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출입일상'이 한결같기를

TaNaKh 121:8의 공공적 번역

by푸른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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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순수한 반복, 출입일상

일상(日常)은 겉으로는 가볍고 안으로는 묵직한 삶의 시공간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은 아마도 ‘출(出)’과 ‘입(入)’일 것입니다. ‘출’은 공간으로부터 나가는 모습입니다. ‘입’은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입(出入)’은 특정한 시간, 하나의 공간으로부터 또 다른 새로운 공간을 사이에 두고 나고 드는 모든 움직임을 함의합니다.


이처럼 출입은 사소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일상이 제약받는 몸의 행동입니다. 또한, 누구에게든 어떤 시간, 어느 ‘공간’을 자신의 시간에 맞춰 드나드는 자유로운 행동입니다. 따라서 출입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일 때 의미 있습니다. 몸으로 직접 겪거나 보여주는 일일 때 더욱 가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 아침 자기 몸이 머물렀던 가장 기본적인 공간으로부터 나왔을 것입니다(출). 그 몸으로 길에 나서고, 가까운 곳은 걸어서, 너무 멀면 기계의 도움을 얻어 그 몸을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해놓은, 아니라면 정처 없이 새로운 공간에 들어설 것입니다. 조금씩 자기 몸을 움직여 새로운 환경에 걸맞게 스스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느라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활동을 마친 후, 다시 자신이 머물 공간으로 나왔던 것을 역순으로 하여서 들어갈(입) 것입니다. 몸의 평안함이 깨어지지 않고 되돌아온 날이라면 더욱 기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출’과 ‘입’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나는 그것을 출입일상이라 부릅니다. 이 두 행동은 하나입니다.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만나지 못하는 날, 우리의 일상은 균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몸이 겪은 여러 공간을 이어가며 연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순리가 어둑해진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출입일상, 가장 견고한 삶의 상징

시대가 흘러 ‘출’과 ‘입’은 떨어지지 않고 관용적인 표현으로 발전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 두 말도 흩어져있다가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 하나의 새로운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출입’은 몸이 나가고 들어오는 모습이 구분되면서 엮인 것이 아니라 아예 떨어지지 않는 원처럼 이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의 세계를 그려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도 마치 이 출입의 원과 같이 그려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탄생과 소멸, 태어남과 죽어감이 떨어지지 않고 공존하는 모양입니다. 결국, 출입은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드나듦이 제약받지 않는 몸, 나갈 수 있고, 들어올 수 있으며, 태어나 일정한 시간을 맴돌다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 그것이 바로 ‘출입’이라는 가장 평범한 삶일 것입니다.


자유로움, 출입일상의 동력

‘출입한다.’라는 말을 한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삶으로 받아들이면, 이제 그 삶을 유지하는 동력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자유로움’이라는 행동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이 행동은 삶이 유지된다는 것을 환유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저 위대한 모세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표현으로 그가 125세에 이르러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은유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참고 수 6:1 여리고 성이 닫혀 출입이 금지되었다. 삶이 막혔다) 지난 2020년 창궐한 코비드 19로 한때 우리 슬롯도 길을 막아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길만 막힌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멈춘 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출’과 ‘입’이 결합한 ‘출입’은 자유로운 삶을 상징합니다. 어느 시간이든, 어떤 공간이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은 곧 그의 삶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동력입니다.


경계의 무위, 몸의 자유

막힌 길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것은 더 멀리 보면, 삶을 가로막는 경계와 벽이 무위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출입의 자유는 열린 문, 낮은 벽, 보이지 않게만 존재하는 경계, 비상상황에서만 운행되는 ‘임시조치’ 너머로 삶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출입일상은 자유로운 삶이고, 그 자유는 경계와 벽을 넘나들 수 있는 인간의 원시 권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란 몸의 출입이 막힘없이 허용된 상태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자유의 소멸은 당연히 교도소이며, 더 깊게는 질병(특히 스스로 갇힌 자,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과 암암리에 회자하는 최후의 두려움, 곧 요양원의 삶일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문을 나서지 못할 만큼 자기 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억압받는 상태입니다. 나서지 못하면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돌아오지 못하면 다시 나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출입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삶을 가로막는 경계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몸을 스스로 막아 세우든지, 외부의 침입으로 가로막히든지 모든 출입의 근원에는 몸의 자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출입일상이라는 행복은 몸의 결격 없는 상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몸의 질서는 인간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척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출입일상’은 한 사람의 성장에 따른 분별력을 가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참고 왕상 3:7). 출입을 결정짓는 판단은 그가 살아갈 삶의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지혜의 성숙도를 반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넓게 말하면,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출입한다는 것은 삶의 영역을 세밀히 관찰하며 그 사건 속을 자유롭게 관조하는 통찰력과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출입한다.’라는 말은 성숙한 ‘지혜자, 어른의 일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성숙한 어른에게 있어서 자유로운 ‘출입’이라는 삶의 습관은 아무것도 아닌 듯해도 타인의 출입(자유)을 방해하지 않으며 공존하는 샬롬의 실천이란 근원적인 지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입일상, 샬롬이라는 번역어

