라보기 위해 자신을 겨우 붙들고 있는 희미한 호흡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몸에 간직한 채로도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서늘하고도 굳건한 평화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검은 안식은 빛이 닿지 않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의 탄식과 함께 머무는 삶입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이들을 멀리서 위로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들의 어둠 속으로 함께 들어가 숨을 맞추는 일입니다. 안식은 언제나 밝은 자들의 평온만은 아닙니다. 때로 안식은 어둠 속에 남겨진 이들의 숨을 함께 지키는 낮은 평화입니다.


이 검은 안식의 감각 안에서 시편 121편 8절은 다시 들립니다.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는 “당신의 드나듦을 준수해 주십시오.”라는 소리로 더 선명하게 몸에 스며듭니다. 이는 안전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종교적 위안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길 위에서 불안한 자들, 돌아갈 곳을 잃은 자들, 다시 나아가야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자들을 위한 탄원입니다. 야훼가 그들의 출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야훼 자신이 그 어둠의 길 위로 출입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검은 안식의 시학 안에서 샬롬은 더 이상 밝은 세계의 평온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샬롬은 폐허 위에서도, 닫힌 문 앞에서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길 위에서도 피어나야 합니다. 그 샬롬은 백색의 평온이 아니라 검은 밤을 통과한 평화입니다. 어둠을 지운 평화가 아니라, 어둠을 품은 채 끝내 무너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5. 시편 121편 8절과 공공적 번역의 세계성

결국 시편 121편 8절에 대한 나의 글쓰기는 이 구절이 단순한 권면이나 덕담이 아니라 탄원 기도일 수 있음을 드러내려는 시도였습니다. 인간의 출입을 지켜 달라는 기도는 인간의 안전만을 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야훼가 인간의 길 위로 계속 출입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출입으로 누리는 자유는 인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샬롬은 야훼의 직접적인 관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계로 나아가고 다시 돌아오는 길 위에서 야훼가 함께 출입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쉽게 불안과 고립의 길이 됩니다. 그러나 야훼의 출입이 일상처럼 한결같이 유지된다면, 인간은 지금-여기의 세계뿐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불확정의 세계까지 야훼와 함께 바라볼 힘을 얻게 됩니다.


시편 121편 8절의 번역은 나와 우리를 넘어 세계로까지 확장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번역은 본문의 전통적 의미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신학적 가능성을 오늘의 몸과 언어 안에서 다시 열어보려는 시도입니다. 인간의 출입을 지키시는 야훼는, 인간의 출입 바깥에 가만히 서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길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가며, 그들과 함께 걷는 분입니다. 그가 출입하시기에 인간도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길 위에 계시기에 인간의 길도 폐허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세계는 반드시 안식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읽은 야훼의 출입일상입니다. 인간이 들고 나는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야훼의 출입이 일상처럼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신의 출입이 인간의 샬롬을 보존하고, 인간의 출입이 신의 동행을 증언하는 자리. 그곳에서 시편 121편 8절은 단순한 보호의 문장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함께 길 위에 서는 문장이 됩니다.


1세기 유대 슬롯에서 야훼의 출입이 한 인간의 몸으로 실현된 날부터 오늘까지, 그의 샬롬이 저 땅바닥에서부터 하늘에 이르는 모든 길 위에 백합화(百合花)처럼 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오늘도 누군가의 출입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숨이 막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돌아갈 길이 아주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편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내게 다시 들립니다.


인간의 출입을 지키시는 야훼,
부디 당신의 출입도 멈추지 마십시오.
당신이 일상처럼 우리 삶에 드나들어야 인간도 폐허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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