몸의 자유와 드나듦의 경계 없음은 곧 샬롬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샬롬은 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없는 말입니다. 샬롬은 언제나 관계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샬롬이 유지된다는 것은 나와 타인, 나와 사물 사이에 의지적 충돌이 없는, 무의식적 충돌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처럼 ‘출입일상’은 나의 발걸음만 막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걸음이 거침없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어떤 시공간이든 당당하게 자기 걸음을 활보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달리 말해 ‘출입한다.’라는 것은 이 세계가 누구든 누구에게도 막힘 당하지 않고 자기의 두 발로(휠체어 역시) 들고날 수 있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이 시편에서 출입일상의 기원은 우리의 샬롬을 보장할 수 있는 인간의 원초적 소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유의 원천으로서 신의 출입일상

이제 이 시편 구절을 우리의 언어로 옮길 때, 평소 익숙한 시선을 잠시 돌려보겠습니다. 이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은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신을 대리하여 성전으로 출입한 한 사람을 위해 기원합니다. “너의 출입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샬롬이 있기를~”


그러나 이 구절이 낯설게 읽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샬롬은 야훼의 샬롬과도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편 구절을 바카라에서 떼어내어 기억 속에 담아두고, 길을 걸으며 암송하면서 몇 번이고 되뇌다 보면, 몇 가지 침전물이 물 위로 떠 오르듯 몸에서 살아납니다. 이 구절은 제사상과 한 사람 사이에서 ‘신을 향한 부탁’으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야훼여, 당신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히브리어 표현을 곱씹어 암송하면서 그 시어를 되새겨보면, 제사장이 ‘야훼여’라고 말한 부분에 히브리어 편집자는 쉼표를 두었던 것이 다시 들립니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히 제삼자가 말하는 문장의 주어가 아니라 야훼를 아예 2인칭으로 부르는 말로 들립니다. 이어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3인칭 서술어는 오히려 보호해 달라는 기원이며 간구로 울립니다. 그러니 단순히 지켜달라는 의미를 넘어 ‘약속을, 규칙을, 생활방식을 준수해 달라’는 호소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이 구절은 기원과 간구의 호소로 이어진 구절도 다시 들립니다.


끝으로 ‘출입’도 낯설게 들립니다. 그것은 야훼 자신의 ‘나아옴과 들어감’으로 들립니다. 다시 말해 이 출입은 신의 행동이지 인간의 행동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시간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공간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지금 여기로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속에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과거로부터 흘러온 내 삶의 자리, 그 보이는 공간에서부터 야훼가 감춰 둔 공간(올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공간, 그 불확정적 세계까지 아우르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구절을 번역하자면, “야훼여, 당신의 몸으로 자유로운 일상의 샬롬을 한결같이 지켜내 주십시오, 나에게 보이는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보편적 출입생활을 꿈꾸는 기도

이제 이 시구는 개인의 안녕과 보호의 기원을 넘어 이 세계, 생명의 안전한 출입생활을 야훼 자신이 바카라임져 달라는 기도로 들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출’과 ‘입’은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길은 끊어지고, 몸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두려움의 실타래에 엉킬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이 출생, 생존 기간 그리고 입사(入死)라는 삶의 흐름을 끊어지지 않게 이어가기 힘겨운 시대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출’과 ‘입’에 대해 어느 정도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전쟁, 분쟁, 기후변화, 감성적 기계 인간의 등장, 자기 속의 자기 등이 모두 빙산 일각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안전하게 출입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편 121편의 마지막 구절은 전적으로 야훼의 관심이자 바카라임을 호소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몸의 보호를 위한 사랑의 바카라임’을 다시 부탁해 보는 것입니다. 야훼가 보여준 긍휼과 헤세드라는 심성에 기대어 약속대로 이 세계에 출입하고, 그 결과로 인간의 출입이 점점 봉쇄되는 인간의 샬롬을 유지해 달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잠깐 어려운 상황에서 겪는 ‘출입’의 미미한 어긋남보다 마지막 순간, 보이지 않는 시공간에서도 이탈되지 않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야훼는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무한한 바카라임적 사랑을 항상 인식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야훼가 자신을 견실한 ‘보디가드’라는 자의식을 놓치지 않도록 강권합니다. 시인은 우리를 대신하여 신에게 인간을 향한 바카라무를 감당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나아가 이 시대를 통치하는 야훼의 방식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오늘 아침, 나의 숨 쉬는 호흡 같은 나의 기도를 일깨워야겠습니다. 그 신뢰와 야훼의 헤세드에 힘입어 오늘 나왔던 그 첫자리로 제대로 ‘돌아가는’ 일을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감사한 마음으로 반복해야겠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일상이 야훼의 한결같은 일상으로 샬롬을 보호받길 기대합니다.


나의 기도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과정은 ‘출’과 ‘입’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선 모든 이들이 잠시 머물 장소에 자기 몸을 멈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과 활동하는 모든 일은 ‘나가고 들어오는’ 행동의 연속으로 이어진 끈입니다. 태어났습니다. 다시 본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거듭 말하지만, 평안한 삶은 이 두 개의 끝이 잘 묶여야 할 매듭입니다. 그것들이 다시 이어져 완성되어 가는 하나의 실처럼 보입니다. 나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머물러 있기만 하고 떠나는 일이 없다면 삶은 고립되기 쉽습니다. ‘나가고 머물고 들어오고’ 다시 ‘나가고 머물고 들어오는’이 평범한 일상이 순환할 때 우리가 꿈꾸는 거대한 삶에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누구보다 야훼의 출입 일상이 우리 앞에 실감 나기를 기대합니다. 야훼의 반복된 일상은 우리의 호흡입니다. 그의 단순한 몸의 활동은 우리가 미처 다 드리지 못해도 실현될 거대한 기도입니다. 오늘 하루 인간의 ‘출’로 시작한 첫걸음이 ‘입’으로 마감되는 것처럼 야훼의 출입도 눈앞에 실현되기를 기대합니다. 인간과 신, 모두 출입일상이라는 샬롬으로 이 세계와 모두 안녕하기를 다시 기대합니다. ‘출’과 ‘입’ 사이에 잠시 머물러 있는 하루의 시공간, 다가오는 모든 삶의 자리가 평안하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나의 이 마음을 담아 시편 121편을 나의 언어로 바꾸어 보려 합니다.


히브리 시편 121편 8절을 따라 성전을 나갔다 돌아와 다시 나가며 드리는 기도


창조자 야훼여!

지금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곳에, 함께 머물도록

우리의 이전 상황들과 우리의 모든 여건을

알맞게 조정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이곳에 오기 전까지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삶은 어수선하고 분주했습니다.

심지어 가로막힌 담 때문에 방향을 잃은 적도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곳에 다시 도착해서

이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안심합니다.


여기는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선물로 마련해 주신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나의 야훼여!

이곳에 도착하기 전, 만약 걱정거리와 만난다면

길을 멈추고 속상한 마음을 쏟아내며 대화하는 데 익숙합니다.


근심거리와 만나기라도 하면 어서 그 올무를 벗어나려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나의 상한 마음을 털어놓느라

내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놓쳐 버릴 때가 허다합니다.


피난처가 있고 안식처가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스스로 그곳을 자주 유령의 공간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내 삶이 풍비박산 나기 전까지는

이곳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곳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에 사고가 나거나 어려움이 다가오면

인간의 만들어낸 안전한 장치를 떠올리고

그 혜택을 찾는 데 능숙합니다.


어려움이 오기 전 미리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자기만의 보호소를 찾아두는 지혜도 있습니다.


실제로 위기가 닥쳐왔을 때 보험을 먼저 챙기는 것이

인간 본연의 삶이라고 판단할 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영원한 생의 안전장치는

실감 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도우심이 손에 잡히지 않기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허구 같은 신앙의 지배 아래서

우리의 몸으로 기꺼이 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직 믿음의 잔설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예배 공간을 기억하고 찾아왔습니다.


명절에 고향을 찾듯, 고향이 나를 반기듯

본향 같은, 이 예배실에 돌아왔습니다.


오래된 기억만으로도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이곳으로 찾아왔습니다. 다행입니다.

당신의 환대를 받으니 좋습니다.


우리의 야훼여!

시대가 당신의 출입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당신이 일상으로 들려주신 이야기,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샬롬을 희망합니다.

행복한 웃음과 함께 맛있는 먹거리를 나누며

기필코 당신의 통치가 우리 눈앞에 실현될 것을 함께 기대합니다.


여전히 도시의 한쪽에는 전쟁의 소음이

다른 한쪽에는 쪽방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먹을거리 하나 변변치 못합니다.

어제의 안식처가 오늘 아침 폐허가 되어

이방인이 되어버린 이들이 삶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선단체에서 건네주는,

겨우 작은 쌀 한 주먹으로

이 긴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삶을 상상만 할 뿐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여 이런 상상 속 기도만이라도 그들의 삶에 가 닿기를 간구합니다.

당신이 약속한 출입일상을 한결같이 지켜주시기만을 탄원합니다.


하늘을 향하는 나의 마음을 땅으로 시선을 내려 호소합니다.

어떤 이들은 탄탄한 성 같은 높은 꼭대기에서

낮은 땅을 내려다보며

행복한 시간을 지루할 정도로 많이 누렸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만큼

땅바닥을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려야만 하는 사람에게도

균등한 샬롬의 혜택을 주셔야겠습니다.


부족한 것투성이, 늪 같은 삶을

벗어날 힘을 당신이 주셔야겠습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노숙 생활 같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버텨낼 용기를

당신이 바카라임져야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수선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나갔던 자리로 되돌아왔습니다.

피곤한 우리가 주의 따듯한 손길을 구합니다.


이 세계의 통치자 야훼여!

아시듯이, 우리의 시대, 세계 정치가 힘듭니다.

부디 법의 무질서가 우리의 삶을 억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도 이 시대에 방향 없이 그저 편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순간 판단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그리 녹록하지가 않은 것이니

잘 버텨내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겨운 시대에,

이곳에 모인 우리가 당신의 질문에 열심히 답해보겠습니다.

사실, 답하기는 버겁고 어렵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채로 답해보겠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우리의 질문에 속히 응답해 주십시오.

또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정중하게 대해 주시는 분이시니,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여전하시니

우리가 용기를 내어 응답하겠습니다.


우리의 시대를 평안하게,

우리의 시대가 질서를 회복하게,

우리의 시대가 올바르게 전진하도록

나의 사소한 힘을 더하겠습니다.


범법 한, 비법한, 무법한 이들을 뿌리째 뽑아내겠습니다.

부디 신실한 이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비록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많이 흔들리긴 해도

쓰러지진 않기를 바랍니다. 나를 도우시기를 간구합니다.


야훼여!

오늘 이 시간, 동시다발로 이 나라 곳곳에서 예배가 드려집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교회 의자에 앉아,

어떤 사람은 길바닥에 나가 소리 높여 외치며 예배합니다.


어떤 사람은 깃발을 흔들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노래하며 참여합니다.

이 예배에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배는 하나도 빠짐없이 당신께 거룩한 소리로 드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압니다.

이 모든 예배는 훗날 당신이 내리는 심판의 대상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이 시대에,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선이 될지, 악이 될지 누구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디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는 선이든 악이든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기에,

지금 우리의 판단이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잇대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나의 보이는, 보이지 않는 흠결을 고백합니다.

의를 추구합니다.

힘겹고 역겨운 중에도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모든 어수선한 마음 됨을 내려놓고,

불투명한 미래를 끌어다가 현재를 뒤흔드는

어리석은 행동을 강물에 버립니다.


“나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불태워지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모든 곳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 쏟아지는

간절한 탄원과 소망에 나도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부디 땅의 사람들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겠습니다.

아무 걱정이 없이 살아도 될만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간절히 탄원하는 희생적 탄원도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나는 우리의 의식은

우리 일생의 한 점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점을 찍음으로

어느새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진입했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작고 연약하며 가냘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미미한 고백들이

당신을 크게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더욱 확신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애를 지금까지 도우셨던 당신,

지금도 도우시는 당신,

앞으로도 도우실 야훼 당신을 나는 믿습니다.


물론 그 일의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좋으신 대로 하셔도 됩니다.

우리의 모든 생애는 그저 당신의 선한 길을

뒤따라 걷기만 하겠습니다.


나의 들어옴과 나감을 지켜주셔서

주의 길을 건강하게

걷도록 당신의 안내를 따르겠습니다.


당신의 출입일상을 몸으로 드러낸

예수의 이름으로.


<2024. 5. 2. 교정, 2026. 5. 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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